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하는 글 / 들어가는 말 / 서론 : 친밀한 성애의 미래
하나 | 욕망과 쾌락을 위한 나이 섹스를 ‘수행하는’ 단계에 머물러서야, 결과는 빤하지! / 에로틱한 능력을 개발하라 / 일상에서 친밀감을 쌓아가라 /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은 아니다 / 어떤 것들이 제동을 걸까? 둘 | 제2의 사춘기 시니어의 성, 왜 ‘붐’인가? / 우선 몸과 마음을 젊게 하라 / 이상적인 사랑에 대한 환상 / 빈번한 ‘체인징 파트너즈’ / 다자간 연애의 유혹 셋 | 노후에도 끄떡없는 이 커플들 행복하게 살기로 마음먹다 /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꿈꾸기 / ‘한 마음 되기’의 즐거움을 위한 ‘한 마음 되기’ 넷 | 섹스라면 ‘이제 그만’이라는 사람들 우리, 이제 섹스는 그만하기로 했어 / ‘깃발 내린’ 욕망 / 쾌락이라는 지상명령에 저항하기 / 다섯 | 고독, 그리고 자유 감내해야 할 고독 / 스스로에게 과감히 쾌락을 허하라 / 여자들끼리 누리기 / 사랑을 가르치는 여자들 / 여섯 | 또 다른 성과 섹스 진짜 쾌락? 60이 넘어야 알 수 있지! / 야성적이지 않고 완숙한 섹슈앨러티 / 에로틱한 세계의 공유 / 삶의 재료로써 선택한 기쁨 / 은밀한 연애의 윤리 / 일곱 | 에로틱한 세계로 가는 또 다른 길들 느릿느릿한 섹스 / 탄트라 여인들 / 가만 둬도 성기는 사랑할 줄 안다 / 에로틱 캠프/ 테이레시아스의 여행 / 정중동靜中動으로 하나 되기? 젊음 지상주의 때문에 사는 게 힘들어! / 오르가즘 명상 여덟 | 시니어들의 사랑 마음이 인도하는 섹슈앨러티 / 틀림없어, 아직도 섹스를 하고 있는 거야! / 우린 80대지만, 섹스를 원하는 80대! / 애정 만들기? / 평생 지속될 수 있는 욕망 / 죽음까지 넘어선 에로틱한 관계 / 멈추는 것이 슬기로운 선택 / 호의적인 시선 / 사랑의 즐거움은 양로원에서도 / 사생활 존중, 하지만 어디까지? 결론 |
Marie de Hennezel
“진정한 만남이란, 그 만남이 이루어질 정도로 성숙해졌을 때 우연히 일어납니다. 전 중요한 걸 깨달았어요. 인생에서 만날지 안 만날지도 모를 동반자를 찾는 데만 몰두할 게 아니라, 사랑하는 중요한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겁니다.”
60대가 되면 감각은 여러 모로 쇠약해지니까 40대였을 때만큼 강렬하게 느낄 순 없지만, 쾌락은 둘의 관계가 지닌 정서적 특질에 영향을 받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여자들이 60세 이후에 느끼는 쾌락이 훨씬 ‘격格이 높다’는 말을 종종 듣는 거다.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쾌락에 도달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바로 그런 사랑의 차원, 두 사람 외에는 이해할 수 없는 친밀감, 에로틱한 교감과 연결되어 있는 정서적인 상상의 세계다. 욕망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요, 피할 수 없는 숙명, 하나의 운명이다. 그러니까 욕망은 우리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에게 허용된 유일한 자유는 욕망하는 여자나 남자를 향한 사랑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을 자유다. 사랑은 욕망과 아무 관계가 없다. 사랑과 욕망은 서로 다른 두 나라다. 커플관계에서는 계속 서로를 욕망하지 않고도 계속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그걸 잘 안다. 우리는 전혀 상대를 다양한 각도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래서는 상대를 완벽하게 알지 못할 것이다. 타인을 향한 우리의 욕망은 아직도 우리 눈에 그가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신비함의 크기와 비례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자신감을 줄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은, 자신이 느끼는 쾌락에 몰입하는 모습을 남자에게 보라고 하면서 자신의 쾌락에 동참시키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 됨’이란, 여자가 자기를 지켜보는 남자에게 자신의 쾌락을 선사할 줄 아는 이 방법에 다름 아니다. 