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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여행자
윤대녕
중앙m&b 2003.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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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눈의 부름
기린 한 마리
코끼리 두 마리
쥐 세 마리
개구리 네 마리
달팽이 다섯 마리
나비 여섯 마리
고양이 일곱 마리
연필 여덟 자루
칸나 아홉 송이
손가락 열 개
눈의 소리
눈아이와 보낸 한 시간
회향
작가 후기

저자 소개 1

YOON DEA NYUNG,尹大寧

196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단국대 불문과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8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원」이 당선되었고, 1990년 [문학사상]에서 「어머니의 숲」으로 신인상을 받아 등단했다. 출판사와 기업체 홍보실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1994년 『은어낚시통신』을 발표하며 전업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 책을 통해 존재의 시원에 대한 천착을 통해 우수와 허무가 짙게 깔린 독특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며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 후 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떠오르며 '존재의 시원에 대한 그리움'을 그만의 독특한 문체로 그려나가고
196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단국대 불문과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8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원」이 당선되었고, 1990년 [문학사상]에서 「어머니의 숲」으로 신인상을 받아 등단했다. 출판사와 기업체 홍보실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1994년 『은어낚시통신』을 발표하며 전업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 책을 통해 존재의 시원에 대한 천착을 통해 우수와 허무가 짙게 깔린 독특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며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 후 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떠오르며 '존재의 시원에 대한 그리움'을 그만의 독특한 문체로 그려나가고 있다. 오늘의 젊은예술가상(1994), 이상문학상(1996), 현대문학상(1998), 이효석문학상(2003), 김유정문학상(2007), 김준성문학상(2012)을 수상했다. 2019년 현재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여섯 살 이전의 기억은 전혀 뇌리에 남아 있지 않다는 그의 최초의 기억은 조모의 등에 업혀 천연두 예방 주사를 맞기 위해 초등학교에 가던 날이다. 주사 바늘이 몸에 박히는 순간 제대로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일곱 살 때 조부가 교장으로 있던 학교에 들어갔다. 입학도 안 하고 1학년 2학기에 학교 소사에게 끌려가 교실이라는 낯선 공간에 내던져진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아버지에게 한자를 배웠다. 한자 공부가 끝나면 조부는 밤길에 막걸리 심부름이나 빈 대두병을 들려 석유를 받아 오게 했다. 오는 길이 무서워 주전가 꼭지에 입을 대고 찔끔찔끔 막걸리를 빨아먹거나 당근밭에 웅크리고 앉아 석유 냄새를 맡곤 했던 것이 서글프면서도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독서 취미가 다소 병적으로 변해,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 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가 우연히 '동맥'이라는 문학 동인회에 가입한다. 그때부터 치기와 겉멋이 무엇인지 알게 돼 선배들을 따라 술집을 전전하기도 하고 백일장이나 현상 문예에 투고하기도 했고 또 가끔 상을 받기도 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거의 한 달에 한 편씩 소설을 써대며 찬바람이 불면 벌써부터 신춘 문예 병이 들어 방안에 처박히기도 했다.

대학에 가서는 자취방에 처박혀 롤랑 바르트나 바슐라르, 프레이저, 융 같은 이들의 저작을 교과서 대신 읽었고 어찌다 학교에 가도 뭘 얻어들을 게 없나 싶어 국문과나 기웃거렸다. 1학년 때부터 매년 신춘 문예에 응모했지만 계속 낙선이어서 3학년을 마치고 화천에 있는 7사단으로 입대한다. 군에 있을 때에는 밖에서 우편으로 부쳐 온 시집들을 성경처럼 읽으며 제대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때 군복을 입고 100권쯤 읽은 시집들이 훗날 글쓰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제대 후 1주일 만에 공주의 조그만 암자에 들어가 유예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을 투명하게 보려고 몸부림쳤다. 이듬해 봄이 왔을 때도 산에서 내려가는 일을 자꾸 뒤로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뻔한 현실론에 떠밀려 다시 복학했고 한 순간 번뜩,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문학이라는 것을 아프게 깨닫는다.

데뷔 이래 줄곧 시적 감수성이 뚝뚝 묻어나는 글쓰기로 주목을 받은 윤대녕은 ‘시적인 문체’를 지녔다는 찬사를 받는다. 그의 글에서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그만의 시적 색채가 느껴지는 문체가 있어서이다. 동시에 그의 글에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일상을 마치 스냅사진을 찍듯 자연스럽게 포착하여 그려내는 뛰어난 서사의 힘이 느껴진다.

