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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앵두의 시간
작가 연보 쓰다 2000년 10월 3일~2002년 4월 20일의 기록 아프다 2002년 5월 22일~2003년 12월 31일의 기록 고치다 2004년 1월 5일~2006년 12월 26일의 기록 상상하다 2007년 1월 11일~2009년 12월 26일의 기록 다시! 쓰고 고치다 2010년 1월 3일~2010년 12월 13일의 기록 추천사 『김탁환의 원고지』, 고통과 황홀과 고독의 노트 |
金琸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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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를 시작하면 내 능력 이상의 것을 꿈꾸게 된다. 이 정도면 만족하지 않겠느냐고 미리 예상을 하고 들어가지만 막상 문장 하나하나와 씨름을 하다보면 어느새 나는 내가 오를 산봉우리 너머까지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퇴고는 힘들다. 온몸의 기가 빠져나가는 작업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고치면 고칠수록, 불가능을 꿈꾸면 꿈꿀수록, 비록 완벽한 문장, 완전한 소설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소설이 훨씬 좋아진다는 사실이다. 2000년 10월 3일의 기록
처음에는 전략을 선명하게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다가, 이제는 그 전략마저 지워버려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의도하지 않고 가기. 그것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그 끝없는 이야기 속에서 소설가가 지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넘어서는 것이다. 끝나지 않으면 어때, 갈 데까지 가보는 거지. 2000년 10월 16일의 기록 물론 아름다운 문장은 좋은 것이지만, 그 때문에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된다. 나는 아름답게 쓰지 않고 정확하게 쓰고 싶다. 그 길은? 일단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 그래서 그 단어를 만들어낸 앞뒤 문맥을 모두 파악한 상태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 그러나 나는 또 정확하다는 것이 그런 공부를 넘어선다는 것도 안다. 2001년 7월 16일의 기록 아무도 모르는(이해받기 힘든, 시대착오적이기까지 한) 정서(혹은 사상)라고 하더라도 난 이걸 쓸 수밖에 없다. 이것이 내 고민의 뿌리이며 내가 그래도 글쟁이다운 글쟁이를 꿈꿀 수 있게 만든 근간이니까. 어떤 작업보다 힘들고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난 올라갈 것이다. 2002년 7월 31일의 기록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 앞에 원고가 있고 나는 이것을 더 훌륭한 작품으로 고쳐야 한다.’ 사실 할 일도 없지 않은가? 2권까지 퇴고를 마치면, 유채꽃 벚꽃 모두 떨어지겠지. 5월이겠지. 그리고 5월에도 나는 다시 이 소설 원고를 붙들고 2차 퇴고에 돌입하겠지. 아, 이 현기증 나는 예측 가능한 삶들. 5년 뒤에도 나는……. 10년 뒤에도 나는……. 2003년 4월 14일의 기록 본격적으로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러니까 서른한 살 이후부터, 삶은 잘 떠오르지 않고 내가 쓴 책 제목만 기억나는 탓이기도 하다. 서른한 살부터 서른다섯 살……. 그 5년 동안 내 인생은 어디론가 날아가버린 것만 같다. 2003년 11월 30일의 기록 소설가의 길로 접어들면서부터 알고 있었지만, 결국 작가는 혼자 자신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길은 옳고 그름의 길이 아니라 얼마나 극한의 고통을 잘 견뎌 그것을 작품 속으로 녹아내었느냐를 살피는 길이다. 2004년 1월 18일의 기록 나를 실패하게 만드는, 내 부족한 부분과 약점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이 소설이라는 칼날이 더욱 마음에 든다. 2004년 6월 6일의 기록 슬픔이 공포에 이르면, 모든 글자들은 흔들리며 죽음의 춤을 춘다. 그 두려움까지 닿아야 괜찮은 소설을 쓸 수 있다. 말을 더 줄이고 모이를 쪼듯 글자들을 한 자 한 자 쪼아야겠다. 내 앞에 있는 당신들은 누구인가. 나는 당신들을 모른다. 당신들 역시 나를 모른다. 나는 홀로 있을 때 나다. 그 혼자인 내가 무엇을 하는지… 그때 나는 과연 괴물이 되는지……. 2005년 2월 22일의 기록 왜 비평을 하다가 창작으로 전환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간단하다. 예술은 창작자의 것이므로. 우아한 달변을 뽐내는 손님보단 처절하게 버벅대는 주인이 좋다. 2005년 6월 15일의 기록 난 400매에서 딱 멈추고 며칠을 그냥 보내곤 해. 