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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의 난
정인택
알다 2009.10.01.
베스트
기호학/언어학 top20 7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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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들어가는 말

가. 누가 만들었는가?
1) 국책사업의 담당자는 언문팔유(諺文八儒)였다?
2) 국책사업의 담당자는 집현전 학사들이었다?
3) 일본의 외교 사절이 한양에 머물 때에 훈민정음이 공개된 것은 우연의 일치였을까?
4) 문창살 문양의 원조는 전자(篆字)였다.
5) 전자는 「해례」에서 신체의 발성부위와 천ㆍ지ㆍ인의 원리로 둔갑했다.
6) 정도전의 「고려사」가 개수되는 과정을 통해 살펴본 꾀돌이 세종의 단적인 면모.
7) 정도전이 「고려사」를 편찬한 까닭은 역사 주권의 위기감 때문이었다.

나. 언제 만들었는가?
1) 훈민정음의 창안은 중국을 의식한 극비 프로젝트였다?
2) 세종이 참고할 수 있는 문자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3) 세종 25년 이전에 문자와 관련된 특이사항이 있었는가?
4) 세종, 그는 중증의 일 중독증 환자였다.
5) 역사적으로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은 따로 있었는가?

다. 어디서 만들었는가?
1) 한 글자 한 소리의 대원칙
2) 훈민정음이 창안된 장소는 정음청의 청사이다?
3) 세종은 「해례」가 제시한 표기 규범을 지키지 않았다.
4) 경복궁 내에 훈민정음을 창안할 만한 전각은 어디인가?
5) 세종이 궁궐에서 성장기를 보낸 것이 훈민정음의 창제에 밑바탕이 되었다.
6) 세종이 집현전에 중국어 몰입 교육을 강요하자 학사들은 조선말을 고수했다.
7) 장영실은 원어민 출신 전속 통역관을 대동하고 중국행에 나섰다.
8) 모래시계와 원리가 동일한 물시계 자격루가 국가 표준 시계로 공인된 비결은?
9) 세종 25년 3월, 충청도 온양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0) 왕의 남자였던 장영실, 세종은 그의 존재를 어떻게 알게 됐을까?

라. 무엇을 만들었는가?
1) 왜 46자가 아닌 28자를 만들었다고 했을까?
2) 신숙주는 「동국정운」의 서문에서 23자라고 했다.
3) 공개 당시에는 28자가 아닌 27자였다.
4) 세종은 「해례」를 쓰면서 외교적 위험도 불사했다.
5) 오늘날 전해지는 「예의」는 훈민정음이 공개되던 당시의 것이 아니다.
6) 「해례」와 중국식 한자 발음의 채택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7) 「해례」를 쓰면서 달라진 것은?
8) 세종은 자신이 직접 모양새를 고안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차별했다.
9) ㅳㅄㅴㅵㅶㅷ, ㅺㅻㅼㅽ 등의 형태가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의 증명
10) 어두자음군이 구현되는 발음 환경에서 모아적기의 발상이 나올 수 있었을까?
11) ㅳㅄㅴㅵㅶㅷ, ㅺㅻㅼㅽ 등의 형태들은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고안된 것들이다.

마. 왜 만들었는가?
1) 훈민정음은 과연 어린-어리석은- 백성들의 문자였는가?
2) 훈민정음은 문자 향유자의 비율을 단숨에 두 배로 끌어올렸다.
3) 조선의 국호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중 어느 것에서 유래했을까?
4) 단군은 세종의 시대에 이르러 제대로 된 예우를 받았다.
5) 서장관 정도전과 이방원
6) 태종 이방원을 위한 변명
7)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창제의 동기는 한자를 이겨먹을 조선의 문자였다.
8) 또 한 명의 서장관 신숙주
9) 한글은 식민지의 상황에서 주류 문자로 우뚝 섰다.
10) 한글이 없었다면 오늘날 통일은 물 건너갔을 것이다.

바. 어떻게 만들었는가? (준비 과정)
1) 가림토 문자가 훈민정음의 자ㆍ모음에 기원이었다?
2) 산스크리트 문자 내지는 파스파 문자 기원설
3) 중국의 운서 기원설
4) 세종은 조선말 소리의 특성을 분석해 자음의 계보와 순서를 확정했다.
5) 세종은 조선말의 표기에 필요한 자ㆍ모음의 수를 한자를 활용해 확보했다.
6) 모음에 적용됐다는 천ㆍ지ㆍ인의 원리도 없었다.
7) 「해례」에 들어 있는 철학적 원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8) 오늘날 전해지는 「예의」에는 불교와 관련된 글자들이 많다.

