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서문
1장 하동과 진주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나다/문자와의 만남/마지막 수업의 충격/정미소와 양조장/나의 요람 진주/하영진의 지우를 입다/사랑과 반항과 퇴학/신화의 생성 과정/ 2장 현해탄을 건너다 전검시험/교토에서의 나날들/아름다운 일본, 잘 사는 일본/메이지대학 문예과/독서록/니체 제자의 교련 거부/스무 살 혹은 1941년 언저리/도스토예프스키가 던져 준 공포/철학과 사상의 맹아들/도쿄의 종달새 3장 소주와 상해 지원과 강제의 실상/울고 갈 길을 왜 왔던고/불노의 사상을 키우다/악령의 리얼리티/잘려진 손가락 한 마디/용서하지 못한 나/혼돈의 상해/처녀작, 희곡 유맹 4장 좌우의 소용돌이 귀국과 상경/다시 진주에서/여사록의 경우/우익에 섰지만/나는 회색인이 아니다/이병두와 송치무의 화해/진주농과대학 교수/살로메 연출/우장춘 박사의 후광을 보다 5장 조국 부재의 사상 625 발발/피난/두 번째 죽을 고비/시련과 환멸/1951년 5월의 미스테리/1951년 7월이라는 착각/ 6장 마산의9류 교수 해인대학의 복잡한 역사/국회의원 출마/패자의 관/마산에서 7장 부산의 아름다운 시절 국제신보 입사일의 혼선/첫 소설 내일 없는 그날/부산 시대 개막/시민 위안 잔치의 참극/칸나X타나토스/대설과 중설, 그리고 소설/두 편의 논설/옥중에서 만난 사마천/국립대학에서의 2년 7개월 8장 알렉산드리아 주변 상경의 이유 혹은 망명의 사상/신동문이광훈의 역할/운명의 여신, 사라 엔젤/ 주문 제작, 매화나무의 인과/마술사를 쓰던 무렵/초기 삼부작의 완성 이병주 연보 이병주의 작품 연보 참고문헌 각주 |
鄭範俊
정범준의 다른 상품
|
관부연락선은 그대로 전율이었다. 책 읽으며 소름이 돋아날 정도였다. 그렇게 이병주 선생은 내게로 왔다. 아니, 그렇게 나는 선생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무슨 연애를 하는 것처럼 인터넷 헌책방에서 선생의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퇴근 길엔 집에 도착해 있을 선생의 책을 상상하며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p. 6
프랑스에는 생텍쥐페리의 추락 지점을 찾아내기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의 헌신이라면 감히 흉내내기도 어렵겠지만 나 또한 이병주 선생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약간은 드러내고 싶었다. 이것이 내가 작가의 탄생을 쓰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다. ---p.6 작가의 탄생을 쓴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이병주 선생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의 글과 작품을 좀더 접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그의 에세이와 작품을 많이 인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p.8 그의 삶과 문학은 이 책(작가의 탄생)에서 끊임없이 교접할 것이다. 삶이 그대로 문학(소설)이 된 지점에서는 그 문학이 곧 그의 생애라는 것을 밝힐 것이며, 반대로 그의 소설 속에서 그의 생애를 추정해 보는 일도 있을 것이다. 다만 사실은 사실임을, 추정은 추정임을 명확히 해두었다. 사실은 사실대로 그의 삶을 조명하는 의미를 가질 것이고, 추정은 추정대로 그의 문학을 자연스럽게 소개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p.8 비유를 통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1919년 3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것과, 31절 60주년 기념식장에서 같은 구호를 외친 것은 분명 다른 일이다. 후자를 가지고 이것은 그의 독립의지를 드러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틀린 연보를 통해 작가의 내면을 추측하고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좀더 남아 있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묻어두는 것이 옳을 듯하다. ---p.9 역사와 신화의 차이는 그 기록의 명정()에 달린 것은 혹시 아닐까. 태양과 월광의 차이처럼 말이다. 태양은 미녀의 기미와 주름까지도 들춰내지만 교교한 월광은 그것을 가릴 뿐만 아니라 거기에 표현하기 힘든 신비와 황홀을 드리우기도 한다. ---p.60 승자의 기록은 태양의 조명을 받아 역사로 남고, 패자의 기록은 달빛에 바래져 신화가 된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젖으면 전설이 된다. 