윤대녕은 고전적 감각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동시대적 삶과 문화에 대한 예리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들을 지향점을 잃어버린 시대에 삶과 사랑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젊은 세대의 일상에 시적 묘사와 신화적 상징을 투사함으로서 삶의 근원적 비의를 탐색한다. 내성적 문체, 진지한 시선, 시적 상상력과 회화적인 감수성, 치밀한 이미지 구성으로 우리 소설의 새로운 표정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품으로『남쪽 계단을 보라』,『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대설주의보』를 비롯해 장편소설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추억의 아주 먼 곳』,『달의 지평선』,『코카콜라 애인』, 『사슴벌레 여자』, 『미란』 등을 발표했다. 산문집 『그녀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것들』, 『누가 걸어간다』, 『어머니의 수저』,『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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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3년 10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280쪽 | 354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57571606

책 속으로

나라는 존재도 이 무량히 퍼붓는 눈송이 중의 하나가 아닐까. 세상의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내가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몰라도 다 함께 이 지상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함께 쌓여 다른 세상을 만나는 것은 아닐까. 더불어 내가 한 송이 눈이 되어 떠돌 때 가슴에 품고 있는 상처나 고통도 세상과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닐까.

.

"근데 아저씨는 어디서 왔어요?"
궁리 끝에 나는 동화(童話)식으로 대꾸했다.
"눈이 아주 많이 내리는 나라. 어젯밤 그곳에서 왔어."
너를 만나러.
"정말? 와 좋겠다."
금방 눈빛이 환해지며 수가 테이블 위에 두 팔을 올려놓고 몸을 기울여왔다.
"거기에서는 다들 장화를 신고 다녀. 눈 때문에 말이야. 남자는 파란색, 여자는 빨간색, 그리고 또 다들 우산을 쓰고 다니지."
"눈 때문에?"
"음. 또 눈으로 만든 얼음집도 있어. 거기서 아이들이 등불을 켜놓고 살아."
"음, 멋있어. 근데 눈이 다 녹으면 그애들은 어디로 가?"
예기치 못했던 질문에 나는 순간 당황했다.
"어...... 봄이 되면 눈과 함께 다들 푸른 하늘로 올라가. 그리고 겨울까지 기다렸다가 또 눈이 내리면 함께 내려와서 얼음집을 짓고 사는 거야."
"음, 근사한 얘기야. 그런데 아저씨는 거기서 뭐 해?"
또다시 예기치 못했던 질문.
"어..... 아이들에게 얼음집을 지어 살게 하지."
"그럼 아저씨는 다시 거기로 갈 거야?"
"음, 그래."
수가 표정을 스윽 바꾸며 당돌한 눈빛으로 물어왔다.
"그럼 언제 또 나를 만나러 와?"
순간 나는 정수리를 얻어맞은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과연 언제 다시 올 것인가.

--- pp. 262∼263

"이런 날은 텔레비전 속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그녀는 허리를 굽혀 내게 되물었다.
"캔 유 텔 미 리피트?"
"이렇게 날이 캄캄하면 텔레비전 속에서 아이가 울지 않냐구요."
이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듣고 나는 소름이 끼쳤다.
"지금 텔레비전 속이잖아요. 캄캄해요."
나는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잘 훈련된 표정으로 희미하게 웃으면서 덧붙였다.
"근데 아기가 울어요? 여긴 아기가 없어요. 아기는 호텔에 오지 않아요."
그렇다면 나도 블랙 유머로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유치원 보모의 흉내를 내서 말했다. 그녀의 눈앞에 손가락으로 열심히 그림까지 그려가며.
"나는 고장난 텔레비전입니다. 내 속에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눈만 내리면 웁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 아이는 젖은 눈이 내리던 날 추운 병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서 스윽 웃음이 걷혔다. 그녀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더니 다시는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 pp. 186∼187

관련 자료

눈을 소재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은 팔 년 전, 그때 타클라마칸에서 우연찮게 비롯되었다.
당시 나는 실크로드를 여행 중이었는데, 어느 날 저녁 사막에 내리는 눈을 목격하게 되었다. 사막에서, 그것은 신기루와 다름없는 현상이었다. 모래와 눈. 그토록 이질적인 두 개의 이미지가 하나로 겹쳐지면서 그 부산한 틈새에서 머나먼 미지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 외침은 세월이 지나면서 내 귀에서 보다 선연해져갔다. (……)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다만 눈이 몰려가는 소리였을까. 아니면 어느 거친 바위틈에서 빠져나온 오래된 바람의 소리였을까. (……) 나는 우선 니가타로 갔다. 거기서 하루 묵은 다은 기차를 타고 겨울 해안선을 따라 아키타로 올라갔다. 그로부터 보름 동안 나는 눈이 퍼붓는 곳들을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고 취재를 한 다음 나머지 보름 동안은 오직 쓰기에 매달려 초고를 완성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2월의 일이었다. 이 소설은 아키타 현에 속해 있는 요코테라는 작은 도시에서 썼는데 커다란 창문을 통해 밤낮으로 눈이 퍼붓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낯선 곳에서 혼자였으므로 고독하고 행복한 순간이 매일 똑같이 되풀이되었다. 쉴새없이 퍼붓는 눈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랫는지도 모른다. 눈이 내리면 대낮에도 세상은 어둡고 불현듯 삶은 막막했다. 쌓은 눈은 흰색이지만 내릴 때는 캄캄한 회색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그 일이 추억으로 변했다. 사람이란 추억을 기다리며 삶을 견디는 것이다. (……) 눈을 따라 이동했던 일본에서의 한 달이 내게는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고 오래 묵은 마음의 부담 하나를 덜어낸 심정이다. 소설을 하나 끝낼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앞으로의 내 삶이 무척 궁금하다.

