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서문
성균관 캠퍼스의 모든 것 '쉬어가는 이야기' 성균관 괴담, 서재 진사간의 유령 1. 조선 최고의 엘리트가 되기 위하여 선비들의 시험지옥, 과거 상재생과 하재생 | 승보陞補 | 문음門蔭 | 사량기재 | 그 외의 경우 '쉬어가는 이야기' 성균관의 미운 오리 새끼, 대사성이 되다 성균관, 신입생 맞이 | 상읍례 | 신방례 | 면책례 학교에 갈 때 뭘 입을까 '쉬어가는 이야기' 말 타고 등교하는 것은 금지 2. 성균관의 출석 체크 성실한자, 빨리 졸업할 수 있으리니 얌체들의 요령 넘치는 출석방법 | 핑계 | 대리출석 3. 학력평가, 땡땡이와 잔머리를 막아라 암기냐, 논술이냐 쉴 새 없는 테스트의 나날들 | 일고日考 | 순고旬考 | 월고月考 | 연고年考 휴가, 그러나 놀 수는 없다 4. 성균관에서 잘 먹고 잘 살기 학생식당 밥은 언제나 맛이 없다 주사부일체酒師父一體 '쉬어가는 이야기' 공짜 학용품을 쟁취하는 법 5. 성균관을 움직인 사람들 학교에 학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사성, 성균관의 교장선생님 좨주祭酒, 조선 후기 성균관의 장관 직강, 역사와 전통의 관직 조선시대에도 무너지는 교권 '쉬어가는 이야기' 사람 잡는 체벌은 과연 교육인가? 반인泮人, 성균관의 실세 '쉬어가는 이야기' 유생과 관비 사이의 부적절한 관계, 스캔들이 되다 6. 조선의 대학로, 반촌 성균관의 터줏대감 반인, 그들의 마을 소 잡는 반인들 하숙집 주인과 하숙생 유생 그래도 무서운 반촌 7. 시험, 종류도 많아라 시험, 모의고사 성적 좋아봐야 말짱 헛거 | 도기과到記科 | 절제節製 | 순두전강旬頭 | 친시親試, 응제應製, 알성시謁聖試 | 대윤차大輪次: 패자부활전 | 황감제黃柑製 | 통독시通讀試 | 승보시陞補試 '쉬어가는 이야기' 성균관식 성적표 매기는 법 '쉬어가는 이야기' 학부모, 과거 공부에 미치다 시험합격을 위한 각종 꼼수 쇼생크 커닝 '쉬어가는 이야기' 유생들의 시험공포증 8. 학교에서 공부만 하고 사나요 성균관에 임금님 납시오 영광의 과거 합격자 퍼레이드 성균관의 풀뿌리 학생자치 | 재회 | 학생회 멤버가 되려면 | 학교 울타리 안의 권력다툼 '쉬어가는 이야기' 유벌儒罰 지금이 바로 성균관이 나서야 할 때 | 유소를 앞세우고, 경복궁으로 행진| 공관, 치사해서 공부 안 하고 맙니다 '쉬어가는 이야기' 임금님, 유생들 혼내지 말아주세요 9. 성균관 생활의 사건사고 조선판 달마야 놀자, 덕방암 패싸움 벽서 사건, 성균관을 뒤엎은 한 장의 벽서 관청을 습격한 유생들 성균관의 바바리맨 비밀유생클럽, 서학을 연구하다 10. 결론 성균관, 나라의 미래와 이상을 공교육에 담다 |
이한의 다른 상품
|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신고식은 오히려 신방례 쪽일 것 같다. 아주 점잖은 예식인 상읍례와 달리 신방례는 즐기고 먹고 노는 행사였다. 성균관의 선배들도 신입이 들어왔다는 핑계로 장난을 치거나 괴롭히는 일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입학보다는 생원진사시 합격을 빌미로 한 행사가 있었다.