태양이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이 바래면 신화가 된다. ---p.60 여사록은 1976년 1월호 현대문학에 발표되었다. 관련 인물들이 거의 생존해 있었고 이름 한 자만 바꿔놓았다 하지만 누가 누군지 다 알 수가 있었다. 아무리 용기있는 소설가라고 해도 이런 소설에 있지도 않은 사실을 꾸며 넣을 수는 없다. 소설에 언급된 당사자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병주는 자신의 경력이나 활동을 섣불리 미화하거나 조작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p.165 이병주는 양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3년 동안이나 독학했다. --- pp.34-35 그가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것은 1941년이 아니라 1943년이다. ---pp.110-111 그가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합격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실제로 다닌 적은 없다. 입학식을 치를 사이도 없이 학병으로 끌려갔다. ---p.111 이병주는 오른손의 가운데 손가락이 한 토막 끊겨져 나간 손가락 병신(?)이다. 그 손가락이 언제 잘라져 나갔는지에 대해선 이론이 분분하여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그가 감옥에 있을 때라고 하는 설과, 일제시대 때 저항의 한 표식이라고 하는 설 등이 그중 유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누구도 본인에게 그 손가락에 대한 얘기를 확인한 바가 없으니 그 어느 것도 정설()이 아닐 수도 있다.(이병주 신화,소설문학 1981년 3월) ---p.130 하룻밤에 원고지 200장, 한 달 평균 1,000여장 가까이 문제작들을 쏟아내며 한 시절을 풍미했던 이병주는 그러나 사망 이후 까맣게 잊혀져버렸다. 수년 전 왜 이병주를 평가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한 진보적 문학평론가는 문학사적 가치가 없다고 잘라 말했고, 한 출판사 대표는 누군가 그의 전집을 내긴 내야 하는데라며 말을 흐렸다. 만인보의 고은 시인은 시 소설가 이병주에서 그를 이데올로기를/이데올로기 멜로드라마로 그리는 사람/ 이데올로기를/이데올로기 추억으로 노래하는 사람//그의 소설들은/ 언제나 과거/언제나 현실이되/현실인 양/비현실적인 회한의 반동이었다고 했다. 이병주는 우리사회 좌와 우, 진보와 보수 모두에서 금기가 돼 있었다. (2006년 4월 18일자) ---p.174 그는 1951년 5월 해인대학 교수가 된 것이 아니라, 출가를 위해 해인사에 들어갔다. --- p.221 이병주 자신도 착각하고 있었지만 그가 빨치산에 의해 납치될 뻔한 사건은 1951년 7월이 아니라 이듬해인 1952년 7월에 일어났다. 이 사실은 그가 빨치산으로 활동했다는 소문이 근거가 없음을 드러내는 유력한 정황 증거가 된다. ---pp.228-229 하지만 만의 하나 그가 빨치산 활동을 했다면 그것은 1951년 5월부터 1952년 4월 사이의 일일 것이다. 그 이전과 이후의 행적이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집안의 양조장 일을 봐주고 있었고 이후에는 해인대학 교수로 활동했다. 사견이지만 그의 빨치산 경력은 소문이나 신화에 불과한 것으로 확신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1952년 4월 하산해 곧바로 해인대학 교수가 된 셈이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빨치산 시비를 이병주는 죽는 날까지 한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에 몇 마디 더 덧붙여둔다. 그가 빨치산 활동을 했을 리 없는 근거는 너무나 많다. 1948년 여순사건 때도, 1950년 7월 진주가 인민군의 수중에 떨어졌을 때도 그는 좌익에 가담하지 않았다. 처가가 있는 고성으로 피난을 가기까지 했다. ---pp.232-233 이병주는 소설알렉산드리아를 통해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이후 초기 3부작을 완성해 출판사까지 차리고 소설집을 냈다. 신춘문예로 당선된 것도, 문예지의 추천을 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이제 누가 뭐라 해도 작가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비유가 가능할 수 있을까. 두어 번 섬광이 번쩍인 것 같은데 그 빛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얼마 후 지축을 울리는 듯한 천둥과 함께 패기만만한 중년의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가 이병주였다. 작가가 탄생한 것이다. ---p.337 |
