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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한국어판 편집자의 글 1장 피너츠 가스펠 땅콩(피너츠)의 딱딱한 껍질을 벗겨야만 고소한 알맹이의 맛을 볼 수 있다. ‘피너츠’ 만화의 각피 속에는 깨우침을 주는 복음이 담겨 있다. 귀 있는 자는 들을 수 있다. 2장 인간에 대한 헛된 기대를 버려라 인간의 본성은 너무나 심각하게 부패했고, 너무나 암담하게 눈멀어 죄의 심각성을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다 3장 절망의 끝에서 진리를 보다 잡초에서 꿀을 따고 악마에게서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하듯이 현재의 고뇌와 죄로 인한 고통 속에서도 진리를 바라보아야 한다. 4장 진정한 근심에 빠져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룬다. 구원을 이루는 진정한 근심을 하라. 5장 완전한 순종의 기쁨을 맛보라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주인의 발 앞에 엎드리는 순종과 겸손, 다른 사람을 섬기는 완벽한 순종과 겸손으로 개(스누피)처럼 낮아져야 마땅하다. 6장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코미디 기독교인들이 실제로 믿고 있는 모든 것과 사랑하는 모든 것은 코미디를 위한 썩 괜찮은 주제가 될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이란 게 근본적으로 불합리하고, 불가능하고,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다. - 이 책에 대하여 - 후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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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이
스누피를 통해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거짓 선지자 발람을 깨우쳐주시기 위해 발람이 타고 가는 당나귀가 사람의 말을 하도록 하였다(민 22:21-30).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일이 둔할 때에 하나님은 짐승인 당나귀를 통해서 깨우침을 주기도 하셨다. 이 책은 우리에게 친숙한 캐릭터인 강아지 스누피와 소년 찰리 브라운이 등장하는 찰스 슐츠 작화(作畵)의 ‘피너츠’ 만화를 소재로 우리가 믿어야 할 복음이 무엇인가를 경쾌하고도 심오한 톤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옛날 당나귀가 발람에게 선지자의 음성을 발한 것처럼, 오늘 우리의 불신앙적인 마음을 돌이키고자 강아지 스누피는 우리에게 선지자의 음성을 들려주고 있다. 그런데 그 예언적 음성은 “귀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다.” 스누피의 소리에 ‘귀 밝은’ 이 책의 저자 로버트 쇼트는 (방언에 통역이 필요하듯이) 스누피어(語)를 ‘복음의 언어’로 기막히게 통역하고 있다. 명장(明匠)에게는 작품을 다듬는 자신만의 공구(工具)가 따로 있듯, 탁월한 문화 통역자인 로버트 쇼트는 ‘피너츠’ 만화에 문(文), 사(史), 철(哲)을 종횡으로 휘젓는 자신의 연장을 들이대어 영혼을 진단하고 치유하는 복스러운 소식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혹자는 “만화를 그리 심각하게 볼 필요가 있는가? 그냥 보고 즐기면 되지”라며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반문하고 싶다. 즐거움에는 단지 그냥 보고 즐기는 ‘가벼운 즐거움’만 있는가? ‘심각한 즐거움’이 있으면 안 되는가? 가벼운 즐거움도 즐기고 심각한 즐거움도 즐기는 것이 풍요로운 인생이 아니겠는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우리 인생을 더 권태롭게 하지는 않는가? 몬스터 주식회사와 피너츠 예를 한번 들어보자. 2001년 월트디즈니사에서 제작한 ‘몬스터 주식회사’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다들 기억할 것이다. 요즘도 대형할인매장 DVD판매 코너에서는 어린이들이 이 영화에 넋을 잃고 빠져 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아이들은 이 영화를 그냥 재미있어서 본다. 물론 그렇게 보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그냥 재미삼아 보는 것은 이 영화를 풍성히 즐기는 태도가 못 된다. 영화에 잠재된 상징적 코드를 해석해보라. 그러면 영화를 훨씬 더 풍성하게 즐길 수 있다. ‘몬스터 주식회사’에서도 ‘심각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눈 있고 귀 있는 자’만이 누리게 되는 즐거운 보너스이다. 눈에 쓴 유아기적 콩깍지를 떨어내고 ‘몬스터 주식회사’를 찬찬히 들여다보자. 이 영화는 현대의 비정한 자본주의적 회사 경영을 통렬하게 조롱하는 영화로도 읽을 수 있다. 현대의 기업은 괴물들만 모여 있는 집단이라는 것이다. 편집증적으로 한쪽만 보는 외눈박이, 머리만 발달한 가분수, 부지런히 발로 뛰기만 해서 기형적으로 발만 발달한 문어다리 괴물 등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모여 이익 창출만을 위해 매진한다는 것이다. 이 ‘몬스터 주식회사’ 사람들은 어린이와 접촉해서는 안 된다. 어린이가 들어오는 날에는 깜짝 놀라 전부 대피한다. 이것은 어떤 상징인가? 