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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서문
제1장 실크로드와 돈황 제2장 석실비고의 발견 제3장 돈황군의 성립과 발전 제4장 막고굴 천불동의 개화 제5장 꽃피는 돈황 제6장 티베트족의 도약 제7장 변경 왕국의 성립 제8장 모래에 묻힌 돈황 해제-돈황학의 어제와 오늘 미주 도판목록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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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특색을 지닌 돈황에는 여러 인종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중 핵심은 한 대漢代 이래 이 지방에 진출하여 식민화했던 한漢족이었지만, 그 외에 티베트계, 투르크계, 멀리는 서아시아의 소그드인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잡다한 민족이 여기에 살고 있었다. …… 일찍이 이크볼R. B. Fkall이 지적했던 것처럼 이들 여러 민족의 문화교류의 침윤은 매우 복잡하고, 그 각자가 돈황의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기고 있다. 특히 중원 지방의 한漢 문화뿐만 아니라, 이란문화 티베트문화 등 갖가지 문화가 현란한 꽃을 피웠던 것은 돈황이 가지는 하나의 특색이었다. 그중에서도 서역문화는, 이곳이 동서 교통의 가장 중요한 핵심 지대였기에 대단히 왕성하게 유입되었다. --- pp. 20~21
사진에 의하면 코르덴 옷을 걸친 펠리오가 희미한 양초 빛에 의지하여 산더미처럼 쌓인 고문서 앞에서 꼼짝하지 않고 한 장의 문서를 응시하고 있다. 동양학 사상 일찍이 없었던 충실한 보고寶庫안에서 그의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희열은 어떠했을까. 뛰어난 동양학자로서 의 그의 능력은 여기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겨우 하루 만의 조사로 그는 이 귀중한 고문서군의 가치를 예리하게 간파하였다. 즉 이들 고문서는 대체로 6세기에서 10세기 정도까지의 것이며, 한문 경전뿐 아니라 다양한 언어의 고문서와 많은 이란계 인도계의 문서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 문서의 질과 양으로 보아 이제까지 없었던 동양학의 보고라는 사실, 아마 서하의 돈황 침입으로 모든 문서류가 이곳에 넣어져 봉해졌으리라는 것 등이다. --- p. 56 이와 같이 여러 해 동안 동서 교역의 실권을 장악하고 하서 지방을 점령하고 있던 흉노는 이제 고비 사막의 안 깊이 물러나, 그 이후로는 점차 분열하여 세력도 쇠약해져 갔다. 한편 무제는 하서통랑 지대에 계속해서 한인을 이주시키고, 여기에 한 직할의 무위군武威郡, 장액군張掖郡, 주천군酒泉郡, 돈황군敦煌郡이라는 네 개의 군, 소위 하서사군을 설치했다. 하서사군의 성립이 한의 대서역 무역로의 확보 그리고 흉노와 티베트족과의 연락 차단에 얼마나 중요했던가는 새삼스럽게 되풀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pp. 88~89 「이릉전」의 이 구절은 읽으면 읽을수록 실로 처참한 이야기이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2100여 년 전의 일, 장소는 유달리 모래가 깊은 고비 사막의 한가운데. 그곳에 빈약한 장비를 가지고 돌진하는 한의 군사가 있었으니, 애초부터 살아서 돌아오기를 기대하긴 어렵다. 그러한 원정길의 거칠고 사나운 남자들을, 많은 부녀자들이 엄한 군율을 범해가면서까지 심하게 흔들리는 수중거輜重車에 숨어 따라갔다고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녀들은 원정의 뒤안길에 남겨졌더라도 삭풍이 몰아치는 봉수대에 외로이 남겨져 결국 배고픔과 고통으로 고민하다 죽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감히 군율을 어기고서라도 끝까지 남편의 뒤를 따라가 작은 행복에 매달리기를 원했던 것이다. --- p. 113 그 때문에 하서의 서 끝 돈황 같은 곳은 서방에서 멀리 찾아온 인도나 서역 승려의 집합소가 되기도 했다. 불교가 중국에 퍼지자 경전의 부족함을 한탄하고 멀리 인도까지 구법 여행을 떠난 중국 승려도 적지 않았지만, 이들이 고난에 가득 찬 긴 여로의 출발지로 삼은 곳도 돈황이었다. 그래서 이 오아시스에는 여러 나라의 승려가 모여 사원도 조성되고, 오아시스 남의 명사산 기슭에는 쿠차나 투르판에 보이는 것과 같이 석굴사원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 p. 116 그러나 3세기 이상에 걸친 수당시대에는, 돈황 주변만 살펴보더라도 대단한 변화의 역사를 거쳤다. 