|
이병주의 한
1943년 10월 20일 일제는 전문학교 또는 대학에 재학중인 조선인을 대상으로 특별지원병제를 실시한다. 자격이 되는 대상자는 총 6200여명이었고 이 가운데 4385명이 신체검사 등을 거쳐 학병으로 끌려갔다. 이것은 당시 20세 안팎의 조선 청년 가운데 고등교육을 받고 있던 이가 겨우 6200여명에 불과했다는 뜻이며, 또한 이 중의 70퍼센트(4385명)가 학병으로 끌려갔다는 얘기가 된다. 이병주는 이들 중 하나였고 그런 의미에서 당시 식민지 지식인의 한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병주는 학병에 끌려간 자신을 끝끝내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주장에 앞서 타협을 배워버린 스스로의 비굴함을 일제의 그 가혹한 체제를 감안하더라도 나는 아직껏 용서할 수가 없다(본문 139p.)라는 말까지 했다. 그런데 그가 우여곡절을 거쳐 소설가가 됐다. 학병 세대 가운덴 거의 유일한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이병주는 그냥 소설가가 아니었다. 70,80년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다고 할 수 있다. 7080세대라면 그의 소설 한 권쯤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 것이다. 하지만 그는 타계(1992년 3월) 이후엔 철저히 잊혀졌다. 왜 그랬을까. 어느 신문에 실린 한 칼럼을 옮겨본다. 하룻밤에 원고지 200장, 한 달 평균 1,000여장 가까이 문제작들을 쏟아내며 한 시절을 풍미했던 이병주는 그러나 사망 이후 까맣게 잊혀져버렸다. 수년 전 왜 이병주를 평가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한 진보적 문학평론가는 문학사적 가치가 없다고 잘라 말했고, 한 출판사 대표는 누군가 그의 전집을 내긴 내야 하는데라며 말을 흐렸다. 만인보의 고은 시인은 시 소설가 이병주에서 그를 이데올로기를/이데올로기 멜로드라마로 그리는 사람/ 이데올로기를/이데올로기 추억으로 노래하는 사람//그의 소설들은/ 언제나 과거/언제나 현실이되/현실인 양/비현실적인 회한의 반동이었다고 했다. 이병주는 우리사회 좌와 우, 진보와 보수 모두에서 금기가 돼 있었다. (2006년 4월 18일자) *본문 p.174에서도 인용했음 생전의 이병주 역시 나는 어느덧 우익으로부턴 용공분자로 몰리고, 좌익으로부턴 악질적인 반공분자로 몰렸다. 가장 너그러운 평가란 것이 회색분자란 낙인이었다(본문 p.168)라고 푸념한 적이 있다. 이병주에게는 또 다른 한이 있었다. 남로당 활동 시비가 그것이다. 1978년 어느 문학평론가는 자신의 평론집에서 해방 후에는 잠시 N당에 참여하여 행동한 일이 있다는 점 등은, 이 점 이병주에게는 N당의 정치투쟁에 행동 참여를 한 생체험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본문 p.152) N당은 누가 봐도 남로당이었으며 이병주 역시 그렇게 받아들였다. 소송도 불사하리라고 격노했던 이병주는 한 다방에서 그 문학평론가를 우연히 만나 뺨을 한 대 때리고 소송을 포기했다. 이병주는 그 심경을 담아 추풍사라는 단편을 쓰기도 했다. 이병주는 빨치산 시비에도 휘말렸다. 시인 김규태는 (이병주는) 빨치산이었다는 터무니없는 오해 탓으로 보수진영으로부터 사갈시 당했다고 썼다. 어느 시인 겸 소설가는 이런 일화를 들려준다. 1970년대 중반 문인들이 모인 어느 술자리. 한 젊은 소설가가 술기운을 빌려 이병주에게 대뜸 묻는다. 선생님, 빨치산 하셨지요? 적당히 술이 올라 기분이 좋았던 이병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린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이병주에게 쏠린다. 짧은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이병주가 벌떡 일어선다. 내가 빨치산 한 걸 네가 봤어? 증거 있으면 대보라구, 이 자식아! 이병주가 들고 있던 술잔이 어느새 젊은 작가의 얼굴을 향해 날아간다. 말 한 마디 잘못 꺼낸 죄로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한 젊은 작가가 묵묵히 있자 이병주는 분이 덜 풀린 듯 후배 작가의 멱살을 움켜잡는다. 주위 사람들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아 가까스로 더 큰 불상사로 번지지는 않는다. 이병주는 자신에게 평생 동안 따라다닌 좌익 혐의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다. (이 일화의 사실 여부는 아직 확인하진 못했지만 앞서 언급한 뺨 때린 사건이 와전된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러한 시비와 오해가 이병주에겐 한이 되었다. 