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검색을 사용해 보세요
검색창 이전화면 이전화면
최근 검색어
인기 검색어

소득공제
여보, 나좀 도와줘
개정증보판
노무현
새터 2017.02.20.
가격
17,000
10 15,300
YES포인트?
850원 (5%)
5만원 이상 구매 시 2천원 추가 적립
결제혜택
카드/간편결제 혜택을 확인하세요

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해외배송 가능?
  •  문화비소득공제 가능

이 분야의 이벤트

책소개

목차

여의도 부시맨
여의도 부시맨/
여우와 포수/
그렇게 막은 내리고/
어느 잔인한 봄날/
모두가 떠나고 없는 빈들에서/
덕분에 잡지 많이 팔렸어요/
또 하나의 시작/

잃어버린 영웅
영원한 보스/
침묵으로 말하는 정치 9단/
빌린 머리와 돈 봉투/
YS의 트로이 목마/
참으로 아까운, 그래서 더욱 아쉬운/
큰 수레와 사마귀/
돌아올 수 없는 다리/

여보, 나 좀 도와줘
여보, 나 좀 도와줘/
하늘의 절반/
참으로 어려운 자식 농사/
내 아버지의 아들, 내 아들의 아버지/
르망과 콩코드, 그리고 자전거/
내 후원회 전화번호는요/

내 마음의 풍차
내 마음의 풍차/
이놈 역적 아니야/
노가다의 짝사랑/
저, 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사법고시 수험기/
돈 잘 버는 변호사와 부림 사건/
삶의 바로 그 현장으로/
사람 사는 세상/

책을 내면서
지은이 약력

저자 소개 1

Roh Moo-hyun,盧武鉉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 1946년 9월 1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때,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집권자인 이승만의 생일을 기념하는 교내글짓기대회가 열리자 '백지동맹'을 선동하다가 정학(停學)을 당할 정도로 성격은 당차고 맹랑했다. 가난으로 인해 어렵게 진영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상고에 진학하였다. 졸업 이후 농협 입사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하였으나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발등을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하여 그만두었다. 그 뒤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사법고시 공부에 매달리게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 1946년 9월 1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때,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집권자인 이승만의 생일을 기념하는 교내글짓기대회가 열리자 '백지동맹'을 선동하다가 정학(停學)을 당할 정도로 성격은 당차고 맹랑했다. 가난으로 인해 어렵게 진영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상고에 진학하였다. 졸업 이후 농협 입사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하였으나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발등을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하여 그만두었다. 그 뒤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사법고시 공부에 매달리게 된다.

군 제대 후 1971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사법고시에 매진하였다. '빨치산 부역 혐의로 옥사한 장인'과 '불투명한 고시생' 문제로 얽혀 양가가 티격태격한 결혼은 "판사안하면 어떠냐"라는 노무현의 엄포로 풀렸다. 1973년 결혼하였으며, 네 번째 도전만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다. 1978년 5월,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고 주로 조세 및 회계 사건 등을 통해 1백억원대 소송도 연달아 수임하는 등 명성을 쌓았다. 그러나 1981년 부림사건(대학생 독서서클 검거)의 변호를 맡으면서, 교도소에서 57일간 고문을 당한 한 학생의 시퍼런 몸과 겁에 질린 눈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이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변론에도 참여하며 투사로 탈바꿈했다.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시민운동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고,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 민주항쟁에 앞장섰다.

항쟁 후 재야 활동을 하던 그는 당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부탁을 받고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정치에 입문하였고, 1988년 부산 동구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국회에 입성한 노무현은 노동위원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 이해찬, 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원회의 3총사’로 불렸으며, 그해 11월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와 최초로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5월 광주 자위권 발동' 연설 때 명패를 던지는 등의 행동으로 국민의 관심을 받았다. 이른바 '5공 청문회 스타'가 된 것이다.

1990년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민주정의당 총재인 대통령 노태우,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이 합당하여 민자당을 창당하기로 하자 노무현은 이를 부도덕한 야합이라는 이유로 민자당에 합류하지 않았고 자신의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하였다. 이후 부산에서 3차례 총선과 시장선거에 나섰으나 그때마다 고배를 마셨다. 그리고 2000년 4월, 총선에서 상대적으로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종로구 공천을 거절하고,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결국 낙선하였다. 하지만 이때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지지모임 '노사모'도 결성되었다.

