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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양심
김우창
에피파니 2017.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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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도덕의 빛과 힘―타락한 세계에서의 양심과 정의
정의와 양심
양심의 문제 / 민주화투쟁: 자유와 평등 / 평등의 여러 차원 / 정의와 권리 / 생명의 권리 / 생존의 두 방식 / 인간의 평등과 존재의 고귀함 / 정의를 위한 투쟁과 도덕적 초월 / 투쟁과 온화한 덕성
양심의 여러 모습
양심의 권형(權衡) / 양심과 정치 / 자존심과 양심 / 관용과 화해 / 부정의의 상황/사려/자비 / 슬픔의 인식론 / 현실과 양심의 비극적 결단 / 산업 근대화와 민주화/사실적 지혜와 양심 / 근대화와 민주화
행복과 정신적 덕성
도덕의 영웅적 차원과 일상적 차원 / 행복지수 / 경제, 행복, 윤리
짧은 결론

법, 윤리 그리고 생활 세계의 규범
법과 형
교통 규칙 이야기
법치와 덕치
동아시아의 전통
법, 규범, 생활 세계
황폐한 세계에서의 법
근대적 법치와 민주주의
정치와 법의 주체
자유와 덕성
별이 있는 하늘과 도덕률
윤리와 인간 상황
결론을 대신하여

인문적 사고: 양심에 대한 단면적 고찰―로버트 볼트의 『모든 계절의 사람』
서론: 오늘의 현실과 인문과학의 물음
볼트의 『모든 계절의 사람』: 양심
연극의 주제
마키아벨리즘/작은 사실 속의 큰 주제
양심의 현실 시험
현실 역사의 진행: 양심과 현실 정치의 변증법
양심의 실존적 의미와 인간적 의미
자아의 근본으로서의 양심 그리고 여러 가지의 양심
양심의 현실 시험
양심의 인간과 역사
인문적 사고

사회적 도덕: 이념과 사실적 조건
정의의 문제·도덕의 문제
도덕적 결단과 판단·시장 논리와 이익의 관점
개인의 이익·개인의 자유/공공성·인간의 자유
정의에 대한 확신과 갈등
이성의 보편적 원칙
‘상생의 계약’/사회적 협약/사회적 유대감
공동체주의
도덕적 선택
칸트적 이성의 도덕과 개인적 집단적 이해 관계
신의 율법과 정치 공동체의 법
구체적 현실에 들어 있는 이성
도덕의 기초, 전통과 서사
프로네시스, 이성과 덕성
비극은 현실의 일부
도덕과 위선적 명분
영광과 포상에 잠재된 도덕적 부패의 가능성
그 자체로 존재하는 도덕률
요약, 결론을 대신하여

법률인과 부도덕한 사회
시작하며
자기완성의 행복
부도덕한 사회의 도덕적 인간
생활, 정신, 윤리, 법 / 법과 윤리 / 부도덕한 사회에서의 도덕적 인간 / 규범을 위한 결단
윤리 의식의 변화
윤리 / 인간관계의 감정과 이성 / 평등과 규범
예의·윤리·인간 존재에 대한 자각
예의
윤리적 자각과 그 불확실성
규범과 그 기초. 상호존중의 사회 / 깨달음의 복합적 의미 / 개인적 자유/사회적 자유
판단의 객관성과 지각적 균형
법 과정의 숙고와 결단 / 윤리, 도덕, 양심 / 양심, 규범, 문화, 보편성 / 법과 이성 / 양심과 법 체제
체험의 주관성과 판단의 객체성
지각적 균형 / 삶의 이야기로서의 소설 / 공평한 관측자 / 이반 일리치의 죽음 / 서열적 인간관계 / 제도의 허위 / 사실의 진실
도덕률의 지상명령

저자 소개 1

고려대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37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65년 「청맥」 지에 '엘리어트의 예'로 등단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 문명사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영문과 교수, 고려대 영문과 교수, 고려대 대학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고려대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5 프랑크푸르트도서전 주빈국 조직위원장을 역임했다. 영문학자, 공공지식인, 문명비평가, 문화사가, 문학이론가, 평론가, 철학자로서 인문.사회,자연과학을 아우르는 통합적 이해, 가늠하기 어려운 사상적 넓이와 깊이로 한국 인문학의 거장으로 불
고려대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37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65년 「청맥」 지에 '엘리어트의 예'로 등단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 문명사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영문과 교수, 고려대 영문과 교수, 고려대 대학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고려대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5 프랑크푸르트도서전 주빈국 조직위원장을 역임했다. 영문학자, 공공지식인, 문명비평가, 문화사가, 문학이론가, 평론가, 철학자로서 인문.사회,자연과학을 아우르는 통합적 이해, 가늠하기 어려운 사상적 넓이와 깊이로 한국 인문학의 거장으로 불린다.