이병주는 자전적 소설 관부연락선의 주인공인 유태림의 입을 빌어 한쪽에선 반동으로 몰리고, 다른 한쪽에선 회색분자로 몰리는 자신의 처지가 치사스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병주와 연애를 하다 이병주는 한이 많아 쓰고, 한이 많아 소설가가 됐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그런데 문학평론가도, 국문학자도 아닌 저자는 어떻게 이병주에 대한 책을 쓰게 된 것일까. 2005년 관훈클럽에서 일하던 저자는 원로 언론인들의 한담을 들을 때가 많았다. 이따금 이병주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당시는 저자가 인터넷 헌책방에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사모으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문득 우리 아?지도 관부연락선 세대야하는 어느 언론인의 말이 생각나서 역사서 네댓 권을 신청했던 주문지에 이병주의 대표작 관부연락선과 그의 단편 몇 편이 수록된 한국문학전집류 한 권을 끼어 넣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관부연락선은 그대로 전율이었다. 책 읽으며 소름이 돋아날 정도였다. 그렇게 이병주 선생은 내게로 왔다. 아니, 그렇게 나는 선생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무슨 연애를 하는 것처럼 인터넷 헌책방에서 선생의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퇴근 길엔 집에 도착해 있을 선생의 책을 상상하며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서문 중에서, p.6) 이병주의 에세이와 소설은 문자의 바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방대하다. 단행본만 백여권이 넘을 것이다. 일반인은 접하기 어려운 잡지와 사보에 수록된 그의 글도 무수히 많다. 게다가 그를 다룬, 또는 그의 작품을 다룬 기자나 문인, 독자들의 글도 셀 수 없을 정도다. 저자는 이러한 글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이면 다 찾아 읽었다. 어느 문학평론가, 어느 열혈 독자보다 많이 읽었다고 자부한다. 그러다 문득 이병주에 관한 책을 쓰고 싶어졌다. 저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프랑스에는 생텍쥐페리의 추락 지점을 찾아내기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의 헌신이라면 감히 흉내내기도 어렵겠지만 나 또한 이병주 선생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약간은 드러내고 싶었다. 이것이 내가 작가의 탄생을 쓰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다.(서문 중에서, p6.) 작가의 탄생을 쓴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이병주 선생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의 글과 작품을 좀더 접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그의 에세이와 작품을 많이 인용하기 위해 노력했다.(서문 중에서, p.8) 태양과 월광, 그리고 역사와 신화 좌와 우, 그리고 문단에서는 냉대를 받았지만 독자들은 이병주에 열광했다. 지식인, 칼럼리스트 가운데서도 팬들이 많았다. 이병주가 남긴 수많은 수사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말인 것 같다. 그의 장편 산하 말미에 나오는 문구다. 그런데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뜻일까. 이 문구는 꽤 많은 저술가나 기자, 또는 칼럼리스트의 글에 인용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뜻이라도 제대로 생각해 보고 인용한 것인지 의아스러운 경우도 있었다. 세 가지 예를 들어본다. 출처는 밝히지 않지만 모두 책이나 매체 등에 인용된 경우다. 승자의 기록은 태양의 조명을 받아 역사로 남고, 패자의 기록은 달빛에 바래져 신화가 된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젖으면 전설이 된다. 태양이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이 바래면 신화가 된다.(이상 본문 p.60) 이것이 과연 올바른 인용일까. 다시 한 번 이병주의 수사를 음미해 본다.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이병주는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했던 것일까. 어느 문학평론가는 태양에 바래진다는 의미를 기록성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기록하면 역사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신화가 된다는 뜻으로 보인다. 