중원 왕조의 초무책招撫策으로 붉은 머리 파란 눈의 이란 상인들이 동분서주하고, 수많은 서역의 보화가 낙타의 등에서 흔들리며 장안으로 향하는 한가로운 한때도 있었는가 하면, 모래 먼지를 날리며 북방의 민족이 내습하여 마침내는 그 지배하에 무릎을 꿇었던 때도 있었다. 그리고 또 이러한 야만족의 지배를 견디지 못해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실패한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드디어 숙원의 독립을 완수하여 2세기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변경 왕국을 건설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 p. 153 명사산으로부터 솟아 나온 물은 많은 관개수로에 의해 그물망처럼 돈황 오아시스 전체를 적시고, 많은 농부들은 부지런히 경작에 힘썼다. 젊은이들은 모래 바다 위의 작은 오아시스를 이민족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많은 전쟁에 참가했다. 돈황 각지에 산재되어 있던 17대사는 신앙의 대사이었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생활과 밀접한 사회·경제적 관계를 가졌으며 많은 주민이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오아시스 남의 막고굴에서는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모두 그들의 재산을 들여 석굴을 조영했고, 화려한 벽화와 불교 장식은 사람들을 법열法悅의 경지에 머무르게 했다. --- pp. 169~170 이러한 사회·경제사학적 연구의 진전은 다시 많은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예를 들면, 니이다 노보루 박사는 호적이나 계契(매매, 대차, 전질典質, 고용 등에 관한 계약서)를 검토하고, 토지법·거래법·신분법 등 법제사상에서 여러 가지 새로운 연구를 행하였다. 또 펠리오 문서를 조사한 나바 도시사다 박사는 지방행정과 하서河西 변방군邊防軍(두로군豆盧軍)의 실태, 거渠에 의한 용수 관개, 사원 경제의 여러 모습, 혹은 민간의 상호 부조 조직인 사의 조직, 당시 돈황의 종교 활동 등에 대하여 수많은 업적을 발표하였다. --- p. 177 이러한 대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망망한 오아시스 돈황에는 앞에 기록한 바와 같은 무거운 세역과 함께, 멀리 내륙에서 납입된 조용조租庸調(당대에 정비된 조세 제도)의 물품도 수송되어 왔다. 게다가 두로군의 유지를 위해서는 조세로서 거두는 조와 보리만으로 부족했음 그 이외에도 다량의 곡물이 현지에서 구입되었다. 또 빈농의 약점을 틈타 봄의 파종기에 볍씨의 대부貸付도 이루어져, 가을의 수확기에 5할의 이자를 붙여 관에 반환하게 하고 있었다. 이러한 출납에 관한 천보 9년의 상세한 장부 일부가 펠리오 문서(P.2083)에서 발견되었다. --- p. 1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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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의의
1. 문명의 십자로, 실크로드의 요충, 돈황 중국의 장안과 로마의 콘스탄티노플을 이어주는 비단의 길, 실크로드는 캐러밴들이 기나긴 황량한 사막을 넘어 동과 서를 이어주던 길이다. 거대한 모래 바다 위의 오아시스를 연결하는 실크로드는 각양각색의 인종과 민족이 어울리고, 동과 서의 희귀한 문물이 오고가던 동서 교류의 장이었다. 동양학의 보고寶庫 돈황은 실크로드의 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실크로드 선상에서 북경으로부터 3분의 1, 테헤란으로부터 3분의 2 지점에 위치한 돈황은 중앙아시아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오아시스이자 북방의 유목민과 남방의 티베트인이 교통하던 통로로 동과 서, 남과 북의 문명이 모이고 갈라지는 실크로드의 요충이자 문명의 십자로였다. 2, 돈황으로 안내하는 길잡이 ‘세기의 대발견’ 이후 동양사의 무수한 비밀을 풀어준 동양학의 보고 돈황 석굴과 흥미진진한 탐험가들의 이야기가 어우러진 돈황은 역사적 낭만의 아우라를 전달한다. 하지만 신비로운 낭만을 벗겨내고 보면 중원의 제국과 변경의 소국들이 각축을 벌이고 수많은 인물들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치열하고 복잡한 역사적 공간이다. 이 책은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사 연구의 권위자인 와세다대 명예교수 나가사와 카즈토시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돈황의 변천과정과 흥망성쇠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돈황 개설서이다. 