사. 어떻게 만들었는가? (완성 과정)
1) 세종은 온수의 지명을 온양으로 바꾸고, 현을 군으로 격상시켰다.
2) 세종, 한 글자 한 소리의 복병을 만나 또 한 차례 심한 고통을 치르다.
3) 장영실, 의금부에 투옥되다.
4) 강원도 이천으로 이동하는 길목에서 세종의 행적이 심히 이상했다.
5) 상의원 내에서 일어난 사고를 장영실은 어째서 무마하지 못한 것일까?
6) 세종, 상의원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다.
7)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종의 일처리
8) 세종, 1차 완성된 자음의 모양새를 장영실에게 건네다.
9) 장영실, 요철의 원리로 한 글자 한 소리의 난제를 해결하다.
10) 세종, 요철의 원리에 모음조화의 원리를 추가해 모음체계를 완성하다.
11) 세종, 자음도 기본자를 설정해 기존의 것을 전면적으로 수정하다.
12) 마치면서

아. 여기까지 이르러서도 남은 두 가지 의문
1) 이배(吏輩) 십여 인의 의문
2) 언문(諺文)의 의문

추천의 글 - 훈민정음의 비밀 / 김응교(시인,문학평론가)

저자 소개

저자 : 정인택
61년 경북 안동 출생. 작가로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면서 한글에 대한 깊은 관심을 품게 됐다. 작품에는 중편집 『뽕짝병원 이야기』 장편 『남자의 가정』『일곱 살 민들레』, 『쌍권총』 등이 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10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299쪽 | 416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93916010

출판사 리뷰

이 책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훈민정음은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지시해 만들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뒤엎는 이야기이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는 작가는 지난 5년 동안 「실록」 등 방대한 자료를 연구해 훈민정음 창제의 진실을 육하원칙으로 새롭게 재해석했다.

당시 중국을 추종하고 한자를 안 쓰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던 사회적 분위기에서 중국에 이겨먹을 문자를 만드는 작업 자체가 '문자의 난'과도 같은 일이다. 세종이 문자를 혼자 몰래 만들다가 어려움에 빠지자 관노 출신 천재 발명가 장영실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훈민정음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특히, 중국 사대주의에 빠져 있는 사대부들을 설득하기 위해 한자(전자)를 본 따 만들었다는 둥, 천지인사상을 기본으로 만들었다는 둥 세종의 비애와 고독이 그대로 전해진다.

훈민정음 창제의 원리와 비밀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작가의 예리한 추론과 뛰어난 상상력이 결합되었다. 독자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 훈민정음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갖게 하며, 지적 호기심을 자극해 훈민정음에 대한 탐구와 연구에 열중하게 만들고, 훈민정음을 둘러싼 새로운 논쟁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하다.

한자는 거란 문자, 여진 문자를 도태시켰다. 일본은 아예 한자와 공존할 작정을 하고 가나 문자를 창안했다. 원나라가 중국을 통치하던 시절 몽골의 파스파 문자는 한족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나중에 청나라의 만주 문자도 사문자가 되고 말았다. 동방불패 한자, 한자 문화권에서 나온 문자 중에 한자를 이겨먹은 문자는 오직 한글뿐이다.

만약 세종이 어리석은 백성들의 문자를 만들었다면 훈민정음과 같은 경이로운 문자는 나오지 않았다. 세종은 아예 처음부터 한자를 의식하고 조선 문자의 상을 그렸다. 뜻글자 한자, 한자를 이겨먹으려면 '모든 조선말을 표기할 수 있는 문자, 익히기 쉽고 사용하기 편리한 문자'를 만들어야 했다.

먼저 모든 조선말을 표기하려면 조선말에서 구현되는 자음과 모음의 숫자와 개별 소리들의 성격을 파악해야 한다. 오늘날 한글학계에서는 15세기 당시 최첨단 음운학 이론이 동원됐고, 그 실무 작업은 집현전의 학사들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만리, 신석조, 김문, 정창손을 비롯한 집현전의 최 상층부는 폐기 상소문에서, ‘재상들과 의논도 거치지 않고 갑자기 이배(吏輩) 십여 인에게 가르쳐 익히도록 했다’라고 했다. 여기서 이배(吏輩)는 관직의 품계도 따로 없는 중인 출신 잡관들을 낮춰 이르는 호칭이다. 집현전 학사들이 협력했다면 이런 얘기는 애당초 나올 수가 없다.

