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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계속 젊은 시절을 생각한다.”
2. “곤들매기로 가득찬 수족관의 빨간 금붕어처럼” 3. 이튼이여, 영원하라 4. 버마 시절 5. 가난 부인 6. “나는 조지 오웰에게 꼼짝도 못한다” 7. 블레어 동지 8.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볼 장 다 본 시대다 9. 아무것도 죽지 않는다 연표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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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웰은 가난한 것으로 의심되는 아이들이 당하는 “악의적이고 고약한 질문들”에 대해 말한다. “네 아빠는 연봉이 얼마나 되니? 런던의 어느 동네에 살아? 사는 동네가 나이츠 브리지야, 아니면 켄싱턴이야? 집에는 욕실이 몇 개야? 하인은 몇 명이나 두고 있어? 집에 관리인은 있어? 좋아, 그러면, 요리사는? 넌 옷을 어디서 맞춰 입니? 방학 동안 공연을 몇 번이나 갔어? 용돈은 얼마나 받아? 등등.” 에릭은 돈의 역할과 사회적 계급에 따라 달라지는 개인의 운명을 아주 빨리 깨닫는다. “나는 일찌감치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10만 파운드 이상을 갖지 못하면 하찮은 인간이라는 사실…… 그런 사회적 명예의 기준에 따르면, 나는 아무런 가치도 없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였다.”
---「2. “곤들매기로 가득찬 수족관의 빨간 금붕어처럼”」중에서 에릭은 헉슬리 선생에게서 플로베르, 졸라, 모파상, 아나톨 프랑스를 배웠다. 헉슬리와 함께 이따금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특히 헉슬리의 어법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의 주목을 끌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단어야’라고 우리는 서로에게 이야기해주곤 했다. 우리는 단어에 대한 취미, 즉 구체적이고 의미 있는 단어 사용에 대한 취미를 갖게 되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그에게 큰 빚을 졌다.” 오웰이 훗날에도 구체적인 영어, 즉 고유의 의미를 가지되 진부하지 않은 단어들을 찾아내려 애썼던 것은 헉슬리의 영향임이 분명하다. ---「3. 이튼이여, 영원하라」중에서 “나는 경찰에서 근무했다. 즉, 나는 전제군주제의 기계설비 심장부에 있었던 거다. 더구나 경찰은 제국의 가장 저급한 일들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기회를 제공하는데, 더러운 일을 직접 하는 것과 그 열매만 따먹는 일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존재한다.” ---「4. 버마 시절」중에서 에릭 블레어로 하여금 사직하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양심의 가책이었다. “그는 마침내 제국주의를 단지 갱단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고, 그런 제국주의를 위해 일하고 있음”을 자각한 것이다. 버마에서 마주쳤던 얼굴들, 즉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수감자들, 사형수들의 방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내가 거칠게 다루었던 아랫사람들, 내가 모욕을 줬던 늙은 농부들, 내가 화날 때 두들겨 팼던 하인들과 일꾼들의 얼굴들”이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가 거기에서 맡았던 역할은 “압박 시스템의 톱니바퀴 중 하나”였다는 것을 그는 명료하게 자각한다. “치명적인 전제군주제”를 위한 그 일이 그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그런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그래서 그의 이상과는 매우 거리가 먼 일에서 자신이 성장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가 어떻게 그토록 맹목적으로 될 수 있겠는가? 버마는 그에게 다시 회복하기 힘들 정도의 트라우마를 안겼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 입장에서라면 정확히 나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그런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는 일이 나는 아주 싫었다.” 그는 정말로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했으며, 그의 미래는 전부 그가 버마에서 깨달은 새로운 사실들에 의해 좌우된다. ---「5. 가난 부인」중에서 12월, 그는 1928년 1월 1일부로 사직서가 수리되었다는 확답을 받고 획기적인 경험을 할 준비를 한다.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그는 “극단적인 환경에 처한, 사회의 밑바닥 인생, 즉 거지, 부랑아, 범죄자, 창녀”와 같이 생활하면서 밑바닥까지 내려갈 결심을 한다. 그가 그런 경험에서 글감을 구하고 싶어 한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 중 가장 하등한 인간들” 곁에서 자신을 정화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결심은 그를 접시닦이로까지 몰고 간다. ---「5. 