하지만 위의 세 인용문의 경우처럼 그 뜻을 다소 자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저자는 그 뜻에 대해 고민하고 이렇게 해석했다. 역사와 신화의 차이는 그 기록의 명정에 달린 것은 혹시 아닐까. 태양과 월광의 차이처럼 말이다. 태양은 미녀의 기미와 주름까지도 들춰내지만 교교한 월광은 그것을 가릴 뿐만 아니라 거기에 표현하기 힘든 신비와 황홀을 드리우기도 한다.(본문 p60.) 저자는 기록의 명정이라는 표현을 썼다. 태양처럼 명확하고 정확한 조명을 받으면 역사가 되고, 월광처럼 흐릿하고 신비로운 조명을 받으면 신화가 된다고 해석한 것이다. 이병주는 이런 말도 한 적이 있다. 달빛에 물들면 로맨스가 되고 햇빛에 바래면 스캔들이 된다. 이병주 스스로의 해석은 숨겨져 있었을 때는 로맨스였던 것이 백일하에 폭로되면 스캔들로 된다(본문 p.108)는 것이었다. 이 말 역시 조명의 조도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는 자신의 해석만이 옳다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글을 인용해 자신의 글을 풍부하게 만들고자 할 때는 일단 그 원문을 정확하게 인용하고 그리고 그 뜻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해보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병주의 신화 몇 가지 작가의 탄생에서 저자는 이병주와 관련된 이런저런 신화들을 모두 역사로 만드는 작업을 한다. 달리 말해 사실 관계, 그리고 사실 관계를 명확하고 정확하게 조명해 이병주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병주가 빨치산으로 활동했다는 신화에 저자는 이렇게 반박한다. 하지만 만의 하나 그가 빨치산 활동을 했다면 그것은 1951년 5월부터 1952년 4월 사이의 일일 것이다. 그 이전과 이후의 행적이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집안의 양조장 일을 봐주고 있었고 이후에는 해인대학 교수로 활동했다. 사견이지만 그의 빨치산 경력은 소문이나 신화에 불과한 것으로 확신한다. 이것쳀 사실이라면 그는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1952년 4월 하산해 곧바로 해인대학 교수가 된 셈이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빨치산 시비를 이병주는 죽는 날까지 한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에 몇 마디 더 덧붙여둔다. 그가 빨치산 활동을 했을 리 없는 근거는 너무나 많다. 1948년 여순사건 때도, 1950년 7월 진주가 인민군의 수중에 떨어졌을 때도 그는 좌익에 가담하지 않았다. 처가가 있는 고성으로 피난을 가기까지 했다. (본문 p.232-p.233) 이병주에게는 또한 1950년 인민군 문예공작부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를 연출했다는 신화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이병주가 1949년 10월 진주농과대학 개교 1주년 기념식에서 살로메를 연출한 것이 와전된 것이다. 이것은 총부리를 어느 쪽에 겨눴느냐는 것 만큼 민감한 사안이다. 이 문제에 대해 저자는 이병주의 (문예공작부) 이동연극단 활동은 이것(별다른 연습도 없이 해산)이 전부였다. 그가 이때 살로메를 연출했다는 문헌도 있지만 이 역시 신화에 불과하다. 태양에 바래지지 않고 월광에 물들었던 것이라고 썼다.(본문 p.212) 실제로 이병주 신화라는 제목의 글도 있었다. 이병주는 오른손의 가운데 손가락이 한 토막 끊겨져 나간 손가락 병신(?)이다. 그 손가락이 언제 잘라져 나갔는지에 대해선 이론이 분분하여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그가 감옥에 있을 때라고 하는 설과, 일제시대 때 저항의 한 표식이라고 하는 설 등이 그중 유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누구도 본인에게 그 손가락에 대한 얘기를 확인한 바가 없으니 그 어느 것도 정설이 아닐 수도 있다.(이병주 신화,소설문학 1981년 3월)(본문 p.130에도 인용) 이병주의 잘려진 손가락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다. 동상에 걸려 잘랐다는 설, 학병 시절 총을 쏘기 싫어 스스로 잘랐다는 설, 파상풍이 염려돼 절단했다는 설이 그것이다. 작가는 이에 대해 일일이 검증을 시도하면서 세 번째 설에 신빙성이 있음을 확언했다.(본문 p.133) 이병주는 어떻게 작가로 탄생했는가 이병주는 어떻게 작가가 됐을까. 처녀작은 과연 무엇일까. 처녀작의 사전적 의미는 처음으로 지었거나 발표한 작품이라 한다. 