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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약어 1부: 19세기의 유럽통합 사상 1. 프랑스의 죽음과 변용: 빅토르 위고 2. 유럽통합을 주창한 민족주의자: 주세페 마치니 3. 유럽연방을 꿈꾼 사회주의자: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4. 유럽합중국을 부르짖은 아나키스트: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 2부: 유럽공동체(EC)의 성립과 발전: 양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유럽공동체 가입까지 1. 범유럽운동의 창시자: 리하르트 쿠덴호베칼레르기 2. 통합과 배타의 이중주 연주가: 폴 발레리 3. 유럽의 바다에서 사투를 벌인 노인: 알티에로 스피넬리 4. 초국가 유럽의 산파: 장 모네 5. 유럽과 ‘함께’ 그러나 유럽에 ‘속하지 않은’ 영국: 윈스턴 처칠 6. 이탈리아의 타고난 유럽주의자: 알치데 데 가스페리 7. 전형적인 유럽인: 콘라트 아데나워 8. 유럽통합을 수용한 민족주의자: 샤를 드골 9. 드골에 맞섰던 연방주의 투사: 발터 할슈타인 3부: 유럽연합(EU)의 출범과 발전: 유럽 단일 시장에서 오늘날까지 1. 세계 평화를 위한 정치가로 다시 태어나다: 빌리 브란트 2. 유럽의 부활을 이끈 리더십: 프랑수아 미테랑 3. “브뤼셀의 황제”: 자크 들로르 4. 유럽의 명예시민: 헬무트 콜 5. “여성 드골”: 마거릿 대처 6. 유럽의 또 다른 유럽인: 괸츠 아르파드 7. 유럽연합을 단일한 운명 공동체로 인식한 유럽인: 바츨라프 하벨 연표로 보는 유럽통합사 지도와 표로 보는 유럽통합사 유럽연합의 이모저모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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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통합은 근대의 산물
19세기 이전의 유럽통합 사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민족주의가 근대의 산물이듯, 민족주의를 자신의 존립 근거로 삼는 근대 국민국가 체제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유럽통합 역시 근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9세기 전반기 복고 체제의 신성동맹과 같은 전근대적 국제 관계뿐 아니라 그 이전 시기의 왕조 국가에 기초한 유럽통합 사상은 전근대적 형태이기 때문에 오늘날 유럽통합과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 판단하여 이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제외했다. 무력으로 통합을 시도한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본서에서 제외되었는데, 이들의 유럽은 회원국 간 평등성에 기초한 오늘날의 통합 유럽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 p. 13 하나로 수렴되는 마치니의 민족주의와 유럽통합 사상 마치니는 세간에 민족주의자로 널리 통하고 있지만, 그가 유럽통합론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마치니의 사상에서 민족주의와 유럽통합 사상이 수렴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흥미롭다. 그러한 수렴은 필경 19세기 ‘자유주의 시대’라는 역동적인 사유 공간에서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기실, 이와 같은 사유 공간에서 마치니는 개인의 자유와 민족의 독립을 통합적으로 사고하려 했고, 나아가 자유롭고 독립된 민족들의 형성이 민족 간 갈등이 아니라 민족 간 평화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라고 확신함으로써 유럽통합의 사상을 성숙시켜 나갔다. --- p. 42 논리적인 그러나 달성하기 어려운 프루동의 연방주의 구상 프루동은 1848년 혁명 실패 이후 자신이 새로운 사회조직 원리로 제시했던 상호주의 이론을 연방주의와 연결시킨다. 정치조직은 가변적이다. 진정한 변혁은 사회적 토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정부보다는 산업 조직이, 헌법보다는 경제적 관계가, 겉잡아 말해서 정치보다는 경제가 먼저 연방주의의 토대 위에 설 때 국내에서든 국제적으로든 연방제 정치 구조가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프루동의 연방주의는 단순히 국제 관계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국내의 사회 재조직 문제와 연결되며 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을 긴밀하게 통합시킨다. 훗날 연방제 이론가들이 프루동의 이론을 ‘총체적 연방주의’라고 부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프루동의 이론 체계는 여느 연방주의 이론들보다 더 논리적 일관성을 갖추었지만, 그만큼 더 달성하기 힘겨운 구상이기도 했다. --- p. 75 유럽의 바다에서 사투를 벌인 노인, 스피넬리 그렇다면 스피넬리는 어떤 사람인가? 