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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가 만들어내는 그 어떤 것보다 더 매혹적인 고흐
어떤 초상화 -머리말 보리밭의 장례행렬 1853-69년 텅빈 캔버스 1869년-74년 좌절 1874-76년 기도하라, 나의 영혼이여 1876-78년 보리나주 1878-80년 테오 1880-83년 감자 먹는 사람들 1883-85년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 1853-85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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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의 중요한 자산은 한결같은 성실함과 어려운 일에도 굴복하지 않는 정신력이었다. 그는 타고난 화가는 아니었으며 스스로를 화가로 만들어냈다. 브뤼셀은 지저분한 카페 위층에 있는 아주 작은 호텔 방에서 밤낮으로 거칠고 미숙하고 가망 없는 스케치를 무수히 한 끝에 자신의 눈과 손을 점차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눈과 손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천재라는 단어가 틀린 것이라면 용기라는 단어로 대체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부학 지식이 인물상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된 빈센트는 앵그르'지 다섯 장을 펼쳐 단단히 풀칠 해 붙인 뒤 실물 크기의 골격을 그렸다. 그러고는 수의과 대학에 가서 데생을 새용할 동물뼈를 얻을 수 없는냐고 부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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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에게서는 화가의 재능이란 흔족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박물학자가 된 그의 모습을 상상하는 쪽이 훨씬 쉬웠다. 그는 자신의 과학적 방식에 대단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연구를 장난으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분통을 터트렸다. 엘리자베트가 나중에 쓴 글에 따르면, 그는 언젠가 접합제인 퍼터로 코기리를 만들었으나 부모가 너무 요란스럽게 치켜세울 것이라는 생각에 부숴버리고 말았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애정은 그의 일생에 걸쳐 중요한 요소였다. 그것은 그가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브라반트의 시골에 깊이 뿌리박은 것이었다. 그의 초기 작품에서는 19세기의 발전과는 무관해 보이는 농가와 마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초가집에서 염소 한 마리와 문 곁에 땅을 파고 있는 닭들을 돌보는 시골 아낙네, 쟁기를 끄는 황소 뒤를 나막신을 신고 따라가는 농부, 밭에 베틀로 옷감을 짜는 사람을 볼 수 있다. ---p. 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