더 가면 이런 아슬아슬함은 사라지거든. 지금이야. 바로 그제 어제 그리고 오늘! 난 400매에 간당거리는 소설을 잊고 딴 짓하며 지냈어. 그런데도 그는 내게 401매의 아름다움과 501매의 매혹을 이야기하지. 꼭 이야기가 이렇게 가야 한다며 스스로 연기를 해보이기도 해. 2008년 1월 20일 작가의 고독은 책의 출간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했던가. 내 이름으로 나가지만, 내가 끼어들 부분이 남아 있지 않은 책. 그 책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 또한 작가의 운명이리라. 2009월 6월 16일의 기록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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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드는 이야기가 ‘진짜’ 이야기일까. 그리고 이런 생각도 꼬리를 물었다. 예술가란 ‘진짜’에 매혹된 영혼들이라고. 진짜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발레리나는 춤을 연습하고, 소설가는 이야기를 연습하고, 화가는 그림을 연습하는 것이라고. 그 진짜에 닿기 위해, 잠시 잠깐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이기적으로 단순하게 사는 것이라고. 그래도 진짜에 닿는 순간은 몇 번 되지 않는다고. 진짜에 닿지 않았으니까 계속 연습하고 연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 2010년 11월 3일의 기록 중에서
책의 개요 ♠ 영화〈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 〈가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황진이〉 등등 가장 많은 작품이 영상화된 소설가 김탁환, 그 10년간의 치열한 창작 기록. 영감이 찾아오면 신들린 듯 문장을 써내려가는 소설가, 막힘없는 붓놀림으로 거대한 그림을 뚝딱 완성하는 화가, 음악에 모든 걸 맡긴 채 주변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듯 몰입하는 가수……. 아름다운 작품을 생산해내는 예술가들을 떠올리다보면 어떤 격정적인 이미지만 떠오른다. 예술가들의 삶이란 정말 그런 것일까?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의 낭만적 상상에 묻혀, 노동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예술가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천지창조〉를 완성하기 위해 미켈란젤로는 4년을 꼬박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작업하느라 목과 눈에 이상이 생겼고, 루벤스와 르누아르도 물감 안료에 포함된 금속에 중독돼 고통 받았다. 전설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다 건초염 때문에 꿈을 포기했으며,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도 손가락 인대가 늘어나 5년이나 무대를 떠나야 했다. 어느 예술노동자의 황홀한 분투기 그리고 지금 여기, 직업인으로서 예술가의 초상을 보여주는 한 남자가 있다. 스무 편 넘는 장편소설에 중단편과 연구서, 산문집을 합쳐 50권 분량을 훌쩍 넘는 저작 목록, 그리고 가장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원작을 지닌 이야기꾼. 바로 김탁환이다. 이 책 《김탁환의 원고지》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온 세상이 달뜨던 2000년부터 2010년까지 소설을 집필하는 사이사이에 남긴 창작일기다. 출간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내면의 풍경을 가감 없이 드러냈던 이 기록 속에는 예술가의 삶이란 게 과연 어떤 모습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책 속에 그려진 소설가 김탁환의 생활은 뮤즈와의 조우나 격정에 휩싸인 찰나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는 ‘더 써야 한다. 더 집중해야 한다. 더 고독해져야 한다. 버텨야 한다.’며 자신을 다그쳤고, 낙관과 비관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했고, 글을 쓰다 지쳐 잠들기도 했고, 쑤시고 아픈 몸을 견디며 창작과 퇴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꼬박 10년. 소설을 ‘쓰지 않을 때, 쓸 수 없을 때, 쓰기 싫을 때, 문득’ 써내려갔던 이 일기는 긴 시간을 거쳐 어느새 원고지 1,000매를 훌쩍 뛰어넘는 서사시가 되었다. 《김탁환의 원고지》는 그야말로 숨 막힐 듯 치열하고 지루하리만치 성실한 ‘예술노동자’의 황홀한 분투기다. 지독하다, 소설밖에 모르는 삶! 죽기 며칠 전의 허균, 조선시대 저잣거리에서 소설 읽어주던 사람, 무대에 올라 춤을 추는 순간 잠시 호흡을 멈추고 세상과 대결하는 황진이, 파리와 모로코 탕헤르의 공기를 마셨던 조선의 궁녀, 겨울 숲에서 호랑이의 숨소리를 쫓는 사내…….