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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
귀경 해후 구안정 인연 산채 폭우 출생 춘정 변곡 순어 파몽 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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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은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한 구안정을 바라보았다. 현판은 왕희지 못지않은 필체로 장엄하나 건물의 몸체는 한낱 토막에 불과한 운곡의 사랑방. 저곳에서 회초리를 맞았고 글을 읽었고 화로 속에서 익은 군밤도 까먹었다. 아버지 같고 할아버지 같았던 운곡은 그때도 해소를 앓고 있었다. 운이 산채를 떠나며 하직 인사를 올리자 요란한 기침 끝에 운곡이 말했다. 집을 찾지 못하겠거든 네 스스로 집이 되라고…….
---「인연」중에서 “네 답을 다시 듣고 싶다. 홀로 짐 지려 하지 말고 나누어다오. 나는 네 짐을 함께 질 준비가 되어있다.” 온요는 얼굴을 굳혔다. 짐을 나누자고? 짐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운은 정지상 대감의 아들이다. 혈통이 끊는다 마음먹었다고 끊어지는가. 운은 운의 길을, 온요는 온요의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이 순리다. 모두에게 이로운 길이다. 마음을 주는 것과 짐을 나누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온요가 입을 열려 하자 운이 가로채 말했다. “지금 답하지 마라. 재촉하지 않겠다. 두 달 후가 아니어도 괜찮다. 네 마음이 정하는 때를 기다리겠다. 가벼이 듣지 말고 충분히 고민해본 뒤 답해다오.” 운이 굳은 눈빛으로 다시금 동의를 구했다. 그의 청을 어찌 가벼이 들을 수 있을까. 가벼워서가 아니라 바위처럼 무거워 말문이 막힌다. ---「변곡」중에서 온요 차례가 되었다. 온요는 언제 꺾어왔는지 꽃 한 묶음을 묘 앞에 놓았다. 노란 꽃술에 하얀 꽃잎을 종종 매단 이름 모를 들꽃들이 등롱처럼 봉분을 밝혔다. 매무시를 만져 단정히 한 온요가 부복하여 절했다. 그녀가 절할 때마다 하얀 장의 아래 두른 노란 치맛자락이 꽃봉오리처럼 부풀었다. 어여뻤다. 아니, 어여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돈후는 온몸 가득 뿌듯하게 차오르는 뜨거운 기운에 숨이 가빠졌다. 드디어 찾았다. 막막했던 바다에서 돛보다 선명한 부표가 떠올랐다. 어둠뿐인 벌에 태양보다 밝은 횃불이 나타났다. 저 여인이다. 저 여인만 있으면 된다. 넘어야 할 파도가 높겠지만, 치워야 할 장애물이 많겠지만, 저 여인만 있으면 갈 수 있다. 저 여인을 내자로 맞이한다면 허울뿐인 반편이 생도 온전해질 수 있으리라. ---「순어」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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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함과 활기로 가득한 천 년 전 고려의 모습
작품에는 천 년 전 고려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지도를 그리듯 묘사된 개경 거리, 탄탄하게 고증된 복식과 제도, 귀족, 상인, 노비, 장인, 추쇄꾼 등 다양한 사람들, 언어와 풍물을 통해 전해지는 그 시대 문화와 습속을 느껴보는 것은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시대 분위기를 살려내는 정갈한 문장이 멋과 향취를 더한다. 권세가 김부식, 혁명가 묘청과 정지상, 의뭉스러운 임금 인종 등 실제 역사 인물의 활약도 이야기를 더욱 흥미롭게 한다. 이들은 권력을 위해, 이상을 위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밀어붙인다. 그러나 이들이 만든 고려는 사람의 삶과 닿지 못한다. 권력을 쥔 이들이 다투는 사이 억압받고 소외되는 소설 속 젊은이들의 모습은 오늘날 고단한 청년들의 삶과도 닮았다. 이들의 싸움이 더욱 마음에 와닿는 이유다.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끈이 끊어지리까 천년을 외로이 살아간들 믿음이 끊어지리까 제목 ‘징과 돌의 노래’는 고려가요 ‘정석가(鄭石歌)’의 제목을 우리말로 풀어낸 것이다. 천 년을 헤어져 살아도 임을 잊지 않겠다 노래한 고려가요처럼, 『징과 돌의 노래』의 주인공들은 혼란한 세상 속에서도 사랑의 끈을 놓지 않는다. 아픔을 지닌 아웃사이더들이 사랑에서 희망을 찾으며 세상을 헤쳐나가는 모습은 독자에게 잔잔한 위안을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