지은 책으로는 『궁핍한 시대의 시인』 『지상의 척도』 『시인의 보석』 『법 없는 길』 『이성적 사회를 향하여』 김우창 전집 5권과 『심미적 이성의 탐구』 『정치와 삶의 세계』 『행동과 사유』 『사유의 공간』 『시대의 흐름에 서서』 『풍경과 마음』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미메시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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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8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336쪽 | 140*210*30mm
ISBN13
9788955968064

책 속으로

적어도 보통 사람에겐, 법은 ‘위협에 의해 뒷받침 되는 명령’(오스틴)으로 지키지 않으면 혼이 날 것으로 여겨진다. 사회나 국가의 질서가 덕으로만 유지될 수는 없다. 법이 중요하다. 그러나 덕의 배경이 없이는, 법은 폭력에 직결되며 내면적 설득을 통해 얻는 권위도 없게 된다.

사람은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며 산다. 정직한 사회에서는 정직한 사람으로 살고 부정직한 사회에서는 부정직한 사람으로 산다. 법보다 자연스러운 윤리나 도덕에 의지하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더 자연스러운 질서를 만들어낸다. 위협의 법이 아닌 덕의 정치는 무엇보다 부끄러움을 알게 하는 정치이다.

세월호 사건의 큰 충격은 우리 사회의 여러 조직 구도가 부패의 매트리스가 되어 있다는 느낌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정치가 부끄러움을 잃어버리고 공동체의 합의가 무너져 있을 때 ‘술수의 정치’는 대두된다. ‘술수의 정치’는, 정치가 개별자의 이익을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대신한다.

공적인 차원에서의 도덕적 명령을 절대화하면 그것은 쉽게 개인적 이익을 도장하는 공허한 명분이나 수단이 된다. 현대사회의 사회적 균열의 대부분은 확신의 체계가 된 정치적 이념으로 인한 것이다. 이때 도덕적 명분은 권력과 탐욕의 장에서 쉽게 발견되는 공동 통화(通貨)이다. 오늘 우리의 사회는 명분적 도덕이 자아를 부풀리기 위한 수단이 되고 도덕적 언설의 범람과 도덕적 타락이 상호 자극하면서 진정한 인간적 도덕의 기준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강한 신념의 인간들이 부딪치는 곳에서 대결은 불가피하다. 우리는, 비천한 동기가 아니라 고귀한 인간적 동기에서 나오는 높은 도덕적 선택이 야기하는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갈등은 인간 현실의 불가피한 현실이다.

어떤 도덕적 모순은 차라리 모순으로 남겨두는 것이 필요하다. 도덕은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모어(T. More) 는 자신의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강조하지 않으며, 다른 양심의 믿음과도 대결하지 않는다. 모어의 믿음은 사람의 사회적ㆍ정치적 관계는 오로지 법으로만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어는 오로지 자기 자신이기를 원한다. 모어가 싫어하는 것은 자기 과대화의 망상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영웅이 된다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자신의 양심을 지켜야 한다고 모어는 생각한다. 양심의 이름으로 현실에 개입하는 것을 주저하는 모어는 스스로에게는 양심의 세계를 강조하면서도, 현실에서는 ‘법적 절차를 통하여’ 바로 잡아야 할 일이 많다고 지적한다.

정치적 정의의 실현은 악인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악인을 만들어 내는 사회 조건을 향한다. 그리하여 악인도 희생자라는 관점이 성립한다. 불교의 [자비慈悲]는 인생이 슬픔의 바다라는 생각에 이어져 있다. 슬픔은 사람의 마음을 모든 것에 열어놓는다.

