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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옮긴이 글 1부 : 집정관이 되기까지, 기원전 100~59년 1. 카이사르의 세계 2. 카이사르의 어린 시절 3. 첫번째 독재관 4. 젊은 카이사르 5. 흰 옷을 입은 남자 6. 음모 7. 스캔들 8. 집정관 2부 : 프로콘술, 기원전 58~50년 9. 갈리아 312 10. 이주민, 그리고 용병: 첫번째 출정, 기원전 58년 11.‘ 갈리아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들’: 벨가이, 기원전 57년 12. 정치와 전쟁: 루카 회담 13.‘ 바다를 건너’: 브리타니아와 게르마니아 원정, 기원전 55~54년 14. 반란, 재앙 그리고 복수 15. 베르킨게토릭스 그리고 갈리아 대반란, 기원전 52년 16.‘ 갈리아 전체가 정복되었다.’ 3부 : 내전, 그리고 독재관, 기원전 49~44년 17. 루비콘으로 가는 길 18. 전격전: 이탈리아와 에스파냐, 기원전 49년 겨울~가을 19. 마케도니아, 기원전 49년 11월~기원전 48년 8월 20. 클레오파트라와 이집트 그리고 동방, 기원전 48년 가을~기원전 47년 여름 21. 아프리카, 기원전 47년 9월~기원전 46년 6월 22. 독재관, 기원전 46~기원전 44년 23. 3월 15일(THE IDES OF MARCH) 에필로그 연표 용어 설명 참고 문헌 각 장의 주에 대한 약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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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퓰라리스(민중 지향적 정치인, 일종의 선동 정치가)였지만 지극히 실용주의적이었던 지도자 허례허식보다 평화와 번영을 우선했던 지도자
카이사르의 조치들을 보면 포퓰라리스적 요소가 많이 느껴지긴 하지만 이런 개혁들은 그 자체만으로 보면 결코 극단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회의 모든 측면을 개선하려고 노력했고 특정 계층을 희생시켜 일부 계층을 이롭게 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 p.787 공직 생활의 형식적이고 비효율적인 관습, 이제는 더더욱 의미를 찾기 힘들어진 형식적인 일들을 그는 참아내지 못했다. --- p.821 하지만 그는 승리한 뒤에는 매우 책임감 있는 통치로 일관하여 원로원의 귀족들과 뚜렷한 대비를 보여주었다 그의 법안들은 사회의 폭넓은 계층에 두루 이롭게 만들어졌다 그의 체제는 강압적이지 않았으며, 그는 전에 적이었던 수많은 인물들을 용서하고 요직에 기용했다 로마와 이탈리아 그리고 속주는 그의 통치하에서 어느 때보다도 더한 풍요를 누렸다. --- p.9 사람들은 때로는 카이사르에게 불만을 표시하거나 항의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언제나 특별한 경우에 한했다 평생 일부 소수 계층이 아닌,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옹호했던 한 인물 그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이 심각하게 흔들렸던 적은 결코 없었다. --- p.835 카이사르는 부하들의 생활 태도 또는 재산 여부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그에게 용기가 있는가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의 백인대장들은 자신들이 능력에 따라 보상받게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다. --- p.391 카이사르의 달력 개정은 무척 실용적인 것이었으며 혼란과 정치적 악용의 소지를 제거할 수 있는 조치였다(16세기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의 후원으로 이 율리우스력에 약간의 수정을 가해 만들어진 그레고리우스력이 바로 오늘날의 달력입니다) --- p.785 2 관용의 지도자 카이사르는 말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한다면 우리는 모두의 지지, 그리고 영원한 승리를 얻을 것이다 잔인한 행동은 필연적으로 증오를 낳으며 승리를 유지할 수 없게 한다는 사실을 이미 여러 사람들이 보여주었다 나는 술라를 흉내내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방식의 정복이다 우리는 자비와 관용을 통해 강해질 것이다” --- p.625 ‘카이사르는 승자로서 로마에 돌아왔다 그리고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그를 향해 무기를 들었던 사람들을 모두 용서한 것이다’ --- p.767 심지어 카이사르는 그에게 가장 맹렬하게 저항했던 적들마저 풀어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란의 목적과 명분에는 무관심했다 그들에게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모두 존경스럽고 위대한 국가의 종이었다 만약 카이사르의 군대가 약탈과 학살을 일삼았다면 시민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을 것이다 ‘카이사르의 관용’은 극히 실용적인 것이었다. --- p.640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목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슬픔은 진실이었을 것이다 그는 초창기부터 적을 용서하고 관용을 베푸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 p.708 동기야 어쨌든 비슷한 환경에서 정권을 장악했던 다른 로마인들과 비교하면 그는 관용의 인간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는 일평생 포퓰라리스로 머물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려고 했지만 실제로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로운 많은 정책을 폈다. --- p.844 3 결단과 실행, 행동하는 지도자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시인 메난더(메난드로스 Menandros)의 시구를 인용하여 그리스어로 말했다고 주장했다 “주사위를 던져라(aneristho kubos)!” 