가난 부인」중에서 1932년 11월 19일, 그는 에이전트인 무어에게 세 개의 이름 목록을 제안했다. “필명에 관해서, 제가 방랑 시절에 늘 썼던 이름이 하나 있는데, 버튼P. S. Burton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름이 별로 그럴듯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은 이름들은 어떨지 의견 부탁드립니다. 케네스 마일스Kenneth Miles, 조지 오웰George Orwell, 루이스 올웨이스H. Lewis Allways. 저는 조지 오웰이 제일 좋습니다.” 그렇게 해서 1932년 11월 19일, 조지 오웰이 탄생했다. ‘오웰’은 사우스올드의 남쪽으로 6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 입스위치를 가로지르는 강 이름이다. 이웃에 살았던 여자친구인 엘리너는 에릭이 그 도시로부터 돌아온 날 이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앞으로 조지 오웰이란 이름을 쓸 거요. 왜냐하면 영어로 발음이 잘 되는 이름이거든.” 한편, ‘조지’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작가 조지 기싱George Gissing에 대한 열정에서인지, 왕족 이름들에 대한 취미 때문인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큰 소리로 “안녕, 조지!”라고 외치던 메이블의 남편의 습관 때문인지 모르지만), 한 번도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다. ---「6. “나는 조지 오웰에게 꼼짝도 못한다”」중에서 그는 그 전선에서 지냈던 것이 자신의 인생 중 가장 의미 없는 시기라는 판단이 서자, 몹시 슬펐다. “나는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 민병대에 참가했는데 지금까지 거의 싸워보지도 못했고, 일종의 허수아비처럼 자리를 지킨 것에 불과했다. 내 밥값도 못했고, 한 거라고는 추위와 수면 부족으로 고통받은 게 전부였다.” 이런 인식은 블레어의 내면에 혁명을 일으켰다. 말하자면, “예전의 모든 것과 완전히 다른,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올 경험과도 완전히 다른, 일종의 공백기”였으며, 그에게는 유일무이한 경험이 되었다. 평등을 실현할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믿음을 굳건하게 만든 것은 스페인에서였다. “거기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예감을 경험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을 사회주의로 이끄는 것, 그들이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뛰어들게 만드는 것, 즉 사회주의의 ‘신비주의 신학’은 바로 평등의 개념이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는 계급 없는 사회를 의미하거나, 또는 전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민병대에서 보낸 몇 달은 나에게는 큰 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스페인 민병대는 일종의 계급 없는 사회의 축소판이었기 때문이다.” ---「7. 블레어 동지」중에서 블레어는 좌파 신문기자들이 사실을 왜곡 보도함으로써 영국인들이 스페인에서 일어난 일들의 전모를 그대로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그들과는 돌이킬 수 없는 적대관계가 되었다. 게다가 그는 그들이 그런 짓을 멈추지 않는다면, 다음번 책에서도 영국 언론의 거짓말과 그들이 생략해버린 내용들을 부록으로 담겠다고 그들에게 알린다. 조준사격을 당한 좌파신문들의 체면을 세우는 유일한 방법은 오웰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뿐이었다. ---「7. 블레어 동지」중에서 1940년 12월, 블레어는 처음으로 BBC 방송에 출연해 ‘프롤레타리아 작가’에 대해 말했는데, 작가와 정치 참여의 밀접한 관계를 주장했다. 라디오에서, 혹은 신문에서, 그는 계속해서 “모든 글쓰기는 프로파간다다”라는 주장을 하면서, 순수 탐미주의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날 것을 촉구했다. “프로파간다는 모든 책의 심장부에 숨어 있다. 예술 작품은 어느 것이든 각각의 의미와 주제, 즉 정치적, 사회적, 혹은 종교적인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 ---「8.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볼 장 다 본 시대다」중에서 그는 친소 정치 선전으로 잠들어 있던 영국에서 자신의 반스탈린주의가 어떤 가혹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온몸으로 느꼈다. 그는 자신이 쓴 기사들 중 가장 신랄한 것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리기 위한 은밀한 검열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가 볼 때, “러시아와 스탈린에 대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는 것”은 지적인 정직함의 문제였다. 그는 좌파 신문기자와 영국 지식 계급을 경계하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몇 년 내내, 소련체제나 그 밖의 다른 어떤 체제에 대해 비굴한 아첨꾼으로 혹은 정치 선전꾼으로 행동하고 나서,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의 지적 정직성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마시오. 