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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철학하기 시리즈 1~3권 세트
사진 인문학 + 사진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 + 사진으로 생각하고 철학이 뒤섞다
알렙 2017.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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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품의 구성 소개

책소개

목차

서문 사진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

제1부 사진의 인문학

들어가며 사진은 인문학의 보고다
제1장 벤야민의 아우라: 익숙한 것을 낯설게 읽기
제2장 바르트의 풍크툼: 기호가 넘치는 세계에서 찔린 아픈 상처
제3장 하이데거의 존재: 사물의 재현이 아닌 존재의 체험
제4장 칸트의 주관: 창조성의 근대적 영역 찾기
제5장 엘리아데의 원초: 영원회귀를 향한 메타 시간
제6장 구하의 기록: 작고 모호한 삶의 역사
제7장 레비스트로스의 참여 관찰: 낯선 문화와의 만남
제8장 데리다의 해체: 흔적 위에서 모든 시선의 해방
제9장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동양에 대한 편견과 왜곡
제10장 들뢰즈의 시뮬라크르: 복제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변화에서 생긴 차이
제11장 푸코의 탈주체: 근대적 주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기 찾기
제12장 보드리야르의 가상: 이미지가 실재인 세상

제2부 사진 속 생각 읽기

들어가며 사진에 담긴 생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제1장 이순희와 재현: 「보이는 것은 모두 동일한가?」
제2장 이정진과 가상: 「매트릭스」
제3장 이상욱과 스케치: 「Blue City」
제4장 최철민과 시간: 「邑, 江景 ?시간이 잠든 집」
제5장 정금희와 사유: 「바람 속에 누군가 있다」
제6장 이정규와 유사: 「공존의 이유」
제7장 최원락과 행위: 「사진의 힘」
제8장 박정미와 담론: 「도시의 섬」
제9장 김병국과 은유: 「내 꿈의 언저리」
제10장 이광수와 전유: 「신자유주의」
제11장 이순남과 퍼포먼스: 「벽 속의 사람」
제12장 JOOJOO와 스토리텔링: 「matilda, 이중적 빨강」

제3부 사진으로 철학하기

들어가며 사진으로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
제1장 「고통은 현재이다」 그리고 수전 손택
제2장 「공장, 언캐니」그리고 미셸 푸코
제3장 「어머니의 땅」그리고 반다나 시바
제4장 「큰 아름다움은 말이 없다」그리고 장자
제5장 「붉은 망토의 시간 여행자」 그리고 마르틴 하이데거
제6장 「노에마」 그리고 에드문트 후설
제7장 「Undefined」 그리고 질 들뢰즈
제8장 「질서의 바깥 풍경」 그리고 장 보드리야르
제9장 「NINE(123456789)」그리고 이반 일리치
제10장 「밀려나는 사람들」 그리고 제러미 리프킨
제11장 「신(新)시지프스」그리고 알베르 카뮈
제12장 「아모르 파티」그리고 프리드리히 니체
서문 사진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

제1부 사진의 인문학

들어가며 사진은 인문학의 보고다
제1장 벤야민의 아우라: 익숙한 것을 낯설게 읽기
제2장 바르트의 풍크툼: 기호가 넘치는 세계에서 찔린 아픈 상처
제3장 하이데거의 존재: 사물의 재현이 아닌 존재의 체험
제4장 칸트의 주관: 창조성의 근대적 영역 찾기
제5장 엘리아데의 원초: 영원회귀를 향한 메타 시간
제6장 구하의 기록: 작고 모호한 삶의 역사
제7장 레비스트로스의 참여 관찰: 낯선 문화와의 만남
제8장 데리다의 해체: 흔적 위에서 모든 시선의 해방
제9장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동양에 대한 편견과 왜곡
제10장 들뢰즈의 시뮬라크르: 복제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변화에서 생긴 차이
제11장 푸코의 탈주체: 근대적 주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기 찾기
제12장 보드리야르의 가상: 이미지가 실재인 세상

제2부 사진 속 생각 읽기

들어가며 사진에 담긴 생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제1장 이순희와 재현: 「보이는 것은 모두 동일한가?」
제2장 이정진과 가상: 「매트릭스」
제3장 이상욱과 스케치: 「Blue City」
제4장 최철민과 시간: 「邑, 江景 ?시간이 잠든 집」
제5장 정금희와 사유: 「바람 속에 누군가 있다」
제6장 이정규와 유사: 「공존의 이유」
제7장 최원락과 행위: 「사진의 힘」
제8장 박정미와 담론: 「도시의 섬」
제9장 김병국과 은유: 「내 꿈의 언저리」
제10장 이광수와 전유: 「신자유주의」
제11장 이순남과 퍼포먼스: 「벽 속의 사람」
제12장 JOOJOO와 스토리텔링: 「matilda, 이중적 빨강」

제3부 사진으로 철학하기

들어가며 사진으로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
제1장 「고통은 현재이다」 그리고 수전 손택
제2장 「공장, 언캐니」그리고 미셸 푸코
제3장 「어머니의 땅」그리고 반다나 시바
제4장 「큰 아름다움은 말이 없다」그리고 장자
제5장 「붉은 망토의 시간 여행자」 그리고 마르틴 하이데거
제6장 「노에마」 그리고 에드문트 후설
제7장 「Undefined」 그리고 질 들뢰즈
제8장 「질서의 바깥 풍경」 그리고 장 보드리야르
제9장 「NINE(123456789)」그리고 이반 일리치
제10장 「밀려나는 사람들」 그리고 제러미 리프킨
제11장 「신(新)시지프스」그리고 알베르 카뮈
제12장 「아모르 파티」그리고 프리드리히 니체
서문 사진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

제1부 사진의 인문학

들어가며 사진은 인문학의 보고다
제1장 벤야민의 아우라: 익숙한 것을 낯설게 읽기
제2장 바르트의 풍크툼: 기호가 넘치는 세계에서 찔린 아픈 상처
제3장 하이데거의 존재: 사물의 재현이 아닌 존재의 체험
제4장 칸트의 주관: 창조성의 근대적 영역 찾기
제5장 엘리아데의 원초: 영원회귀를 향한 메타 시간
제6장 구하의 기록: 작고 모호한 삶의 역사
제7장 레비스트로스의 참여 관찰: 낯선 문화와의 만남
제8장 데리다의 해체: 흔적 위에서 모든 시선의 해방
제9장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동양에 대한 편견과 왜곡
제10장 들뢰즈의 시뮬라크르: 복제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변화에서 생긴 차이
제11장 푸코의 탈주체: 근대적 주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기 찾기
제12장 보드리야르의 가상: 이미지가 실재인 세상

제2부 사진 속 생각 읽기

들어가며 사진에 담긴 생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제1장 이순희와 재현: 「보이는 것은 모두 동일한가?」
제2장 이정진과 가상: 「매트릭스」
제3장 이상욱과 스케치: 「Blue City」
제4장 최철민과 시간: 「邑, 江景 ?시간이 잠든 집」
제5장 정금희와 사유: 「바람 속에 누군가 있다」
제6장 이정규와 유사: 「공존의 이유」
제7장 최원락과 행위: 「사진의 힘」
제8장 박정미와 담론: 「도시의 섬」
제9장 김병국과 은유: 「내 꿈의 언저리」
제10장 이광수와 전유: 「신자유주의」
제11장 이순남과 퍼포먼스: 「벽 속의 사람」
제12장 JOOJOO와 스토리텔링: 「matilda, 이중적 빨강」