수에토니우스는 너무나 유명한 라틴어 문구를 제시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iacta alea est)” --- p.622 카이사르는 그야말로 지휘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겪고 있었다 자신의 군대는 수백 킬로미터 밖에 있는데 그 사이에 적들이 꽉 들어차 있는 것이다 군대로 하여금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게 한다면 그들은 지휘관도 없는 상태에서 적과 마주치게 될 것이 분명했고 이는 패배를 의미했다 그가 가는 것도 무척 위험했다 많은 부족이 적으로 변했고 어떤 부족을 신뢰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소수의 호위병만 데리고 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래지 않아 결정을 내린 듯하다 카이사르는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는 쪽을 택했다 그가 움직이는 것이 훨씬 빠른 방법이었다 수행원과 400명의 게르만 기병을 이끌고 서둘러 군단으로 가는 편이 군단이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빠른 것이다. --- p.527 카이사르는 그때까지의 자신의 삶을 통해 가치 있는 뭔가를 얻을 수 있다면 위험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바 있다 그는 포기를 몰랐다 기원전 49년의 카이사르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싸우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해 보였다 로마 귀족 사회는 ‘결단’을 숭상했다 특히 불굴의 정신을 가진 장군을 존경했다. --- p.623 4 전쟁의 천재, 행동하는 리더십, 부하들의 마음을 얻은 지도자 카이사르는 세심하게 그들을 양성했다 그는 원로원 의원들이 포룸에서 지나가는 시민들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하듯이 백인대장들의 이름을 열심히 외워 써먹었다. --- p.391 카이사르는 병사들을 부를 때 결코 ‘여러분’ 또는 ‘병사들’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전우들(콤밀리토네스, commilitones)’이라고 했다. --- p.393 실수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다 대책 없이 쳐들어간 브리타니아 원정이 있었고, 코타와 사비누스의 참패가 있었으며, 게르고비아에서의 실패도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병사들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있는 한 항상 마지막에는 승리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했다. --- p.584 그의 지휘 방식은 전형적인 로마 장군의 방식 그대로였다 그는 최전선에 인접한 곳에서 전투를 지휘했고, 예비대를 출동시켰으며, 부하들의 활동을 지켜보면서 그들을 격려했다 그의 전술은 극히 공격적이었으며 그는 언제나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 그는 아무리 불리한 여건에서도 궁극적인 성공이 자신의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 p.584 대부분 경험이 부족했던 군단병들 사이에 두려움이 퍼지기 시작했다 카이사르는 늘 그렇듯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며 병사들을 격려했다 그 와중에 기수 하나가 도망치려 한 일이 있었다 카이사르는 그를 붙잡아 돌려세운 뒤 말했다 “이봐, 적은 그쪽이 아니라 저쪽이다!” --- p.750 카이사르는 그들이 스스로와 소속 부대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세심하게 안배했다 용맹함을 보여준 병사들에게는 금 또는 은으로 장식된 무기가 수여되었고 이는 그들에게 특별한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로마군은 항상 병사들의 대담성을 장려하는 체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카이사르의 군단에서는 특히 이것이 극대화되었다. --- p.394 이번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카이사르가 최전방에서 싸우며 보여준 용기는 지휘관으로서의 솜씨와 함께 귀족에게 요구되는 ‘비르투스(육체적 힘, 자신감, 도덕적 용기, 군인으로서의 역량 등을 통칭하는 단어)’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였다 