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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_역사 발전의 원동력은 지식이다
PART I_피터 드러커의 지식역사관 CHAPTER 01_무엇이 역사를 움직이는가? 역사철학자 피터 드러커/드러커의 역사관: 연속과 변화/드러커의 인간 모델: 지식근로자/역사의 원동력은 무엇인가?/드러커의 반 유물론 CHAPTER 02_지식역사의 시대구분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와 역사의 시대구분/드러커의 시대구분과 전환기/지식, 과학, 기술 PART II_지식역사의 전개 CHAPTER 03_지식이 인간 내면에 적용된 시대 - 고대에서 산업혁명 직전까지 지식 패러다임의 이동/유토피아/고대 그리스와 로마/중세/르네상스와 과학혁명/계몽시대 CHAPTER 04_지식이 작업도구, 제조공정, 제품에 적용된 시대 - 1750~1880 이중혁명 시대/산업혁명과 자본생산성/현대 자본주의와 마르크스 사회주의 CHAPTER 05_지식이 작업방식과 육체노동에 적용된 시대 - 1880~1950 과학적 관리혁명과 노동생산성/제1차 대전과 대공황/제2차 대전 CHAPTER 06_지식이 지식에 적용되는 시대 - 1950~21세기 초 육체노동의 종말과 정부의 역할/지식혁명과 지식생산성 에필로그_우리는 새로운 ‘미래사회’를 만드는 변화기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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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Christoph Burckhardt, 1818~1897)는, 역사학이란 역사의 맨 처음이 언제였는지 밝힐 수 없으며 그 종말도 말할 수 없는 불확실한 학문이라고 보았다.
드러커는 부르크하르트의 이런 견해를 받아들여 『경제인의 종말』에서 ‘경제인 모델(economic man model)’이 종말을 맞고 자본주의가 수정될 것이라 보았지만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처럼 공산주의가 역사의 귀결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의 실패가 나치즘과 파시즘을 불러들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드러커는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1952~)가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에서 주장한 자유민주주주의의 영원한 승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드러커의 역사관은 종말론도 아니다. 드러커는 사회의 제반 문제는 새로운 지식과 기술의 등장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진전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퇴보사관도 물론 아니다. 드러커는 역사의 진행을 ‘연속과 변화(continuity and discontinuity)’의 과정으로 보았다. 한 역사는 다음 역사로 넘어갈 때 ‘역사의 경계(historical divide)’를 지나 일정 기간 혼란과 변화 또는 단절의 시대를 겪은 뒤 장기간 연속 상태가 지속된다고 보았다. 이는 일견 순환사관과 유사한 듯 보이지만, 드러커는 인류의 역사는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한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따라서 드러커의 역사관은 종말론, 퇴보사관, 순환사관을 배제한 진보사관에 가깝긴 하지만 역사의 연속과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p. 19 ‘드러커의 역사관: 연속과 변화’ 중에서 과거에 지식은 언제나 사유재산이었고 자기수양의 도구였다. 그러나 1750년 무렵 갑자기, 지식은 공공재산이 되었고 보편적이고 실용적인 것이 되었다. 지식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 즉 지식의 의미 변화와 적용 변화(이하 지식 패러다임 이동)는 지금까지 세 단계를 거쳤다. 지식 패러다임 이동의 첫 번째 단계는 1750~1880년까지 130년 기간으로, 지식이 작업도구와 제조공정과 제품에 적용되어 자본생산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지식의 의미변화의 첫 번째 단계에서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동의 소외와 새로운 계급의 등장과 계급투쟁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공산주의를 잉태했다. 두 번째 단계는 1880~1950년까지 70년 기간인데, 지식이 작업 그 자체에 적용되어 노동생산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1881년 프레더릭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 1856~1915)는 일하는 과정에 (작업연구, 작업분석, 시간연구 등) 과학적 관리법을 적용했고, 제2차 대전 무렵 노동생산성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로 인해 생산성혁명(productivity revolution)은 70여 년 만에 프롤레타리아를 거의 부르주아로 바꾸어놓았다. 