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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으름 누리기
쉼 또는 게으름 천천히, 느리게, 있는 그대로 정원에서 무를 위한 시간 잠옷, 면양말, 젖가슴 2. 시간, 멈추어 버린 낮잠 자는 이의 추억 괴짜 밤과 잠 권태 속으로 일요일, 그 등대에서 시시한 이야기 옮기고 나서 |
Pierre Sans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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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를 향해서 가려면 우리는 뭘 거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단 하나의 얼굴, 단 한 마디의 말, 단 하나의 몸뚱이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식으로 설교하는 이들을, 허공을 바라보는 듯한 겁먹은 눈초리로 말까지 더듬거리는, 이른바 예언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 p.1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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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이른바 무위가 끊임없이 무슨 일을 벌여야 하는 실험실과 세미나의 열기에 더 많은 가치를 얹어 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또 살롱이라든지 그 비슷한 사교 모임의 공허함을 저 밖으로 내치거나 거기에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한데로 몰아 낸다면, 어떤 한 가지 생각은 극복할 길 없어 보이는 상황과 맞선 한 인간의 기발한 투쟁에서만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 p.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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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시계 속에 시간을 갉아먹는 쥐새끼 같은 건 없다고? 평화! 나는 당신에게 말한다. 낮잠, 그것은 잠정 휴전이라고. 마침내 고즈넉한 시간이라고.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깊은 숲 속의 빈터라고.”
― p.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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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게으르게 살 권리가 있다
우리는 누구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 때로 게으르게 살아야 이 물음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뭐에 쫓기듯 앞만 보면서 뛰어가는 사람들의 삶에는 이런 물음 자체가 빠져 있기 일쑤다. 도대체 왜 사나? 왜 일을 하나? 무턱대고 달리다가 넘어져서 또 무릎을 다치기보다 해넘이라도, 그 저녁놀이라도 보면서 빈둥거리는 시간을 가져 보자.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좀 더 나은 삶을 위하여. <게으름의 즐거움>은 느리고 한갓지게 사는 것이 정신 없이 바쁘게 사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는 데 그치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의 지은이들은 여기에서 예찬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언사로 게으름이, 느림이, 멈춤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삶의 질을 얼마나 끌어올리는지 이리저리 풀어헤쳐 보인다. 여기에는 작가나 철학자의 맛깔스럽고 울림이 남는 글이 있는가 하면, 정원 설계사나 물리학자의 색다르고 풋풋한 글도 있다. 깊이와 밀도가 느껴지는 글이 있는가 하면,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듯한 글도 있다. 어쩌라는 것인지, 문득 가슴에 바람 구멍을 내놓는 글까지 있다. 잘 쉬려고 일한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는 ‘게으름 누리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1999년 4월 30일과 5월 1일에 프랑스의 텔레비전 방송사인 ‘카날 플뤼스’가 내보낸 다큐멘터리 ?게으름의 전파자들?과 ?왜 일을 하나??에 바탕을 두고 있다. 2부는 ‘시간, 멈추어 버린’이라는 부제로 작가와 학자, 기자로 있는 여섯 사람이 쓴 에세이를 다발로 묶어 놓은 것이다. 글 사이사이에 들어 있는 사진들은 마음을 쉬어 가게 하는 의자 구실을 한다. 2002년 여름, 한 결혼 정보 회사가 수도권에서 사는 25살~35살 미혼 남녀 56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휴가 대신 근무를 하면 수당을 많이 받을 경우 휴가를 반납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71.8%가 그래도 휴가를 가겠다고 답한 바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이제 우리 나라 사람들도 일을 하기 위하여 쉬는 것이 아니라, 잘 쉬기 위하여 일을 하는 쪽으로 의식이 바뀌는 중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뜨거운 지지를 보내고 있는 캐릭터 가운데 하나인 스노우캣의 이른바 ‘귀차니즘’ 또한 이런 현상을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산업 사회가 저물어 가고 이에 따라 노동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 땅에서,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게으름의 의미도 이제 새로 자리매김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오늘 한국 경제가 ‘버벅’거리고 있는 것이 우리가 일을 적게 해서는 아닐 터. ‘자아 충전’ 없이는 창의성도 없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또 지칠 줄 모르고 일한 것으로 유명한 윈스턴 처칠은 생전에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나는 피로를 모른다. 왜냐하면 제때제때 쉬어서 피로해지는 걸 막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디를 가나 좀처럼 놓지 못하는 휴대폰도 배터리가 다 닳으면 쓸모없는 물건이 되기 일쑤다. 다시 충전해야 그 물건도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피로에 절어서 일과 인간 관계에 내둘리는 사람은 이를테면 배터리가 다 된 채로 가까스로 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게으름은, 쉼은, 이를테면 자아 충전의 배터리 팩이자 발전소다. 심지어 한 사회의 문화도 거기에 무위와 권태라는 요소가 빠져 있으면 퇴행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류 문명사는 말해 준다. 게으름과 쉼은 언제 어디서나 문화와 예술을 꽃피게 하는 토양, 말하자면 부식토와 같은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개혁성을 상징하는 인물인 강금실 법무 장관은 지난 여름에 ‘통 크게’도 역대 장관들과 달리 1주일 휴가를 고스란히 다 써서 이야깃거리가 되기도 했다. 창의성이 중시되는 일을 할수록 쉴 때는 쉬면서 다음을 예비하는 것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도 권장해 마땅한 일이다. 뭘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위하여 피에르 쌍소는 지난 2000년에 번역 출간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통해 ‘느림의 철학자’로 우리 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에서 쌍소는 특유의 사유 방식에 따라 게으르게 사는 기쁨과 즐거움을 찬찬히 늘어놓는다. 게으름은 어디 아픈 것처럼, 몸져누운 것처럼 꼼짝도 하기 싫어하는 증세가 아니다. 그것은 ‘천천히, 느리게, 있는 그대로’ 삶을 누리려는 몸가짐이자 마음가짐이다. 게으름의 시간, 그 ‘존재의 아름다운 순간’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쌍소는 말한다. 크리스티앙 보뱅……. 이 이름 앞에서 문득 숨을 멈추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프랑스를 대표하는 에세이스트인 그는 이 책에서도 감성 어린 글로 어룽더룽한 삶의 무늬를 펼쳐 보인다. 프랑스 사람들의 게으름 예찬은 꽤 오랜 연원을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칼 마르크스의 사위로 알려진 폴 라파르그는 1880년에 내놓은 <게으를 권리>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 게으름이여, 이 오랜 고통에 자비를 베푸소서! 예술과 고귀한 미덕의 어머니인 게으름이여! 우리 인간의 고통에 위안이 되어 주소서!” 억지로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은 그 자체로 축복일 터. 탈산업 사회로 가는 모퉁이에 이 책을 떨어뜨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