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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할아버지 김염을 찾아서
2. 치치하얼의 조선인 이상촌 3. 중국 영화 황제 김염의 불꽃같은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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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새해가 밝아 왔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로서는 가슴이 옥죄어 오듯 답답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리우나어우라는 일본 앞잡이가 귀찮을 정도로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대만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상하이에서 '수말서점'을 경영하며 한때는 좌익 출판물을 대량으로 취급하여 루쉰, 양한성 등 좌익 작가와도 교제했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일본의 신감각과 문학에 영향을 받아 '중국 신감각파' 소설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현대 영화>이라는 월간지도 운영했다. 이 영화 잡지를 통해 그는 "영화는 비정치적인 순예술이며 오락성이 풍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화는 눈으로 보는 아이스크림 같은 것이며, 앉으면 기분 좋은 소파처럼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며 좌익 영화 평론가와 논전을 벌이기도 했따. 그는 미이씽과 국민당 정부 직속의 '중앙전영'에서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을 지내던 중 일중합병의 '중화전영'에 들어간 사람이었다. "김염. 일본 측에서 일중 합작 영화에 당신의 출연을 희망하고 있어요." 그는 국민당 정부와 일본 측으로부터도 크게 신임받고 중용된 사람이었다.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 나는 그런 영화에 출연하지 않습니다." 처음엔 조용히 사절했다. "이봐요, 김염. 당신이 그 영화에 출연한다면 당신의 상하이 생활은 안전할 것이오." "안전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유혹이 있어도 출연하지 않는다니까 그래요." "내 말 들어요. 이제 세상은 일본 판이오. 김염, 내 말을 거절하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 거요." "후회하지 않을 거니가 다시는 날 찾아오지 마시오." 일본 영화사들의 상하이 영화계 침투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나라와 민족을 배신하고 일본 측과 손잡고 있는 그 작자를 쳐다보기도 싫었다. 들을 가치도 없는 그의 제의를 때로는 면박까지 줘 가며 거절했다. --- pp.284-2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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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염(金焰)
1910년 4월 7일 김필순의 3남으로 서울에서 출생. 본명은 김덕린, 아버지 김필순은 세브란스 의학교 1회 졸업생으로 한국 최초로 면허를 받은 의사다. 신민회의 독립 운동 자금을 조달했던 김필순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중국으로 망명했고, 김염은 중국 국적을 취득했다. 부친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하자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어린 김염은 상하이의 고모(김순애)집에 의탁한다. 고모부 김규식 또한 독립 운동에 투신하여 생활이 어려웠다. 고학으로 중 · 고등학교를 다니던 김염은 집을 나와 1927년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하이 영화계에 들어간다. 1929년부터 당대의 뛰어난 감독 쑨유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고, 여배우 롼랑위와 함께 주연한 '야초한화'(1932)의 성공으로 중국 최고의 남자 배우가 되었다. 이후 출연작마다 대성공을 거두어 중국 전역에서 실시한 조사에서 '영화 황제'로 뽑혔다. 지금까지 중국 영화 100년 역사에서 오직 김염 만이 '영화 황제'로 소개된다. 그는 조교 협회를 조직하고 조선인 학교를 후원하는 등 동포들을 도왔다. 만주 사변이 발발하자 자신의 사인을 담은 브로마이드를 판매하여 항일 자금을 지원했고, 상하이 사변 후에는 구국 운동에 참가했으며 부상병들을 구호했다. 1934년 배우 왕런메이와 결혼했다. 김염이 출연한 영화는 대부분 항일 영화로 특히 '장지릉운'(1936)은 일본이 홍콩을 점령했을 때 가장 먼저 필름을 찾아 없애 버린 영화다. 중일 전쟁이 터지자 참전을 결심하고 전투기 조종사 시험을 쳤지만 낙방하고, 일본이 제안한 합작 영화의 출연 요구를 거절하고 홍콩으로 피신한다. 1947년 여배우 친이와 재혼. 신중국 수립 후 상하이 영화제작소 극단장을 맡았다. 마오쩌둥은 그를 국가 일급배우로 임명했는데 이 직책은 장관보다 높은 대우였다. 1962년 위 수술 후유증으로 영화계를 은퇴하고 끝까지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이례적으로 중국 영화계에서 고위직을 지냈다.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수용소에 감금되는 등 시련을 겪었으며, 이때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들 첩(쇼우린)은 이후 정신 장애자가 되었다. 1983년 12월 27일 일흔셋의 나이로 상하이에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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