제3부 사진으로 철학하기

들어가며 사진으로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
제1장 「고통은 현재이다」 그리고 수전 손택
제2장 「공장, 언캐니」그리고 미셸 푸코
제3장 「어머니의 땅」그리고 반다나 시바
제4장 「큰 아름다움은 말이 없다」그리고 장자
제5장 「붉은 망토의 시간 여행자」 그리고 마르틴 하이데거
제6장 「노에마」 그리고 에드문트 후설
제7장 「Undefined」 그리고 질 들뢰즈
제8장 「질서의 바깥 풍경」 그리고 장 보드리야르
제9장 「NINE(123456789)」그리고 이반 일리치
제10장 「밀려나는 사람들」 그리고 제러미 리프킨
제11장 「신(新)시지프스」그리고 알베르 카뮈
제12장 「아모르 파티」그리고 프리드리히 니체

저자 소개 2

철학하는 시인이자 항해사다. 배 타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다. 녹색과 잡종의 세상을 지향하는 베르그송주의 철학가로, 베르그송과 레이디 가가를 좋아한다. 1961년 부산에서 출생하여 부산수산대학(현 부경대) 어업학과를 졸업하였다. 1984년부터 약 7년간 원양어선 및 상선 항해사로 근무한 바 있다. 1982년 향파문학상, 2005년 인터넷문학상 시 부문에 당선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2013년 부산일보 해양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011년 시집 『영화처럼』을 발간하였으며 현재는 문학동인 ‘잡어’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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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외국어대 교수. 역사학자(인도사). 시민운동가. 고대 종교사를 주전공으로 하고 인도 근현대사, 사진사, 정치, 외교, 사회, 종교, 법, 의식주 문화 등 인도의 여러 분야를 35년간 가르쳤다. 저술로는 『 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 『 인도는 무엇으로 사는가』, 『 역사는 핵무기보다 무섭다』, 『 슬픈 붓다』, 『 카스트』, 『 현대 인도 저항 운동사』, 『 인도 수구 세력 난동사』 등이 있고, 『 고대 인도의 정치 이론』, 『 침묵의 이면에 감추어진 역사』, 『 성스러운 암소 신화』, 『 민족주의 사상과 식민지 세계』 등의 옮긴 책이 있다. 논
부산외국어대 교수. 역사학자(인도사). 시민운동가. 고대 종교사를 주전공으로 하고 인도 근현대사, 사진사, 정치, 외교, 사회, 종교, 법, 의식주 문화 등 인도의 여러 분야를 35년간 가르쳤다.

저술로는 『 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 『 인도는 무엇으로 사는가』, 『 역사는 핵무기보다 무섭다』, 『 슬픈 붓다』, 『 카스트』, 『 현대 인도 저항 운동사』, 『 인도 수구 세력 난동사』 등이 있고, 『 고대 인도의 정치 이론』, 『 침묵의 이면에 감추어진 역사』, 『 성스러운 암소 신화』, 『 민족주의 사상과 식민지 세계』 등의 옮긴 책이 있다.

논문으로는 〈고대 힌두교에서 지존위 쉬바와 우빠니샤드 이데올로기〉, 〈1947년 인도아대륙 분단과 ‘파키스탄 난민’의 정체성 변화―델리를 중심으로〉, 〈분쟁과 건설에 대한 한 여성 포토저널리스트의 시선: 호마이 비야라왈라의 분단-국민국가 건설 시기 사진 재현의 의미〉 등 30여 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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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6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924쪽 | 크기확인중

출판사 리뷰

인문학과 만났을 때 비로소 보이는 사진

누구나 카메라를 갖고 있듯이, 누구든 사진가가 될 수 있다. 프로든 아마추어이든 하이 아마추어이든 사진에 대해서라면 누구도 할 말은 있다. 그렇더라도, 사진에 담긴 뜻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사진에 담긴 생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리고 사진으로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 흔히 말하듯,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이란 있는가? 그리고 구분할 수 있는가?
“사진으로 철학하기”라는 콘셉트를 담은 이 책은 철학이 낳은 혹은 철학을 성립하게 한 사진 작품들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책이다. 역사학자이자 사진 비평가인 저자 이광수 교수는, 사진이 재현하고 전유하는 사물의 존재/비존재를 통해서 사진가들은 어떤 생각을 담고자 했는지를 탐구한다. 또한, 우리 시대 사진가들의 작품 세계와 작가 의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자 한다.

사진의 세계에 인문학의 낯선 발상들이 발을 디뎠다. 사진비평가 이광수 교수는 사진과 인문학의 만남의 의미를 탐색해 보았다. 예를 들면, 저자는 먼저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라는 개념을 들고, 이것이 외젠 앗제의 사진 작품 속에서 어떻게 위치 지워졌는가, 그리고 한국의 작가 민병헌, 화덕헌의 세계에서 벤야민 사진 미학의 중심 개념인 아우라로부터의 탈피 즉 대상으로부터 거리 두기는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탐색한다.
롤랑 바르트의 풍크툼 개념으로는 최민식의 사진과 쿠델카, 그리고 정택용의 사진을 예로 들어, 오래된 사진이 주는, 그 어떤 예술도 행해 내기 어려운, 대중 예술로서의 존재 가치를 발견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저자는 벤야민, 바르트, 하이데거, 칸트, 들뢰즈, 푸코 등 주요 철학자들과, 구하, 사이드, 엘리아데, 레비스트로스 등 문학, 역사, 종교, 문화인류학을 넘나들며 사유의 세계와 작품 세계를 연결 짓는 사유를 펼쳐보였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이미지를 통해 세상의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우리 시대의 사진가들이 카메라의 창을 통해 무엇을 읽고자 하는가로 집중된다. 이 책의 2부와 3부는 저자와 사진가들의 컬래버레이션으로 기획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저자는 “사진 인문학”을 위해서, 사진가들에게 작품과 작업 노트를 보내주길 청했고, 사진가들은 이에 응했다. 저자는 수준의 높낮이를 따지지 않고, 사진가들의 작품 세계를 날 것 그대로 보고자 했다.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으로 품평하지 않고, 사진을 통해 사유하기 좋은 것, 사진으로 담을 수 있는 작가의 뜻(의식)에 주목했다.
1부에서는 사진 예술의 선구자들과 한국의 프로 사진가들의 작품 세계를 주로 다뤘다면, 2부와 3부는 프로급에 못지않은 하이 아마추어 사진가들과 공동의 사유와 공동의 작업을 해나가면서 그들 작품 세계를 소개하고 이해하려 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사진을 통해 사색해 보는 철학적 명제와 개념들이 한국의 사진가들에게 어떤 영감을 주었는지, 그것이 사진가들의 배열, 제목과 캡션, 작업 노트를 통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사고는 헤맴에서 나온다! 쉽고도 쉽지 않은 사진에 관한 인문적 사유