일반인들도 읽을 수 있도록 평이하고 명료하게 쓰여졌으면서도, 원사료를 충분히 인용하고 돈황학의 다양한 학설도 접할 수 있어 돈황학의 풍미도 느낄 수 있다. 또 돈황 문서의 극적인 발견과 탐험가들의 이야기, 사막의 오아시스 돈황에서 전개되는 역사의 전변과 다양한 인물 군상의 이야기가 펼쳐져 마치 소설을 보는 듯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다. 주요 내용 1. 돈황의 역사지리학적 통사 돈황은 중국의 변경이자 중앙아시아의 한복판에 위치한 지역으로 중원과 변경의 세력이 각축을 벌이고 여러 인종과 민족이 거주한 공간으로 복잡하고 다이내믹한 역사를 거쳐왔다. 따라서 돈황의 역사는 지역사이자 경계의 역사이다. 이 책은 황하 서쪽인 하서지방의 실크로드 선상에 위치하고 북으로 고비사막을, 남으로는 티베트 고원을 둔 돈항의 지리적 조건부터 시작해 선사시대 토기문화와 중국의 고문헌에 기록된 지역의 역사를 찾아가면서 돈황의 역사를 서술한다. 돈황사는 중국 변경 세력인 월지의 등장과 흉노의 대두로 시작해 한 무제의 서역 정벌로 이뤄진 중원으로의 편입과 돈황군의 설치로 본격화되고, 이후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중원의 혼란과 변경 세력의 부침에 따라 수많은 민족과 정치권력의 흥망성쇠를 거치면서 변천한다. 이 책은 격변의 역사 속에 사회조직, 돈황 석굴의 창건 등 당대의 사회경제사, 문화사, 종교사 등을 망라하는 본격 돈황 개설서이다. 2. 돈황의 드라마, 역사 이야기 이 책은 복잡한 돈황의 역사를 체계적이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돈황학 입문서이면서, 경계의 지역에서 펼쳐진 극적인 역사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변경 지역 각 민족의 부침에 따른 역사의 전변을 기본으로 구성하면서, 흉노를 일으킨 묵돌부터 대제국을 건설한 한 무제, 무제의 명을 받고 수십년간 서역을 떠돈 장건, 변경 지역에 근무하다가 무참하게 죽어간 병사와 가족들, 돈황 지역을 지배한 토호 세력들과 이민족의 수장들, 돈황에 불교를 전하고 부흥시킨 고승들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주역인 수많은 인간 군상의 이야기가 중국 변경의 극적인 역사와 맞물려 흥미진진한 드라마로 펼쳐진다. 3. 세기의 대발견, 돈황의 발견 돈황 이야기의 한 축은 돈황 문서를 발굴하고 정리한 탐험가들의 이야기이다. 19세기와 20세기를 가른 1900년, 세상을 떠돌던 도사 왕원록이 돈황에 정착하여 우연하게 발견한 돈황 문서는 ‘세기의 대발견’이라 불릴 정도로 양적, 질적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역사적 자료들이었다. 당시 호시탐탐 중앙아시아를 노리고 있던 서구 열강의 탐사대와 학술 조사대는 돈황 문서를 입수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면서 고문서를 획득해간다. 돈황의 발견이자 돈황학의 시초이고, 동양학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이 발견은 서구 학술 조사대의 학문적 열정이자 집념이었고, 제국주의 국가의 문화재 침탈이고 문화 침략이었다. 4, 동양학의 보고, 돈황 문서의 가치 1000년가량을 굴속에 묻혀 있던 고문서들은 한문, 티베트어, 산스크리트어, 소그드어, 호탄어, 쿠차어, 투르크어, 팔라비어, 아라비아어, 서하어, 몽골어 등 상이한 언어로 작성되었고, 『시경』, 『주역』 등의 경서부터 불교 문헌, 조로아스터교, 네스토리우스파 크리스트교 등의 종교 경전과 『사기』, 『한서』 등의 잔간과 『왕오천축국전』 같은 역사지리서, 변문이나 곡曲같은 문학작품을 망라한다. 또 경전의 뒷면에 기록된 호적, 계약문서, 족보, 서의, 판사집, 장적류, 사원관계 문서 등은 당대의 사회경제사를 밝혀주는 귀중한 사료들이다. 이 문서들로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당대 일상생활을 복원할 수 있었고, 잊혀졌던 많은 종교와 언어가 다시 숨을 쉬게 되었다. 이로써 돈황이 동양학의 보고라 불리게 되었다. 5. 돈황학의 풍미, 수준 높은 돈황 교양서 이 책은 초심자들에게 돈황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하는 교양서이면서도, 많은 원사료와 고문헌의 인용, 다양한 학설의 소개로 돈황학의 깊이도 동시에 전한다. 특히 역사 서술에 있어서 철저하게 근거와 문헌에 입각해 설명하고, 원사료와 고문서를 바탕으로 당대의 사회경제사와 일상생활을 재구성하는 등 저자의 학자로서의 탁월한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또 역사적 사실을 전개할 때도 다양한 학자의 견해를 설명하고 정리하면서 엄격한 학문적 태도로 뒷받침하고 있어, 학술적인 가치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