중종 때의 기록에 따르면 접방례接房禮라는 나쁜 풍속이 있었는데, 새로 생원이나 진사가 된 사람의 집에 쳐들어가서 축하를 빌미로 거하게 뜯어먹는 일이었다. 이것도 주로 성균관을 중심으로 벌어졌으니, 학생회의 일원인 당장堂長과 색장色掌이 주도했던 것 같다. 유생들은 신입생이 들어오면 그 사람의 집이나 하숙집에 쳐들어가서 풍악을 울려라, 약과를 내와라 하며 억지 잔치를 벌였다. 그나마 집안이 넉넉한 신입생이라면 총알이 넉넉하니 그럭저럭 버텼지만, 가난한 유생들은 너무 괴로운 나머지 성균관 입학을 아예 그만두기까지 했다. 이를테면 숙종 때 정시한丁時翰이란 유학자가 있었다.* 강원도 원주에 살던 그는 과거에 뜻이 없었지만, 부모의 부탁 때문에 생원시를 봤다가 덜컥 2등이라는 좋은 성적으로 성균관에 입학했다. 이렇게 뛰어난 성적이라면 가문의 영광이자 야심을 가질 법도 하건만, 그는 끝내 제대로 된 벼슬을 하지 않고 과거를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그는 문집에 본인이 성균관 신입식을 치렀다는 사실을 간단히 적었다. 이에 따르면 처음 성균관에 입학한 사람을 신래新걐, 곧 신참이라고 부르며(이건 새로운 관리를 맞이하는 면신례도 마찬가지였다), 놀리는 방법이 꽤나 다양했다고 한다. 너무 간략하게 적어서 정시한이 대체 어떻게 괴롭힘을 당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지만 후배를 놀리기 좋아하는 짓궂은 선배가 많이 있었을 테고, 가끔 정도가 심한 사람도 있었으리라. 특히 억지 잔치를 벌여서 세간의 평판을 벗겨먹는 것은 폐해가 너무나도 컸다. 결국 나라에서는 이런 사달을 막기 위해 주모자인 학생회 임원들에게 과거시험을 못 보게 하는 처분을 내리고, 그 외의 동조자들은 성균관에서 알아서 처벌하게 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 '성균관, 신입생 맞이' 중에서 성균관은 그저 공부만을 가르치는 곳은 아니었다. 훗날의 신진이자 다음 대의 정치를 이어받을 이들이었고, 이들의 목소리는 틀림없는 정치의 한 축이었다. 요즘이라면 공부나 하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성균관은 여론을 이끄는 하나의 축으로 정치와 사회에 결코 작지 않은 관여를 했다. 성균관 학생들이 내는 목소리에 중심이 된 것은 바로 학생회였으며, 성균관 학생회는 정말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성균관의 학생회를 재회(齋會)라고 불렀고, 임원들은 재임(齋任)이라고 했다. 학생회장, 즉 유생 대표는 장의(掌議)였는데, 동재와 서재에서 각각 한 사람이 뽑혀 모두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 상색장(上色掌)과 하색장(下色掌)이 각각 두 사람씩 있었으니(때로 동색장, 서색장, 상색장, 하색장이라고도 했다) 이렇게 총 6인이 학생회 멤버였다. 이 외에도 정식 멤버는 아니었지만 서기 일을 도맡아 했던 조사(曹司)가 있고, 그 외 보조를 하는 당장(堂長)이 있었는데, 당장은 정확한 인원수가 규정된 게 아니라서 때에 따라 달라졌다. 성균관 학생회의 파워는 참으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비록 유생들끼리 조직하고 뽑은 일종의 자치제였지만, 성균관 안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기에 성균관의 임금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우선 장의가 되면 기숙사에서도 특별한 방을 제공받았으니, 서재와 동재 모두 세 번째 방이 장의방’이었다. 말 그대로‘장의의 방’이란 소리이니 다른 유생들은 여기에 감히 머물지 못했다. 이 외에도 장의들은 각종 특권을 누렸다. 출석부를 관리하는 것도 이들이 하는 일이었고, 분향에 참여하지 않아도 학용품을 받을 수도 있었다. 재회의 일 때문에 관리나 스승에게 처벌을 받지 않을 면책권이 있었으며, 가끔 성균관의 인재를 뽑아 관리로 특별 채용하는 일도 있었는데, 누구를 추천하느냐의 권한 역시 재회와 장의가 가지고 있었다. --- '성균관의 풀뿌리 학생자치' 중에서 |
|
성균관 유생들, 스캔들에 휩싸이다!