벤야민은 “20세기의 문맹은 사진을 모르는 사람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20세기를 넘어 이제 21세기가 된 우리의 오늘은 이미지가 이미지를 낳은 그야말로 복제 시대이다. 이제는 이미지가 실재를 만드는 초실재 속에 들어가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미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은 이미지의 노예로 종속된다. 이미지는 무엇을 말하는가?
저자는 “사진 인문학의 개념” “사진에 담긴 생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사진으로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라는 세 가지 주제에 대해 말한다. 앞의 주제는 철학적 개념과 작품을 연결 짓는 것으로, 뒤의 두 주제는 사진 작품의 의미를 읽어내고, 사진가들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사진 인문학의 개념” 즉 사진이 철학하기 좋은 주제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저자는 사진은 존재의 증명이란 점을 말한다. 어떤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사진은 나올 수 없다는 점이 출발점이다. 카메라 앞에 뭔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또한, 사진은 시간을 담는 매체다. 모든 대상은 사진 속으로 담기면서 그 순간부터 그것은 과거에 박제된다. 그때 그 시간은 돌아올 수 없는 과거가 되고 그래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은 모두 과거에서 정지되어 버린다. 수전 손택이, 사진은 시간의 흐름이 아닌 시간의 어느 한 순간을 포착해 놓은 것이고, 그래서 사진은 ‘기억’을 하기 좋은 매체라고 한 것은 이 맥락에서다. 사람들이 일기나 그림이 아닌 사진을 통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그 불규칙적이고 이질적인 과거를 잘 떠올리는 것은 바로 사진이 시간을 담는 매체라는 속성 때문이다. 이것이 사진이 갖는 인문학적 사유의 기본이다. 여기에 더해, 저자는 사진을 통해 인문학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진이 모사가 아닌 재현을 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닌 인간의 의지가 반영되는 재현인 것이다.

“사진과 같이 시간, 존재, 재현 등에 관한 다양한 시선과 그것을 둘러싼 권력과 맥락을 포함하는 매체는 인문학의 향연을 펼치기에 매우 적합하다. 정해진 해답이 없고, 옳고 그름도 없으며, 접하는 사람에 따라 생각을 달리하고 그 가치를 달리 부여할 수 있는 사진이란, 인간 정신을 상실해 가는 이미지가 범람하고 복제가 만능인 21세기라는 시대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인문학의 보고이다.”(20쪽)

저자는 1부에서 사진 담론의 개념들에서 주로 다뤄져 온 사상가들의 관점들을 살펴보며, 이를 사진가들의 작품과 연결시켜 본다. 예를 들어, 벤야민이 아우라 개념을 들어 사진은 아우라를 재현할 수 없다고 한 것에 대해, 저자는 ‘사진은 아우라를 지우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외젠 앗제와 아우구스트 잔더의 사진들은 대상으로부터 거리 두기 즉 아우라로부터의 해방을 의도한 작품이라 본다. 그러면서, “사진은 아우라를 지우는 맛”이란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사진의 맛은 아우라를 죽이고 누구나 즐기는 대중 예술로 가는 데 있지 않을까?”라는 문제의식에서이다.
바르트의 풍크툼과 스투디움의 개념을 알고 구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사진에 관한 시각과 관점이 확 트이는 일일 것이다. 바르트의 풍크툼을 통해, 저자는 “풍크툼의 존재가 있어서 사진은 테크닉도 아니고, 실재도 아니며, 객관도 아닌 것이 된다. 그 소통 불가능한 우연의 세계가 사진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자 사진이 인문학의 보고가 되는 개념이다.”라고 말한다. 돌발적인 아픔, 아픈 찔림으로도 풀이할 수 있는 이 풍크툼의 개념은, 최민식이나 쿠델카, 정택용의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래된 사진은 가끔 찔린 아픔을 준다. 사조가 어떠하든, 철학이 어떠하든, 기록의 가치가 어떠하든, 사진가의 역사적 위치가 어떠하든, 존재 자체로서 이미 사진 예술의 경지에 오른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진계의 오래된 1세대 사진가들, 강운구, 육명심, 주명덕, 김응식, 정범태, 김녕만 등이 남긴 마을, 장터, 가족, 논밭, 가게, 도심의 풍경 속에서 작가의 의도나 메시지를 해석하는 것은 한정적이다. 그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그 오래된 사진들이 많은 우리들에게 찔림으로 소통을 이루고 그 안에서 잃어버린 인간 지향의 세계를 이어주는 것일 것이다.”(40쪽)

저자는 철학이나 기호학의 개념만이 아니라, 종교와 신화, 인류학과 역사 영역까지 탐색해 본다. 종교학자 엘리아데가 말한 ‘영원회귀를 위한 메타 시간’은 마이너 화이트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 한국 작가 이갑철의 사진 속에서 구현돼 있다. 역사학자 구하는 ‘서발턴’이라는 하층민의 역사에 대해 주목하였는데, ‘작은 사건’이 ‘큰 역사’에서 어떻게 묻혀버리는지 탐구하였듯이, 저자도 ‘작은 사진 한 장’이 때로는 ‘역사의 큰 증언’이 될 수 있음에 주목하고, 다큐멘터리 사진은 ‘현존을 증언’하기에 역사로서의 사진의 본원적 임무를 맡는다고 보았다. 우리는 로버트 프랭크와 노순택의 사진을 통해 구하의 문제의식에 접할 수 있다.
문화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라포(참여 관찰 시의 신뢰관계)의 구축이란 사진가가 그 대상에 대해 갖는 기본 태도로써 중요한 개념이 된다. 저자는 김수남의 작품이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닮았다고 본다.(87쪽) 한국의 많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낯선 문화에 다가서기를 업으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성남훈과 이재갑 또한 잊혀진 역사를 기록해 온다.
문학자인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통해서는, 사진이 초창기 역사에서 제국주의의 식민 침탈의 한 도구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서양의 식민 지배 담론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은 사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었다. 사진은 서양 지배자들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식민지를 과학적으로 재현하여 실증적으로 보여주는데 다른 어떤 매체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과학은 어느덧 객관성과 보편성을 담보하는 것으로 대접받았고 그 과학의 총아가 사진이었다. 그래서 식민 지배 초기에 아시아로 온 유럽의 많은 식민 지배자들은 식민지 곳곳을 사진으로 남겼다.”(109쪽)

사진 읽기 혹은 사진 인문학의 첫 걸음은 시선으로부터 자유!