병사들과 함께 싸우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죽는다 이는 카이사르와 그의 병사들 사이의 신뢰감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 p.414 하지만 카이사르는 자신의 개인적인 무용을 내세우려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대신 그는 지휘관으로서의 역할에만 집중했다 그는 상브르 전투의 주인공이 병사들이었음을 분명히 했다 그 승리는 궁극적으로 군단병들의 결의와 기강 그리고 그들이 받은 훈련에 기인한 것이었다. --- p.415 군대가 카이사르에게 보여준 충성심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것은 심지어 그가 죽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충성심이 왜,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카이사르와 장교들과 병사들 사이에 맺어지고, 카이사르의 세심한 안배하에 갈리아 전쟁을 통해 강화된 끈끈한 결합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 p.627 5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커뮤니케이션의 달인, 홍보의 달인 병사들의 소요 사태를 순식간에 잠재운 사례 --- p.742 이 승리의 신속함은 카이사르가 로마에 있는 대리인에게 보낸 편지에 적힌 간결한 문구로 표현될 수 있는데, 그 문구는 훗날 카이사르의 개선식을 장식하기도 한다 VENI, VIDI, VICI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 p.732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는 라틴어 문학의 최고봉으로 손꼽혀 왔다 카이사르의 연설을 지극히 높이 평가했던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전쟁기에 대해서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실로 감탄할 만하다 의복과 장신구를 모조리 벗어던지고 벌거벗은 채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 카이사르는 “보편적으로 쓰이지 않는 말은 키잡이가 암초를 피하듯이 피해야 한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외국어 등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그는 이 원칙을 굳게 지키며 명료하고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다 그의 글에는 감정적 또는 신파조의 내용이 거의 없다 극적인 사건과 중요한 사건의 경우에 그는 그 사건이 스스로 이야기하게 했다 자신을 제삼자로, 자신의 병사들을 ‘우리 사람들(nostril)’로 칭하면서 그는 ‘적법한’ 지휘관의 지휘 아래 흉포한 적군, 때로는 자연을 상대로 싸우는 로마 시민들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다 아울러 그는 매번 자신의 행동이 전적으로 공화국의 이익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많은 정치 지도자들과 군 지휘관들이 자신들이 겪은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곤 하지만 문학적인 측면에서 카이사르의 전쟁기에 필적할 만한 것은 아직 없다 카이사르는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글을 썼다 공화국의 위대한 종복으로서 자신의 명성을 확고히 하고 자신이 특별한 대우를 받을 만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결국 그의 전쟁기는 일종의 선전물로서 자신의 행위를 최고로 멋있게 꾸민 것이기도 하다. --- p.316 카이사르는 전차를 활용한 전술에 대해 상세히 언급했다 호메로스의 영웅담을 연상시키는 그 이국적인 병기에 로마 사람들이 매혹될 것을 알았던 것이다. --- p.463 그 원정을 카이사르의 위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해가 끝나기도 전에 카이사르는 브리타니아 원정이 홍보라는 측면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모험에 관한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는 열광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로마 군단이 바다를 건너 이상하고 신비로운 섬으로 갔다는 생각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 p.471 브리타니아 원정으로 대중의 엄청난 관심과 호의가 카이사르에게 쏠렸다 대중은 그 새로운 이야기, 전차를 타고 대청으로 몸을 퍼렇게 물들인 야만인들의 이야기에 열광했다 감수해야만 했던 큰 위험에 비하면 실질적인 성과는 미약했지만 홍보라는 측면에서 브리타니아 원정은 대성공이었다. --- p.481 잘못도 있었지만 카이사르는 애국자였다 매우 유능한 애국자 그는 싸웠다 그리고 내전에서 이겨 독재관이 되었으며 암살자들의 칼에 쓰러졌다 잘한 일도 있었고 잘못한 일도 있었겠지만, 이보다 더 극적인 삶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 p.846, 에필로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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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1. 카이사르에게 호의적이지만 그의 실수, 결함도 빠뜨리지 않고, 서양사의 격동의 시기를 수많은 사료를 바탕으로 객관적으로 재현해내고 있다.
