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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단면을 깊이 우려내는 시간
삶에 대한 하나의 정갈한 태도로서, 차를 마시는 일에 대한 이야기. 다른 무엇이 아니라, 차를 마셔야 할 때가 있단다. 외롭고 심심할 때, 편치 않을 때 불쑥, 차를 마시면 어지러운 일들이 찻잔 안으로 가라앉는다고. 따뜻한 차 한 잔이 선사하는 고요한 시간을 맘껏 누려보길.
2018.03.02.
에세이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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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부 차의 시간 : 차는 홀로 마시면 신비롭다-초의 외로워서 마신다 심심해서 마신다 혼자서 마신다 편치 않을 때 마신다 비우려고 마신다 시간마다 다르게 마신다 특별히, 오후의 차 차를 마시는 동안 일어나는 일 정점 차는 그날의 물기를 기억한다. 섬세해야 한다 사색하는 인간은 걷거나, 마신다 사색하는 인간에게는 차 한 잔도 자극적이다 가만히 있는 시간이 는다 자세가 중요하다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다도라니 다도가 아니라면 한국 다례 일본 다도 중국 다예 다우 다우를 만나다 차의 맛이 문제가 아니다 궁극의 물 어떤 차가 좋은 차인가? 손님이 물었다 어떤 차가 좋은 차인가? 친구가 물었다 2부 차의 맛 : 차는 물의 신이고, 물은 차의 몸이다-장원 푸르른, 푸르른 녹차 처방전 옥로 사비 처음엔 쓰고 나중엔 감미롭다 가을 오후엔 홍차를 마신다 아삼 얼그레이 다즐링 다즐링 세컨드 플러쉬 랍상 소우총 딤불라! 우바! 누와라 엘리야! 밀크티 붉디 붉을 홍 보이차 보이차를 마시면 백차 백호은침 쓰지 않으면 단조롭다 수선 철관음 3부 차의 몸 : 보는 것은 믿는 것이고, 만지는 것은 아는 것이다-피터 슈예달 찻잎이 춤춘다 찻잔을 더 좋아한다 손잡이 없는 찻잔을 좋아한다 찻잔의 손잡이를 잡을 경우 볼에 대볼래? 쓰기에 아까운 찻잔을 써야 한다 낡은 찻잔에는 표정이 있다 낡은 찻잔에는 시간이 있다 아주 작은 찻잔을 비우기가 어렵다 오래 곁에 있는 찻잔 사이 찻잔을 바꾸다 어째서 세 개 이상의 찻잔이 필요한가? 잔과 컵 잔과 나 다선 숙우, 공도배, 다해 로열 코펜하겐 도천 천한봉 티포트의 일 책 읽는 사람 옆에 있어야 하는 것 4부 차와 글쓰기 : 찻잎, 글쓰기의 그물-롤랑 바르트 차에 의지해 쓴다 향기가 나를 떠민다 오른손의 좋은 일 하찮은 우주의 점 하나가 차를 홀짝인다 카페를 선호한다 찻집의 조건 카페와 헤어지는 일 오래 들여다본다 차와 건강 블렌딩이 필요한 시간 가진 것 중 제일 좋은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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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울 때 마신다
차는 왜 마시는가? 외로워서 마신다. 정말이지, 외로워서. 추사도, 다산도, 외로워서 마셨을 것이다. 둘은 유배지에서 누구보다 외로웠다. 추사와 다산이 이뤄낸 성취들은 모두 외로움 이 잉태한 것들이다. 외로운 이는 외로움을 꺼려 하지만 외로 움에 끌린다. 차는 외로움을 달래면서도 외로움을 고양시킨다. 어떤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보다 높은 외로움에 이른다는 것. 외로운 이가 외따로 있는 듯 보이는 것은 그가 보다 높은 외로움에 있기 때 문이다. 편치 않을 때 마신다 차는 편할 때 마시면 그런대로 좋지만, 편치 않을 때야 말로 차를 마셔야 하는 적기라 할 만하다. 서럽고 분하고 눈물 이 멈추질 않고, 일은 꼬이고 엉켜서 퇴로가 보이지 않을 때, 불 쑥, 그러니까 불쑥 일어나 물을 끓이고, 어떤 차를 마실지, 어 떤 찻잔을 쓸지, 신중히 결정한 다음, 무엇보다 차를 우리는 데 전력을 다하고, 우린 차를 흘리지 않게 조심해서 찻잔에 따르 고, 차향을 맡고 차를 마시며, 찻잔의 기원이나 양식에 대해 골몰하는 이런 난데없는 허튼짓이, 불가피해 보이던 사태의 맥을 툭툭 끊는다. 내게는 걸레를 빠는 일이나 차를 마시는 일이나 다르지 않은데, 걸레를 빨아야 할 때가 있고 차를 마셔야 할 때 가 있다. 시간마다 다르게 마신다 아침에 깨어나 마시는 차는 꿈과 현실 사이에 가로놓인 향긋한 교량과 같다. 차를 마시다 보면 어느새 나는 꿈에서 현 실로 건너와 있다. 그럼에도 교량을 건너며 몇 번이나 뛰어내리고 싶었던가. 점심을 먹고 마시는 차는 산책과 흡사하다. 산책에 나서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차를 마신다. 