조선 시대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학생들이 모여 학문과 지성을 겨뤘던 곳. 지금 우리는 성균관을 그렇게 생각한다. 성균관은 과연 공부 잘하는 유생들이 모여앉아 점잖게 공부하고 토론을 벌이는 곳이었을까? 예의범절로 가득한 답답한 곳이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지금 우리네 대학생 못지않은 고민과 애환, 사건사고가 가득했다. 이제부터 조선왕조 500년간, 사상과 교육의 핵심이었던 성균관으로 가 보자. 이제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면모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선망했던 ‘성균관 유생’ 흔히 교육을 백년대계라고 한다. 이에 조선은 인재 육성에 많은 힘을 기울였으니 그 결실이 바로 성균관이다. 나라에서는 성균관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의식주는 기본이었고, 공부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런 만큼 성균관에 입학하기 위한 조건은 매우 까다로웠다. 그리하여 최고 학벌을 차지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유교 경전 및 고전과 씨름했으며,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당시의 학부모들은 조기교육도 서슴지 않았다. 이렇게 치열하게 공부하여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타이틀을 획득하려고 노력했으니, 그것이 바로 ‘성균관 유생’이다. 나라와 시대를 반영했던 성균관 성균관의 역사는 조선의 역사과 같이 한다. 성균관이라는 학교는 나라와 시대를 고스란히 반영했는데, 그래서 왕과 사회가 병들었으면 성균관도 그랬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연산군이 폭정으로 성균관을 뒤집어엎었을 때 성균관은 제 기능을 상실하였으며, 후기의 성균관은 당파싸움 대리전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최고 학교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자 성균관의 기능은 지방 향교와 서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올바로 기능하는 성균관은 나랏일에 참여하는 것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정부는 유생들의 의견을 검토하고 옳은 것을 수용하기도 하였으니, 성균관 유생들은 장차 예비 관료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성균관 유생들은 과연 공부벌레였을까? 조선 최고의 수재들이 한곳에 모여 열과 성을 다해 공부한 성균관. 그러나 유생들이 아무리 명문가의 자제라도, 아무리 공부를 잘하더라도 결국은 어린 학생들이었다. 한창 때의 젊은이들이 200명씩 모여 있었으니 성균관에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공부하기 싫어하고, 시험 때면 기상천외한 커닝 수법을 개발했으며, 여자 문제로 서로 머리를 잡고 싸운 일도 있었다. 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린 이도 있었고, 정말로 공부만 한 말 그대로 공부벌레들도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던 성균관. 그 시대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으니, 그들은 결국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과 같은 고민, 같은 열정을 품고 살아갔다. 그리하여 500년의 역사를 품은 그곳은 오늘날 우리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상상하던 성균관의 모습과 실제 성균관의 모습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 책을 통해 성균관의 A부터 Z까지, 이모저모를 알아보자. 성균관 이모저모 - 구성원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성균관 유생은 소과를 통해 성균관에 입학한 생원진사들을 이르는 것이다. 이들을 상재생이라고 부른다. 만약 성균관 200명 정원이 차지 않은 경우에는 추가 입학생을 받았으니 이것이 하재생, 혹은 기재생이다. 그런데 성균관은 학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교장인 ‘대사성’, 장관인 ‘좨주’, 선생님인 ‘직강’ 등 여러 직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이 양지에서 성균관을 구성하는 이들이었다면, 보이지 않게 성균관을 지탱한 것이 바로 ‘반인’이다. 어린아이인 재직은 유생들의 수발을 들었고, 어른 반인들은 각기 담당을 나눠 의식주를 책임졌다. - 재회 성균관은 자치적인 조직이었다. 미래의 관료로서 정치에 적극 참여했던 성균관은 그래서 학생회의 영향력이 굉장히 막강했다. 성균관의 학생회는 재회라고 하며, 대표, 즉 학생회장은 장의라고 불렀다. 장의는 특별한 방을 제공받았으며, 조정 높은 관리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러 장의와 학생회는 결국 당파싸움에 뒤얽혀 유명무실해졌다. 그 외에도 서기를 담당한 조서, 보조인 당장 등으로 구성되었다. - 반촌 성균관이 자리 잡은 동네로 반인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반인들은 이곳에서 푸줏간을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하숙집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이곳이야말로 성균관 유생들이 마음 놓고 놀 수 있는 곳으로 이를테면 오늘날의 대학로와 같은 곳이었다는 점이다. - 시험 성균관 유생들의 목적은 결국 대과에 합격하여 관릺을 입고 머리에 어사화를 꽂고 나라의 동량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유생들은 성균관에 머무는 때부터 현대보다 더한 시험 전쟁에 시달려야 했으니 그 종류가 참으로 다양했다. 또한 지금과 마찬가지로 시험에 관련된 에피소드도 다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