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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부름
기린 한 마리 코끼리 두 마리 쥐 세 마리 개구리 네 마리 달팽이 다섯 마리 나비 여섯 마리 고양이 일곱 마리 연필 여덟 자루 칸나 아홉 송이 손가락 열 개 눈의 소리 눈아이와 보낸 한 시간 회향 작가 후기 |
YOON DEA NYUNG,尹大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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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존재도 이 무량히 퍼붓는 눈송이 중의 하나가 아닐까. 세상의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내가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몰라도 다 함께 이 지상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함께 쌓여 다른 세상을 만나는 것은 아닐까. 더불어 내가 한 송이 눈이 되어 떠돌 때 가슴에 품고 있는 상처나 고통도 세상과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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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아저씨는 어디서 왔어요?"
궁리 끝에 나는 동화(童話)식으로 대꾸했다. "눈이 아주 많이 내리는 나라. 어젯밤 그곳에서 왔어." 너를 만나러. "정말? 와 좋겠다." 금방 눈빛이 환해지며 수가 테이블 위에 두 팔을 올려놓고 몸을 기울여왔다. "거기에서는 다들 장화를 신고 다녀. 눈 때문에 말이야. 남자는 파란색, 여자는 빨간색, 그리고 또 다들 우산을 쓰고 다니지." "눈 때문에?" "음. 또 눈으로 만든 얼음집도 있어. 거기서 아이들이 등불을 켜놓고 살아." "음, 멋있어. 근데 눈이 다 녹으면 그애들은 어디로 가?" 예기치 못했던 질문에 나는 순간 당황했다. "어...... 봄이 되면 눈과 함께 다들 푸른 하늘로 올라가. 그리고 겨울까지 기다렸다가 또 눈이 내리면 함께 내려와서 얼음집을 짓고 사는 거야." "음, 근사한 얘기야. 그런데 아저씨는 거기서 뭐 해?" 또다시 예기치 못했던 질문. "어..... 아이들에게 얼음집을 지어 살게 하지." "그럼 아저씨는 다시 거기로 갈 거야?" "음, 그래." 수가 표정을 스윽 바꾸며 당돌한 눈빛으로 물어왔다. "그럼 언제 또 나를 만나러 와?" 순간 나는 정수리를 얻어맞은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과연 언제 다시 올 것인가. --- pp. 262∼2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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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날은 텔레비전 속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그녀는 허리를 굽혀 내게 되물었다. "캔 유 텔 미 리피트?" "이렇게 날이 캄캄하면 텔레비전 속에서 아이가 울지 않냐구요." 이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듣고 나는 소름이 끼쳤다. "지금 텔레비전 속이잖아요. 캄캄해요." 나는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잘 훈련된 표정으로 희미하게 웃으면서 덧붙였다. "근데 아기가 울어요? 여긴 아기가 없어요. 아기는 호텔에 오지 않아요." 그렇다면 나도 블랙 유머로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유치원 보모의 흉내를 내서 말했다. 그녀의 눈앞에 손가락으로 열심히 그림까지 그려가며. "나는 고장난 텔레비전입니다. 내 속에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눈만 내리면 웁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 아이는 젖은 눈이 내리던 날 추운 병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서 스윽 웃음이 걷혔다. 그녀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더니 다시는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 pp. 186∼1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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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소재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은 팔 년 전, 그때 타클라마칸에서 우연찮게 비롯되었다.
