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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17 |
정한아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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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결코 쉽지도 않지만 그렇게 절망적이지도 않은 것
--- 강현정 (jude55@yes24.com)
나는 쉽게 읽히고 감성을 과도로 자극하는 일본의 베스트셀러 소설과 같은 류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건조하고 딱딱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소설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다. 적당하고 균형잡힌 스토리 전개와 감성적인 요소가 적절히 배합되어 있는 소설을 선호하는 편인데, 제 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인 정한아의 『달의 바다』는 그 두 가지를 두루 갖추고 있는 깔끔한 소설이란 느낌을 받았다.
『달의 바다』의 인물 구성은 지극히 가족 관계 중심의 양상을 띠고 있는데, 그에 따라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의 수는 많지 않다. 스물 일곱 살의 백수인 여주인공 은미와 트랜스 젠더가 되고 싶어하는 그의 소꿉친구 민이,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모님, 그리고 이 소설에서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고모 등이 그들이며, 비교적 등장인물이 소수인 까닭에 작품을 읽으면서 흐름을 따라가는 것에는 그렇게 무리가 없다. 작가는 13년 간이나 만나지 못하는 상태로 있었던 고모와 은미가 직접 만나는 구성을 통하여, 거의 끊어져 있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 놓는 작전을 편다. 주인공 은미의 나이와 작가의 실제 나이가 같다는 점이 재미있었는데 ‘소리 없이 가장 빠르게 죽는 방법을 연구하는 20대 중후반의 취업 낙방생‘이라는 설정은, 어쩌면 정한아 작가가 자신이 아직은 방황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주인공의 캐릭터에 자신의 실제 모습을 투영시킨 게 아닐까 싶었다. 이 소설 속에는 깜짝 놀랄 정도로 가슴을 울리는 대사들이 꽤 등장하는데,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의 작가가 쓴 소설이라고 믿지 못할 만큼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눈이 참 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컨대 이러한 것들이다. 은미와 민이의 대화에서, “슬리퍼 장사라는 게 남자로서 너무 야망이 없는 거 아닌가.”라고 말하는 민이에게 은미는 “그게 기쁨일 수도 있잖아."라면서 인생의 즐거움은 무엇을 이루느냐는 결과치의 척도가 아닌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고, 그것에서 위안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이나, 민이가 트랜스젠더가 된다고 해도 백화점에 가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 탈의실 밖에서 겉옷을 들고 기다려 줄 수 있다고 하면서 언제든지 곁에 있어 주는 게 진짜 우정이라는 정의를 내리는 부분이 그것이다. 읽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글을 써 내는 작가의 역량에서, 그 안에 내재된 작가로서의 잠재가능성을 볼 수 있었고,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론가들이 입 모아 말하듯이 소설의 백미는 아마도 고모의 편지들일 것이다. 당연히 직접 우주여행을 해 본 적이 없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상세히 묘사해 놓은 우주여행 관련 디테일들은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을 엿볼 수 있게 해 주었고, 소설 후반부에 나오는 반전은 꿈꾸는 것과 그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꿈에 대한 갈망에 대한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어떻게 보면 ‘우주 여행’ ‘우주 비행사’라는 설정은, 현실에서는 꿈꾸지만 정말 실현할 가능성이 0프로에 가까운, 극단적으로 허구적이고 환상적인 테마를 강조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야. 생각처럼 나쁘지는 않은데 늘 우리의 밑그림을 넘어서니까 당황하고 불신하게 되는 거야. 이렇게 네가 나를 보러 와준 것처럼 기대 밖의 좋은 일도 있는 거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 거고.’ 라는 고모의 말처럼 결국 『달의 바다』는 지금까지 지탱해 온 삶과 아직 다 펼쳐지지 않은 삶 모두를 긍정의 눈으로 보게 해 주는, 희망적인 시각을 길러주는 따뜻한 메시지다. 세상의 통념을 깨뜨리고 민이가 그토록 원했던 트랜스젠더 수술을 받는 것에서, 방에 박혀 글만 쓸 줄 알았던 은미가 이대 갈비에 출근하면서 또 다른 삶을 경험하고 삶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모습에서 그러한 부분은 여실히 드러난다. 작가는 이들의 모습을 통하여 삶은 결코 쉽지도 않지만 그렇게 절망적이지도 않고, 꿈꾸어 왔던 것이 언제나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바로 삶이고 인생임을 역설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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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 있어요? 그건 사실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일이에요. 희미하게 반짝거렸던 것들이 주름과 악취로 번들거리며 또렷하게 다가온다면 누군들 절망하지 않겠어요. 세상은 언제나 내가 그린 그림보다 멋이 떨어지죠. 현실이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일찍 인정하지 않으면 사는 것은 상처의 연속일 거예요. 나중엔 꿈꿨던 일조차 머쓱해지고 말걸요.