이것은 생산성혁명이 계급투쟁과 공산주의를 패배시켰음을 의미한다. 세 번째 단계는 제2차 대전 후에 시작되었다. 1944년 미국의 제대군인 원호법(GI Bill of Rights) 이후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근로자들이 노동력의 중심이 되었고, 컴퓨터와 인터넷 등을 도구로 삼은 지식근로자는 지식을 다른 지식들에 적용하여 지식생산성을 높이고 있는 중이다. 이것이 경영혁명(managementrevolution)이다. 제1차 대전 말경인 1920년대만 하더라도 고등교육은 귀족이나 성직자들을 제외한 일반 사람들에게 전혀 의미 없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미국의 제대군인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제대군인 원호법이 지식사회로의 이동을 예고했다. 미래의 역사학자들은 제대군인 원호법의 통과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취급해야 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경영혁명’은 제임스 번햄(James Burnham, 1905~ 1987)의 『경영자 혁명(Managerial Revolution)』(1941)과는 무관하다. 번햄은 자본주의 사회가 지속되지 못할 것이고 경영전문가가 사회를 지배할 것으로 보았다. 반면 드러커가 말하는 경영혁명은 경영자가 지식과 지식을 결합하여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과업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p. 50 ‘지식 패러다임 이동의 세 단계’ 중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초고층 건물을 뜻하는 ‘마천루(skyscraper)’라는 용어가 미국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였다. 초고층 건축 형태는 사회발전과 기술발달이 동시에 맞물려 일어난 합작품으로, 거대기업의 상징이 되었다. 도시에서의 상업활동이 증대함에 따라 수용공간이 필요했고, 또 백화점 건물에 고객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면서 5층 이상 높은 건물의 건설이 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초고층 빌딩이란 정면에서 본 건물의 수평 입면과 건물 높이와의 비율이 최소한 5:1 이상인 것을 말하는데, 1885년 제니(William Le Baron Jenney, 1832~1907)가 철골구조(iron beam) 공법으로 시카고에 지은 55미터의 12층짜리 홈인슈어런스 빌딩이 첫 번째 고층빌딩이다. 기술적으로 초고층 건물은 강한 바람을 버텨낼 수 있어야 한다. 산업혁명 덕분에 실용화 단계에 접어든 강철이 그것을 가능케 해주었고, 게다가 엘리샤 오티스(Elisha Graves Otis, 1811~1861)가 1857년 개발한 고속 엘리베이터가 실용화되고 있었다. 시카고는 당시 급성장하던 철도산업의 핵심도시이자 상공업 중심지로 번성중이어서 급격하게 인구가 늘고 있었다. 1891년 시카고에 16층짜리 모나독(Monadock) 빌딩이 세워졌다. 설계사 루이스 술리반(Louis Sullivan, 1856~1924)은 다음과 같이 썼다. “엄청난 벽돌더미가 깎아지른 듯 그리고 튼튼하게 올라갔다.” 그 뒤를 따라 회사들과 건축가들 모두 점점 더 높은 빌딩을 짓느라 경쟁하는 한편 상업용 건물은 우아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시카고에서 첫 선을 보인 고층건물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운 곳은 맨해튼으로, 1900년대에 들어오면서 미국의 경제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상업건축으로 시작된 마천루는 미국에서 발달하여 점차 세계로 퍼져나가 주거용으로도 쓰이고 있다. 초고층 건물은 경쟁적으로 몇 차례 단계를 거치며 발전했다. 단순히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화려한 고전 건물양식을 도입하는 등 미적인 측면에서도 발전했다. 1931년, 102층 381미터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수용인원 1만 8,000명, 분당 360미터 속도로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65대, 화장실 2,500개, 계단 1,860개를 가진 세계 최고의 빌딩이 탄생한 것이다. 이런 빌딩들이 건설되던 때 미국은 대공황 시기였고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여 재기를 일구려는 의도가 있었다. 당시 케인스는 경기변동의 원인이 공급보다는 수요에 있다고 진단하고 재정금융정책을 통해 불황을 타개할 것을 주장했다. 맨해튼의 빌딩과 후버댐, 테네시강유역 개발공사(TVA) 등은 케인스 처방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오랫동안 높은 공실률을 보였고, 한동안 엠프티(empty) 빌딩이란 빈축을 샀다. 