오늘날 경쟁적인 자본주의 체제하의 기업들에게 ‘어린아이의 순박함’이란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인자(因子)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멀리해야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조금만 사색해보면 기쁨은 두 배가 된다. 가벼운 즐거움에만 몰입하지 말고 심각한 즐거움도 누리도록 권하고 싶다. 이런 감상법은 ‘몬스터 주식회사’에 그치지 않는다. 찰스 슐츠의 유명한 만화인 ‘피너츠’ 역시 여기에 해당된다. ‘피너츠 깊이 읽기’에 성공한 사람이 이 책의 저자 로버트 쇼트이다. ‘피너츠’ 만화의 작화자인 찰스 슐츠는 미국 ‘하나님의 교회’(the Church of God)의 평신도 설교자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만화에 기독교적인 코드를 깔아두었고, 복음의 감수성이 예민한 로버트 쇼트가 이를 캐치해낸 것이다. 로버트 쇼트의 이 책이 이렇게 재미와 깊이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에서 천만 부 이상이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피너츠’ 만화를 ‘단순히 즐기는’ 가벼운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을 토하는 선지자, 사도의 음성과 조우하는 ‘거룩한 즐거움’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비관 VS 하나님에 대한 낙관 이 책 1장은 예술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도구 노릇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면밀히 보여준다. 그리하여 만화도 하나의 ‘비유’로서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음을 탁월한 수사력으로 진술한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 예수님의 해석이 필요했고, 방언에도 통역이 필요했던 것처럼 ‘피너츠’ 만화도 비유나 방언과 마찬가지로 통역될 때에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으로 사용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1장은 ‘피너츠’ 만화 ‘복음적 읽기’의 가이드인 셈이다. 따라서 본 내용으로 바로 들어가고자 하는 독자는 2장부터 읽어도 무방하다. 그러나 1장을 정독하면 ‘기독교 예술관’에 대한 수준 있는 지침을 얻게 될 것이다. 2장과 3장에서는 자력(自力)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를 ‘피너츠’ 만화의 각 캐릭터들을 통해 생생하게 묘사한다. 죄로 인한 전적 부패의 암담한 상태를 돋을새김으로 보여줌으로써 인간과 세상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증거하고 있다. 인간적인 희망을 버릴 때 비로소 하나님의 소망을 붙들 수 있음을 권면한다. 4장과 5장에서는 인간의 가능성과 희망이 무너진 ‘자기 부인’(自己否認)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하는 양상을 생생히 보여준다.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한 그 자리가 은혜의 자리이며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들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6장에서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로운” 거룩한 역설에 대해 언급한다. 이 책은 ‘안일한 믿음주의’(easy believism), ‘값싼 은혜’(cheap grace)가 만연한 이때에 자만하고 자족하는 영혼들에게 충격으로 다가갈 것이다. 그러나 소경 바디매오와 같이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는 영혼에게는 엄청난 하나님의 위로로 다가서리라 확신한다. 오순절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반응한 청중들처럼, 이 책으로 인해 “주여, 우리의 믿음 없음을 돌아보소서!”라는 간구가 터져 나오게 되기 바란다. --- 규장문화사 편집국장 김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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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너츠의 추억
세월의 흐름은 독자들의 인식에 충격을 안겨다줄 수도 있다. 슐츠는 가끔 만화 ‘피너츠’가 반(半) 자서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만화의 주인공 혹은 주인공답지 못한 주인공인 찰리 브라운을 보면서 대여섯 살 난 꼬마의 모습이 아니라, 여든의 노인을 상상하게 된다. 찰리 브라운과 그의 친구들에게서 넘쳐나는 젊음의 샘에 푹 잠기지 못한 우리는 슐츠의 만화와 쇼트의 글을 읽으면서 세월의 흐름을 체감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정말 많은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다. 1965년은 아직 미국식품의약국(FDA)에서 피임약의 안전을 공표하기 전이다. 관상동맥 수술이나 심장이식 수술도 개발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 해 초, 미군이 베트남에 파병되었고,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가 흑인의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해 셀머 시(市)에서 몽고메리 시(市)까지 행진을 벌였던 해이다. 