한 번창 녀는 영원한 창녀입니다.” 그는 정보국이 편집자들의 재량권에 개입하는 것을 인정할 수 가 없었다. “이런 종류의 간섭은 불안한 징후다.” 조지 오웰은 좀 더 큰 표현의 자유를 요구한다. “상대가 듣고 싶어 하지 않은 것이라도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유다. ---「8.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볼 장 다 본 시대다」중에서 나는 생각한다. 작가의 첫째 의무는 자기 본연의 모습을 잘 보존하는 것이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시의적절하지 않다”거나 이런저런 불길한 영향력을 “본의 아니게 행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거짓말을 하고 사실을 은폐하거나 주관적인 감정을 왜곡하도록 강요당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와 병행해서, 나는 완전히 비정치적인 문학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으며,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특정한 입장에 서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거나 바람직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9. 아무것도 죽지 않는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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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작가로 산다는 것
그에게 작가가 되는 것은 숙명이었다. 그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이미 자신이 작가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냥 작가가 아니라 아주 유명한 작가가. 그러나 결코 편안한 삶을 선택하지 않았기에 수많은 직업(대부분이 막일)을 전전하며 짬짬이 분투적인 글쓰기를 이어나가는 고단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는 평생 폐질환에 시달렸으면서도 종군기자로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누볐고(실제 총상을 입기도 했다) 광부의 삶을 체험하기 위해 막장 갱도로 걸어 들어갔으며 생활비를 벌기 위해 파리 뒷골목의 허름한 호텔 주방에서 새벽 5시에서 밤 10시까지 접시 닦는 일(스스로 ‘지옥’이라고 표현했다)을 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그는 영국 식민제국의 경찰, 홉 따기, 서점 직원, 임시 교사, 농사꾼, 잡화상, 방송작가 등 수많은 직업을 거쳤다. 이는 안정적으로 글을 쓰기 위한 소득원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편하게 사는 것에 대한 남모를 죄의식 그리고 사회 밑바닥 구성원들의 삶을 모르고서는 결코 글을 쓸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가장 낮은 곳, 가장 험한 곳, 가장 위험한 곳에 스스로 걸어 들어갔으며, 그 체험을 통해 인간성의 심연과 시대의 흐름을 통찰했다. 전체주의와 파시즘의 위협 속에서 자유와 진실 그리고 인간성을 지켜내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정치적 행위로서의 글쓰기’였다. 그에게 모든 글쓰기는 프로파간다였으며 거짓과 위선에 대한 비판은 ‘지적인 정직함’의 문제였다. 그의 글쓰기는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 ‘빅브라더’와의 싸움이었는지도 모른다. 치열하게 살았다는 말조차도 그에게는 너무 평이한 표현이다. 총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장을 누볐고 스스로 지하갱도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가장 힘들게 살고 싶어 했고 또 그렇게 살았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런 작품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흔여섯에 생을 마감한 그는 자신에 대한 어떤 전기도 쓰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비정치적 문학은 존재할 수 없다 조지 오웰은 말년에 한 인터뷰에서 ‘완전히 비정치적인 문학은 존재할 수 없으며, 특정한 사안에 대해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의 비판 정신을 이렇게 도저한 문학관과 정치 윤리로 벼려낸 가장 중요한 체험은 무엇일까? 첫째로 버마에서 제국 경찰로 복무한 일을 꼽을 수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버마에서 영국 제국의 관리로 일하면서 그는 트라우마를 얻었다. 제국의 중앙에서 파견된 그는 식민지 주변부의 주민을 억압하는 시스템의 톱니바퀴 중 하나였고, 그는 이 사실을 명료하게 인식했다. 이러한 내면적 고뇌의 상황에서 자신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식민지 주민을 부당한 이유로 처벌해야 할 때마다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했다. 첫 소설 『버마 시절』과 〈코끼리를 쏘다〉 등의 에세이에는 그 시절 조지 오웰이 직접 겪은 제국주의의 폭력과 그로 인한 내면적 갈등이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버마에서 돌아온 그는 마음의 상처를 씻기 위해 런던과 파리에서 밑바닥 인생을 전전한다. 