많은 이들이 헛소리로 비아냥거린 유럽연방의 이상을 고수하면서 제도 정치권에 오래 몸담고 있었고, 또 정치적 실패를 연이어 겪으면서도 연방주의적 원칙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스피넬리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한 연구자는 스피넬리의 일생을 조감한 뒤에 그를 헤밍웨이의 유명한 소설《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노인에 비유한다. 일생일대에 가장 큰 고기를 잡았으나 사투를 벌이며 항으로 끌고 오는 동안 상어에게 모두 뜯어 먹힌 고기의 앙상한 뼈만을 가져온 바로 그 노인 말이다. 그러나 노인은 패배자가 아니다. 그는 투쟁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이런 비유는 스피넬리라는 한 인간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 p. 160~161 ‘좋은 유럽인’ 아데나워 유럽 통합 과정은 서방 연합국의 입장에서 볼 때 난해한 독일 문제를 풀 수 있는 해답이었고, 서독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주권국가를 위한 전제 조건이 되었던 셈이다. 이러한 이유로 아데나워의 서방 통합 외교정책은 양면을 가진 동전의 특성에 비유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 한 면은 독일의 주권 회복이라는 목적을 가진 독일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었고, 동시에 다른 한 면은 유럽 통합을 추구하는 유럽 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유럽 통합의 도구적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일방적으로만 이해하게 된다면, 아데나워의 유럽 통합 정책의 성격에 대한 왜곡된 상을 그리게 될 위험에 빠질 수 있으며, 왜 그에게 ‘좋은 유럽인’ 혹은 ‘유럽 통합의 선구자’라는 찬사가 허락되었는가에 대한 진정한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된다. --- pp. 234~235 일국의 대통령에서 유럽주의자로 변신한 미테랑 미테랑이 유럽주의자가 된 것은 대통령에 당선된 뒤의 일이다. 1981년 미테랑의 대선 공약에서 유럽에 대한 언급은 극히 드물다.…… 미테랑은 당선된 후에 ‘유럽 사회 공간’의 창설과 ‘유럽의 경기 활성화를 위한 계획’을 제안하지만 다른 회원국의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미테랑이 적극적인 유럽주의자로 돌변하는 계기는 1983년 경기 활성화에서 안정화 정책으로의 전환 때문이었다. 사회당은 경제성장과 고용창출을 약속쿇고 집권하였지만 정책 전환으로 그 정반대의 긴축재정과 임금동결이라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인 돌파구와 새로운 이상적 목표가 필요했던 미테랑에게 유럽이라는 쟁점은 안성맞춤이었다. 미테랑은 이때부터 위대한 유럽인, 비전을 가진 유럽의 건축가라는 역할을 자임하기 시작했다. --- pp. 318~319 “브뤼셀의 황제”, 들로르 들로르는 ‘미스터 유럽(Mr. Europe)’이라는 수사가 항상 따라다닐 정도로 유럽통합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변화를 이끈 유럽공동체의 대표적인 지도자이다. 그는 10년 동안 유럽공동체의 집행위원장으로 재임하면서 유럽공동체의 대통령과 같은 이미지를 구축하여, ‘유럽의 차르(Czar of Europe)’ 혹은 ‘브뤼셀의 차르(Czar of Bruxelles)’로 불릴 정도였다. 실질적으로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 체결과 단일유럽시장 설립을 완성하고 경제통화동맹(Economic and Monetary Union, EMU)을 통해 단일화폐인 유로(EURO)의 도입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그는 정치공동체로서 ‘유럽’의 출발점을 성공적으로 이끈 대표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 pp. 328 대처의 유럽통합 정책 평가 대처의 유럽 통합 정책은 어디까지나 민족국가 중심의 협력을 축으로 이루어졌다. 유럽 무대에서 대처가 종종 구사한 극단적인 수사가 다른 회원국 수반들과 언론의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그가 영국의 국익을 추구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영국은 아직도 주요 정당 간에 그리고 주요 정당 내부에서도 유럽통합에 대한 합의가 없다. 따라서 영국의 총리는 보수나 노동당 출신이냐를 막론하고 유럽통합 정책에 대한 재량권이 그다지 많지 않다. 당내 합의나 정당 간 합의가 없는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총리나 정당 지도자나 되도록이면 이 문제를 건드리려 하지 않는다. 대개 독일과 프랑스가 정책을 제안하면 이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나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대처도 영국의 이런 유럽 통합 정책의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대처는 유럽 통합을 위대한 프랑스를 실현하는 도구로 간주한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유럽 통합에서 민족국가의 역할과 초국가기구의 역할, 그리고 양자 간의 긴장과 균형은 아직도 계속되는 핵심 쟁점이다. --- pp. 377~3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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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년간 유럽인들이 꿈꿔온 유럽통합의 역사가 펼쳐진다