당시 나는 실크로드를 여행 중이었는데, 어느 날 저녁 사막에 내리는 눈을 목격하게 되었다. 사막에서, 그것은 신기루와 다름없는 현상이었다. 모래와 눈. 그토록 이질적인 두 개의 이미지가 하나로 겹쳐지면서 그 부산한 틈새에서 머나먼 미지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 외침은 세월이 지나면서 내 귀에서 보다 선연해져갔다. (……)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다만 눈이 몰려가는 소리였을까. 아니면 어느 거친 바위틈에서 빠져나온 오래된 바람의 소리였을까. (……) 나는 우선 니가타로 갔다. 거기서 하루 묵은 다은 기차를 타고 겨울 해안선을 따라 아키타로 올라갔다. 그로부터 보름 동안 나는 눈이 퍼붓는 곳들을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고 취재를 한 다음 나머지 보름 동안은 오직 쓰기에 매달려 초고를 완성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2월의 일이었다. 이 소설은 아키타 현에 속해 있는 요코테라는 작은 도시에서 썼는데 커다란 창문을 통해 밤낮으로 눈이 퍼붓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낯선 곳에서 혼자였으므로 고독하고 행복한 순간이 매일 똑같이 되풀이되었다. 쉴새없이 퍼붓는 눈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랫는지도 모른다. 눈이 내리면 대낮에도 세상은 어둡고 불현듯 삶은 막막했다. 쌓은 눈은 흰색이지만 내릴 때는 캄캄한 회색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그 일이 추억으로 변했다. 사람이란 추억을 기다리며 삶을 견디는 것이다. (……) 눈을 따라 이동했던 일본에서의 한 달이 내게는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고 오래 묵은 마음의 부담 하나를 덜어낸 심정이다. 소설을 하나 끝낼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앞으로의 내 삶이 무척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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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에이전시의 k라는 사람이 그에게 숫자놀이 책 한 권과 편지를 건넨다.
얼마 전부터 눈이 내리는 밤이면 텔레비전 속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곤 합니다. 12월 초에는 열흘을 쉬지 않고 눈이 내렸습니다. 이층 창문까지 눈이 쌓여 마치 전원이 나간 텔레비전 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 들더군요. 말하자면 그 속에서 아이가 우는 소리를 열흘 내내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는 어디 먼 곳에 버려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울음소리는 자기를 찾아달라고 호소하는 것처럼 들려왔습니다. 밤낮없는 울음소리에 저는 조금씩 미쳐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죠. 급기야 짐을 꾸려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아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숫자놀이 책에 적혀 있는 메모는 보름 동안 눈을 따라다니며 기록한 것들입니다. 제가 눈을 따라 여행한 곳은 일본 동북부에서도 특히 눈이 많이 내리는 곳들입니다. 하지만 저는 끝내 눈 속에 버려진 아이를 찾지 못했습니다. 터무니없이 들리겠지만, 혹시 선생님이라면 그 아이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편지를 써보냅니다. -본문 중에서(p23) 편지와 더불어 수수께끼 같은 글들이 볼펜으로 빼곡이 적혀져 있는 유아용 숫자놀이 책을 보낸 이는 박양숙이라는 이름의 여자다. 여자는 자신을 '눈의 감옥에 갇혀 살고 있는 무기수 같은 존재'라고 표현한다. 결국 그는 에이전시 k의 강권에 못 이겨 일본 여행길에 오른다. 눈 속에 실종된 아이를 찾아서. 이때부터 '그'는 '나'로 바뀌게 된다. 나 역시도 아이에 관한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외사촌 누이가 나의 아이를 가졌을 때, 나는 인공 유산을 주장했으나 그녀는 한 달 동안의 여행 끝에 배가 불러져 돌아왔다. 그리하여 외사촌 누이의 몸에서 나의 아이 '수'가 태어났고 그녀는 아이가 두 돌을 채 넘기기도 전에 아이와 함께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내 손에는 지금 일본에 사는 어떤 사람이 부쳐온 '눈을 찾아가는 지도'가 쥐어져 있다. 눈 속에서 버려진 아이를 찾아 달라고 하는.-본문 중에서(p39) 여행은 숫자 놀이 책에 쓰여져 있는 메모를 따라 시작되고, 메모는 눈을 따라 가고 있었다. 니가타 역에서 오전 11시 20분발 아키타행 열차에 오름. 아침은 호텔 식당에서 샌드위치와 커피. 기차 안에서 사사단고로 점심. 수많은 터널. 수많은 해안가 마을의 묘지. 바다에 하염없이 내리는 눈. -본문 중세서(p55) 아가야, 너무 추운 방이구나. 