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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서문을 대신하여 역자 후기 이집트원정 연대기 1.백과전서의 여행 평균 나이 25세 '오리앙' 호를 타고 말타를 지나며 2.빛의 근원에서 피라미드로 가는 길 위에서 만난 신기루 정복의 노예가 된 군대 보나파르트, 이집트 학사원을 창설하다 학술 잡지와 신문 3.예언자와 마술사들 외면당한 프랑스 기술 두 문화의 충격 4.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모세의 땅에서의 보나파르트 10미터의 실수 수문 없는 직통 운하 5.거인들 사이의 연대기 작가 당나귀와 학자들 어느 미학자의 경탄 6.페스트 앞에서 현지의 의사들 시리아 원정 전염병에 대한 논란 7.유명해진 돌, 로제타스톤 알려지지 않은 문자와 언어 아부키르에서 파리로 8.도원경의 황홀 덴데라 12궁도 테베의 폐허 속에서 학제간의 작업 9.샅샅이 조사한 이집트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사회 예술가 겸 민족학자들 '와조'호의 출발 실패 10.나일강의 모든 물고기 식민지화 계획 우울과 낙담 지칠 줄 모르는 조프루아 11.연속적인 측량 작업 피라미드의 높이 측정 마지막 회합 아주 탐내던 전리품 12.20권의 박학서 기념비적인 출간 풍요로운 박물관, 이집트 화려한 경력 부록 학자들의 리스트 과학예술위원회 이집트 학사원 <이집트지Description de I'Egypte> 참고문헌 인명찾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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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파르트가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자부심 중의 하나는 그가 1797년 12월 25일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밀려난 카르노의 자리를 대신하여 '학사원' 기계분과위원에 선출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느날 저녁식사 도중 보나파르트는 해박한 과학적 지식으로 라플라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 것 같다. 그리고 이후에 보나파르트는 "내가 만약 총사령관이 되지 않았더라면 정밀과학에 투신했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뉴튼, 갈릴레이의 길을 뒤따랐을 지도 모른다." 라고 말했다.
공화국 군대는 프랑스 박물관들을 채울 예술품들을 선정하기 위해 정복한 나라에서 학자들과 예술가들을 번번히 동원했다. 이러한 약탈 방식은 이미 독일과 네덜란드 그리고 보다 대규모로 이탈리아에서 자주 자행되고 있었다. 보나 파르트는 이탈리아에서 몽주와 베르톨레를 만났다. 이 젊은 장군에게 매료당한 두 명의 학자는 보나파르트가 학사원에 들어가는 것을 적극 지원하게 되며, 보나파르트는 그들을 이집트 원정 계획에 합류시키게 된다. ---pp. 37~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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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파르트는 대포와 인쇄기를 가지고 이집트에 왔다. 그러나 대포는 떠났고 인쇄기는 남았다"
어린 시절부터 동양을 꿈꾸어 왔던 보나파르트에게 있어 이집트는 위대한 일들이 벌어지는 장소였다. 21세의 나이에 이미 보나파르트는 「예언자의 가면」이라는 동양에 대한 짧은 콩트를 쓴 바가 있다. 문학적 가치는 없었지만 이 책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그 내용이 칼리프에 대한 민중 반란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보나파르트는 저명한 동양 여행가이며 이집트 정복을 강력히 주창하던 볼네와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
전장에서 이미 자시의 능력을 입증했고 공화국에 이탈리아를 바친 바 있는 이 젋은 장군은 이제 바다를 건너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궤적을 따라나서게 된다. 하지만 이 원정은 단지 진부한 군사 정복으로만 축소 해석될 수는 없었다. 또한 원정대와 함께 한 학자들과 예술가들의 존재는 이집트 원정에 특별한 위상을 부여하고 있다. 원정대조차 어디로 떠나는 것인지 몰랐던 이 얼마나 이상하고도 학술적인 모험이었던가! 몇몇은 이집트로 떠나기를 원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와 반대로 파리에 남은 다른 사람들은, 이 원정이 '파라오의 나라'를 탐사하러 가는 것임을 알았더라면 틀림없이 그 대열에 합류했을 것이다. 또한 군사적인 이유로 비밀이 엄수되지만 않았어도 이 학술 여행은 훨씬 치밀하게 준비되었을 것이다. 현지에 도착한 '학자들'은 실험기구 일부를 잃어버리고 프랑스와 통신수단이 두절된 점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결국 신선한 시각, 온갖 형태의 즉흥성 그리고 예기치 못한 탐험이 나일 계곡의 호화찬란함을 발견하게 해주었다. 이집트 발견은 탐험의 목표를 이루고 있었다. 시간이 부족하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목표는 초과 달성되었다. 이집트에서의 작업은 '이집트학'이라는 새 학문의 길을 열고, 나머지 아프리카 국가들을 탐사하는 데 본보기로 사용된다. 그리고 푸리에, 조마르, 코스타즈, 자코탱, 샤브롤 드 볼빅 같은 이들은 1821년 지리학회의 창설에 적극 참여했다. 또 「이집트지」의 여세를 몰아 알제리에 대한 고고학 및 예술 총목록이 1844년부터 출간된다. 1822년부터 시작된 샹폴리옹Champollion의 상형문자 해독은 파라오의 나라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호기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여러 사람이 나일 강 계곡에 정착하러 떠났는데, 그 중에는 세라피즈 신전을 찾아내고 카이롤 박물관을 창설한 오귀스트 마리엣 같은 인물도 들어있었다. 그가 최초로 1858년 부터 1880년 사이에 맡았던 고대 이집트 유물관장 직책은 거의 한 세기동안 프랑스인들에 의해 독점된다. 원정대 엔지니어들이 연구하고, 70년 후에 페르디낭 드 레셉스 덕분에 건설되는 수에즈 운하도 이집트에서의 프랑스 진출에 한층 무게를 더했다. 동시에 가톨릭 신부들은 신도 전도단과 함께 이집트에서 가장 우수한 학교들을 건설한다. 나일 강변에서는 고급 프랑스어권 신문도 만들어진다. 평범하지 않았던 원정, 그 나라의 아랍화와 정신의 미국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많은 자취가 남아있다. 구속 대신 유혹을 넘겼던 이 평화적인 정복은 보나파르트의 비범한 학자들이 열렬히 꿈꾸었던 바로 그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