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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이 세상에 나온 지 16년 만에 ‘공식적인 시집’으로 내는 감회도 감회려니와 불현 듯 떠오르는 내 청춘의 암약(暗躍)이 나를 걷잡을 수 없이 추억의 급물살 속으로 빨려들어 가게 하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참으로 아득한 세월의 강물이요, 참으로 오랜만에 젖어보는 역류의 강물이 아닐 수 없다. 내 지금은 비록 가슴에 폭탄 같은 시를 장착하고 불 속으로 뛰어들었던 그 분노와 그 노여움은 사라졌지만, 그러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천둥 같은 그리움만큼은 여전히 삼엄하고 또 여전히 장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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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 4. 3과 이산하의 <한라산>
시인 이산하는 1987년 장시 <한라산>을 통해 당시까지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던 ‘제주4·3 사건’을 다뤄 이 사건의 비극을 최초로 공론화했다. <한라산>은 16년 전인 1987년 3월 사회과학 무크지인 「녹두서평」 창간호에 발표되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당시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온 국민들의 분노와 눈물이 전국으로 번져가고 있을 때였다. 「녹두서평」의 맨 앞에 실린 <한라산>은 엄청난 충격과 파장을 몰고 왔다. 출판사는 ‘초상집’으로 변했고 시인에게는 물론 「녹두서평」의 다른 필자들도 대부분 수배되었다. 결국 저자는 도피생활 끝에 1987년 11월 11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발표 이후 한라산은 역사의 진실에 목마른 양심적인 지식인과 학생들의 필독시가 되었지만 공안정국을 위기 때마다 조성해온 군사정권의 폭압 아래 오랫동안 한 권의 책으로 엮이지 못했다. <한라산>의 발표 이후 4.3에 대한 민주세력과 국민들, 당사자인 제주도민들의 진상규명 요구가 거세져갔고 최근에 국회 주도로 4.3 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되기도 했다. 진상조사보고서의 발간에도 불구하고 4.3의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 이유를 이산하 시인은 시집의 후기에서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 자들보다 더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벽이었다. 제주도는 40여년이나 입에 재갈을 물린 거대한 벽이었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서로 약속이나 한 듯 표정이 없었다. 그들에게 4·3은 마치 기억조차 하면 안 되는 너무나 끔찍한 악몽 같은 것이었다.”고 말한다. 최근 정부가 민간인 학살을 국가 차원에서 공식 인정했지만 진상규명은 요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탄압과 학살의 선봉에 선 서북청년단원들마저 그 누구 하나 양심선언을 하거나 인정조차 하지 않고 있으며 군경이 갖고 있던 자료들은 거의 파기되었기 때문이다. 2. ‘복원판’ <한라산> “제주도의 아름다운 신혼여행지는 모두 우리가 묵념해야할 학살의 장소이다. 그곳에 핀 노란 유채꽃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다.“ 한라산은 1987년에 녹두서평 창간호의 지면을 빌어 세상에 나온 후 16년 동안이나 한권의 책으로 엮이지 못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미완성’이다. 16년 동안이나 출간도 ‘완성’도 미뤄졌던 것은 시인의 게으름 탓이 아니다. 복원판 <한라산>에는 한라산의 집필배경과 비화, 87년 대선을 앞두고 한건을 노리던 공안당국의 음모, 재판과정, ‘복원판’ <한라산>에 대해 밝힌 후기가 덧붙었다. 시인은 이 후기에서 미완성의 이유를 1990년 석방 이후에 처음으로 제주도를 방문했던 때의 기억을 더듬어 “비록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제주에 다녀온 이후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마저 사라져버렸다. 또 그것이 다시 생기리라고 섣불리 기대하지도 않는다. 이런 상태라면 <한라산>의 완결이라는 숙제는 좀더 미뤄지지 않을 수 없다”고 밝힌다. 한라산의 출간본이 ‘복원판’인 까닭은 나중에 “이데올로기의 마지노선”을 넘은 작품이었다고 판명되기는 했지만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인쇄물이면 인쇄소에서 작업을 거부하던 공안정국의 서슬과 완화된 내용이라도 세상에 보여야 한다는 절박함의 타협이라고 시인은 밝히고 있다. 결국 한라산조차도 ‘자기검열’의 고개를 넘지 못했으며 시인은 “타협해서는 안 될 문제를 타협해서라도 풀겠다는 마음의 틈새를 스스로에게 들켜” 마음이 편치 못하다고 고백하고 있다. 3. <한라산>의 배경 장시 한라산은 ‘그날의 폭도들에게 바치는’ 헌사로 시작된다. 서시에는 4.3의 비극을 예고하는 한반도의 정국을 담은 비장한 전주곡이 울린다. 4장으로 구성된 한라산은 1장 ‘정복자’ 2장 ‘폭풍전야’ 3장 ‘포문을 열다’ 4장 ‘불타는 섬’으로 이어진다. 1948년 4월3일 새벽 1시 제주 전역에서 무장 게릴라들이 경찰지서와 우익 인사들의 집을 습격하면서 사건은 시작되었다. 4·3의 봉화를 올린 ‘폭도’들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48년 5·10 총선거에 대한 반대를 거사의 취지로 내세웠다. 오랜 이민족의 지배에서 풀려난 우리 겨레가 독립국가의 꼴을 갖추기 전에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외세와 그에 빌붙은 분열주의자들은 반분된 땅덩어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몫을 차지하고자 혈안이 돼 있었다. ‘단독선거 반대’라는 4·3의 취지는 당시의 정세에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민족적 정당성을 담고 있었다. 4·3은 또한 해방과 더불어 삼팔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정에 대한 이 땅 민중들의 불만과 저항의 표출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운형 주도의 건국준비위원회와 그 후신인 인민공화국이 독립국가 수립의 채비를 착착 다져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를 깡그리 무시하고 오히려 친일파와 민족분열주의자들을 두둔하고 나선 미군정의 처사는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서의 그들의 본질을 유감없이 발휘했음이다. 게다가 대흉년과 콜레라의 창궐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진 제주에서는 그나마 미곡정책 실패와 관리들의 횡포로 인해 미군정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이 포화지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947년 3월1일 제주 읍내 관덕정 광장에서 열린 3·1절 시위군중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해 6명이 사망한다. 이 사건은 미군정 및 경찰과 민중들 사이의 관계를 화해 불능 상태로 몰고갔으며 결국 4·3의 도화선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