그렇지? 하지만 밖엔 지금 함박눈이 내리고 있단다. 빨간 장화를 신은 아이들이 우산을 쓰고 나란히 빵가게 앞을 걸어가고 있어.-본문 중에서(p63) 여자의 메모를 따라 니가타와 아키타를 거쳐 깊디깊은 고원에 있는 온천 '학의 탕'까지 간 나에게도 어느 순간 아이의 울음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가 내 가까이에 와 있었다. 나는 삼나무 숲 뒤편을 걸어가던 거인의 그림자를 떠올렸다. 그는 정녕 설인(雪人)이 아니었을까, 라는 깨달음이 다시금 이마를 스쳐갔다. 전율은 야릇한 공포로 변해 있었고 나는 꼼짝없이 눈 속에 파묻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커다란 힘의 그림자 속에서 불현듯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플 정도로 양쪽 귀를 활짝 벌려놓고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분명 아기가 울고 있는 소리였다. 아기한테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너무나 고독한 울음소리였다. 깊은 눈 속에 외홀로 버려져 있을 때 우는 울음. 그 울고 있는 아기를 거인의 그림자가 엄마처럼 가슴에 끌어안고 있는 형상이 눈앞에 환영처럼 나타났다.-본문 종에서(p91) 기린 한 마리에서부터 시작한 숫자놀이 책이 손가락 열 개에 이르렀을 무렵, 나는 다시 여행의 출발지였던 니가타로 돌아간다. 니가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숫자놀이 책과 편지를 보냈던 부부다. 엄마, 아빠라는 말 대신 일본말로 '유키' 즉 '눈'이라는 말을 제일 먼저 배웠던 딸아이를 사고로 잃고 나서, 부부 중 아내는 넋이 나갔다. 아내는 죽은 딸아이의 이빨 열 개와 딸아이의 숫자놀이 책을 가지고 여행을 떠나 눈 속에 아이의 이빨을 하나씩 묻었던 것이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지만 딸아이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글을 통해서라도 집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비록 세상에 태어나 한 해밖에 살지 못했지만 그것도 한 사람의 일생이잖아요. 그런데 이 눈구덩이뿐인 일본 동북부에 딸아이의 이빨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요. 무덤이 자그마치 열 개란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 딸아이가 머물 수 있는 집을 하나 지어 주세요. 그애가 들어가 살 수 있는 조그만 집 말예요. 딸아이가 분명히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증언해 주세요. 그저 눈으로 만든 조그만 집이면 됩니다.-본문 중에서(p249) 내가 만약 얼음집을 하나 지을 수 있다면, 지금도 눈이 까맣게 퍼붓고 있는 산 속에서 밤마다 울고 있는 아이를 정녕 그 안에 잠들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내 아이 수.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어쩌면 나는 얼음집을 하나 더 지어야만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라도.-본문 중에서(p252) 일본을 떠나기 직전 외사촌 누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오고, 그리하여 나는 수를 만나게 된다. "근데 아저씨는 어디서 왔어요?" "눈이 아주 많이 내리는 나라. 어젯밤 그곳에서 왔어." 너를 만나러. (......) "거기에서는 다들 장화를 신고 다녀. 눈 때문에 말이야. 남자는 파란색, 여자는 빨간색. 그리고 다들 우산을 쓰고 다니지." "눈 때문에?" "음. 또 눈으로 만든 얼음집도 있어. 거기서 아이들이 등불을 켜놓고 살아." "음, 멋있어. 근데 눈이 다 녹으면 그애들은 어디로 가?" "어......봄이 되면 눈과 함께 다들 푸른 하늘로 올라가. 그리고 겨울까지 기다렸다가 또 눈이 내리면 함께 내려와서 얼음집을 짓고 사는 거야." "음, 근사한 얘기야. 그런데 아저씨는 거기서 뭐 해? "어......아이들에게 얼음집을 지어 살게 하지." "그럼, 아저씨는 다시 거기로 갈 거야? "음, 그래." "그럼, 언제 또 나를 만나러 와?" -본문 중에서(p262) 누군가가 쓴 메모를 따라 눈 속을 헤매다니며 수수께끼를 풀던 '나'의 여행은 어느새 '수'를 찾는 여행길로 바뀌게 되고 '수'와 나의 화해를 통해 아이는 울음소리 밖으로 나와 잠시 모습을 드러낸 후 사라진다. 그때 그는 보았다. 웬 어린아이 하나가 활주로 끝에서부터 비행기를 향해 타박타박 걸어오는 것을. 환영이었을까. 아이는 활주로를 일직선으로 걸어와 비행기 옆에 와서 꿈꾸듯 사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트랩을 한 칸씩 걸어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트랩을 다 올라간 아이는 머리에 묻은 눈을 털고 나서 비행기 안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본문 중에서(p27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