숙고한 뒤에 내린 결정이었건 잠시 방심했던 것이었건 간에 결과적으로 카이사르는 작업 중인 군단을 보호하지 않는 위험을 감수했다. 어쩌면 전 주에 세 부족을 상대로 거둔 쉬운 승리에 도취해 있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 p.411 특징 2. 수많은 사료를 통해 전해주는 풍부한 디테일,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을 전해준다. 일부의 주장에 의하면 카이사르는 세르빌리아의 아들을 보자 저항을 멈추고 말했다고 한다. “아들아, 너마저?” 아쉽게도 셰익스피어의 대사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를 기록한 사료는 없다. --- p.833 카이사르는 공화국을 개조하기 위해 내전을 벌인 것이 아니었다. 또, 키케로와 몇몇 사람들의 주장과는 달리 그가 평생토록 절대 권력을 꿈꾸었다는 증거도 없다. --- p.773 카이사르는 끊임없이 유부녀를 유혹했다. 그의 여성 편력은 로마 사회에서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과연 그는 왜 그런 예외적인 방식으로 행동했을까? --- p.147 카이사르는 해변에 발을 디딘 순간 비틀거리다 쓰러졌다고 전해진다. 나쁜 징조였다. 하지만 두 손에 조약돌을 한 움큼씩 쥐고 벌떡 일어나 소리친 카이사르를 보고 사람들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아프리카여, 내 너를 잡았구나!” --- p.747 특징 3. 간결 명료한 전쟁 서술, 전사학자로서 현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적절한 배경 설명 폼페이우스의 군단병들은 전진하지 말고 자리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즉 그들의 임무는 적을 못 박아 두는 것이었다. 폼페이우스는 기병으로 승리를 거두려 하고 있었다. 라비에누스가 직접 지휘하는 6천400기의 기병이 좌익에 집결해 있었다. 수천 명의 경보병이 그들을 지원하고 있었지만 승리를 가져와야 하는 것은 결국 기병이었다. 수적으로 상대가 안 되는 카이사르의 기병을 쓸어버린 뒤에 우익과 배후를 치는 것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지극히 합리적인 계획이었다. 수적인 우위, 특히 기병의 우위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으며 전장 역시 기병이 활동하기에 좋은 평원이었다. 문제는 기병의 공격이 실패했을 경우에 대한 대책이 없다는 것이었다. --- p.696~698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의 ‘카이사르’편과 이 책의 비교 비교1. 니코메데스와의 동성애 스캔들이 빠졌다.(진위와 상관없이 평생 그를 따라다닌 큰 스캔들인데도 빠져있다). --- p.113~118 비교2. 나나미는 후세 사가 또는 작가가 각색한 내용을 카이사르의 말인 것처럼 그대로 사용했다. (예) 카틸리나의 음모를 둘러싼 원로원 토론 중 카이사르의 연설 카이사르의 연설은 전해지지 않지만 살루스티우스는 당시 그 논쟁의 핵심 부분을 각색한 작품을 남겼다. 물론 분량도 줄었을 것이고 문체도 바뀌었을 것이다. 또, 모든 연설문이 그렇듯이 청중을 앞에 둔 연사의 입에서 나온 말의 울림은 글로써는 느끼기 힘든 것이기도 하다. 카이사르는 그 몸짓, 기품 있고 힘찬 자세와 행동, 살짝 높은 음조를 지닌 좋은 목소리로 극찬을 받았다. 살루스티우스 식으로 표현하면 그 탁월한 공연은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 p.230~231 비교3. 나나미의 『갈리아 전쟁기』 등은 카이사르의 저작에 99% 의존했다.(이 책도 카이사르의 전쟁기에 의존한다. 하지만 배경과 원인 등에 대해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설명과 분석을 요소요소에 끼워넣었다. 매 챕터 말미의 각주는 이 책의 객관성을 담보하는 좋은 자료이다. 아울러 카이사르가 과장한 부분 등 현실적이지 못한 대목 등에서는 비평적인 설명을 가하고 있다.) - 갈리아 전쟁기의 배경 그의 글에는 감정적 또는 신파조의 내용이 거의 없다. 극적인 사건과 중요한 사건의 경우에 그는 그 사건이 스스로 이야기하게 했다. 자신을 제삼자로, 자신의 병사들을 ‘우리 사람들’로 칭하면서 그는 ‘적법한’ 지휘관의 지휘 아래 흉포한 적군, 때로는 자연을 상대로 싸우는 로마 시민들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다. 아울러 그는 매번 자신의 행동이 전적으로 공화국의 이익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많은 정치 지도자들과 군 지휘관들이 자신들이 겪은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곤 하지만 문학적인 측면에서 카이사르의 전쟁기에 필적할 만한 것은 아직 없다. 카이사르는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글을 썼다. 공화국의 위대한 종복으로서 자신의 명성을 확고히 하고 자신이 특별한 대우를 받을 만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결국 그의 전쟁기는 일종의 선전물로서 자신의 행위를 최고로 멋있게 꾸민 것이기도 하다. 만약 카이사르가 일부 자신의 행동을 왜곡했다면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 pp.315~323 -브리타니아 원정 배경 첫번째 브리타니아 원정은 실패였다. 