2009년 11월 3일, 체코가 유럽연합의 ‘미니 헌법’이라 불리는 리스본 조약에 드디어 서명했다. 이것은 유럽통합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커다란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유럽연합은 유럽단일화폐인 유로로 상징되는 경제적 통합 단계에서 정치적 차원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가기 위해 8년 전 유럽연합 헌법을 마련했다. 200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비준을 거부함에 따라 이 원대한 꿈은 좌절되었지만, 유럽연합 헌법의 핵심적 내용을 간직한 리스본 조약이 체코를 끝으로 27개의 유럽연합 회원국 모두에서 비준되었다. 그리고 2009년 12월 1일 리스본 조약이 발효하여 유럽연합은 그야말로 ‘유럽합중국’을 향한 거보를 내딛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유럽통합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관심도 고조되고 있다. 이 책은 유럽인들이 유럽통합의 꿈을 꾸기 시작한 19세기부터 ‘하나의 유럽’을 향해 여전히 거침없는 질주를 계속하고 있는 21세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럽통합의 전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이 책 한 권이면 유럽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인 유럽통합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틱한 유럽통합 인물 열전 기존의 유럽통합사 관련서가 유럽통합의 정치사적, 경제사적 과정을 무미건조하게 나열하고 있다면, 이 책은 유럽통합의 이념을 전파하거나 유럽통합사의 일선에서 활약했던 역사적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특히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한, 하지만 잘은 몰랐던 인물이 대거 등장한다. 빅토르 위고가 ‘유럽합중국’을 제창했고, 민족주의자 마치니와 무정부주의자 프루동·바쿠닌이 ‘하나의 유럽’을 꿈꾸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처칠, 드골, 대처 등 세계적인 정치 지도자들이 유럽통합의 무대에서 벌인 활약상은 우리에게 그들에 대한 새로운 인상을 심어준다. ‘인물로 보는’ 유럽통합사가 갖는 또 하나의 장점은 유럽통합이라는 ‘하나의 과정’을 인물들의 ‘다양한 시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유럽통합이라는 건조한 ‘결과’만 보는 것이 아니라, 각국 활동가들이 겪었던 갈등과 투쟁 그리고 타협의 생생한 ‘과정’을 다양한 시선으로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유럽통합의 역사를 더욱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학자와 역사학자가 함께 쓴 유럽통합사 한국에서 유럽통합 연구의 역사는 그리 짧지 않다. 유럽학회, EU학회 등 유럽통합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연구회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고, 이들의 학제 간 프로젝트도 꾸준히 진행되어왔다. 그러나 사회과학자들이 주로 활동하는 위 학회들은 오늘날의 유럽통합을 주된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접근은 ‘변방’에 머물러 있다. 반면 한국의 서양사학자들은 서양 각국사로 분절되어 연구를 진행해왔기 때문에, 유럽통합사를 전공하거나 관련 논문을 내놓는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역사학자들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설명하려 하지만 현재에 오기 전 어느 지점에 머물러 더 나아가지 못하는 ‘악습’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기획하고 집필한 ‘통합유럽연구회’는 사회과학적 방법과 역사학적 접근을 융합하여 유럽통합을 연구하기 위해 2007년 일단의 정치학자와 역사학자들이 결성한 연구회다. ‘변방’에 머문 역사와 ‘악습’으로 소외된 현재를 화해시켜 유럽통합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이 연구회는 정기적으로 회원의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하며 각자의 정보를 서로 나누는 열린 연구공동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