국회의원 낙선 후 그는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까지 김대중 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그리고 김근태,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등이 후보로 출마한 국민경선제 끝에 새천년 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당내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었던 이인제와 호남 지역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는 한화갑을 모두 밀어낸 대이변의 승리였다. 하지만 지방선거와 재보선을 거치며 노무현의 지지율은 바닥까지 곤두박질 친다. 이에 '후보교체론'까지 나오는 등 입지가 위태로워지지만, 정몽준 후보와의 극적인 단일화로 부활했다. 그리고 결국 2002년 12월 19일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드라마틱한 당선 이후, 그는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했다. 집권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이라크 파병' 결정은 그를 지지했던 진보·개혁세력의 호된 질책을 받았다. 대통령 개인적으로도 이라크 파병 결정이 가장 힘든 결정 중 하나였음을 밝힌바 있으며, 자신의 소신 보다는 '국익'을 생각해야 하는 대통령이라는 위치에서 내린 결정임에 대해 이해를 구했다. 그리고 지지율 하락 속에서 총선을 앞둔 2004년 3월, 헌정사상 국회에서 탄핵당하는 첫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총선은 열린우리당의 과반 획득이라는 결과를 낳았고, 사실상 국민들에 의해 '재신임'을 받음으로써 이후 참여정부의 개혁정책들을 점화하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정치 실험'과 '개혁 정책'들은 '남-남 갈등', '진보-보수' 갈등 등으로 불리는 사회적인 논란 속에서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져, '구시대의 막내'를 자임함으로써 다음 대통령에게 새 시대를 물려주고자 한 그의 신념과 정책은 아쉽게도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임기 말에는 '참여정부 실패론'이 제기되기도 하였고, 진보 세력들로부터는 신자유주의로 서민들의 삶을 더욱 고통에 빠뜨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정부 기간 동안 많은 노력이 있었고, 또한 성과도 있었다. 그는 취임과 동시에 굳은 의지를 가지고 개혁을 해 나가고자 하였다. '평검사와의 대화' 등을 통해 검찰조직 등 권력기관, 사정기관들을 개혁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였으며, '최고 권력자'인 스스로가 권력기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줄여나갔다. 이는 국가 기관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행정수도 이전'으로 상징되듯이 수도권과 지방 간의 격차를 줄이고, 균형적인 국토 발전에 국가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하였다. 이전과는 다른 큰 변화들이 그의 재임기간 동안 일어났다. 또한 경제 양극화가 심해지는 상황 속에서 복지 지출을 크게 늘려 서민의 삶에 보탬이 되고자 하였으며, 2007년 10월에는 평양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10·4 남북정상회담을 업적으로 남겨, 동북아 긴장 완화-평화 정착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퇴임 후에는 고향인 봉하마을로 내려가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자 하였으나, 그 꿈은 정치인생 후원자였던 소위 '박연차게이트'와 함께 허물어졌다.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고 비판과 의심의 여론이 일었던 검찰의 수사를 통해 오랜 지인들과 가족들이 비리의 혐의를 받았으며, 그 자신도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은 세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검찰의 수사가 진행 중이던 2009년 5월 23일 새벽, 유서를 남기고 사저 뒤 봉화산을 경호원 1명과 함께 등산하던 중 아래로 투신해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갑작스런 서거 후 시민들의 추모물결은 거대하게 일었다. 봉하마을을 찾는 조문객들은 몇날 며칠 끊어지지 않았으며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분향소가 마련되어 추모가 이루어졌다. 또한 '인간 노무현'과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적극적인 재평가 작업이 제기되면서 '노무현'과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새롭게 부각되었고, 노무현의 신념과 정신을 기리고자 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리고 참여정부가 시도한 정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들이 수면 위로 올라 왔으며, 참여정부가 '민주화'라는 한국 현대사의 큰 흐름에 있어서 어떤 역사적 지위를 가지는지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를 내리기 위한 논의도 시작되어, 그는 사후에 더욱 의미있는 조명을 받고 있다.

노무현의 다른 상품

관련 분류

수상내역 및 미디어 추천 분류
카테고리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2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272쪽 | 436g | 153*224*20mm
ISBN13
9788987175959

책 속으로

“여보, 나 좀 도와줘. 나는 꿈이 있어. 나는 꼭 그 꿈을 실현하고 싶어. 정치를 하려면 미쳐야 된대. 여보 양숙 씨. 우리 같이 한 번 미쳐 보자. 응?”