저자는 2부와 3부를 통해, 사진으로 생각 읽기에 나선다. 물론, 그 대상은 우리 시대의 사진가들이다. 우리 시대 작가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그 생각을 작품에 어떻게 담아내는가이다. 저자는 “사진 예술이란 ‘무엇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사진가들은 널리 알려진 익숙함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실험 정신의 추구이자 일상의 전복이다. 그런데, 그 실험 정도가 심할수록 독자는 의미를 읽기가 어렵다. 예술을 추구할수록 사진가는 불친절하고, 독자는 이해하거나 느끼기가 어렵다.
생각이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공유되기 위해서는 제목과 작업 노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전제다. 또 잘 찍은 ‘사진 한 장’보다는 ‘사진들의 배열’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그럼으로써, 비로서-> 비로소 작가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하는데, 무엇보다도 작가나 비평가, 기획자나 큐레이터의 생각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되며, 그들이 가진 느낌을 교본처럼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사진으로 작가의 생각을 읽는 방식이란 정해진 것이 있을 수 없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작가의 큰 의도 속에서 자신만의 창작 독해를 하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경우 좋은 작가는 독자의 해석을 유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독자는 작가의 의도에는 맞춰 가되 그만의 해석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독자가 끌려 다니지 않아야 하는 존재로 작가만 있는 게 아니다. 비평가도 있고, 기획자도 있으며, 큐레이터도 있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작 기호학적 해석이나 맥락에 따른 해석뿐이다. 그들이 가진 느낌이 교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사진으로 생각 읽기의 첫 걸음이다.”

2부는 “사진 속 생각”을 읽어내는 작업이다. 저자는 이순희, 이정진, 이상욱, 최철민, 정금희, 이정규, 최원락, 박정미, 김병국, 이순남, JOOJOO 등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들의 작품을 비평해 보고, 그들의 작업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그럼으로써, 각각의 작가는 재현, 가상, 스케치, 시간, 사유, 유사, 행위, 담론, 은유, 전유, 퍼포먼스, 스토리텔링이란 주제와 화두로 사진 작업을 해나가고 있음을 밝힌다.
3부는 사진가들이 사진을 통해 어떤 말(메시지)을 하고자 하는가를 읽어내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먼저 작가의 작업 노트로 시작된다. 이성주, 김정원, 김호영, 조기호, 길범철, 이계영, 오진영, 정근업, 윤창수, 조균래, 임만순, 조복래 등이 작업 노트를 통해 작품이 말하는 바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 후에 저자는 각각의 작품 세계가 갖고 있는 함의를 주요 인문/철학적 사유와 연결 짓는다. 말하자면, 각각의 작가들의 작품은 수전 손택, 미셸 푸코, 반다나 시바, 장자, 마르틴 하이데거, 에드문트 후설, 질 들뢰즈, 장 보드리야르, 이반 일리치, 제러미 리프킨, 알베르 카뮈, 프리드리히 니체 등의 생각과 연결된다.
이렇듯, 저자는 인문학적 사유와 사진 예술을 연결 짓는 것을 통해, 사진에 관한 끝없는 질문과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우리 시대 사진가들의 다양한 면면들을 소개하고 비평하면서, 사진 예술이 추구해야 할 자기 정체성 내지 주체적 태도를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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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넘쳐난다. 그러다 보니 볼 것이 너무 많다. 이 폭주하는 이미지의 세례 속에서 오히려 눈을 감아버리는 게 편안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석을 가려내야 하는 제도적 책임이란 것이 있다. 그 제도 안에 아카데미가 있고, 이론 하는 사람이 있고, 미술관이 있다. 이광수 교수의 『사진 인문학』은 어쩌면 뻔한 우리 사진의 제도 안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한 축을 만들 수도 있으리라 믿는다. 사진을 찍어본 역사학자가 쓴 사진에 관한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체적 사진 찍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편하고 유익하게 읽을 수가 있다. 이 책은 막연했던 사진에 관한 인문학이 정초되고 작가가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이상일(사진가, 고은사진미술관 관장)

사진은 쉽다, 기계 의존적이니까. 사진은 쉽지만은 않다, 대상 의존적이니까. 문학과 사진은 다른 것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타자를 향한 응시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우리는 왜 남을 향한 시선을 거두어들이지 못하는가. 타자의 의미를 묻는 일은 결국 자신의 의미를 묻는 일이 되곤 한다, 세계의 의미를 묻는 일이 되곤 한다. 인간과 세계의 의미에 관해 사고하는 것, 그것이 인문 정신 아닐까. 이광수는 잘 헤매는 사람 같다. 인도에서 헤맸고, 교단에서 헤맸으며, 사회운동에서도 헤맸다. 그리고 사진에서 헤맨다. 왜냐면, 사람과 사회와 사진은 알 듯한 것이 아니오, 모를 듯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고는, 헤맴에서 나온다.
노순택(사진가)

미니 인터뷰 : 이광수 “사진의 뜻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3년 만에 『사진 인문학』 집필 출간한 사진비평가 이광수와의 인터뷰

역사학자이자 사진 비평가인 이광수 교수가 『사진 인문학』을 들고 독자를 찾아왔다. 사진과 사진 비평의 세계에 매혹된 인문학자가 사진의 기술이 아니라 사진의 뜻을 찾아 인문학적 사유를 펼쳐 보인다. 무려 3년이 넘는 동안 월간 『사진 예술』에 연재를 해왔던 이 글은, 후반기에는 사진가들과 직접 소통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한다. 저자의 글을 직접 편집 출간 작업을 했던 편집자가 독자를 대신하여 몇 가지 질문을 드려 보았다.

『사진 인문학』이라는, 어찌 보면 쉽고 어찌 보면 까다로운 주제를 들고, 독자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동안 역사학자 그리고 시민운동가로서 책도 여러 권 내셨는데요. 이번에는 사진 비평가 내지 사진 인문학자의 책으로는 처음입니다. 사진가로서 그리고 사진 비평가로서 어떻게 이 세계에 접하게 되었는지요?

제가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쯤의 일입니다. 2002년 미군이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한 직후 제가 공동 대표로 있는 아시아평화인권연대에서는 아프간 난민을 긴급 구호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죠. 몇 차례 다녀온 뒤에, 우리는 후원회원에게 사진전 겸 보고회를 열었는데요, 글쎄, 제가 찍은 사진을 보니 죄다 흔들려 건질 수 있는 게 한 장도 없었습니다. 세상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소중한 데를 다닐 텐데, 사진을 좀 배우라는 주위의 성화에 못 이겨 사진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죠.

그렇다면, 아마추어 사진가 아니면 하이 아마추어 사진가로서, 사진 창작 활동이나 예술 사진 등을 찍으면 그저 즐기는 일이 될 텐데, 왜 이렇게 인문학적으로 또 비평적으로 무겁게 접근하셨나요?

네. 그것은 제가 학자였기 때문에 천성적으로 그렇게 되었나 봅니다. 사진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다 보니, 개념적으로 정리하고 싶었고, 또 개념을 정리하다 보니, 그 개념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어, 실제 사진가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사진의 본성을 들여다보고 파헤치고자 한 것이죠. 무엇보다도 사진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단순히 보는 대상을 넘어 읽는 대상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 때문이지요.

이번 책은 3년여 동안 『사진 예술』에 연재하였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우리 시대의 사진가들과 소통한 대목이 독특한데요. 모두 24명의 하이 아마추어 수준의 작가들이죠?