좋은 사회란 진실의 사회라기보다는 인간적 현실의 여러 요소가 균형을 이룬 사회이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김우창 글의 사회적 성격

김우창 글의 사회적 성격은 경직되고 폭력적인 모든 것에 대한 강인하고 집요한 경고와 회의이다. 우리 밖의 정치적 억압과 우리 안의 탐욕스러운 욕망이 함께 뒤범벅되어 나타난 폭력의 경직성은 우리 모두의 삶을 ‘짧고 저열하고 짐승스럽게’ 만든다. 더구나 그 폭력은 밖에서 강제된 물리적 폭력일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영혼 안에 감추어져 있던 폭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문제의 해결은 간단하질 않다.
널리 알려진 대로 김우창은, 정신의 원리를, 진리를 강요하고 명령하는 집단적 추상성이 아니라 진리를 요청하고 선택하는 개별적 구체성에서 본다. 그 유명한 ‘구체적 보편성’의 원칙이다. 이때 중요한 점은, 그리고 김우창이 중요한 점은, 그 요청과 선택의 필연성을 그럴듯한 도덕적 훈계학이나 잠언적 지혜로써가 아니라, 이성의 존재론적 구조와 철학적 탐구를 통해 밝혀내고 있는 점이다.

도덕과 윤리에 관심을 갖는 인문학의 일이 쉬운 도덕적 해답일 수는 없다고 김우창은 말한다. 인간 정신의 내적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 인문학이라기보다 인문과학이라 불리워지길 원한 김우창은, 우원함이야말로 인문학의 속성이라 본다. 그 우원함과 반성적 성찰이 나의 자의성을 넘어 세계의 보편성에로 인간을 이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과 의견은 다른 것이며, 사실과 가치의 엄격한 구분을 받아들인 것이 현대의 마음임을 상기하면서, 어떤 방법으로든 사실을 떠나 인간이 살 방법은 없다고 김우창은 강조하고 있다. 베버의 가치중립성이 오히려 더 깊은 가치존중의 윤리적 선택인 것처럼, 인문학의 가치추구는 가치의 주장이나 명령이 아니라 사실 위에서만 숙고되고 사실로서만 요청되어지는 ‘사실의 사유’임을 김우창은 말하고 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차고 넘치는 윤리적 설교와 도덕적 명령은 그 자체가 바로 윤리와 도덕이 ‘사실로서’ 부재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중요한 것은, 가치의 중요성을 명령하는 지적 권력의 크고 쉰 목소리가 아니라 가치 실현의 사실적 기반을 찾아가는 지적 탐색의 성실성과 겸손함이다.
바로 이곳에서 김우창의 난해함과 복잡성이 연유한다. 반복하여 말하자면 김우창이 생각하는 윤리와 도덕이,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경우처럼, 깨달은 자가 가르치고 명령하는 ‘정신적 권력’의 권위적 가치에서가 아니라 삶의 개별적 자율과 이성의 보편적 기율에 따른 ‘선택의 사실’―‘선택의 자유’와 ‘사실의 필연’ 위에 있기 때문이다.
명령하는 가치는 쉽고 단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쉽고 단순한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는 역사가―숱한 종교전쟁을 포함한 진리를 위한 학살행위가 증거한다. 사실 명령의 가치가 쉽게 느껴지는 것은, 명령이 쉽고 단순하기 때문이 아니라 명령을 따르고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패거리―이해관계를 함께하는 집단과 진영과 계급 그리고 조금 복잡하게는 집단 무의식까지도 포함된 해석학적 패러다임―가 있기 때문이다. 이해관계가 긍정적으로 얽혀 있는 이들에겐 쉽고 단순한 것이 다른 입장의 사람들에게는 그토록 어려운 것이라는 이 사실을 왜 우리는 잊고 사는가.)

어쨌거나 대체로 사람은, 삶의 일상성 속에 숨이 있는 실존적 필요로서 가치를 선택하고 받아들인다. 이때 가치의 선택은 무한정한 자유가 아닌 사실의 필연에 제약된다. 물론 이 사실의 필연은 나의 자유가 받아들인 필연이다.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없이 받아들인 선택에도 ‘먹는 것이 가능한 사실의 조건’을 받아들인 자유가 근거한다. 모든 선택은 사실의 필연성 속에 그 가능성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선택의 자유를 유지한다. ‘사실의 객관적 구조’가 갖고 있는 필연 안에서 비슷하게 살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의 삶도, 저마다의 처지에 따른 제각각의 다른 이유로 선택하고 받아들인 삶인 것이다. 자유는 ‘사실의 필연’에 대한 선택 혹은 복종으로서의 근거이다. 이 모든 과정에 이성이 개입된다.
이처럼 삶의 다양성과 선택의 자율성을 사실의 필연성과 이성의 보편성으로 함께 검토하는 김우창의 변증적 사유가 어떻게 난삽하지 않을 수 있는가.