흔히 이병주는 1965년 6월호 세대에 발표한 소설알렉산드리아로 데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것은 문단에서 말하는 등단은 아니다. 세대가 문예지가 아니라 종합지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세대는 신동아, 월간조선, 월간중앙 등과 비슷한 성격의 잡지다. 문학평론가나 국문학자들은 이병주의 처녀작을 내일 없는 그날이라고 주장한다. 내일 없는 그날은 1957년 8월 1일부터 이듬해 2월 25일까지 부산일보에 연재된 이병주의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1959년 3월 국제신보사에 의해 단행본으로 출간됐고, 같은 해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병주의 처녀작은 내일 없는 그날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저자가 작가의 탄생을 통해 새롭게 밝히는 사실은 그의 처녀작이 뜻밖에도 희곡 유맹나라를 잃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병주는 이 작품에 대해 해방 직후 상해에서 쓴 작품인데 그대로 버리기엔 아깝다는 친구의 권에 의하여 발표한다고 썼다.(본문 p.148) 이 희곡은 문학 1959년 11월호와 12월호에 상중으로 실렸는데 애석하게도 하편은 찾아낼 수 없었다. 물론 처녀 소설 또는 처녀작 소설은 내일 없는 그날이고, 처녀 희곡 또는 처녀작 희곡은 유맹이라고 정리할 수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그런 용어 자체가 이미 부자연스럽게 느껴짐에서 알 수 있듯이 처녀작이라 하면 그것이 소설이든 희곡이든 제일 처음에 쓴 작품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희곡 유맹이 이병주의 처녀작이라고 밝힌 것은 작가의 탄생의 수확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유맹의 줄거리를 책의 각주(p.369-371)에 실었다. 어찌됐든 이병주는 작가로서의 데뷔가 어정쩡하다. 출세작인 소설알렉산드리아의 발표는 1965년, 처녀작 유맹을 쓴 것은 해방 직후, 이를 발표한 것은 1959년, 첫 장편소설 연재는 1957년, 이를 단행본으로 낸 것은 1959년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런 말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며, 이병주는 어느 순간, 그냥 운명처럼 작가가 된 것 같다(본문 p.261)고 했고 다음과 같이 책을 마무리했다. 이병주는 소설알렉산드리아를 통해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이후 초기 3부작을 완성해 출판사까지 차리고 소설집을 냈다. 신춘문예로 당선된 것도, 문예지의 추천을 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이제 누가 뭐라 해도 작가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비유가 가능할 수 있을까. 두어 번 섬광이 번쩍인 것 같은데 그 빛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얼마 후 지축을 울리는 듯한 천둥과 함께 패기만만한 중년의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가 이병주였다. 작가가 탄생한 것이다.(본문 p.337) 작가의 뫅생에 대하여 문학연구의 기본은 작가론과 작품론이 아닐까. 또한 작가론의 기본 작업은 작가에 대한 정확한 연보 작성이고, 작품론의 그것은 해당 작품이 언제, 어떤 문헌을 통해 발표됐다거나 또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연재되었다는 작품 연보의 작성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병주에 관한 기존의 연구평론서 가운데 이러한 두 가지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문헌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것은 전문연구자나 평론가들의 방임 또는 태만 때문이 아니라 아직까지 그 비평적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탓인 듯하다. 비평적 대상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들도 혹시 있을지 모른다(서문p.9)고 말하고 있다. 이 책에 대한 저자의 자부심은 성실한 자료 조사와 분석에 있다. 가령 작가의 탄생에 수록된, 이병주의 신문 연재소설의 연재 기간은 저자가 신문사 사사나 마이크로필름 등을 뒤져 일일이 찾아낸 것이다. 발품은 좀 드는 작업이지만 확인을 하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을 그 동안 시도조차 하지 않은 셈이다. 