존 스타인백(John Steinbeck, 1902~1968)은 1939년 『분노의 포도(The Wrath of Grape)』에서 대공황 시기에 농토를 빼앗기고 서부로 이주하는 소작농의 처절한 삶을 그렸다. 땅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농부가 차압을 붙이러 온 집행관에게 마냥 푸념을 늘어놓는다. “이건 우리 땅이에요. 여기서 태어났고 일생 일했으며 여기서 죽어갔소. 그것이 바로 이 땅이 우리들의 것이라는 증명이요. ……종이쪽지가 중요한 게 아니오.” “참으로 안 된 일이지만 그건 은행이라는 괴물이 하는 짓이요.” “은행도 사람들이 운영하고 있지 않은가요?” “아니에요. 은행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요. ……은행은 돈과 이자를 먹고 살지요. 먹을 돈이나 이자가 없으면 그냥 죽고 말아요.” 이 소설은 대공황의 무서움과 은행의 비인간성을 고발한 것이지만, 그 농부들과 후예들은 모두 도시에서 임노동자가 되었고 또 그 아이들은 지식근로자가 되었다. 아무도 다시 농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pp. 201-203 ‘대공황과 토목사업’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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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지식인의 표본, 지금도 놀라운 혜안과 통찰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 탄생 100주년 “지난 역사를 어떻게 미래에 적용시킬 것인가!”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 평가받는 피터 드러커는 뛰어난 ‘역사철학자’이기도 했다. 역사철학자를 “역사에서 어떤 종류의 ‘패턴’을 발견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면(비록 스스로 역사가로서의 위치를 피력하지는 않았지만) 피터 드러커는 충분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도 남는다. 역사철학자로서 그는 21세기 역사의 전개방향과 과정에 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이 책은 드러커의 역사관을 종합하고 정리한 최초의 저작이다. 그가 발견한 패턴은 바로 ‘지식’이다. 역사발전의 원동력을 ‘지식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에서 찾은 것이다. 이 책 『지식역사』는 국내 최고의 피터 드러커 권위자 이재규 교수가 드러커 경영사상의 핵심 키워드인 ‘지식’을 테마로 ‘지식근로자’, ‘지식사회’, ‘지식역사’ 3부작으로 집대성한 시리즈의 세 번째 저작이다.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지식’의 의미와 기능의 변화에 있다는 드러커 고유의 역사관을 소개한다. 고대로부터 중세 봉건사회, 근대 산업사회를 거쳐 현대 지식사회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피터 드러커가 제시한 ‘지식’의 관점에서 흥미롭게 풀어간다. 피터 드러커의 방대한 저작을 모두 섭렵해 온전히 이해한 저자가 심도 깊은 통찰로 드러커 사상의 정수만을 모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시대의 경쟁코드를 읽어야 하는 기업의 관리자, 혁신이 생존의 필수요건임을 알고 있는 모든 직장인의 필독서라 할 수 있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더 먼 곳을 바라보는 즐거움 현대적 시각으로 재탄생한 피터 드러커 경영학의 정수 제3탄! “지식생산성 향상은 피를 흘리는 혁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 1909-2005) 지식은 어떻게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는가? 피터 드러커는 1946년 최초의 경영서 『기업의 개념』을 출판한 이래, 『경영의 실제』(1954), 『창조하는 경영자』(1964)를 발표했고, 그리고 『매니지먼트: 경영의 과업, 책임, 실제』(1973)를 통해 현대 경영학의 체계를 완성했다. 그 후로도 많은 경영 저술들을 출간했고 『HBR(Harvard Business Review)』 등을 통해 경영 논문을 발표했다. 90세가 되는 1999년에는 지식근로자의 생산성 향상방법을 제시한 『21세기 지식경영』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저술작업으로 인해 일반 사람들은 드러커가 경영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것은 중대한 오해다. 드러커가 발표한 최초의 논문은 1924년 15세의 나이에 빈의 한 살롱에서 발표한 〈파나마 운하가 세계무역에 미친 영향〉으로서, 비록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드러커는 이 논문을 손질하여 1927년 함부르크 대학교 입학자격 논문으로 제출했다. 활자로 인쇄된 드러커의 최초의 저서는 1933년 독일의 튀빙겐출판사가 『독일의 법과 정치』 시리즈 100호 기념으로 출간한 소책자 『프리드리히 율리우스 스탈: 보수주의적 국가이론과 역사발전』이었다. 