출판사 리뷰

어느 날 에이전시의 k라는 사람이 그에게 숫자놀이 책 한 권과 편지를 건넨다.

얼마 전부터 눈이 내리는 밤이면 텔레비전 속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곤 합니다. 12월 초에는 열흘을 쉬지 않고 눈이 내렸습니다. 이층 창문까지 눈이 쌓여 마치 전원이 나간 텔레비전 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 들더군요. 말하자면 그 속에서 아이가 우는 소리를 열흘 내내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는 어디 먼 곳에 버려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울음소리는 자기를 찾아달라고 호소하는 것처럼 들려왔습니다. 밤낮없는 울음소리에 저는 조금씩 미쳐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죠. 급기야 짐을 꾸려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아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숫자놀이 책에 적혀 있는 메모는 보름 동안 눈을 따라다니며 기록한 것들입니다. 제가 눈을 따라 여행한 곳은 일본 동북부에서도 특히 눈이 많이 내리는 곳들입니다. 하지만 저는 끝내 눈 속에 버려진 아이를 찾지 못했습니다.
터무니없이 들리겠지만, 혹시 선생님이라면 그 아이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편지를 써보냅니다. -본문 중에서(p23)

편지와 더불어 수수께끼 같은 글들이 볼펜으로 빼곡이 적혀져 있는 유아용 숫자놀이 책을 보낸 이는 박양숙이라는 이름의 여자다. 여자는 자신을 '눈의 감옥에 갇혀 살고 있는 무기수 같은 존재'라고 표현한다. 결국 그는 에이전시 k의 강권에 못 이겨 일본 여행길에 오른다. 눈 속에 실종된 아이를 찾아서. 이때부터 '그'는 '나'로 바뀌게 된다.

나 역시도 아이에 관한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외사촌 누이가 나의 아이를 가졌을 때, 나는 인공 유산을 주장했으나 그녀는 한 달 동안의 여행 끝에 배가 불러져 돌아왔다. 그리하여 외사촌 누이의 몸에서 나의 아이 '수'가 태어났고 그녀는 아이가 두 돌을 채 넘기기도 전에 아이와 함께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내 손에는 지금 일본에 사는 어떤 사람이 부쳐온 '눈을 찾아가는 지도'가 쥐어져 있다. 눈 속에서 버려진 아이를 찾아 달라고 하는.-본문 중에서(p39)

여행은 숫자 놀이 책에 쓰여져 있는 메모를 따라 시작되고, 메모는 눈을 따라 가고 있었다.

니가타 역에서 오전 11시 20분발 아키타행 열차에 오름.
아침은 호텔 식당에서 샌드위치와 커피. 기차 안에서 사사단고로 점심.
수많은 터널. 수많은 해안가 마을의 묘지. 바다에 하염없이 내리는 눈. -본문 중세서(p55)

아가야, 너무 추운 방이구나. 그렇지? 하지만 밖엔 지금 함박눈이 내리고 있단다. 빨간 장화를 신은 아이들이 우산을 쓰고 나란히 빵가게 앞을 걸어가고 있어.-본문 중에서(p63)

여자의 메모를 따라 니가타와 아키타를 거쳐 깊디깊은 고원에 있는 온천 '학의 탕'까지 간 나에게도 어느 순간 아이의 울음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가 내 가까이에 와 있었다. 나는 삼나무 숲 뒤편을 걸어가던 거인의 그림자를 떠올렸다. 그는 정녕 설인(雪人)이 아니었을까, 라는 깨달음이 다시금 이마를 스쳐갔다. 전율은 야릇한 공포로 변해 있었고 나는 꼼짝없이 눈 속에 파묻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커다란 힘의 그림자 속에서 불현듯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플 정도로 양쪽 귀를 활짝 벌려놓고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분명 아기가 울고 있는 소리였다. 아기한테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너무나 고독한 울음소리였다. 깊은 눈 속에 외홀로 버려져 있을 때 우는 울음. 그 울고 있는 아기를 거인의 그림자가 엄마처럼 가슴에 끌어안고 있는 형상이 눈앞에 환영처럼 나타났다.-본문 종에서(p91)