사실 가까스로 재앙을 모면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해가 끝나기도 전에 카이사르는 브리타니아 원정이 홍보라는 측면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모험에 관한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는 열광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로마 군단이 바다를 건너 이상하고 신비로운 섬으로 갔다는 생각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 pp.470~471 비교4. 술라에게 반항하고 북동부 사비니족 영토로 도망쳤다.(나나미의 책에는 빠진 부분. 카이사르의 젊은 시절의 행적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다). --- pp.97~101 비교5. 민중파와 원로원파가 실제 존재하는가? 카이사르가 민중파의 영수였는가? 카이사르도 애초부터 포퓰라리스를 지향했다고 해도 그가 유사한 방식으로 행동한 다른 여러 사람들과 특정한 대의를 공유한 것은 아니었다. 정치는 본질적으로 개인간의 투쟁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모두 경쟁자였다. 중요한 것은 대중의 갈채를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더 받는’ 것이었다. --- pp.177~178 비교6. 에스파냐에서의 전쟁 활동 (나나미의 책에서는 빠진 부분) --- pp.251~256 비교7. 카이사르는 과연 제정을 기획하고 설계했는가? (나나미는 모두 카이사르의 작품이라고 하지만, 학자들의 의견은 양분되어 있다). 어떤 학자들은 그를 공화국이 직면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공화정 체제로는 변화된 환경에 대응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선각자로 여긴다. 결국 카이사르는 왕조 혹은 제정만이 그 해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가 세운 계획은 정치적 변화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로마와 이탈리아, 로마와 이탈리아와 속주와의 관계 전반에 걸친 급격한 변혁이 그의 목표였다. 이런 관점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카이사르는 급격한 개혁주의자 혹은 원대한 계획을 가진 선각자가 아니라 공화국 체제 내에서 개인의 영광과 지위를 추구하던 와중에 권력을 얻게 된, 극히 보수적인 귀족이었다. --- pp.774~775 비교8. 폼페이우스는 과연 졸장부였는가? 그는 57세였고, 13년 이상 전장을 떠난 상태였지만 사람들은 그의 체력과 열정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그는 군단병의 장비를 갖추고 함께 훈련했으며 직접 말을 타고 기병에게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던진 투창이 젊은 병사들의 것보다 훨씬 정확했고 훨씬 멀리 나갔다고 했다. 솔선수범하는 폼페이우스에게 자극받았는지, 군대는 점차 강하고 규율 있는 정예군으로 변해갔다. --- pp.668~669 비교9. 독재관 카이사르의 관직 남발 (나나미의 책에서는 없다). 많은 추종자들을 고위직에 임명하려던 카이사르의 바람은 종종 적법한 절차와는 상충되는 경우를 만들어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투표장에 갔는데, 그의 집정관 당선이 선언되자 사람들은 그에게 고함과 야유를 보냈다고 한다. “그는 절대 집정관이 아니야!” 그는 임기 마지막 날 아침에 죽었다. ...... 이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즉시 코미티아 켄투리아타를 소집하여 신임 집정관을 선출했다. 정오가 지나 집정관에 당선된 사람은 갈리아에서 그의 레가투스였던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였다. 결국 그의 집정관 재임 기간은 몇 시간에 불과하게 되었다. --- pp.778~779 비교10. 라비에누스의 배신이 과연 클리엔테스로서의 ‘신의’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는가? (이 책에서는 여러 가능성을 분석했지만, 나나미는 로마인들의 의리를 너무 맹신하고 있다). 라비에누스는 피케눔 출신이었는데 그 지역은 폼페이우스 가문이 영향력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따라서 라베에누스가 일종의 의리를 지켜 그에게 갔을 수도 있다. 그가 한때 폼페이우스 휘하에서 근무했으며 폼페이우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 라비에누스는 자신의 황금기를 카이사르를 위해 바쳤지만 충분히 인정받지는 못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여러 차례 자기 혼자만의 능력으로 승리를 이끌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언제나 2인자라는 사실, 자신의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 그로 하여금 결정을 내리게 한 것이다. 어쩌면 카이사르가 내전에서 질 것이라고 예상했을 수도 있다. --- pp.629~630 비교11. 카이사르가 토지법 통과를 위해 폭력 사태를 꾸민 사실. (나나미의 책에는 없다). --- p.2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