네. 처음에는 인문학의 개념이나 원리를 사진 비평에 끌어오는 방식이었는데요. 나중에는 지금 활동하고 있는 사진 작가들을 더 들여다보고 싶었죠. 그래서, 사진가들에게 사진 작품과 함께 작업 노트를 보내달라고 청한 것이고요. 그 작업 노트를 통해서도 사진가들의 “뜻”을 읽으려고 시도해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진가들의 작품에는 “뜻”이 담겨 있는데, 그 “뜻”은 인문학에서 말하는 어떠한 관점과 연결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작업이나 활동을 사진가들과 함께 한 것이죠.

그러면, “사진”을 가지고 인문학을 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여쭤 봐도 될까요?

사진은 인문학의 보고다라고 썼지만, 회화(그림)에 비하면 고유의 미학 담론이나 인식론이 양적으로도 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사진이 다른 예술 형식이나 표현 양식에 비해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결코 뒤지는 장르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진은 역사도 되고 과학도 되고 예술도 될 수 있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사진에 대한 감상평은 객관적이다 말할 수 없습니다.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죠. 사유의 헤맴, 그것이 인문학과 맞닿아 있습니다.

편집자인 제가 정리해 보려다, 잘 안 되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언어도단일지 모르지만,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은 엄연히 구분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그러한 구분이 타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멋진 사진, 좋은 사진이란 도대체 누가 규정한 것이고, 그렇게 규정하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역사학자로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경계선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해 평생 고민해 온 학자가 던지는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죠. 제 나름의 답은 이렇습니다.
사진 언어는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사진가가 자신이 갖는 생각을 사진으로 재현하기도 어렵지만 독자가 그것을 읽어내기도 어렵습니다. 사진 언어는 그 특성상 논리의 문법을 가지고 의미를 제시한다기보다는 보는 사람만의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데 적합하죠. 그 감성은 사람마다 다르고 그것도 때와 장소 혹은 분위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 장의 사진을 볼 때 독자 개인의 생뚱맞은 느낌이 사진가의 의도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거나 열등한 느낌이라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으로 나눌 수는 없다는 겁니다. 좀 더 쉽게 말씀 드리자면, 흔히들 흔들린 사진이나 구도가 틀어진 사진은 ‘나쁜 사진“이라고들 하는데, 그 사진으로 흔들리는 대상이나 어긋난 대상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 맥락에서는 ’좋은 사진”이 된다는 겁니다.

혹시 이 책을 쓰면서, 선생님의 책이 어떻게 읽혔으면 좋겠습니까? 혹은 이 책을 읽을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사진은 하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 도구로 소통도 하고, 사유도 하고, 인문학도 할 수 있습니다. 사회에 팽배한 어떤 구조의 신화에 끌려 다니면서 사진을 숭배하기 보다는 사진으로 자기 자신의 사유 세계의 지평이 더욱 넓어지고 풍부해졌으면 하는 겁니다. 그러려면, 책에 쓴 내용이긴 한데요, 독자는 작가의 의도에는 맞춰 가되 그만의 해석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됩니다. 또 독자가 끌려 다니지 않아야 하는 존재로 작가만 있는 게 아니죠. 비평가도 있고, 기획자도 있으며, 큐레이터도 있습니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작 기호학적 해석이나 맥락에 따른 해석뿐이죠. 그들이 가진 느낌이 교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사진으로 생각 읽기의 첫 걸음입니다.
인문학자 이광수 교수와 시인 최희철의 인문학 컬래버레이션!
“사진, 시처럼 철학처럼 읽다”


최희철 시인은 배 타는 일과 닭 잡아 파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던 사람이다. 녹색과 잡종의 세상을 지향하는 베르그송주의 생生 철학가다. 평소에 그를 접할 때마다 그가 가진 생각을 많은 독자와 널리 공유하고 싶었다. …… 사진가는 이런 생각을 갖고 찍었는데, 철학하는 시인은 저런 생각으로 보았구나, 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의 놀이를 하면서 사는 것이 곧 사진으로 인문학을 하는 것이다, 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사진가와 시인이 하는 사진으로 하는 삶과 인문학 놀이에 독자들도 주저 없이 끼어들어 한바탕 신명나게 놀아 봤으면 한다.
- 이광수(사진가, 인문학자)

사진 속엔 수많은 시선이 교차한다. 비록 사진 속에 담기지 않았다 할지라도 사진의 외부, 그러니까 인화지 바깥에도 사건의 시선들은 이어진다. 사진 이미지는 외부가 내부로 드리워진 잔상殘像이다. 온갖 기억이 뒤엉킨 냄새 같은 것, 하여 사진에서는 이미지뿐 아니라 온갖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광수의 사진들 역시 그랬다. 이미지 속에 접혀 있던 온갖 냄새들이 서서히 드러나는 것 말이다. 그 냄새들은 사진이 온전히 빛과 관련된 시각적 이미지만을 다루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그렇다면 사진은 온갖 것들이 무한히 접혀 있는 ‘모나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나로 하여금 여러 글을 쓰게 했다.
- 최희철(시인)

사진, 시처럼 철학처럼 읽다!
사진으로 하는 인문학놀이, 사유놀이


현대의 대표적인 대중예술인 사진은 인문학의 향연을 펼치기 좋은 매체다. 사진만큼 시간, 존재, 재현 등에 관한 다양한 시선과 그것을 둘러싼 권력과 맥락을 포함하는 매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의 공저자인 이광수 교수는 전작 《사진 인문학》에서 사진을 인문학의 보고寶庫라 했다.

이광수 교수는 사진으로 인문학적 사색의 향연을 펼칠 뿐 아니라, 그 ‘생각’을 다른 이와 ‘같이’ 나누어보고자 했다. 누구나 사진을 찍지만, 사진에 대해서 말하는 이는 드물다. 사진에 관해서는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이라 말하면 끝일까? 사진에 담긴 생각을 제대로 말했다고,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광수 교수는 자신이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수년 동안 직접 찍은 사진들에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오랜 벗이며 후배인 “철학하는 시인” 최희철과 사유의 길에 나섰다.

이 책 《사진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는 사진 찍는 인문학자와 철학하는 시인이 함께한 사유의 놀이, 인문학의 향연이다. 사유의 주고받음을 통해, 멈추어 서지 않은 채 지속하는 것, 즉 삶의 의미를 곱씹고자 했다. 사진은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를 추구하는 예술이다. 모사가 아닌 재현의 예술이다. 시간과 우연, 존재와 비존재, 세속과 성스러움에 대해 사유하기 좋은 인문학의 보고인 것이다.

창조적 종합을 향한 사진과 시의 패킹 작용
그리고 인문학적 삶


최희철 시인은 두 저자의 만남을 일종의 패킹 작용이라고 비유하였다. 이광수 교수는 인도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이다. 최희철 시인은 배 타는 일(항해사)과 닭치는 일로 생계를 꾸렸던, 철학하는 시인이다. 스스로도 사유의 경계 지음이 없었던 이들인데, 두 저자의 만남은 더더욱 무경계의 사유를 보여준다. 텅 빈 경계가 충만할 수 있는 지점이다. 패킹 작용이란 관管과 관 사이에서 자신도 관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일종의 창조적 종합creative synthesis이라 할 것이다.