진실은 세종이 혼자 몰래 만들어 기습적으로 공개했다는 것이다. 또 학계에서 언급하는 음운학 이론은 중국에서 확립된 것으로 「홍무정운」, 「고금운회거요」 등이 중요 책자이다. 핵심은 중국말은 모음조화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훈민정음의 모음은 모음조화 현상에 입각하지 않으면 이해가 불가능하다. 세종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자ㆍ모음의 숫자와 개별 소리의 속성을 파악했다.

다음으로 세종은 익히기 쉬운 문자가 되게 하려고 자ㆍ모음 공히 기본자의 원리를 도입했다. 이것은 세계 문자의 개발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 또 사용하기 편리한 문자가 되게 하려고 ‘ㅎㅏㄴㄱㅡㄹ’이 아닌 ‘한글’로 표기가 가능하도록 했다. ‘ㅎㅏㄴㄱㅡㄹ’과 같은 표기 형태를 늘여적기라고 한다. ‘한글’의 형태는 모아적기이다. 알파벳을 비롯한 자ㆍ모음의 체계를 갖춘 모든 음소문자들은 늘여적기를 한다. 이것이 해명돼야 한다. 세종은 대체 어디서 영감을 얻어 기본자의 원리를, 모아적기의 표기 형태를 발상해 낸 것일까?

1. 집현전 학사들이 협력했다면, 훈민정음의 창안은 국책사업이다. 국책사업이라면 전해지는 얘기가 풍성해야 한다. 그러나 1940년 「훈민정음 해례」가 발견되기 이전에는 자음의 기본자가 신체의 발성 부위에서 나왔고, 모음에 적용된 천지인의 원리조차 까맣게 몰랐다. 그래서 문창살의 문양에서 나왔다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2. 세종은 재위 25년 12월에 완성된 훈민정음을 공개한다. 그로부터 두 달쯤 후인 26년 2월에 최만리 등은 폐기 상소문을 올린다. 또 「해례」는 28년 9월에 완성됐다. 「해례」에 들어있는 내용 중 일부는 상소문에 의해 부정된다. 「해례」는 28자인데, 상소문에서는 27자인 것이 단적인 예다. 공개 당시에는 27자였다. ㅿ이 없었다. 이 책은 ㅿ이 나중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3. 「예의」는 훈민정음의 운용원리를 간략하게 설명한 글이다. 「해례」에 실려 있는 「예의」는 된소리 ㄲㄸㅉㅃㅆ의 소릿값을 ?覃步慈邪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15세기에 ?覃步慈邪의 발음뫀 ‘규담보?사’였다. 그런데 「해례」는 중국식 한자 발음을 채택하다 보니 ‘?땀뿅?썅’이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공개할 때 이미 「예의」를 작성해 전국에 배포했다. 그 사실은 정인지가 작성한 「해례」의 서문에 나와 있다. 여기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된다. 공개 당시 작성된 「예의」도 중국식 한자 발음이었을까?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규담보?사’가 ‘?땀뽕?썅’이라면 된소리와 예사소리의 구분이 불가하기 때문이다. 또 ‘?’는 정확한 발음을 할 수 없을뿐더러 ‘뿅썅’의 경우는 모음까지 헷갈리게 한다.

어디 그뿐인가. 중국식 한자 발음은 한자 생활 자체에 대 혼란을 초래한다. 세종은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중국말을 익히라는 지시를 내린 적 있다. 그때 집현전에서는 나이 먹어 외국어를 익히다보니 발음 교정이 안 된다고 고충을 호소해, 세종이 영을 거둔 적이 있다. 이렇듯 집현전의 성리학자들이 원한 것은 중국말이 아니었다. 한자 생활의 안정이었다. 그런데 상소문에는 한자 발음과 관련된 문구가 없다.

중국식 한자 발음은 곧바로 중국에서 확립된 음운학으로 이어진다. 이로써 훈민정음 창제의 진실은 한 발자국도 접근할 수 없었다. 이것을 부정하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훈민정음의 실제 창안과정을 복원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오늘날 한자 발음에 된소리가 사용되는 것은 쌍(雙)과 씨(氏) 뿐이다. 15세기는 그마저도 예사소리로 구현됐다. 그러니 공개 당시 세종은 한자의 예를 들어 된소리의 소릿값을 설명할 수 없었다. 바로 그것이 27자가 된 내력이다. 된소리와 더불어 겹모음도 설명을 생략, 연구해서 각각의 소릿값을 깨치라고 했던 것이다.