--- p.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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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너를 생각해보면 왠지 꼭 그럴 것만 같았어. 넌 평범한 애가 아니었으니까. 지금쯤 뭘 해도 안정을 못 찾고 헤매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백수라니, 내 생각과 딱 들어맞잖아?"
얼빠진 표정을 짓는 내 앞에서 길게 하품을 한 고모는 잘 자라는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모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고개를 돌려서 나를 빤히 바라봤다. "왜?" 내가 부루퉁하게 묻자 고모는 눈을 비비면서 말했다. "정말 여기 있는 거 맞나 확인하려고." "여기 있어. 다 포기한 젊은 조카." 고모는 문을 탁, 닫고 들어가더니 그 안에서 소리를 질렀다. "넌 포기한 거 아니야. 잠깐 쉬는 거지." 할머니께 전화를 한 통 드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 집에는 전화기도 없었다. 옷을 벗고 자리에 누웠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고모와의 만남'이라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너무 자연스럽게 일어났다는 것, 그리고 그날 저녁 고모가 우리에게 단 한 번도 '여기에 왜 왔냐'고 먼저 묻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우리가 아직도 하나로 묶인 가족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 p.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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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좋은 사람이야."
레이첼은 음식을 내게 덜어주면서 말했다. "그녀를 만난 것은 이번 생에 내가 받은 두 개의 축복 가운데 하나지." "나머지 하나는 뭔데요?" 내가 묻자 레이첼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지금의 나를 만난 것." --- p.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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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빛나는” 신예 탄생!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장편소설 『달의 바다』 김영하, 조경란, 박현욱, 박민규……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번뜩이는 재치, 기발한 상상력으로 무장하고 혜성같이 등장해 우리 소설문학을 이끌어나가고 있는 이들 작가를 발굴해낸 문학동네작가상이 열두번째 수상작으로 『달의 바다』를 선보인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짜임새 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와 읽는 이를 소설 속 풍경으로 끌어들이는 흡인력 있는 묘사, 그 속에 담겨 있는 삶에 대한 통찰과 인간을 향한 따뜻한 애정은 우리가 한국문학의 미래를 반짝반짝 빛내줄 또 한 명의 믿음직한 신인작가를 발견했음을 확신케 한다. 자, 그가 들려주는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이 있나요? 언론사 입사시험에 번번이 낙방해 백수생활을 하고 있는 ‘나(은미)’. 빈둥빈둥 놀지 말고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갈빗집 ‘이대갈비’에서 일이라도 거들라는 집안 어른들의 구박은 계속 되고,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막막함에 머리카락마저 한 움큼씩 빠지는 우울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나는 할머니로부터 깜짝 놀랄 이야기를 전해듣게 된다. 십오 년 전 소식이 끊긴 고모가 미항공우주국(NASA)의 우주비행사가 되어 있다는 것. 그 동안 다른 식구들 몰래 할머니에게 보내온 고모의 편지에는 생경하기만한 우주의 풍경과 우주비행사로서의 일상생활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마침내 우주선이 달 표면에 착륙했을 때 제 온몸에 감미롭게 와 닿았던 충격을 잊을 수 없어요. 