이미 세 권의 책을 쓴 적이 있는 저자는 집필을 위해 한국, 일본의 자료를 읽으면서 최소한 일본인들보다는 더 정직하고 성실하게 책을 써야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다. 그동안 우리가 그렇게 못해왔기 때문이다. 저자는 작가의 탄생을 쓰면서 다시 한 번 그 결심을 다졌다. 어떤 일에 대해 미진한 설명이나 해설, 평가를 하는 것보다는 먼저 그 어떤 일을 올바르게 발굴하고 복원하는 게 더 의미 있고 소중한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저자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서문에 이렇게 썼다. 비유를 통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1919년 3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것과, 31절 60주년 기념식장에서 같은 구호를 외친 것은 분명 다른 일이다. 후자를 가지고 이것은 그의 독립의지를 드러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틀린 연보를 통해 작가의 내면을 추측하고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좀더 남아 있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묻어두는 것이 옳을 듯하다.(서문 중에서, p.9) 저자는 이병주의 삶에 대한 올바른 복원과 조명 없이, 그의 문학에 대한 해설이나 평가가 선행되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런 이유로 저자는 이병주의 생애 복원에 초점을 맞춘다. 하동군 양보초등학교, 진주산업대학교를 찾아가 이병주의 학적부를 찾았고, 이병주의 장남 이권기 경성대 교수로부터 메이지대학 학적부 사본을 입수했다. 이권기 교수와 함께 하동군 북천면 면사무소에서 이병주의 제적등본을 떼기도 했다. 경상대, 동아대, 부산대, 진주산업대, 국제신보, 부산일보 등의 사사와 직원록도 뒤졌다. 이런 식으로 자료와 기록을 찾은 결과, 저자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냈다. 이병주는 양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3년 동안이나 독학했다.(본문 p.34-35) 그가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것은 1941년이 아니라 1943년이다.(본문 p.110-111) 그가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합격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실제로 다닌 적은 없다. 입학식을 치를 사이도 없이 학병으로 끌려갔다.(본문 p.111) 그는 1951년 5월 해인대학 교수가 된 것이 아니라, 출가를 위해 해인사에 들어갔다.(본문 p.221) 이병주 자신도 착각하고 있었지만 그가 빨치산에 의해 납치될 뻔한 사건은 1951년 7월이 아니라 이듬해인 1952년 7월에 일어났다. 이 사실은 그가 빨치산으로 활동했다는 소문이 근거가 없음을 드러내는 유력한 정황 증거가 된다.(본문 p.228-229) 그가 1955년 10월 국제신보에 입사했다는 것은 낭설이다. 정확한 입사일은 1958년 11월 5일이다.(본문 p.255) 따라서 그가 국제신보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소설을 쓰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경쟁지인 부산일보에 내일 없는 그날을 연재했다는 식의 해석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저자는 이병주의 작품 속에 등장한 인물들의 실존 모델을 일일이 찾아내 진주농림학교 교사 시절 이병주의 행적을 복원하기도 했다. 단편 여사록에서 찾은 실존 모델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여사록(가명) 실존 모델(실명) 실제 경력 변형섭변경섭 : 진주농림중 교장 정영석정범석 : 건국대 대학원장, 국민대 총장 김용달김용관 : 고려대 산림자원학과 교수 이현규이현수 : 가축위생연구소 세균과장 이청진이근진 : 중앙고 교사, *전 KTX 사장 이철의 부친 안희상안치상 : 부광산업사 대표, 부흥산업사 대표 (본문 p.163-164) 저자는 등장인물의 실명과 실제 경력을 밝힌 덴 이유가 있다며 여사록은 거의 사실, 그러니까 이병주의 경험 그 자체라고 믿어도 좋다고 말한다.(본문 p.165)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여사록은 1976년 1월호 현대문학에 발표되었다. 관련 인물들이 거의 생존해 있었고 이름 한 자만 바꿔놓았다 하지만 누가 누군지 다 알 수가 있었다. 아무리 용기있는 튼설가라고 해도 이런 소설에 있지도 않은 사실을 꾸며 넣을 수는 없다. 