4. 세종 27년 1월 신숙주, 성삼문이 중국의 저명한 음운학자 황찬을 찾아 요동으로 길을 떠난다. 그들이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권제, 정인지 등이 「용비어천가」를 완성했다. 세종은 「용비어천가」를 궁중음악의 노랫말로 쓰게 한다. 그러나 출판은 무기한 연기한다. 바로 이때 중국식 한자 발음이 채택됐다. 그래서 「용비어천가」는 중국식 한자 발음으로 쓰여진 옥편 「동국정운」의 완성과 때를 맞춰 출판된다.

5. 공개 당시 자음의 계보와 순서는 ‘ㄱㅋ ㄴㄹㄷㅌ ㅁㅂㅍ ㅅㅈㅊ ㅇㆁㆆㅎ’이었다. 황찬은 이 계보와 순서를 ‘ㄱㅋㆁ ㄷㅌㄴ ㅂㅍㅁ ㅈㅊㅅ ㆆㅎㅇ ㄹ ㅿ’으로 바꿨다. 오늘날 학계는 처음부터 ‘ㄱㅋㆁ ㄷㅌㄴ ㅂㅍㅁ ㅈㅊㅅ ㆆㅎㅇ ㄹ ㅿ’이라고 한다. 그런데 세조 4년에 간행된 「월인석보」본 「예의」에서는 중국의 한자 발음을 표기하려고 ㅈㅊㅅ에 오른쪽 선을 길게 늘여 차별화를 시도했다. 이것은 중국식 한자 발음에 원형을 「해례」를 쓴 시기에도 제대로 몰랐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그럼에도 혼자 몰래 작업한 세종이 중국말을 토대로 확립된 중국의 음운학 이론에 정통해, 그 이론에 입각하여 훈민정음의 자ㆍ모음을 확립했다고 한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6. 조선은 성리학을 국시로 창업했다. 세종은 한자와 다른 문자를 만들자는 얘기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혼자 몰래 만들어 기습적으로 공개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런 환경에서 훈민정음의 생존과 보급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세종은 공개에 즈음하여 거대한 사기극(?)을 펼쳤다. 일본의 외교사절을 끌어들인 것이다. 조선 성리학의 전당 집현전의 분열을 꾀했다. 한자 서체의 일종인 전자(篆字)를 모방했다고 둘러대 한자와 혈통관계를 맺으려 했다. 한자는 정신문화, 훈민정음은 물질문화라는 식으로 저자세로 일관했다.

7. 사대부들은 훈민정음을 '욕 글자', '욕이나 받아 적기 알맞은 문자'라는 뜻을 지닌 언문(諺文)의 호칭을 지어내 비아냥거렸다. 이것이 당시 사대부들의 정서였다. 그만큼 한자와 다른 문자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던 것이다. 따라서 대다수는 지지했는데, 일부 골수 사대주의자들만 반대했다는 것은 틀린 얘기다. 임금이 죽으면 사대를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했는지를 두고 평가했던 시대였다. 오늘날 국사학자에게 최만리가 유별난 사대주의자였느냐고 물으면 누구나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유별난 사람은 임금이면서 개인적 취향이 독특했던 세종이었던 것이다.

세종은 문자의 난, 아니 문자의 혁명에서 승패를 장구한 세월이 걸릴 것이라 예측했다. 세종은 수모를 감수하고 언문의 호칭을 공인했다. 공인의 방식은 춘추관에, ‘앞으로 사초를 작성함에 있어 특별히 공식성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면 언문으로 기록토록 하라.’라는 지침을 내린 것으로 추측된다. 세종이 언문의 호칭을 공인한 사실은 부정할 여지가 없다. 국가공식 기록물인 「실록」에서조차 언문으로 기록됐고, 사람들이 정음청으로 알고 있는 기구의 본래 명칭도 언문청이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공개할 때 가장 우려했던 것은 ‘사대부의 피를 묻힌 문자’였다. 세종은 주도면밀한 준비로 훈민정음 정국을 단 두 달 만에 말끔히 매듭지었고, 그 과정에서 김문과 정창손, 두 사람만을 파직시켰다. 그리고 세종은 두 사람을 몇 달 안 가 원직으로 복직시켰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한가운데 언문의 공인이 자리하고 있다. 세종, 그는 ‘어진 임금'이기 이전에 희대의 승부사라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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