우리는 순서대로 장비를 착용하고 우주선 밖으로 나갔는데, 그 거대한 운동장 같은 달의 표면에 제일 먼저 놀랐어요. 온통 구덩이와 흙투성이였죠. 표면은 작고 고운 가루로 덮여 있어서 발끝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쉽게 입자가 날렸어요. 덕분에 부츠 앞과 양 옆에 석탄가루 같은 미세한 가루들이 잔뜩 달라붙었죠. 저는 보폭을 좁히고 아주 조심스럽게 걸어갔어요. 달은 지구 중력의 육분의 일밖에 되지 않아서 조금만 압력을 가해도 캥거루처럼 튀어오를 수 있거든요. 미국으로 가 고모를 만나보고 오라는 할머니의 말에 나는 단짝친구 민이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편지에 적혀 있던 주소 하나 달랑 들고 플로리다로 날아간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고모를 만나게 되는데…… “세상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야. 생각처럼 나쁘지는 않은데 늘 우리의 밑그림을 넘어서니까 당황하고 불신하게 되는 거야.” 고모는 “환상과 꿈, 아름다움, 비극, 무지개에 대한 믿음”을 가진 할머니가 “적금과 등산, 단골손님, 소갈비, 독감 예방주사에 대한 믿음”을 가진 할아버지 대신 꿈과 희망을 공유할 수 있었던 최고의 파트너였다. 또한 책을 읽는 법, 친구 사귀는 법, 노래 부르는 법까지 모든 것을 고모에게서 배웠던 내가 꿈꿨던 나의 미래이기도 했다. 고모라면 어디서든 멋진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던 나는 십육 년 만에 만난 고모가 그 동안 감추고 있었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왠지 모를 배신감을 느낀다. 그러나 고모가 들려주는 지난 십육 년간의 이야기에 결국 고모의 삶은 오롯이 고모의 몫이자 고모 자신의 선택임을, 그리고 여전히 고모가 나의 미래가 될 수 있음을 긍정하게 된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야.” 고모는 부드럽게 웃었다. “생각처럼 나쁘지는 않은데 늘 우리의 밑그림을 넘어서니까 당황하고 불신하게 되는 거야. 이렇게 네가 나를 보러 와준 것처럼 기대 밖의 좋은 일도 있는 거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 거고. 고모는 그걸 알기 때문에 세상에 빚진 것이 없어.” “그래서?” “자유지.” ‘나’의 이야기와 고모가 보내온 편지가 교차하면서 ‘현실과 환상’을 촘촘히 엮어가며 『달의 바다』는 ‘삶에 대한 긍정’을 이야기한다. 실망스런 현실 속에서 비록 자신의 목표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는 인물들, 그리고 그 인물들이 서로를 지켜봐주고 격려하는 모습은 작가가 품고 있는 삶에 대한,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밤하늘의 저 먼 데를 쳐다보면 아름답고 둥근 행성 한구석에서” “반짝, 하고 빛나는 것을 찾을 수 있”듯 우리의 삶도 그렇게 빛나는 것이라고, 그때부터 진짜 삶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달의 바다』는 그렇게 속삭이며 일상에 지친 우리의 어깨를 토닥여준다. 더불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갈등이 친밀감으로 승화되고,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이들이 유사가족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 그리는 ‘관계에 대한 희망’ 역시 『달의 바다』 특유의 ‘긍정의 힘’이 가지는 미덕일 것이다. 젊은 작가의 개성은 언젠가부터 그 색다른 스타일이나 문체에서 찾아지곤 했다. 독자들은 보물찾기를 하듯, 해독하기 어려운 암호들을 풀듯 작가가 숨겨놓은 이야기들을 스스로 찾아내야 했다. 새로운 이야기가 곧 특이한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젊은 작가 정한아의 따뜻한 이야기가 돋보이는 것은 오히려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주변에 대한 따스한 시선, 지금 발 딛고 있는 현실에 대한 긍정 그리고 마음속에 간직해온 소망…… 작품에 담겨 있는 이 모든 것들은 이제부터 『달의 바다』와 함께 머나먼 우주공간으로의 여행을 시작할 당신에게 드리는 작은 선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