미식축구의 왕좌 결정전인 슈퍼볼도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여성의 신비」(Feminine Mystique)라는 책에 자극된 여성운동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던 때였고 담배 갑에 경고 문구 삽입을 최초로 의무화한 해이기도 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Vatican Council)가 그 해 종료되었다. IBM이 퍼스널 컴퓨터의 원형을 막 개발한 것이 그 시점이었다. 그룹사운드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가 팝 음악계에 데뷔한 지 3년, 영국 그룹 비틀즈(Beatles)가 미국에 상륙한 지 2년째 되던 해이다. 그리고 바로 그 해, 로버트 쇼트라는 젊은 신학생이 이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을 읽는 많은 독자들은 아마 과거에 묻어둔 타임캡슐을 열어보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쇼트는 정말 우리와 다른 세상에 살았던 것만 같다! 쇼트가 인용하는 신학자와 문학가들에는 칼 바르트(Karl Barth), 리처드 니이버(H. Richard Niebuhr), 폴 틸리히(Paul Tillich), 죄렌 키에르케고르(S퓊en Kierkegaard), T. S. 엘리엇(T. S. Eliot),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그래함 그린(Graham Greene), 샐링어(J. D. Salinger)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 :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을 주도하는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와 함께 포스트모더니즘의 주도적 사상가이다 - 역자 주)나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같은 이름은 그의 책에서 찾아볼 수 없다. 왜 우리는 ‘영성’(靈性)이 사정없이 무뎌진 이 시대에 ‘신앙’에 대해 열변을 토해야 하는 것일까? 개인의 구미에 맞게 종교를 선택하는 이 시대에 왜 교회라는 곳에 마음을 써야 하는 것일까? 심지어 오늘날의 복음주의 신앙 공동체 속에서도 이 책이 던져준 충격의 가치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1965년도의 예배는 지금보다 훨씬 더 형식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설교도 지금보다 훨씬 더 뻣뻣했다(그렇지만 결코 지금보다 못하지 않았다!). 당시 설교자들은 가끔 ‘피너츠’ 만화를 인용하는 위험을 감행하곤 했고 사람들은 그런 목회자들을 ‘전위적’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요즘은 목회자들이 영화, 만화, 게임 등을 인용하더라도 대중들에게 ‘무난한 고전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대중들의 문화적 환상인가? 요즘은 근본주의자들조차 교인들이 TV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심지어 그것을 줄줄 꿰고 있어도 당연한 현상으로 여긴다. 이것은 1965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또한 그들은 찰스 디킨즈(Charles Dickens)나 셰익스피어(Shakespeare)보다는 연재만화나 여타의 대중문화에서 긍정적, 부정적인 예증들을 즐겨 이끌어내고 있다. 이 책은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가 소위 ‘선별적 검색’이라 칭했고, 프랑스인들이 ‘원천으로 돌아가기’(ressourcement)라고 일컬은 작업을 수행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말하자면 성경과 종교개혁, 고대 자료, 현대의 자료들에 재차 손을 뻗어 그것을 새로운 정황에서 파악하도록 하는 데 이 책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자식이다. 우리 후손들 또한 우리를 일컬어 “그 분들은 그 분들 시대의 사람이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쇼트가 인용했던 사상가들 역시 그들 시대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그 시대에 갇혀 있지 않다! 샘솟는 신선한 깨달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심오한 주제를 말하고 있고, 고상한 자리에 이르기를 열망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과 죽음, 은총과 죄, 모험과 인간의 한계에 대해 말하면서 냉소주의와 경박함, 방관(傍觀)으로 가득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영원히 감당할 수 없는 심도 있는 주제들을 다루었다. 이 책이 출판된 후, 쇼트가 신학대학원 학생들과 종교학을 연구하는 학생들에게 슬라이드 교육을 하기 위해 시카고 신학대학에 돌아왔던 날이 기억난다. 그들은 자칭 ‘의혹의 해석학’의 전문가들이었기에, 아무나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당시 그들은, 하찮은 신학사조에 파묻혀 지금은 기억에서조차 잊혀진 토머스 알티저(Thomas J. J. Altizer)의 신간, 「기독교 무신론 복음」(The Gospel of Christian Atheism)을 읽고 있었으리라! 그런 그들에게 쇼트는 성경에 대해 역설했다. 