모든 게 그렇듯 혼자서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은 없다. 가령 탁자 위의 패킹은 ‘패킹 작용’을 하지 않는다. 패킹은 관管과 관 사이에 있을 때, 자신이 조여지며 변형될 때, 말 그대로 ‘packing’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패킹은 ‘애무술愛撫術’과 관련되어 있다. 타자他者를 뜨겁게 달구는 것 말이다. 하지만 애무술엔 ‘정통正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만으로 다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창조적 종합creative synthesis’이어야 한다. (최희철, 나가는 글)

서로 다른 사람이 대상을 바라볼 때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대상에게 부여되는 의미가 그것을 대하는 주체의 인식 정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진 찍는 기술이 전문가 수준에까지 미치지 못해, 찍는 사진마다 얼추 비슷하게 나타날 수는 있다. 그렇다고 그 대상을 대하는 인식조차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이광수 교수가, “그냥, 편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자. 이 장면을 대할 때, 난 이렇게 보았다, 이 사진을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라는 것을 서로 이야기해 보자”고 제안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이광수 교수가 말하는 인문학적 삶이다.

멈추어 서지 않은 채 지속되는 것,
사진가와 시인은 삶 속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사진은 이광수 교수가 5년여 동안 인도와 파키스탄 등지에서 찍은 것들이다. 이광수 교수는 ‘좋은 사진’만을 고르지 않았다. 사진이 말하기 방식의 하나이듯, 말하기/말 나누기에 좋을 사진들을 골랐다. 이광수 사진가의 사진에는 (최희철 시인의 표현대로) “수많은 시선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사진은 시선들이 목소리를 은밀하게 드러내는 ‘접선 장소’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사진의 속에 담기지 않더라도 사진의 외부에도 시선들은 이어지고 있었고, 보고 있는 사진 이미지는 내부가 아니라, 외부가 내부로 드리워진 잔상과도 같았다.

최희철 시인은 사진가의 사진들 속에서 이미지뿐 아니라 온갖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 냄새들은 사진이 온전히 빛과 관련된 시각적 이미지만을 다루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하였다. 그렇다면 사진은 온갖 것들이 무한히 접혀 있는 ‘모나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나드Monad는 라이프니츠에 의해 “무엇이 실체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 활용된 개념이다. 그러고 보면, 사진 예술에서 모나드는 의미 있는 개념이다. 사진이 재현하는 것은 사물의 ‘세계 속의 또 다른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사진은 본질의 속성을 재현한다. 원본을 모사할 수 없기에, 원본 같은 사본이 대신하여 본질을 드러낸다.

이광수 사진가는 작품에 [작업 노트]를 달 듯, 작품에 대한 (자신의) 주석을 달았다. 사진 작품의 의미를 읽어내는 작업이었다. “사진에 담긴 생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사진으로 어떻게 말할 것인가”는 저자가 추구하는 ‘사진으로 철학하기’의 주제이다. 여기에, 교차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종의 패킹 작용이 덧붙여졌다. 작품마다 [작업 노트]를 개별적으로 달 수 있겠지만, 교차된 시선으로 서로 주고받음을 통해, 작품의 의미는 다시 해석되고 풍성해졌다.

모나드에 존재를 물었더니……

사진 한 장을 같이 들여다보며 사진가와 시인이 나눈 대화의 첫 화두는 그저 세상살이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었다. 하기에는 쉬운 말이지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사실 무척 어려운 일이다. 특히, 차이 나는 시선을 가지고 있는 두 세계관이 부딪힐 때에, 타자는 하나이지 않고, 무한히 탈주하기 때문이다.

사진가는 그저 셔터를 눌렀을 뿐이다. 누르고 나서 즉흥적인 감정이 떠올라 때론 불편해지며 때론 슬퍼하며 때론 탄식을 하였다. 사진이 우연한, 순간의 모나드를 포착하였다.

시인은 그저 생각을 풀어 보려고 했다. 사진가의 사진 속에 수많은 시선이 교차하고 있음을 읽었다. 사진이, 시선들이 목소리를 은밀하게 드러내는 접선 장소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보고 있는 사진 이미지는 내부가 아니라, 외부가 내부로 드리워진 잔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사진 이미지 역시 내부와 외부 사이에서 어떤 패킹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사진은 온갖 것들이 무한히 접혀 있는 ‘모나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사진가의 사진 속에서, 이미지 속에 접혀 있던 온갖 냄새들이 서서히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그 냄새들은 사진이 온전히 빛과 관련된 시각적 이미지만을 다루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대화의 첫 번째 주제로 사진가와 시인은 존재에 대한 의문을 삼았다. 사진으로 포착하는 모나드의 순간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 순간 사진가의 카메라에, 시인의 눈에 포착되는 그 실체는 과연 어떤 존재인지를 의문으로 삼았다.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의문은 끝내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으로 이어졌다. 그저 제 자리에 그대로 있어 무심히 흘러갈 뿐인 그것을 존재한다는 틀에 가두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 순간을 보고자 한 노력을 담았다.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눈의 해부학적 구조가 밝혀진 19세기 이전까지 눈에서 광선이 나가 사물을 인지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외부의 빛을 받아들여 망막 안에서 뒤집어진 채 보이고, 그것을 두뇌가 인지한다는 것을 ‘발견’한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다. 인간에게 본다는 행위는 삶의 조건이기도 했다. 보고 싶은 것을 보지 않을 권리를 지키기 위해 조선시대 화가 최북崔北은 자신의 눈을 찔렀다. 최북에게 본다는 것은 자존 위에 서는 것이었다.

사진가는 카메라를 통해 인간의 눈으로 담을 수 없는, 뒤집어진 채 인간의 망막을 스쳐지나가는 순간을 “잡는다.” 인간의 시선이 미처 거두지 못한 찰나를 잡는다. 카메라는 시선의 한계를 해방시킨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존은 카메라를 통해 시선의 해방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인간이 허투루 놓쳐버린 순간을 잡아내 정지시키는 카메라는 결국 사진가의 손을 거쳐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버렸다.

시인은 사진 속에서 삶의 수많은 순간 중 하나를 발견한다. 시인에게, 여럿 중에서 하나의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무언가를 찾는 사진은 ‘고대적 방식’을 닮았다. 카메라는 근대의 발명품임에도 고대적 사유를 하는 기계장치인 것이다. 허나 존재의 순간을 잡는다 하더라도 그 존재의 시간을 잡지는 못한다. 카메라가 잡는 것은 흐름일 수 없다. 삶의 미세함, 삶의 최소 단위에 멈춘다. 그 삶의 모나드에서 카메라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시인은 카메라 너머를 짐작해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삶은 무수한 점들의 변화로 이어진다. 이것을 분자적으로 잡아내고 해석하는 것이 사진가의 일이다. 편견은 시선이 현상을 가둘 때 발생한다. 눈을 뜨고 망막을 거쳐 홍채로 빛이 들어오는 순간 어쩌면 우리는 편견을 먼저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본다는 것은 판단한다는 것이다. 사진가의 카메라가 해방시키는 것은 그 판단이다. 카메라는 삶의 순간을 지극히 미세한 단위로 쪼개고 갈라 한 순간을 포착한다. 어떠한 편견이나 판단도 없는 사진 속에서 시인은 비로소 해방을 맞이한다.