이 소책자는 2002년 7월 『소사이어티』에 영어로 번역 수록되었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드러커의 스탈에 관한 논문 발간 70주년 기념으로 2004년 헤르만 지몬(Hermann Simon) 외 7인의 교수들이 『피터 드러커, 효율적 경영의 주요 미덕』이라는 제목의 논문집을 출판했다. 드러커는 1927년 함부르크 대학교를 다니면서 주로 대학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법 아래서의 자유를 주장한 법철학자 프리드리히 율리우스 스탈을 비롯하여 덴마크의 종교 사상가이자 실존주의 철학의 창시자 세렌 키르케고르(Soren Kierkegaard, 1813~1855), 1809년 세계 최초의 근대 대학인 베를린대학(지금의 훔볼트대학교)을 창설한 빌헬름 폰 훔볼트(Wilhelm Von Humbolt, 1767~1835), 프로이센 주도로 독일을 통일하려고 노력했던 최초의 정치가 요제프 라도비츠(Joseph Von Radowitz, 1787~1853) 등 독일의 사상가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드러커는 또한 보수주의 철학에 심취했는데, 특히 근대적 체계를 갖춘 보수주의 이념의 기초를 확립한 영국의 의회주의자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 반(反)혁명 국제적 동맹체제를 구축한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Metternich, 1773~1859),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 『영국의 헌법』을 펴낸 보수적 자유주의자 월터 배젓(Walter Bagehot, 1826~1877) 등을 깊이 연구했다. 드러커가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하면서 수강한 해사법(海事法, admiralty law) 강좌는 서구역사, 사회, 기술, 법사상, 경제학 등을 포괄하고 있었는데, 이는 나중에 드러커가 경영학의 원칙을 가르칠 때 학습법의 원형이 되었다고 한다. 드러커는 그 후 프?크푸르트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영국에서는 케인스에게 경제학을 배웠고, 미국에서는 사라 로렌스 대학과 베닝턴 대학에서 경제학, 통계학, 철학, 역사를 강의했다. 드러커는 차츰 경영학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많은 경영 저술과 논문에서 논리 전개에 필요한 역사적 해설을 곁들였다. 예컨대 『경제인의 종말』(1939)에서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역사와 경제학의 관점에서 서술했고, 『산업인의 미래』(1942)에서 ‘1776년의 보수주의적 반혁명’, ‘루소에서 히틀러까지 전체주의 사상가들’을 포함시켰다. 『기술, 경영, 사회』(1958)에서 ‘기술혁명의 역사적 교훈’을 제시했으며, 『단절의 시대』(1968)에서는 역사와 사회의 ‘연속과 단절’ 현상을 설명했다. 『격변기의 경영』(1980)에서는 ‘주권의 종말’을, 『새로운 현실』(1989)에서는 ‘사회에 의한 구제의 종언’과 ‘러시아 제국의 붕괴’를 역사적인 필연성의 결과로 분석하고 예측했다.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1993)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식사회로’ 변하는 과정을 설명했다. 달리 말해, 역사철학자 딜타이(Wilhelm Dilthey, 1833~1911)가 역사를 문화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콜링우드(Robin G. Collingwood, 1889~1943)가 역사와 철학을 한데 묶으려고 시도한 것처럼, 드러커는 역사의 변화 또는 원동력을 ‘지식의 의미와 역할의 변화과정’으로 설명하는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요컨대 이 책은 피터 드러커의 역사철학을 ‘지식역사관’이라는 관점에서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은 동서양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역사 발전 또는 역사 변화의 원동력은 ‘지식의 의미와 기능의 변화’에 있었다는 피터 드러커의 역사 변동관에 입각하여 해설한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서술과 논리전개는 필자가 드러커의 저술들을 번역하고 연구하면서 터득한 드러커의 역사적·사회적·경제적·철학적 통찰을 ‘역사의 원동력은 지식’이라는 관점에서 종합한 것이지만, 필자 나름의 기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굳이 덧붙이자면, 딜타이는 많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남겨두었지만 그가 죽은 뒤 제자들이 편찬서와 해설서를 출간함으로써 비로소 그의 역사철학이 가치를 얻게 된 것처럼, 이 책은 드러커의 역사관을 최초로 정리하고 종합하는 데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