쇼트의 슬라이드 강연이 끝난 뒤, 히브리어 성경을 가르치던 교수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이 강의실에서 ‘시온의 말씀’을 이렇게 담대하게 증거하는 사람은 만나보지 못했다!” 그렇다. 시온의 말씀이 여기에 들어 있다. 당신이 고리타분하게 여길지도 모르는 그 문화의 틀 속에 ‘시온의 말씀’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마음의 장벽을 허물라. 슐츠와 쇼트 두 사람이 진가를 발휘하도록 기회를 주라. 그러면 당신 마음속에서 신선한 깨달음이 샘솟을 것이다. 때로 평론가들은 이 책의 의미와 영향력을 C. S. 루이스(C. S. Lewis)의 작품과 비교한다. 이 책이 C. S. 루이스의 고상한 문화 변론(辯論)을 대중적인 문화 용어로 옮기고 있기 때문이리라. C. S. 루이스 또한 과거의 사람이지만 ‘선별적 검색’과 ‘원천으로 돌아가기’에 적합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고전적인 작품이 후대에까지 그 진가를 인정받고 있다면, 대중적인 작품도 마땅히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쇼트의 글을 다시 읽으며 불현듯, 그가 일정한 구도를 따라 줄거리를 전개하고 있고 슐츠의 만화 또한 그렇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러 곳에서 주제가 서로 일치하는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주제들이 서로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이 책은 슐츠의 ‘피너츠 만화에 대한 주해(註解)’라기보다 음악 용어로 표현해서 ‘피너츠 만화 테마에 의한 변주곡적인 접근’이라 할 수 있겠다. 아마 독자들은 ‘피너츠’라는 만화를 다시 보며, 쇼트가 작곡한 변주곡과 훌륭하게 조화되거나 혹은 그의 변주곡을 대신할 만한 독자 자신만의 변주곡을 주장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쇼트에게 기회를 준다면, 그가 세상을 판단할 수 있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고,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여러 주제를 상기하도록 독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으리라 생각한다. -마틴 마티(Martin E. Mar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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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너츠 테마에 의한 변주곡
이 책의 영문판(英文版) 표지에는 “천만 부 이상 판매!”라는 글귀가 선명히 새겨져 있다. ‘천만’이라는 숫자는 1965년 로버트 쇼트(Robert L. Short)가 이 책을 저술한 이후, 만화와 결부하여 생각할 수 없었던 ‘신학’이라는 주제로 세상에 출판된 모든 서적 가운데 최고의 판매 부수를 기록한 숫자임에 틀림없다. 현재 내가 소장하고 있는 판본(板本)이 출판되고 난 뒤에도 이 책은 천만 부를 넘어 십 억, 조(兆), 경(京), 해(垓)를 헤아리고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지나친 과장이리라! 하지만 이렇게 과장하는 것은 나를 비롯한 수많은 독자들이 이 책에서 받았을 감동의 정도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또한 지금 내가 ‘천만 부 이상’이라는 이 책의 판매고를 강조하는 것도 복음에 관심 있는 사람, ‘피너츠’ 만화에 관심 있는 사람, 혹 그 둘의 대조관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이 책(영문판)을 소장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다. 맞다. 그들은 분명 이 책을 소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책의 개정판이 필요한 것일까? 우선, 시기적으로 그럴만한 시점이 되었다. 출판 연도로 볼 때 개정판이 나온 2000년은 각각 50주년과 35주년의 의미가 있다. 찰스 슐츠(Charles Schulz)가 본인의 의사와 다르게 ‘피너츠’라는 제목으로 만화 주인공 찰리 브라운(Charlie Brown)의 모험을 최초로 일간지에 게재하기 시작한 해가 1950년이었고, 로버트 쇼트(Robert Short)가 신학적 성찰로 가득한 이 책을 저술한 해가 바로 1965년이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해보자. 왜 개정판이 필요한 것일까? - 바로 젊은 층의 독자들을 위해서다. 개정판 발행과 관련한 좀더 타당한 이유가 ‘세대’(generation)와 관련 있다는 말이다. 찰스 슐츠가 ‘피너츠’라는 제목의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28세였다. 당시 그와 동년배였던 사람들은 지금 78세의 고령이 되었다(2000년을 기준했을 때). 로버트 쇼트가 이 책을 저술했을 때, 그의 나이 33세였다. 당시 그와 비슷한 연령대에 있던 사람들이 지금은 68세의 노인이 되었다. 1965년 당시, 겨우 글을 깨우쳤던 어린이들은 지금 중년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슐츠와 쇼트에 대해 알고 자란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들이 이 책의 개정판을 읽는다면 당시 열렬한 독자층을 형성했던 수백만 명의 독자들과 지적(知的) 격차를 좁히고, 그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