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한 뒤부터, 김탁환은 온전히 이야기에만 이끌려 살았다. 첫 장편 《열두 마리 고래의 사랑 이야기》부터 2010년 출간한 《밀림무정》까지 인간 김탁환의 삶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럴 법도 했다. 온갖 이야기들이 싱싱하게 날뛰고 종횡무진하는 소설 속과 달리 소설 바깥의 생활은 너무나, 지독할 정도로 단조롭고 평범했으므로. 그는 글을 쓰는 틈틈이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학생들을 가르쳤고, 글을 쓰다 지치면 다시 힘을 내기 위해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었으며, 글을 쓰기 위해 대가들을 찾아가 배우고, 써온 글들을 개악의 순간까지 퇴고하기 위해 다시 책상에 앉았다. 이쯤 되니 이것이 인간 김탁환의 삶인지, 이야기의 삶인지 모호해진다. 원고지 400매를 막 넘어선 김탁환에게 이야기는 “401매의 아름다움과 501매의 매혹을” 속삭이고, 이제 주인공들을 그만 괴롭혀야겠다 싶을 때에도 “밀어붙여!”라며 그를 다그쳤다. 그 열기에 밀려 마침내 그는 선언해버린다. “나는 없다. 있는 건 이야기뿐. 이야기들이 새벽에 일어나 일찍 학교가서 컴퓨터를 켜고 자판을 두드리다가 밥을 먹고 또 자판을 두드리다가 밥을 먹고 또 자판을 두드리다가 꾸벅꾸벅 졸다가 잠든다. 그건 내가 아니라 이야기다.” (2003년 9월 18일의 기록 중에서) 창작이라는, 아프고도 매혹적인 노동 창작이란 몸의 감각을 잠시도 쉬게 할 수 없는 작업이었다. 구상과 집필, 그리고 퇴고로 이어지는 일상은 그의 온몸에 흔적을 남겼다. 과로가 불러온 성대결절로 수술을 받았고, 컴퓨터 앞을 떠날 수 없는 사무직 회사원처럼 어깨 경련과 마비가 수시로 찾아왔다. 허리 통증 때문에 한의원을 들락거리며 추나치료를 받았고, 한창 젊음을 구가해야 할 나이인데 머리까지 너무 일찍, 하얗게 세어버렸다. 하지만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감내해야 했던 징글징글한 고통들은 이상하게도 책이 나오고 나면 까맣게 지워졌다. 막 출간된 소설을 앞에 두고 지친 몸과 마음을 다독일라치면 새로운 이야기를 속살거리는 인물들의 목소리에 좀이 쑤시기까지 했다. 불치의 이야기 중독!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하나였다. 그에게 이야기란,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매혹적인 ‘그 무엇’이기에. 김탁환의 재발견 한편 이 책은 그간 한 번도 내보인 적 없는 작가 김탁환의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주기도 한다.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창작과 퇴고 사이사이 떠난 취재여행은 모처럼 김탁환을 그 또래의 청년으로 돌아오게 했다. 가슴 먹먹해지는 제주도의 일몰은 이제 한 작품을 끝낼 때마다 그를 거기로 이끌고, 백제인의 혼이 점점이 박혀 있는 부여와 공주는 몇 번을 가도 아프고 사랑스럽다. 혜초의 발걸음을 따라갔던 실크로드는 또 어떤가? 또 하나. 어지간한 사람은 감히 흉내조차 내기 힘든 방대한 독서와 영화 편력, 발레에서 오페라와 뮤지컬을 가로지르는 문화 취향 그리고 변함없는 드라마 사랑은 감탄을 넘어 경이로울 지경이다. 김탁환은 자신의 눈과 귀와 마음을 흔들어대는 책과 공연과 영화와 드라마들을 단정하고 아름다운 문장 위로 하나하나 호출해낸다. 빼어난 안목으로 이웃 예술작품 창작자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드러내는 산문들은 이 책이 단순한 창작일기를 넘어 달달한 문화기행 혹은 내면여행서로까지 확장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고통과 황홀과 고독의 기록 김탁환 스스로 “날마다 몰래 치른 백병전의 흉터이자 스스로에게 선사하는 쑥스러운 선물”이라고 고백한 이 책 《김탁환의 원고지》는 소설을 쓰는 동안 겪은 고통과 황홀과 고독의 기록인 동시에, 독자들의 어깨에 따뜻하게 손 얹으며 다가서는 에세이다. 가장 순수하고 정신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예술조차, 지리하고 평범하고 단조로운 일상을 거치지 않으면 완성할 수 없다는 하나의 진실 앞에서 우리는 가만히 위로받는다. 그 위안의 정체는, 예술가도 결국 일상을 견디는 한 인간이라는 동질감이다.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지만 예술을 꿈꾸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김탁환의 원고지》는 놀랄 만큼 흥미롭고 실용적인 텍스트다. 창작이란 기술보다 예술가 개인의 정신이나 삶의 성실성에 빚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데뷔 이후 쉬지 않고 움직여온 예술노동자이자 탁월한 이야기꾼 김탁환이 써낸 10년치 창작 기록. 만약 예술에 안내가 필요하다면 이보다 정직한 안내서가 또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