사진가와 시인의 두 번째 이야기는 카메라의 해방성이다. 카메라는 인간이 무심코 흘려보내는 순간을 가두지만 동시에 근대적 해방의 도구이다. 그것은 시선의 한계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판단의 한계에서 인간을 해방시킨다. 삶의 무수히 작은 순간, 삶의 모나드 안에서 시선과 편견은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카메라가 가두는 것은 무엇일까? 사진가와 시인은 인간의 기억과 현재 사이에 존재하는 카메라의 역능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속의 성스러움

산다는 것은 중독이다. 그 고단함에 대한 중독이다. 고단함에 고단함을 더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삶의 무게를 온통 짊어진 발끝에, 힘없이 치켜세운 눈빛에 우리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중독을 드러낸다. 살아 있기에 우리는 삶에 중독된다.
삶을 이루는 수많은 단편 속에서 사진가가 발견한 것은 삶 그 자체다. 삶은 거부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 산다는 것 앞에선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라는 판단마저 무의미하다. 존재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살고 있었다. 사진가의 카메라에 담긴 세상 모든 것은 살아 있다. 어디에도 죽은 것은 없다. 나무, 바위, 구름, 먼지 모두 살아 있다. 삶의 우주 속에서 모든 것은 살아 있고, 살아 있는 것은 동시에 지속된다. 멈추어 서지 않은 채 지속되는 것, 사진가는 지난하고 비루한 삶 속에서 영원을 발견한다.

시인은 현실감을 잃은 세상을 바라본다. 거대한 코끼리 같은 산도 한참을 쳐다보면 현실감을 잃는다. 익숙해지는 것이다. 눈으로 바라볼 뿐 존재론적 관계를 맺지 못한 채 나뉘어 버린다. 그렇게 의미는 상실되고, 세상은 이미지로 소비될 뿐이다. 그 삶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카메라였다면, 거기서 시인이 발견한 것은 삶의 민낯이었다. 그 민낯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다. 감격, 공포, 고통, 환희 모두 사람이 삶에 덧씌운 감정이다. 그것들은 모두 해석된 것이다.

붓다는 삶은 고통이라고 했지만 시인은 삶은 고통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삶에 대한 착각이 고통이라는 것이다. 일상이 ‘삶에 대한 착각’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이 고통이다. 하여 모든 고통은 ‘삶의 착각’과 관련되어 있고, 그 모든 것은 다시 삶으로 수렴된다. 살면서 우리는 고통을 잠시 잊은 채 돈을 벌고, 밥을 먹고, 섹스를 하고, 정치를 한다. 피와 눈물도 흘린다. 시인의 눈에, 이 모든 것들은 더럽지만 또한 숭고하다. 고통마저 잠식해 버릴 정도로 숭고하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 사진가와 시인은 찰나 속에 숨어 있는 삶의 단편을 손에 쥔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쪼개고 쪼개고 쪼갠 뒤 남는 것을 파악한다. 그 극미의 삶 속에서, 순간의 모나드에서 사진가와 시인이 발견한 것은 숭고함이다. 모든 고통의 근원인 동시에 모든 고통을 잠식하는 곳이 바로 삶이다.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현상 사이에서 사람들은 순간순간 늘 변화한다. 그 변화는 멈추게 하거나 멈출 수 없다. 그것은 죽음이다. 어쩌면 삶이란 죽음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숭고한 과정이리라.
인도를 다녀온 사진가와 태평양을 떠돌다 온 시인,
사진을 펼쳐놓고 기억과 존재의 양태에 대해 이야기하다.

카메라를 들고 떠나는 여행을 이광수 교수는 눈과 결별하는 일이라고 했다. 감각의 관성에 길들여진 시선이 아닌 카메라에 비친 세상은 세계를 바라보는 일에 뜻하지 않은 재미를 준다. 카메라는 분명 시각에 들어오는 세상을 포착한 것인데, 화면에 드러났을 때는 예기치 않은 세상이 펼쳐진다. 그 안에서 사진가는 세상의 숨겨진 온갖 이미지를 바라본다. 사진 속에서 생각들은 소용돌이치면서 다른 생각들을 불러온다. 그 생각들이 우연과 만나며 생각은 겹겹이 주름진 파노라마 필름이 된다. 눈과 카메라와 사진 이미지라는 세 개의 차원이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생각의 향연이다
인도를 다녀온 사진과 이광수 교수는 그곳에서 무슬림 남녀 한 쌍의 모습을 보았다. 나이든 남자는 하얀 옷을 휘감았고, 그 옆의 여자는 온몸을 새카만 부르카로 감추었다. 여자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사진가의 생각은 의복의 차별에서 시작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인간과 역사, 문명과 종교에까지 뻗어나갔다. 그에게 사진은 생각의 도구였다. 그리고 사진에서 시작되어 연쇄적으로 파생되는 생각의 고리를 철학하는 시인 최희철과 나누었다.
시인은 사진가가 찍어낸 세상에 대한 생각으로 세계를 해석했다. 시인은 사진을 보면서 생각나는 이 세계에 대한 존재론을 설파한다. 이번에는 스피노자의 모두스modus(양태)의 개념으로 풀었다. 양태는 실체의 표현 부분으로, 비록 찰나적으로 사라지지만 이미 엄청난 실체와 다른 양태들과의 내재적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 스피노자는 양태의 원인이 신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신 역시 양태를 통해 변화한다. 이는 신 역시 불변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신이 따로 있고 양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양태를 포함한 그 모두가 ‘신’이다. 양태와 신은 내재적 관계인 것이다.
사진가의 사진 속에서 시인은 사진들이 고체가 아니라 액체성의 세계를 느꼈다. 고체가 딱딱함이라면 액체는 작동의 극치를 보여주는 춤이다. 스피노자의 실체 역시 액체와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실체와 양태’의 관계 때문에 가능하다. 액체성의 세계는 고정된 형태가 없고 언제나 흘러가고 변화한다. 무수한 접힘과 펼쳐짐 속에서 무한하게 확장한다. 시인이 사진가의 사진을 만나 생각이 뒤섞이는 것도 그런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즉 현장이고 어장이니까 말이다. 그 모든 것들은 ‘표현들’의 힘이다.