몸을 맞대고 싶은 욕구, 관능적인 살갗의 접촉, 애정이 애정을 부르는 무한한 애정의 교류, 이제 이런 것들이 많은 커플들을 속박하며 군림하던 저 유명한 “오르가즘”의 원칙을 밀어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니까 새로운 섹슈앨러티를 만들어낼 줄 아는 커플은 행복하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성욕을 유지하겠다고 애쓸 필요 없이, 새로운 차원의 에로스로 넘어가면 된다. 그것은 “함께 있기”, “함께 눕기”, “한 몸 되기”와 같이 다정하고도 관능적인 상호 몰입에서 체험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욕망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일지 모르지만, 사랑은 차근차근 구축되는 것이고 사랑의 기쁨은 선택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을 원해야 한다. 기쁨을 원하고, 쾌락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는 의욕이 있어야 한다. 기쁨, 쾌락, 자유, 이 셋은 행복의 에로티시즘 안에 긴밀하게 서로 맞물려 있다. “육체와 정신, 그건 결국 하나에요! 정말 제대로만 할 수 있다면 섹스보다 더 장엄한 행위는 없습니다. 그것은 두 존재가 진정으로 ‘하나 되는’ 일입니다.” 오르가즘은 사랑의 행위의 한 부분이지만, 그건 ‘오면 오는 것’이다. 오르가즘이란 스스로 생기는 현상이지, 우리가 원한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우리 힘으로 일어나게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섹스가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다.” 섹스의 목표는 두 성기를 가까이 맞대고 자기 방식대로 내버려둘 때 느껴지는 상상을 초월한 쾌락이다. 그래서 섹스에는 끝이 없다. --- 본문 중에서 |
성은 우리 삶을 완성하는 길이다!
왜 여성이나 시니어의 사랑과 성생활을 존중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일종의 학대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애써 그들의 성을 외면하고 박탈하는 여러 가지 ‘이유들’은 사랑의 욕구가 평생 지속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데 그 배경이 있다. 또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져오면서 이 주제를 애써 외면하고 터부시해온 데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편견과 그늘 속에서 위태롭게 매달린 여성과 노년의 성적 욕망은 ‘주책’이거나 ‘노망’이라는 언어적 폭력의 대상이다. 우리는 이들의 성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각 개인 차원의 자각과 노력 또한 필수적이다. ‘당사자’인 여성과 시니어의 의식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인간의 몸은 시간이 지나면 늙고 병들어 없어지는 껍데기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이다. 더는 성적인 욕망과 육체의 소통을 탓하지 말자. 우리 몸은 아무런 죄가 없다. “우리 몸은 잘못도, 저주도 아니요, 몸은 우리 일부이자 서로 주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서로에게 주며 자신을 발견할 때 행복을 만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이다. 건강한 쾌락과 행복을 위한 참된 나르시시스트 혁명을 만나다! 사랑을 갈구하는 욕망과 성의 즐거움, 그리고 육체적인 내밀한 관계에서 비롯한 친교에는 남녀의 제한도, 나이의 제한도 없다. 특히 자유와 주체성의 회복을 갈망하는 여성들의 경우, 억압되고 짓눌려 왜곡된 섹슈앨러티의 틀을 벗어던져야 한다. ‘의무 수행’으로서의 섹스와 오르가즘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한다. 마음의 문을 열어 진실한 사랑의 의미를 마주하고, 살아있는 내 삶의 주체로서 성을 추구해야 한다. 이 새로운 발견은 달성하게 될지 아닐지도 모르는 쾌락의 한 순간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 사랑과 섹스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나르시시스트 혁명을 일으키고, 그리하여 각자 완성된 성의 주체로 가는 길이다. 그것은 상대의 몸과 영혼을 깊고도 진지하게 알아가고자 하는 노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