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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과의 대화 / 정기용
서문… 수행 생활과 취미 생활의 틈새에서 제1부 절집의 아름다움 절대로 돌아갈 것을 꿈도 꾸지 않는 집_강원도 영월 금몽암 꿈꾸다 죽은 늙은이 잠들다_부여 무량사 청간당 개울을 베고 누워 귀를 씻는다_충북 영동 영국사 달이 지거든 나를 만나러 오라_낙산사 홍련암 해돋이를 보려고 한밤중에 일어나다_낙산사 의상대 공중에 띄운 집_낙산사 빈일루 물고기가 달빛 읽는 소리에 귀를 닦는다_해인사 문수암 관월정 자손 없이 천 년 동안 제사를 받을 수 있는 명당_김제 만경벌 성모암 천 가지에 만 잎사귀가 빛나다_경북 성주 선석사 누구나 한 번쯤 살아보기를 꿈꾸는 이상향_토굴 예찬 근심을 풀다_절집 해우소 먼지 한 점 없이 정갈하다_ 사대문 밖 비구니 도량 성 안과 밖_인왕산 선바위와 국사당 조선왕조의 효심이 서리다_능참봉 불난 집에 그대로 앉아 있다_황룡 선사 매화는 다를 리가 없는데_지리산 매천사 제2부 글 그리고 글씨 청백가풍_죽림정사 과거와 현재의 조합_성철 선사 사리탑 목조건축의 마무리_절집 상량문 수레를 때려야 하나, 말을 때려야 하나_현판 별난 이름을 가진 당우_파위의당 해인사 사랑_최치원의 제시석 역사적 안목, 신앙적 안목_해인사 수미정상탑 천 년의 지혜를 천 년의 미래로_고려초조대장경 제3부 절 이외의 집 전통 양반 가옥의 백미_강릉 선교장 화려함 속에 감춰진 소박함_창경궁 기오헌 상류 민가의 전형_경북 춘우재 내공을 쌓으며 가만히 때를 기다리다_김양수 화백의 적염산방 세월도 녹아 풍경으로 남다_청도 석빙고 빈자의 미학_템플스테이 통합정보센터 빌딩 숲 속 은자처럼 숨어 있다_종로 목은영당 절개의 상징_개성 선죽교 제4부 외국 건축 건축주와 건축가의 제대로 된 만남_프랑스 라 투레트 수도원 지붕을 연꽃 밭으로 만든 ‘물의 사원’_고베 본복사 수어당 상식의 틀을 깨다_중국 쓰촨 성 아미산 3대 성지_보로부두르, 앙코르와트, 파간 선종적 안목으로 보면 ‘중도 도시’_이스탄불 마조도량_장시 성 남창 우민사 경계인의 삶_쓰시마 섬 성지 또한 소통 막히면 '그들만의 성지'일 뿐_세르기예프 수도원 산 자와 죽은 자의 공존 공간_유럽의 묘지 절은 신사를 품고, 신사는 절을 안고_일본 사찰과 신사 제5부 개발과 보존에 대한 생각 근대문화유산_강화성당과 군산 동국사 그리운 그곳_청암사 극락전 요사채 성보와 유물_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소유권과 관리권 사이에서_《조선왕조실록》 모양 없는 성지_폐사지 낮잠에서 깨어나니 산나물 향 그윽하네_용기사, 법수사, 심원사 죽어 있는 문화, 살아 있는 문화_베이징 자금성 우리가 전통 사찰을 가질 자격이 있는가_경주 불국사 복원과 개조_사찰 개조 물은 흘러야 한다_지리산 댐 개발 물결에 휩쓸린 사찰 _사찰 공원화 오래된 도시의 삶의 이야기가 사라져간다_새 피맛길 황사 그리고 흙비_의성 탑리 전탑 수다사가 문을 닫은 까닭은_사찰환경보존 동굴 속 천년 어둠을 밝히는 등불 한 줄기_신계사 시간과 공간과 인간이 합쳐지는 순간 / 조성룡 |
원철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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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몽암은 그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단종이 유배를 오기 전 ‘대궐(禁: 대궐 금)에 있을 때 꿈에 나타난 그 집’이라는 것에서 연유한다. 하지만 사실이 그렇더라도 드러내놓고 말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 자체가 또 다른 오해를 낳을 수 있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말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능히 시빗거리가 될 만한 이름인 셈이다. 어리고 소심한 단종은 역으로 ‘꿈에서도 돌아갈 대궐을 생각하는 집’으로 비칠까 봐 그 자신이 스스로 적이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런 속마음을 들킬까 봐 그 마음속까지 조심해야 할 시절이었다. 그래서 ‘절대로 돌아갈 것을 꿈도 꾸지 않는(禁: 금할 금) 집’으로 새겨듣도록 다시금 사족을 달아야 했던 건 아닐까. --- pp. 31-32.