기린 한 마리에서부터 시작한 숫자놀이 책이 손가락 열 개에 이르렀을 무렵, 나는 다시 여행의 출발지였던 니가타로 돌아간다. 니가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숫자놀이 책과 편지를 보냈던 부부다. 엄마, 아빠라는 말 대신 일본말로 '유키' 즉 '눈'이라는 말을 제일 먼저 배웠던 딸아이를 사고로 잃고 나서, 부부 중 아내는 넋이 나갔다. 아내는 죽은 딸아이의 이빨 열 개와 딸아이의 숫자놀이 책을 가지고 여행을 떠나 눈 속에 아이의 이빨을 하나씩 묻었던 것이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지만 딸아이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글을 통해서라도 집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비록 세상에 태어나 한 해밖에 살지 못했지만 그것도 한 사람의 일생이잖아요. 그런데 이 눈구덩이뿐인 일본 동북부에 딸아이의 이빨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요. 무덤이 자그마치 열 개란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 딸아이가 머물 수 있는 집을 하나 지어 주세요. 그애가 들어가 살 수 있는 조그만 집 말예요. 딸아이가 분명히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증언해 주세요. 그저 눈으로 만든 조그만 집이면 됩니다.-본문 중에서(p249)

내가 만약 얼음집을 하나 지을 수 있다면, 지금도 눈이 까맣게 퍼붓고 있는 산 속에서 밤마다 울고 있는 아이를 정녕 그 안에 잠들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내 아이 수.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어쩌면 나는 얼음집을 하나 더 지어야만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라도.-본문 중에서(p252)

일본을 떠나기 직전 외사촌 누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오고, 그리하여 나는 수를 만나게 된다.

"근데 아저씨는 어디서 왔어요?"
"눈이 아주 많이 내리는 나라. 어젯밤 그곳에서 왔어."
너를 만나러.
(......)
"거기에서는 다들 장화를 신고 다녀. 눈 때문에 말이야. 남자는 파란색, 여자는 빨간색. 그리고 다들 우산을 쓰고 다니지."
"눈 때문에?"
"음. 또 눈으로 만든 얼음집도 있어. 거기서 아이들이 등불을 켜놓고 살아."
"음, 멋있어. 근데 눈이 다 녹으면 그애들은 어디로 가?"
"어......봄이 되면 눈과 함께 다들 푸른 하늘로 올라가. 그리고 겨울까지 기다렸다가 또 눈이 내리면 함께 내려와서 얼음집을 짓고 사는 거야."
"음, 근사한 얘기야. 그런데 아저씨는 거기서 뭐 해?
"어......아이들에게 얼음집을 지어 살게 하지."
"그럼, 아저씨는 다시 거기로 갈 거야?
"음, 그래."
"그럼, 언제 또 나를 만나러 와?"
-본문 중에서(p262)

누군가가 쓴 메모를 따라 눈 속을 헤매다니며 수수께끼를 풀던 '나'의 여행은 어느새 '수'를 찾는 여행길로 바뀌게 되고 '수'와 나의 화해를 통해 아이는 울음소리 밖으로 나와 잠시 모습을 드러낸 후 사라진다.

그때 그는 보았다. 웬 어린아이 하나가 활주로 끝에서부터 비행기를 향해 타박타박 걸어오는 것을. 환영이었을까. 아이는 활주로를 일직선으로 걸어와 비행기 옆에 와서 꿈꾸듯 사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트랩을 한 칸씩 걸어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트랩을 다 올라간 아이는 머리에 묻은 눈을 털고 나서 비행기 안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본문 중에서(p276)

추천평

<눈의 여행자>는 '눈'의 백색 이미지를 슬픈 운명의 수채화로 색채 변환시킨 소설이다. 잠깐 동안 제 형태를 보여주었다가 사라져버리는 눈처럼, 작가가 그리고 있는 슬픈 운명은 만남과 이별, 그리고 삶과 죽음의 마디에서 잠시 제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져버린다. 주인공은 근친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찾아가면서 이 소설 전편에 내리고 있는 운명의 눈들을 받아 안는다. 그 눈은 주인공이 간직한 기억과 그리움 속으로 녹아 들어가 육신의 누추와 어긋난 인연의 生을 정화시키는 힘이 되어준다. <눈의 여행자>는 눈에 관한 놀라운 물질적 상상력으로써 슬픈 운명의 핵심에 부드럽고 순결하게 육박해 들어간 소설인 것이다.
---강상희(문학평론가·경기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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