기억, 양태가 존재하는 법

인간의 기억은 완전할까? 하루 전 출근길 버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을 나는 기억할까? 혹 그 자리에 사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더 오래된 날들은 어떨까? 내가 기억하지 않는 것은 존재한 적이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인식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오만한 생각이라니, 그럼 내 기억이 그 수많은 존재들이 존재하는 조건이 된다는 말인가?
안타깝게도 기억은 존재의 조건이다. 기억되지 못하는 것은 그 존재성을 잃고 만다. 내가 누군가를 기억한다면, 내가 무언가를 기억한다면, 그 또는 그것은 내 기억과 함께 영원의 존재성을 획득하게 된다. 영원, 죽음이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순간. 세상에 존재하느냐 마느냐와 관계없이 내 기억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의 문법이고 기억이 지닌 영원성이다.
사진은 나름의 방식으로 순간을 기억한다. 시각은 다른 모든 감각들이 특수하게 표현된 방식이다. 사진은 그런 시각의 순간을 포착하여 가두어놓는다. 그것은 시인의 가슴속 옹이를 담아내기도 하고, 세상의 무수한 관계와 혼종되기도 한다.
대화의 첫 번째 자리에서, 인도를 다녀온 사진가와 태평양을 떠돌다 온 시인은 사진을 펼쳐놓고 기억과 존재의 양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각자 자신이 가진 도구로 기억 속에서 양태가 존재하는 문법을 탐구한다. 스피노자는 ‘실체와 양태’를 나누었다. 양태, 즉 실체의 표현 부분인 모두스는 찰나적으로 사라지지만, 다른 수많은 양태들과의 내재적 관계 속에서 생성되고 존재한다.
‘양태의 존재성’이라는 연약한 체계에 ‘영원’을 부여하는 방식은 각자가 가진 도구만큼이나 다르다. 사진가는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사진에 담는다. 이때 사진은 기억의 도구가 된다. 시인은 이 사진에 포착된 모습에서 의미를 끌어낸다. 이때 사진은 존재의 도구가 된다. 기억된다는 것은 존재의 양태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이다. 그래서 사진은, 존재가 기억되는 문법, 양태의 영원을 담보하는 조건이 된다.


뒤섞임, 혼돈의 풍경

두 개의 세계가 있다. 하나는 정도精度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강도强度의 세계이다. 정도의 세계는 양적인 세계이고, 강도의 세계는 질적인 세계이다. 양적인 세계와 질적인 세계는 온전히 분리되는 세계가 아니다. 둘은 서로 뒤섞이고 뒤엉켜 있다.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고, 빛과 어둠이 뒤섞여 있다. 신성과 속성이 뒤섞여 있고, 미와 추가 뒤섞여 있다. 양과 음이 뒤섞여 있고, 남성과 여성이 뒤섞여 있다.
섹스를 사람들은 ‘떡을 친다’고 표현한다. 이 표현의 절묘함은 남녀의 성기(굳이 남녀일 필요도 없고, 굳이 성기끼리일 필요도 없다)가 부딪치는 현상을 에둘러 말하는 데 있지 않다. 무언가 분리할 수 없는 상태를 우리는 흔히 떡이라고 한다. 술을 마셔 ‘떡이 되었다’는 것은 감각의 흐름이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이 감각과 저 감각이 뒤섞여 분리될 수 없이 엉켜 있다는 것이다. 떡이다. 혼돈이다. 서로 다른 것들이 어떤 인연으로 꽉 붙들려서 한데 엉켜 있다. 나누려 해도 나누어지지 않는다.
삶과 죽음은 뒤섞일 수 있을까? 신성과 속성은 뒤섞일 수 있을까? 암컷과 수컷은 뒤섞일 수 있을까? 떡이 될 수 있을까? 그리하여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나와 남이 없는 세계, 빛과 어둠이 따로 나뉘지 않은 세계. 장작과 불은 뒤섞여 장작불이 된다. 장작 따로, 불 따로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은 장작불이 아니다. 엄마와 딸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없다면 딸이 존재할 수 없다. 딸이 없다면 엄마는 이미 엄마가 아니다. 뒤섞임은 서로의 필요에서 이루어진다. 조상은 후손에, 후손은 조상에 존재를 기댄다. 남자는 여자에, 여자는 남자에 존재를 기댄다. 존재들이 서로 기대고 사는 곳, 혼돈에서 세계는 시작된다.
사진가와 시인의 두 번째 이야기는 혼돈이 낳은 뒤섞임의 풍경이다. 세계를 두 개의 서로 다른 요소로 나누려 했던 노력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빛과 어둠이 그랬고, 남자와 여자가 그랬고, 물질과 정신이 그랬다. 하지만 결국 남은 것은 그 자체로는 무엇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세상은 무한히 열린 연기의 세계이고, 그 세계는 온갖 것들이 뒤엉켜 ‘떡’이 되어 있다. 이 혼돈의 풍경에서 사진가와 시인이 본 것은 단조로운 불쾌함이 아니라 화려한 변주, 다양함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신, 강에는 영원이 흐른다

세상 밖을 떠돌아다니는 힌두 사회의 유랑자 사두, 그는 삶과 죽음의 집착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위해 삶에 매진한다. 온몸에 죽음을 상징하는 화장터의 횟가루를 뒤집어쓴 채 세상의 모든 것을 버려낸 그들은 뒤섞임을 벗어나 분리된 영원을 꿈꾸는 것일까?
세상은 무수한 속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속성들은 서로 구분되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류다. 그 속성들은 이미 서로 뒤섞여 있어 하나이다. 모든 것에 모든 것의 속성이 있다. 각각에 담긴 ‘본성’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다. 그래서 정신과 육체는 평등하다. 서로 다른 속성인 듯 같은 속성을 공유한다. 정신은 사유 속성이고, 육체는 연장 속성일 뿐이다.
인도로 떠난 사진가는 곳곳에서 성스러움을 발견한다. 수천만의 잡다한 신이 있는 인도, 그곳에서 사진가는 신성과 속성이 결코 구분된 것이 아님을 발견한다. 정신의 세계와 육체의 세계가 다르지 않듯 삶의 세계와 신의 세계는 다르지 않았다. 단지 드러나는 것, 즉 양태만이 달랐을 뿐이다. 드러나 보이는 것이든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이든 결국 함께 존재한다.
갠지스 강은 인도인에게 그 자체로 어머니다. 알몸의 아기가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듯, 알몸으로 강의 품에 안기는 것을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 강에게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고 자신의 죄를 정화한다. 강에는 빛을 포함해 모든 것이 녹아 있다. 어떤 더러움이든 죄든 강은 유유히 흐르면서 모든 것을 흩뜨려 버린다. 흐르는 물, 단 한 번도 물이 아니어 본 적이 없는 흐르는 물, 그것이 강이다.
인도로 떠는 사진가와 시인의 여행은 강물에 이르러 막을 내린다. 인도의 수많은 신은 결국 강에서 태어나 강으로 떠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강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 속성에는 한계가 없고, 고정된 형태가 없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흐른다. 모두스, 양태다. 그 모습 그대로 다른 판단은 필요 없다. 그때그때의 모습대로 고유한 꼴을 따라 흐를 뿐이다. 그 안에는 세상 온갖 소원과 욕망과 신성이 우글거린다. 수천만 개의 다름이, 그만큼의 양태가 강을 따라 바글거린다. 그리고 그 강은 그만큼의 기억과 존재를 품에 안고 흐른다.
강물 속에 담긴 수많은 존재는 각각의 ‘차이’를 품고 있다. 이 차이는 반복된다. 방금 전과 지금, 어제와 오늘, 수천 년 전과 지금이 모두 다르다. 이 차이는 반복된다. 윤회다. 하지만 똑같은 삶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는다. 반복되는 것은 역시 오직 차이뿐이다. 렌즈에 비친 언어, 사진에 포착된 풍경 속 인도는 수많은 차이가 만들어내는 수천만 다른 모습의 신들이 있는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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