고전적 토굴인 바위 굴 전면에 개량형 토굴이라 할 수 있는 소박한 집을 덧붙인 ‘퓨전 토굴’인 청허방장淸虛方丈은 현재 남아 있는 토굴 건축의 종합판이라 하겠다. 바위 굴이나 흙 굴에서 수행할 경우 그 마음의 긴장감과 비장감이야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오래 머물기에는 여러 가지로 무리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후대에는 토굴이 소박한 집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청허방장은 바위 굴과 집의 형태가 함께하는 독특한 모양의 토굴로 이름이 높다. 수행 공간인 굴과 휴식 공간인 집을 적절하게 조합한 까닭이다. --- p. 80. 측신厠神은 잘 달래야 뒤탈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변소 건물을 손볼 때는 항상 간소하나마 꼭 의식을 치르도록 했다. 고사를 마친 후 헐어낼 건물을 대중들이 돌아가며 막대기로 몇 번 큰 소리가 나도록 두드렸다. 이유는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알고 살고 있는 모든 미물들에게 알려주고 미리 옮겨 갈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한 배려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변소를 이용할 때는 인기척을 내고 들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담분귀?糞鬼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배설물을 먹고 산다고 한다. 들어감을 알리지 않고 갑자기 설사라도 하게 되면 그가 미처 비킬 틈도 없이 배설물을 그대로 뒤집어쓰게 된다. 당연히 화를 내면서 용변 보는 이의 배를 걷어차서 배탈이 나도록 만든다고 했다. --- p. 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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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 대표 문필가 원철 스님,
옛 절집에서 스웨덴 숲속 교회정원에 이르기까지 불교적 관점에서 건축을 읽어내다 불교계 대표 문필가 원철 스님이 건축책을 냈다. 절집에 와서 제대로 한 것이라고는 ‘경전 보기’와 ‘글쓰기’밖에 없고, 별다른 취미나 능한 잡기가 없어 ‘승려 노릇 하기는 딱이다’라는 말을 들은 스님은 어느 날 ‘나도 취미를 가져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골라낸 취미가 ‘건축’. 그렇다고 해서 삽을 들고 땅을 판다거나 손수 흙벽돌을 찍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의 취미는 정확히 말하면 ‘건축책 읽기’다. 이렇게 읽어낸 책이 벽면을 가득 채운다. 한옥, 양옥, 퓨전 집을 가리지 않았고 종교 건물, 살림집, 공공건물, 사무실, 빌딩 등 분야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가 공적인 큰 집보다는 사적인 작은 집에 관심을 더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젊은 날에는 크고 장대한 것을 좋아했으나 암자와 작은 집은 사는 사람의 삶과 사상이 투영될 수 있고 그 사람의 의지대로 모든 것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세월의 묵은 때를 사람 냄새와 손때가 켜켜이 쌓인 격조 있는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것은 오랜 세월 써온 그의 글 솜씨에 기인한다. 《절집을 물고 물고기 떠 있네》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고, 물질로 된 건축물과 건축의 본질을 오가며 때로는 사찰 문화의 미래까지 사고하면서도 결국은 불심으로 돌아오는 경쾌한 글쓰기다. 문자로 쓰이지 않은 건축은 보는 사람마다 모두 달리 읽을 수 있다. 건축을 ‘읽는다’는 것은 한편으로 어느 정도 머리로서 건축을 이해했느냐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런데 건축을 온연히 읽어내려면 가슴으로 읽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온몸으로 읽어내야만 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토굴’이라는 말을 때론 팽팽한 긴장감으로 때론 느긋함이 함께하는 이중성을 가진 말로 읽어낸다. 일반인에게는 은둔자의 거처쯤으로 인식될 토굴이 그에게는 한 번쯤 살아보기를 꿈꾸는 이상향이 된다. 