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서문 : 남보다 늦게, 그러나 길잡이별로
1. 마들렌카에서 매들린 올브라이트로 열한 살,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나 미국으로 외국인에서 시민권 없는 미국 소녀로 웰즐리 여대생, 조 올브라이트와 결혼하다 집에 있는 엄마와 집에 있지 않은 엄마의 이분법 올브라이트 부인, 워싱턴에 진출하다 백악관과 브레진스키, 그리고 카터 행정부 이혼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 벨벳 혁명, 벨벳 분열 2. 열네 벌의 양복과 한 벌의 스커트 열네 벌의 양복과 한 벌의 스커트 내전으로 얼룩진 지구촌 세계를 내 집처럼, 발로 뛰는 외교 발칸 반도에 떠도는 공포 내 목소리의 힘 3. 마담 세크러터리 국무 장관이 되어 주십시오 유대인 국무 장관, 내 가족의 비극사 |
노은정의 다른 상품
|
시간은 어느새 9시 45분이 되었다. 나는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지만 내 몸은 스스로 몸속에서 독한 카페인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을 다잡을 필요가 있었다. '대통령이 마음을 바꾼 거야. 아마 늦게까지 고민하는 그에게 한밤중에 누군가가 결정을 번복하라고 얘기한 걸 거야. 어쩌면 유엔 대사 자리조차 못 맡을지도 몰라.' 이윽고 9시 47분에 전화벨이 울렸다. 일레인이 전화를 받고 잠시 얘기를 듣더니 조용히 내게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국무 장관이 되어 주십시오." 이것이 대통령이 처음 꺼낸 말이었다. 나는 마침내 사실을 믿게 되었다. 나는 느린 말투로 대답했다. "영광이고 감사할 뿐입니다. 물론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대통령은 내게 따뜻한 축하 인사를 전하고는 마무리 인사를 하려 했지만 나는 황급히 이를 저지했다. "고맙습니다. 아마 저희 부모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좋아하셨을 겁니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 p.373 |
|
◈ 제1부 마들렌카에서 매들린 올브라이트로 1937년 5월 15일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서 태어난 마들렌카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두 살 때 조국을 떠난다. 망명 정부에서 정보 분야를 담당하던 아버지를 따라 런던에서 생활하던 그녀의 가족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조국으로 돌아갔지만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화되면서 베오그라드를 거쳐 대서양을 건넌다. 조국 체코슬로바키아를 뒤로 하고 미국행 선택한 것이다. 웰즐리 대학 시절 미국 굴지의 미디어 그룹인 콕스 가문의 상속자 중 한 명인 조셉 올브라이트를 만나 졸업 후 곧바로 결혼한다. 셋째 아이를 사산하기도 했지만 세 아이를 키우며 행복한 가정을 꾸리던 마흔다섯 살의 그녀는 어느 날 “당신보다 더 젊고 예쁜 여자가 좋다.”라는 남편의 일방적인 이혼 통고를 받는다. 이혼 후 그녀는 조지타운 대학 교수와 민주당 국제 외교 전문 위원, 상원 의원 보좌관 등의 일을 한꺼번에 맡아 일하면서 이혼의 고통에서 벗어나 정치적 경력을 쌓아 나간다. ◈ 제2부 열네 벌의 양복과 한 벌의 스커트 클린턴 행정부 1기 내각에서 유엔 대사로 임명된 올브라이트는 그때부터 미국의 대변자이자 남성 대사들 사이에서 유일한 여성 대사로 활약한다. 클린턴 행정부는 세계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곧 미국의 국익을 증진시키는 일이라는 비전을 갖고 있었고, 올브라이트는 미국을 대표하여 유엔 평화 유지 활동에서 미국이 더 큰 역할을 맡도록 노력한다. 그녀는 아프리카의 르완다와 발칸 반도에 유엔 평화 유지군을 파견하는 데 앞장섰지만, 미국의 국익을 우선시하는 미 의회의 반대에 부딪혀 적잖은 시련을 겪기도 했다. 내가 유엔에서 일하면서 가장 뼈저리게 후회하는 것은 미국과 국제 사회가 소말리아 사태를 초기에 막을 수 있었는데도 그 조치를 취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분쟁 지역의 당사자들은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 정치 체제를 지니고 있기에 각지의 상황은 저마다 달랐다. 따라서 강압적이거나 획일적인 접근법은 먹혀들지 않는다. 내가 배운 교훈은 지극히 명백한 것이었다. 국제 사회는 자연적 혹은 인위적 참사로 인해 위기에 처한 국가를 도와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