김우창의 복잡함은 깊은 이론의 성실성이 반영된 삶의 복잡함이다. 물론 모든 지적 작업이 꼭 복잡해야 진실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엔 저마다의 길이 있다. 하지만 모든 고귀한 진실이 쉬운 것이 될 수는 없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때로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문 동시에 지극히 어려운 것이다. 그토록 소박한 김우창이 이처럼 복잡한 것은,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김우창이 거짓말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김우창에 대한 에피소드

김우창에 대한 스케치
이 글은 김우창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한 편집자가 사적으로 체험한 작은 사실의 기록이다.

1. 선생은, 초면의 학생에게 아주 긴 말씀을 들려주셨다. 1973년인가, 74년인가. 정확한 연도의 기억은 없지만, 재수 아니면 삼수생이었을 때의 일이다. 뒤늦게 친구로부터 간신히 [세대]지를 구해 황급히 ‘한국시의 형이상’을 읽었다. 이상한 글이었다. 좀 어렵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문제는 깊이와 분위기였다. 그처럼 압도적인 교양과 지식으로 무장된 글들이 그렇게 담담하게 쓰여지다니, 한국 현대시를 서정주와 함께 형이상적 실패의 시로 규정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읽히게 하는 그 글의 고요한 치열성은 내 마음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선생은 단호한 주장을 하는데도 서두름도, 어떤 설교의 흔적도 보이질 않았다. 깨닫고 많이 아닌 이 특유의 가르치려 하는 거드름도 오만함도 전혀 없었다. 그 당시의 많은 유명한 글들과 너무 달랐다. 명령하고 단정하는 글이 아니라 성찰하고 스스로 사유하는 글은 본 적이 없었다. 설교를 안 하다니···. 이상하고 궁금했다. 이 글을 쓴 분은 어떤 분일까. 고대 영문학과에 계셨다.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전화를 드렸다. 찾아뵙고 싶다고.
지금 생각하면 참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이었다. 선생의 강의를 듣는 학생이나 제자도 아닌 재수하는 학생이 마구 전화를 드려 그냥 찾아뵙겠다고 하니 난감한 일이셨을 것이다. 선생께선 그러나 허락하셨다. 날짜도 요일도 잊었지만 시간은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한다. 점심 식사 후 그러니까 오후 한 시에 연구실에서 보자는 말씀이셨다. 문과대 어둡고 어수선한 복도를 거쳐 선생의 연구실 문 앞에 12시 50분쯤 도착했다. 선생께선 12시 58분에 오셨다.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시더니 방문을 여셨다. 선생을 따라 쭈빗쭈빗 들어갔다. 그리고 그날, 몇 시나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어둑어둑해져서 연구실을 나왔다. 먹먹했다.

초면인, 어린 학생의 그 치기 어린 행동과 질문에 선생께선 마다 않으시고, 특유의 진지하고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오랜 시간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엄혹한 시대였다. 아무나 만나고 아무 말이나 해서는 안 되는 시기였다. 까딱하면 간첩단 사건이요, 이른바 프락치들이 날뛰던 때였다. 기억한다. 선생은 말씀하셨다. 학생의 그 고민과 열정을 높이 평가한다. 공부해라. 시간을 아껴라. 마르크스가 혁명적일 수 있었던 것은 깊고 넓게 공부했기 때문이다. 깊이가 없으면 넓지 않고, 넓지 않으면 깊을 수가 없다. 혁명을 위한 혁명이 아닌, 진정한 혁명의 사고는 깊고 넓지 않으면 결코 가질 수 없다고 그렇게 선생은 마르크스의 예를 들어 설명하셨다.
충격이었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이 시퍼렇게 눈에 불을 켜고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감시하던 때이다. 미니스커트나 장발 단속은 물론, 금지곡과 금서를 만들고 무슨 불온서적소지죄인가 하는 것으로 국민의 정신 상태까지 국가가 책임지고 관리하겠다고 으름장 놓는 시대였다. 그런데 마르크스라니. 가슴에 뜨거운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그 뜨거움을 안고, 하나 둘 켜지는 캠퍼스의 가로등을 보며 안암동 고대 운동장을 한참을 빙빙 돌고 또 돌았다.