원효 스님은 《발심수행장》을 통해 “높은 산과 험한 바위가 있는 곳은 지혜 있는 수행자가 살 곳”이라며 토굴 예찬을 폈고, 국민 승려 성철 스님도 ‘안정 토굴’로 알려진 천제굴에서 수행했다. 이렇듯 내로라하는 선지식들이 토굴에서 밤낮을 잊은 용맹 정진의 결과로 수행 경지가 한 차원 높아지거나 혹은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의 쉼터로 삼기도 했다고 쓰고 있다. 절 안의 승려의 신분이지만, 절 밖의 시선을 갖추며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전문성과 역사성 그리고 문학성을 이 책에서 이뤄내고 있는 것이다. 《절집을 물고 물고기 떠 있네》는 건축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역사책이나 문학을 읽는 즐거움도 준다. 이 책 곳곳에는 다양한 설화와 온갖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근심을 풀다_절집 해우소'편에는 절집의 오래된 관습으로 측신을 달래야 뒤탈이 없다는 이야기를 통해 생명을 존중 이야기를 풀어낸다. 옛 어른들은 간소하나마 변소 건물을 손 볼 때가 되면 작은 의식을 치르도록 했다고 한다. 고사를 지낸 후 헐어낼 건물을 대중들이 돌아가며 막대기로 큰 소리가 나도록 두드렸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곳을 삶의 터전으로 알고 사는 모든 미물들에게 미리 옮겨갈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한 배려라고 한다. '절개의 상징_개성 선죽교'편에는 선죽교 다리 밑에 숨어 있던 자객에게 죽임을 당한 정몽주와 ‘송도삼절’의 주인공 황진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끌어온다.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는 참으로 여성스러운 분위기의 시를 남긴 그리하여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외치다가 선죽교에서 최후의 피를 뿌렸던 정몽주와 “명월이 공산에 가득하니 쉬어 간들 어떠하리”라는 시를 우아하게 읊조리며 “백 명의 낭군이라한들 어찌 모두 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며 온갖 염문을 뿌린 꺼릴 것 없는 기질의 소유자 황진이라는 두 역사적 인물을 한자리로 끌어온다. 일상 속에서 세상과 소통하는 깊은 울림 건축을 글로 읽어내면서 원철 스님은 건축에 시를 입힌다. 그리하여 평범했던 건축이 다른 차원으로 되살아나도록 한다. 단순히 시적 영감으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건축’과 ‘세계’와 ‘나’의 본질적 관계를 드러낸다. 그래서 그가 읽어낸 건축은 아주 새로운 의미로 독자를 이끈다. 또한 원철 스님의 건축 읽기의 독특함은 그 관심의 폭이 방대하고 깊다는 점이다. 모든 건축적 대상을 ‘승려’라는 신분 그리고 ‘불교’라는 입장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적인 한계와 취향을 넘어서고 있다. 그 동안 마땅히 순례했을 불교성지는 물론, 뜻밖에 유럽의 기독교 도시와 유적에서도 의미 있는 메시지를 찾아 읽어낸다. 스?덴의 ‘숲속의 교회정원’이라고 불리는 스코그스키르코가르덴 묘지공원과 이탈리아의 도시형 묘지인 산 카탈도 공동묘지를 소개하면서 죽은 자를 어떻게 하든지 멀리 밀쳐내려 하는 우리의 실정을 토로한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철저히 분리하려는 이기적인 생각에서 그 이유를 찾아내며 결국 누구든지 언젠가는 죽을 것인데 늘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한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님을 거듭 강조한다. “나는 설사 땅 한 평, 공간 한 칸이라고 할지라도 죽은 후에는 차지하지 않겠다”라는 말로 남은 자에게 또 다른 짐을 지우지 않는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한다. 스님의 말대로 모든 것은 한 생각 차이일 뿐이다. 원철 스님의 글은 간결하다. 그래서 저자와 함께 읽는 듯한 즐거움이 있다. 스님은 도대체 그리 바삐 살면서 언제 그렇게 깊고 넓게 공부를 했을까. 그의 글을 만나면서 해인사 계곡의 맑고 힘찬 물소리가 귓전을 맴돌고, 잠을 청하기 전 달빛을 바라보며 조주 선사의 달빛 예찬의 글이 떠오른다. 건축가 조성룡 선생의 추천의 글처럼 집 지을 땅을 살피고 터를 만들어 맑은 신심으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라 불전을 궁리해나가는 ‘절집 짓는 스님 건축가’가 이 시대에도 나오기를 기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