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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1자아 외교가 이예와 명, 일본 그리고 조선 조선의 황금기를 이끈 외교_한명기 대일 외교의 중심이 되다_한문종 조선 초기 대일 외교와 이예_나카다 미노루 2장 이예의 외교 리더십 세종 외교의 실천자_박병련 세종시대 해양인식과 이예의 외교 리더십_박현모 이예, 오늘에 되살리다_이명훈 역사기행 이예의 유적지를 가다_유종현 주 참고문헌 부록 1_연구 현황 부록 2_연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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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 40회가 넘게 현해탄을 건너 험지로 뛰어든 ‘외교관’
계해약조 체결로 성공적인 외교를 이끈 탁월한 ‘리더십’ 외교통상부가 선정한 ‘2010 우리 외교를 빛낸 외교인물’ 세종 치세를 만든 조선 최고의 외교관 이예의 삶과 외교 리더십 세종 치세는 사대교린 외교의 바탕 위에서 완성되었다. 사대교린이란 국가 사이의 대소 차이를 인정하고 서루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유교적 국제질서관으로 ‘힘에 기반한 평화외교’를 의미한다. 세종이 펼친 사대교린 외교의 중심에는 외교관 ‘이예’가 있었다. 이 책은 사대교린 외교정책을 가장 뛰어나게 추진한 세종시대의 외교에 대한 연구와 답사의 결과물이다. 세종 외교의 실천자로서 이예를 다룬 연구는 아직 부족한 상황이다. 이런 현실에서 이 책이 갖는 의미는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최고의 외교관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이예는 어떤 인물이며, 그의 외교 철학엔 무엇이 담겨 있을까? 이 책은 그간 이예를 연구해온 여러 연구자가 모여 분석한 외교 리더십과 이예가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 본 역사기행을 담았다. 세종과의 만남, ‘내수외화’를 이끌다 세종대 조선에서 왜구 문제는 커다란 골칫덩이였다. 그렇기에 조선 초기 대일 외교는 왜구들을 일정한 ‘틀’ 속에 묶어두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국내에선 군비를 충실히 갖춰 방어력을 높이고 밖으로는 외교를 통해 왜구를 제도적으로 통제하려는 ‘내수외화’가 주요 외교노선이었다. 이런 외교노선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일본의 사정은 물론 왜구들의 사정과 성정, 사고방식,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에 정통한 인물이 필요했다. 그러나 양반 지배구조의 조선 사회에서 험지인 일본 외교를 전문으로 삼을 만한 양반을 찾기 어려웠다. 이런 문제를 안고 있는 태종, 세종 시기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이예였다. 이예는 울산의 지방 관리인 기관이었다. 당시는 왜구들이 침입이 잦은 때였다. 울산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예가 24살 되던 해에는 그의 상사이던 울산군수 이은이 왜구에 납치되었다. 이를 본 여러 아전은 모두 숨었으나, 이예는 홀로 왜구를 쫓아 대마도에까지 이르러 왜구와의 협상을 통해 이은을 무사히 구해왔다. 이를 계기로 이예는 당상관이 되어 본격적으로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된다. 이예 외교를 말하다 《세종실록》을 보면 이예는 외교관이 된 이후 회례사, 통신사 등의 자격으로 일본을 40여 차례 다녀왔고, 세종을 친히 만난 기록도 7번이나 되었다. 특히 40여 차례에 이르는 사행 중에 대마도나 일본, 유구에 잡혀간 조선 백성을 700명 가까이 구해왔다. 대일 사행은 짧아도 3개월, 길면 6개월 이상이 걸리는 험한 노정이었다. 그야말로 ‘최고의 일본통’이자 ‘헌신적인 외교관’이다. 이예는 강력한 국방과 화목한 교린이라는 대일 외교노선을 세종과 공유했다. 이를 개인의 성품인 용기와 헌신, 전문성으로 실현해낸 것이다. 특히 대일 사절로 활약하면서 문인제도와 계해약조를 정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문인제도와 계해약조는 이후 왜인의 왕래를 통제하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이용되었으며, 조선의 강력한 왜인통제책이 되었다. 이예 외교의 성공에는 겸손한 처신과 친화력과 담대하면서도 주밀한 성품 그리고 끊임없이 정보와 지식을 축적해 국가를 위해 사심 없이 활용한 이예의 개인적 특성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 특성으로 첫째 그는 일본을 잘 알았다. “모르는 사람을 보낼 수 없어 그대를 명하여 보내는 것”이라는 세종의 말을 통해 이를 잘 알 수 있다. 둘째 세심한 관찰력이다. 이예는 일본에서 오는 왜인 중에 가짜 통행증을 가지고 오는 자들이 있다고 세종께 상소하면서 왜인들의 통행증을 꼼꼼히 살펴 정식 통행증이 아닐 경우 그에 따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셋째 그의 헌신적인 태도와 세종의 절대적인 신뢰다. 이예는 71세가 되어서도 자청해서 유구로 사행을 떠났고, 세종은 늘 이예의 의견을 경청했으며 그의 판단과 성실성을 신뢰했다.이에 더해 세종시대의 강한 국방력과 국가 간 신의를 지키려는 군신들의 노력이 뒷받침되었기에 이예의 외교 리더십은 빛날 수 있었고, 성공적인 외교를 이끌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