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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 작가의 말
초판 작가의 말 숲속의 빈터 작품 해설 _ 빈터, 빈 타일, 빈 시간_최성실(문학평론가) |
崔允, 최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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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 그 일이 일어났다. 중앙선을 가운데에 두고 양쪽으로 정체해 있던 차의 대열이 한순간 비워지면서 그 자리에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풍경이 들어섰다. 북방의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키 크고 늠름한 전나무 숲이 길 양쪽으로 나 있고, 그 사이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눈 덮인 흰 길이 쫙 펼쳐져 있었다. 나는 현실에서 그런 풍경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 난생처음 본 풍경은 내게 싸한 아픔을 불러일으키면서, 마치 전신마취에서 깨어날 때와도 같은 안락한 느낌으로 나를 감싸 안았다. 전나무 숲에 둘러싸인 그 길 한중간에 몸을 누이고 쉬고 싶은 그런 평화와 안락의 느낌.
--- p.20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온 길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화란이는 여전히 짖어대며 내 뒤를 따라, 그리고 곧이어 나를 앞서서 뛰어 내려갔다. 나는 단숨에 집까지 뛰었다. 남자가 문을 열고 나를 보았는지, 내 뒤를 쫓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내가 생각해도 무서운 속도로 뛰었으니까. 집에 돌아오자마자 내가 바라본 것은 앞산의 하얀 빈터였다. 그곳은 비어 있었다. 다시 보아도 여전히 비어 있었다. --- p.54~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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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을 갓 넘긴 ‘나’와 민구는 결혼하지 않은 채 동거하기로 하고 단순하고 행복한 삶을 꿈꾸며 시골에 집을 얻는다. 건너편에 빈터가 있고 그 뒤로 전나무 숲이 펼쳐져 있는 이 집에 필요한 것은 목욕탕뿐이다. 그들은 광으로 쓰였던 곳을 개조해 직접 목욕탕을 만들기로 하고 없는 시간을 쪼개 벽에 시멘트를 바르고 타일을 붙이며 자신들만의 목욕탕을 만들어간다. 어느 주말, ‘나’는 건너편 산 둔덕의 작은 빈터에서 전라의 늙은 남자가 자위행위를 하는 것을 목격한다. 하지만 민구는 잘못 본 거 아니냐며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마침내 민구도 그 남자를 보게 되면서 그들이 사는 주변 공간은 더 이상 안락하고 자유로운 공간이 되지 못한다. 목욕탕 배수관 공사를 하러 온 ‘천우공사 아저씨’를 통해 알게 된 그 남자의 정체는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육군 주임상사 출신인 남자는 어느 맑은 오월 대낮에 M16 에이 원 소총을 갖고 집을 나서 길에서 만난 마을 사람들을 이유 없이 쏴 죽였던 사람이었다. 그는 경찰로 넘겨졌으나 감옥에 가지 않고 정신병원에 있다 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 뒤의 방공호에서 가스폭발 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이후로도 남자는 가끔씩 숲속의 빈터에 나타난다. ‘나’와 민구는 배수관 공사는 끝났지만 타일은 붙이다 만 목욕탕으로 향한다. 그들은 욕조 안에 몸을 담근 채 말한다. 봄이 되기 전에 빈터에 전나무를 심어버리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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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빈터’, 결코 메워질 수 없는 ‘마이너스’의 의미무엇이 우리의 삶을 흔드는가? 예기치 않은 타인이 출현할 때이다.『숲속의 빈터』는 풍경처럼 자연스럽게 일상으로 들어오는 낯선 타인과 관계의 영역을 어떻게 영위해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한 남자의 출현은 부부의 삶에 조금씩 균열을 가한다. 숲속 건너편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부부에게 유령처럼 취급당하지만 이 허구의 존재는 점차 부부의 일상에 가시화된다. 그리고 허구의 존재가 실재하는 인간으로 드러나면서 일상을 흔들었던 문제는 리얼한 공포가 된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사소한 일상의 회복이다. 갈라진 틈새를 메우고 손질하는 복구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다고 믿는 의지로 귀결된다. 숲속의 빈터에 전나무를 심기로 한 것이다. 추위에 잘 견디며 숲을 이루는 전나무는 일상의 공포를 상쇄하는 푸른 상징이다. 그들이 단 하나 바랐던 목욕탕이 있는 삶은 일상의 안락, 평범한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타일이 붙여지지 않은 시멘트벽과 바닥의 적나라한 모습으로 전락한다. 이것은 숲속의 빈터를 연상시킨다. 이제 빈터는 채워야 할 추한 공간이 된다. 부부는 희망이랄 것도 없는 나무 심기 계획을 세우며 현재의 목욕탕이 주는 안락함을 더는 열망하지 않는다. 도시를 피해 정착한 숲속 마을조차도 이제는 둘만의 안락한 공간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은 자못 비극적이다. 