‘부림 사건’은 내가 재야 운동에 뛰어들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리고 내 삶에서의 가장 큰 전환점이기도 했다.
그 일 이전에 부산에서는 1979년 부마항쟁이 있었다. 김광일, 이흥록 변호사가 영장도 없이 구금되고 수많은 학생들이 붙잡혀 고문당하고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런데 당시 나는 바로 옆에 있던 변호사가 그런 일을 당해도 그저 소문으로만 들어 넘겼을 뿐 별 관심조차도 가지지 못했다. 모두들 끼어들 여지가 없는 줄 알았고, 나도 그런 줄로만 생각했다.
전두환 정권은 집권 첫 해인 1980년에 이미 대부분의 저항 세력을 제거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학생 운동권을 최종적으로 정리했는데 그것이 바로 ‘부림 사건’이었다. 그것은 비슷한 시기 서울에서 일어난 무림, 학림 사건과 마찬가지로 저항의 기미가 있는 자들에 대한 일종의 예비 검속이었다.
‘부림 사건’에는 사실 ‘사건’이 없다. 무슨 저항의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억지로 엮어 낸 조작된 사건이었다. 1979년에 이흥록 변호사가 양서 조합을 만들었었는데 그 회원들이 대부분 잡혀 들어갔던 것이 전부이다.
내가 그 사건의 변론을 맡게 된 것은 이흥록 변호사의 응원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검사가 김광일 변호사를 그 사건에 함께 엮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김광일 변호사가 그 사건 변론을 할 수 없어 손이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난 사건의 내용이나 성격을 파악하기는커녕 시국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도 가지고 있지를 못했다. 그럼에도 선뜻 변론에 나선 것은 무엇이든 두려워하지 않고 피하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사건의 내용을 파악해 보니 이건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책들, 예를 들어 ‘전환시대의 논리’,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우상과 이성’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게 죄가 되었다.
돌잔치에 모인 몇 사람이 정부를 비판한 몇 마디는 정권 전복 기도로 둔갑했다. 탁구장에서 탁구를 치며 한 얘기, 여름철 계곡에서 놀며 한 얘기, 두 사람이 다방에서 한 얘기까지 모두 불법 집회요 계엄 포고령 위반이 되어 있었다.

1988년 4월의 13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부산 동구에서 허삼수 씨 상대로 출마한 나를 지원하기 위해 내려온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총재는 유권자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허삼수 후보는 반란을 일으킨 군인입니다. 반란의 총잡이입니다. 총잡이는 국회로 보낼 것이 아니라 감옥으로 보내야 합니다.”
그로부터 꼭 4년이 지난 1992년의 14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이번에는 허삼수 씨를 지원하기 위해 내려온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총재는 유권자들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허삼수 씨는 충직한 군인입니다. 허삼수 씨를 뽑아 주시면 제가 중히 쓰겠습니다. 저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도 허삼수 씨를 국회의원으로 뽑아 주십시오.”
뽕밭이 변해서 바다가 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를 두고 격세지감이라고 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그 4년이란 세월이 너무도 짧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곳이 정치판인 줄 알았다면 내 일찍이 발을 들여놓지 않았을 텐데…….
변한 건 YS만이 아니었다.
4년 전에는 YS를 ‘대권병자’로 몰아붙였던 허삼수 씨가 14대 선거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 김영삼 총재님, 그 어른을 모시고 부산의 발전을 위해 이 몸을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극에서 극을 오갔던 그 두 사람의 변화는 결국 나에게 ‘낙선’이라는 쓰디쓴 선물을 안겨 주었다.

지금 역사의 시계는 거꾸로 돌고 있다!

YS가 3당 합당으로 권력을 잡기 전만 해도 이 땅에서는 기회주의자들이 차지할 수 있는 장물의 수준은 한정되어 있었다. 고작해야 권력에 빌붙어 먹고사는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YS의 대권 장악과 함께 기회주의자들의 입지에는 커다란 변화가 생겨났다. 기회주의자들의 성공이 최고 권력의 차원으로까지 올라갔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YS의 대권 장악은 기회주의자들에게는 하나의 신선한 모델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스러기나 먹는 기회주의가 아니라 통째로 먹는 기회주의, 즉 기회주의의 극치가 실현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이 옳은 것이라고 가르쳐야 할 것인가, 정의니 가치니 하는 말들은 이제 국민의 냉소거리에 지나지 않고, 소신과 지조를 얘기하던 사람들에게는 무력한 허탈감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제대로 되어 가는 역사라면, 어떻게 JP가 집권당의 대표로 계속 텔레비전에 나올 수가 있고, 12·12쿠데타의 주범들이 계속 국회의사당에 버티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차세대 전투기 사건, 상무대 비리 사건, YS의 아들 현철 씨가 관련된 한약업자 로비 사건 등 이 모든 권력형 비리가 밝혀지지 않고 있겠는가?
아무튼 지금 역사의 시계는 거꾸로 돌고 있다.

--- 본문 중에서

리뷰/한줄평3

리뷰

9.0 리뷰 총점

한줄평

10.0 한줄평 총점

클린봇이 부적절한 글을 감지 중입니다.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