2. 선생은, 항상 맨 나중에 주문하셨다. 메뉴판에 적혀 있는 것들 중에 값이 낮은 음식으로. 선생을 편집인으로 모시고 하는 인문학 계간지 [비평]의 편집회의는 평창동의 한 카페에서 매달 점심 식사를 끼고 진행되었다. 편집위원과 또 편집담당자도 함께하는 회의는, 식사 주문을 하게 되는데 으레 선생께 무엇을 드시겠느냐고 여쭈면 항상 먼저들 시키라고 하셨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고르면, 후에 선생께선 이것으로 하겠다고 맨 나중에 주문을 하셨다. 처음에는 몰랐다. 선생께서 시키시는 음식이 그 집에서는 제일 가격이 낮은 음식이었는지. 당신께서 싼 음식을 주문하면 다른 사람들이 혹시 그것에 따라 먹고 싶지도 않은 음식을 가격 때문에 시키게 될까 염려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다. 물론 아무 말씀이 없으셨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하는 짐작이다. 그러나 그 후로도 선생을 모시고 하는 식사 자리에선 언제나 그러셨다. 언제나 그 식당에서 비교적 값이 저렴한 음식으로, 대부분 다른 사람이 주문한 다음 시키신다는 것은 기실은 오랜 시간 선생과 식사를 한 후에, 어느 날, 문득 깨달은 사실이다.

3. 선생의 방은 어두웠다. 선생께서 고대 대학원장을 맡고 계실 때였다. 무슨 일인가로 원장실을 찾아갔는데 방이 너무 어두웠다. 마침 사무보는 과장님이 계셔서 “너무 어둡네요, 불 좀 켜시지요” 하고 여쭈니 그분이 웃으면서 “원장님께선 해가 있을 때는 전등을 안 켜세요”라고 한다. 생각해 보니 선생 댁도 항상 춥고 어두웠다. 그래도 여긴 고려대학교 대학원장실이 아닌가. 물었더니 원장님 당신 자신과 연관되는 모든 비용은 최소한도로 다 줄여놓으셨다고 한다. (어쩔 수 없다.)

최근에야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차를 바꾸셨지만 선생의 차는 오랫동안 현대 포니엑셀이었다. (최근 바꾸신 차도 오래된 초창기 아반테이다.) 너무 낡고 초라해 그 차를 타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당연히 승차감도 안 좋고 특히 오래되어 고장도 많았다. 선생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조직위원장을 맡고 계실 때, 조직위원장실이 있던 경복궁의 고궁박물관 쪽 경비원이 조직위원장의 주차 자리에 이런 ‘똥차’를 들어오게 할 수 없다고 가로막은 일이 있었다고도 한다. 선생께서 대학원장을 끝으로 고대를 정년퇴임하실 무렵,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조명한 논집 《사유의 공간》과 대담집 《행동과 사유》를 출간하고 작은 학술발표회와 기념식을 가졌다. 선생을 좋아하는 몇몇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하고 그중 몇은 선생의 검소한 삶을 화제로 삼아 선생의 차를 문화 뉴스로 다루려 하였다. 선생은 웃으셨지만 단호했다. 내 차가 그런 것은 내 처지에 그 차가 알맞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 크고 비싼 차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 사람이 그럴 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내 처지에 맞아서 타고 다니는 차가 특별한 문화 기사가 될 수는 없다는 말씀이셨다. 기사를 쓸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다.)

어느 해인가 겨울, 선생 댁에 고양이들이 아주 많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꽤 많은 고양이들이 다리가 불구인 게 아닌가. 여쭈어봤는지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겨울 평창동 아스팔트 언덕길에서 차 사고로 다리를 다친 고양이들이 자기 먹을 것을 찾아 먹지 못하고 얼어죽을까봐 한두 마리 눈에 띄는 것들을 데려다 놓으셨다고 하셨다. (어쩔 수 없다.)

선생의 옷은 대체로 단정하시다. 하지만 선생이 입고 계시는 와이셔츠의 목깃이나 손목깃이 해져서 너덜거리는 걸 아주 다 감추시진 못한다. 은발이 너무나 아름다우신 사모님께서, 선생께서 옷을 안 사시고 안 버리셔서 속상할 때가 많다고 하실 정도이다. (어쩔 수 없다.)

딱 한 번 여쭈어본 적이 있다. “선생님처럼 우리 모두가 산다면 지구가 지금처럼 하나여도 괜찮지 않을까요.” 선생께서 대답하셨다. 무슨 근거에서인지는 말씀 안 하셨지만 “아마, 한 세 개는 있어야 될 거요”라고.
참, 선생의 자제들 중 한 분이 중학교 1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서울대학교에 진학한, 서울대 역사상 최연소 입학 및 최연소 졸업자이며 금세기 최고의 업적을 보여준 수학자 중 하나인, 영국 옥스퍼드대학 석좌교수 김민형 박사라는 사실을 알리면, 선생께서 야단치실까. (죄송하지만 이미 말하였으니 또 어쩔 수 없다.)

- 박광성 (《법과 양심》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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