소설에 언급된 당사자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병주는 자신의 경력이나 활동을 섣불리 미화하거나 조작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본문 p.165) 요컨대 저자는 이병주의 삶이 그대로 문학(소설)이 된 지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저자는 진주농림중학교 교사 시절의 이병주가 좌우익의 소용돌이 사이에서 지식인으로서의 양심과 균형을 지키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조명한다. 저자가 말한 다음의 말은 작가의 탄생의 서술 방식을 요약하고 있다. 그의 삶과 문학은 이 책(작가의 탄생)에서 끊임없이 교접할 것이다. 삶이 그대로 문학(소설)이 된 지점에서는 그 문학이 곧 그의 생애라는 것을 밝힐 것이며, 반대로 그의 소설 속에서 그의 생애를 추정해 보는 일도 있을 것이다. 다만 사실은 사실임을, 추정은 추정임을 명확히 해두었다. 사실은 사실대로 그의 삶을 조명하는 의미를 가질 것이고, 추정은 추정대로 그의 문학을 자연스럽게 소개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서문 중에서, p.8) 애초에 저자는 이병주 평전을 세 권으로 구상했다. 1권은 출생부터 작가가 되기까지를 다룬 작가의 탄생, 2권은 방대한 작품을 쏟아내던 1970년대를 다룬 문자의 바다, 그리고 1980년대부터 타계할 때까지의 산하가 된 이름이 그것이다. 그리고 123권의 전체 제목은 거인의 산하로 정해두었다. 그런데 저자는 작가의 탄생을 쓰는 도중에 생각을 바꾸었다. 그의 생애를 복원하는 것은 1960년대까지로 충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이후의 생애는 널리 알려져 있고, 행적이 불분명하거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도 없었다. 그러니 서술 방식도 생애 복원보다는 작품 해설에 치중해야 함이 틀림없었다. 그런 이유로 문자의 바다나 산하가 된 이름은 문학평론가나 국문학자의 몫으로 남겨둬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저자는 거인의 산하에 대한 꿈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고 나림 이병주, 거인의 산하를 찾아서라는 부제를 붙였다. 2006년 한길사에서 이병주 전집이 출간됐다. 이병주 문학을 재평가하자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더 반가운 소식은 그 움직임에 좌와 우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그의 한이 이제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일까. 앞서 인용한 칼럼의 일부분을 또 옮겨본다. 그런 이병주를 재평가 내지 재발견하려는 움직임이 이제야 시작됐다. 최근 결성된 이병주 기념사업회는 지난 7일 그의 고향인 경남 하동군 섬진강변에서 이병주문학제를 열었다. 기념사업회 50여명의 발기인 면면이 흥미롭다. 문학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와 정구영 전 검찰총장이 공동회장인데,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과 소설가 이문열씨,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와 허문도 5공 당시 통일원장관 등 어떻게 한자리 모일 수 있을까 싶은 사람들이 회원이다. 임헌영씨는 그 사정을 이병주 문학은 좌익이든 우익이든 인간의 얼굴을 가진 민족운동을 한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산봉우리라고 말했다. 평소 역사의 성긴 그물에서 빠져버린 인간군상의 삶을 소설로 쓰겠다고 했던 이병주가 사후 14년만에 문학의 그물, 그 품이 이 땅의 좌우, 보혁보다 훨씬 넓고 깊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2006년 4월 18일자) 이러한 재평가 움직임은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2008년 10월호 신동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병주 애독자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진다. 2008년 4월 24일 경남 하동군에 이병주 문학관이 문을 연 데다 이병주기념사업회가 이병주 문학을 재조명하는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겠다는 것이다. 이병주 전집도 꾸준히 팔리고 있고, 특히 2030대 독자층에서도 이병주 소설의 진가가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작가의 탄생이 이병주 애독자들에게 또 다른 반가운 소식이 되기를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