그럼으로써 이 소설은 자신만의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부부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은 우연이었으며, 마을에서 일어났던 과거의 사건 또한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는 점에서 일상에 내재된 폭력과 공포의 심각성을 체감하게 되는 것도 이 소설의 구조적 특징이다. 이 빈터는 전나무로 메꾸어야 할 공간이 되지만 결코 메꿀 수 없는 마이너스로서의 빈터이기도 하다는 이중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원점으로의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빈터라는 점에서 아직 푸른색의 타일만큼 희망은 존재한다. 물론 그 희망은 절반짜리에 불과하다. 절반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폭력의 역사이며 나머지 절반은 심은 전나무들이 푸르게 숲을 이루게 될 미래의 몫인 것이다.세계의 붕괴 속에서, 단절이 아니라 소외를 견뎌내면서 고독한 자신을 증명해낸 다섯 작가들,소설향 특별판무심하게 다가오는 작은 폭력의 힘(『숲속의 빈터』), 언어와 서사의 무의미(『하품』), 본능적인 감각의 유혹과 허기(『아주 사소한 중독』), 타락과 파괴에 대한 치명적인 숙명(『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성장 없이 치르는 성년식(『죽은 올빼미 농장』).작가정신 소설향 시리즈는, 한국문학의 현장에서 활발하게 창작하는 신진에서 원로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층의 작가들이 쓴 중편소설을 한 권의 단행본으로 펴내는 기획으로 시작되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이러한 출판 기획은 중편소설의 현주소를 정리함으로써, 장편과 단편으로 편중되어 있던 한국 소설의 구획을 갱신하는 동기가 되었다. 실제로 단편이라는 지루한 반복을 벗어나고 싶은 일탈 욕구와 장편이라는 무거운 중압감을 피하고 싶은 부담감은 작가들의 창작에 큰 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향 시리즈를 통해 출현한 수많은 중편소설들은 단순히 출판 경향의 변화만이 아니라 소설 문학의 내적 변화마저 시도하게 된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표적인 작품인 최윤의 『숲 속의 빈터』, 정영문의 『하품』, 함정임의 『아주 사소한 중독』, 이응준의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백민석의 『죽은 올빼미 농장』에 새로운 옷을 입혀 내놓는 것은, 소설향 시리즈의 현재적 의미를 재확인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번에 소설향 시리즈 중에서 특별판으로 다시 선보이는 다섯 편의 소설은, 인간의 말초적인 심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데올로기 체제의 붕괴로 ‘개인’에 함몰될 수밖에 없었던 현대인의 내면을 분석하고(백민석의 『죽은 올빼미 농장』), 말과 이야기가 가진 허위에 눈뜨기 위해 수 없는 무의미에 집착하는 ‘개인’ 속의 ‘개인’을 찾는 장르적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정영문의 『하품』). 또 정치와 사회와 이념의 무게에 짓눌려 외면해왔던 감각을 철저한 극단적인 폐허로 가는 파국(이응준의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혹은 감정과의 중독적인 관계(함정임의 『아주 사소한 중독』)로 드러내는가 하면, 일상의 사소한 변화가 주는 커다란 파문을 과거 역사와의 연결로 상징화(최윤의 『숲속의 빈터』)한다. 이처럼 다섯 편의 소설들은 각기 서로 다른 다채로운 색깔을 가지고 있으나, 저마다 역사의 이념적 무게 너머에 감추어져 있던 심리에 탐닉하는 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다시 읽어볼 만한 주요 한국 문학의 범주에 속할 수 있다. 추천사『숲 속의 빈터』는 현재를 움직이는 규칙은 과거에 있으며 그런 한에서 과거, 또는 현재가 완료되는 것은 미래 속에서라는, 그리고 그 움직임의 동선이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는 깔끔한 소설이다. 우리의 과거는 미래에만 완성될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알리바이는 미래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어떠한 형태로 다가올지 모르는 과거의 폭력성은 미완의 과거 속에 웅크리고 있다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살아온 지난 과거에 달려 있다. 그 시간적인 메워짐의 의미를 빈 공간, 빈터로 치환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공간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시간의 혼재성과 삶의 구멍, 우연성 등을 구체화시키려는 작가적 의도의 소산이다.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의 무의식 속에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되지 못한 삶의 어쩔 수 없음, 그리고 끝나지 않고 현재에도 지속되는 과거의 폭력성, 우연하게 다가오는 공포스러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한 것이다. - 최성실(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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