그렇게라도 자신을 정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극단의 시대’로 불리는 20세기 전반, 버마 시절에 이어 조지 오웰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사건은 스페인 내전이다. 파시즘에 대항한 민병대의 일원으로 스페인에 건너간 그는 그곳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종업원과 고객이 동등하고, 모든 사람이 서로 ‘동지’라고 부르는 평등한 체제를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념 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인해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반파시즘 대열에 속한 좌파 세력 간에 있었던 알력으로 그가 속한 마르크스주의 통일노동당이 탄압받았고, 그는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자연스레 그가 쓴 글은 출판의 기회를 잡기가 어려워졌다. 『동물농장』은 그런 시련 끝에 가까스로 출판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평등사상에 입각한 사회주의에의 확신을 얻었지만, 세력 다툼으로 부당한 정치적 배제를 경험한 스페인에서 탈출한 그는 결정적으로 정치적 글쓰기에 투신한다. 이제부터 그의 목적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것’, ‘정치적 문제에 정치적 당파성을 주장하는 지적인 정직함’이 된다. 그의 생애 조지 오웰은 1903년 6월, 영국 식민제국의 인도 경찰로 재직하던 리처드 블레어와 그의 젊은 아내 아이다 블레어와의 사이에 둘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누나, 아래로 여동생이 있어서 유일한 아들이었다. 그의 본명은 에릭 블레어다. 조지 오웰이라는 이름은 작가로 활동하면서 필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스스로 지은 것인데, ‘오웰’은 잉글랜드 동남부의 서퍽 지방을 흐르는 강의 이름이다. 그는 평소 강을 좋아했고, ‘조지 오웰’이 영어로 부르기 쉬운 이름이라는 이유로 그 이름을 택했다. 그의 어머니인 아이다 블레어는 교육열이 높은 신여성이었고, 아버지 또한 그가 자신에 이어 영제국의 관리가 되기를 바랐기에 명문고 입학을 목적으로 하는 기숙 사립학교에 아들을 보냈고, 결국 영국 최고의 명문 이튼학교로 진학시켰다. 그러나 부모의 바람과는 달리, 조지 오웰은 그다지 학업에 열중하지 않았고 이튼을 겨우 졸업했다. 동기생들이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로 진학할 때 그는 경찰공무원 시험을 보았다. 이렇게 해서 그는 20세에 영국 경찰이 되어 버마로 발령받았다. 그에게 아시아는 동경의 땅이었기에, 그는 대학보다 차라리 경찰이 되기를 바란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제국의 경찰이라는 신분은 조지 오웰과 맞지 않았다. 그는 거기에서 식민지의 처참한 실상을 보았고 고통 받는 피식민지 주민들의 일상을 마주했으며, 자신이 그들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는 것을 불편해 했다. 죄의식이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경찰 옷을 벗어버림으로써 부모에게 실망을 안겨준다. 스물여섯에 파리로 건너가면서 그는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걸었다. 그는 마치 글쓰기 기계처럼 평생 수없이 많은 글을 썼으나 대부분이 생계를 위해 쓴 칼럼과 연재글이었고 소설 작품은 그다지 많지 않다. 또한 정치색이 짙은 그의 글을 선뜻 출판하려는 출판사를 만나기 어려워 원고를 들고 여러 출판사들을 전전해야 했다. 처음 그의 책을 출판한 출판사들은 대개가 신생 출판사거나 좌파 출판사들이었고 판매에 고전했다. 그러나 그의 진가를 알아본 비평가들과 주변인들 덕에 그의 책은 조금씩 알려졌고 프랑스와 미국에서도 번역 출판되었다. 1945년, 그의 나이 마흔두 살에 『동물농장』이 출간되면서 그는 작가로서 뒤늦게 명성과 부를 얻었다. 기대치 못한 성공이었다. 전 세계 주요국에서 앞다퉈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이로써 그는 경제적인 자유를 얻었으나 건강이 발목을 잡았다. 특히 『1984』를 쓰는 작업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는 원고를 쓰고 또다시 썼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뜯어고치는 작업이 반복되었다. 폐결핵과 싸우면서 그는 『1984』에 매달렸고, “이 빌어먹을 소설을 끝내는 것”을 인생의 마지막 목표로 삼았다. 결국 1948년 11월 완성했다. 하지만 타이핑이 문제였다. 수정이 너무나 많아 아무도 원고를 제대로 읽을 수 없었고, 소설에 나오는 ‘기이한’ 용어와 표현을 제대로 타이핑하는 사람을 구할 수 없었다. 결국 그것도 조지 오웰의 몫이었다. 그는 병상에 앉아 하루 종일 타자기를 두드려야 했는데 이것은 폐결핵 말기환자에게는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1949년 6월 『1984』 초판이 영국에서 나왔고 뒤이어 미국에서 출판되어 이 또한 즉각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건강을 크게 훼손한 작가는 1950년 1월, 스위스의 요양소로 떠날 계획을 하던 중, 숨을 거두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