우두커니, 나는 아직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오후 네 시에 마시는 차는 호락호락 시간에 쫓겨 살지 않겠다는 문명인의 세련된 입장 표명이다. 저녁에 마시는 차는 기도하는 것이다. 간절히 모은 두 손이 찻잔을 쥐고 있다. 특별히, 오후의 차 하루의 반절을 보내며 한 모금. 나머지 반절을 보내기 전 한 모금. 아주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시간. 그처럼 아주 이르지도, 늦지 도 않은 시간. 시작과 끝의 관점에선 무엇을 내세우기에도, 무엇을 단념하기에도 어중간한 시간. 그러니 오후 네 시엔 결심을 미룰 것. 비관도 낙관도 하지 말 것. 대신에 부드러운 곳에 자리를 잡고 터무니없이 한가하게, 찻잔을 들어서 후후 불 것. 가만히 있는 시간이 는다 찻잔이 비었다고 성급히, 찻잔에 차를 다시 채워서는 안 된다. 비 갠 후 꽃의 향이 진해지듯, 차향도 차를 삼킨 후에 야 진해진다. 빈 찻잔을 보며, 가만히 있는 시간이 는다. 자세가 중요하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아나고 태풍이 휘몰아치고 전봇대가 휘어지고 염소가 날고 내 친구도 날고 하필이면 그때 헤어지자는 긴급 문자가 뜨더라도 차를 한번 마셨으면 흔들림 없이, 천천히 마신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찻잔을 더 좋아한다 책상보다 의자를 더 좋아한다. 그처럼 다관보다 찻잔을 더 좋아한다. 책상보다는 의자를, 다관보다는 찻잔을 더 좋아하는 까닭은, 이들이 내 고통을 그 어떤 사물들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믿음에서다. 실제로 나는 의자에 파묻혀 길고 어두 운 밤을 안전히 떠돌았다. 그 같은 밤이면 손에 쥐고서 하염없이 어루만지던 내 외로움은 다관이 아닌 찻잔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종잡을 수 없는 밤이면, 내 낡은 찻잔은 더없이 충실해 보인다.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사물의 내력에서 어떤 견고한 안도감을 느낀다. 책 읽는 사람 옆에 있어야 하는 것 책 읽는 사람 옆에는 찻잔이 있어야 한다. 한 세계를 여 행하는 데 찻잔이 빠져서야! 물론 차를 가득 채운 티포트도 있어야 한다. 고작 찻잔이 비었다고 우주의 미로나, 분홍빛 종탑 이 보이는 콩브레 언덕을 물이나 끓이자고 홀연히 떠나야 하겠는가?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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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의 차로 우리는 삶에서 잠시 비껴 설 수 있다
차를 마시는 일이란, 바로 이 순간에 인생의 단면을 깊게 우려내는 것. 때론 거창한 삶에서 멀어져, 순간에 기대는 것도 좋아요. 유난히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 눈발 휘날리는 [효리네 민박]2의 첫날 아침도 어김없이 차를 마시는 일로 시작되었다. 효리와 상순은 차를 마시며 손님들을 받기 전 숨고르기를 한다. 이때 차는 하루의 시작이자, 노동의 시작에 대한 기대와 불안을 다스린다. 이때뿐이랴. 둘은 시시때때로 하릴없이 차를 마셨다. 간소하게 밥을 먹은 후에도, 요가를 한 후에도, 손님을 맞을 때에도, 손님을 보낸 후에도, 멍하니 고요히 차를 마셨다. 너무 자연스러웠기에 그들에게 차는 가볍고 무심한 일상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차를 마실 때마다 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인생의 순간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꼭 제주의 좋은 집이 아니더라도, 차는 우리에게 ‘인생의 단면’을 선물한다. 나를 불러 세워 호로록, 숨을 고르게 하기 때문이다. 삶이 너무 커다란 위력으로 나를 휘두를 때 하마터면 잊을 뻔했던 일상을 되돌려준다. 그 찰나의 시간으로 우리는 다시 힘을 얻어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다른 무엇이 아니라, 차를 마셔야 할 때가 있다 외로울 때, 심심할 때, 불안할 때, 편치 않을 때 불쑥, 차를 마셔요. 어지러운 일들이 찻잔 안으로 가라앉을 거예요. 왜 차를 마시는가? 『차의 기분』 저자인 사루비아 다방 김인 대표는 일단 외로워서 마신다고 한다. “차는 외로움을 달래면서도 외로움을 고양시킨다.” 외로워서 마시고, 마시다 보면 외로운데, 그 외로움 속에서 문득 인생의 비밀을 알아차리기도 한다고. 커피보다 더욱 느린 호흡으로 우리를 가라앉히기에, 차는 편치 않은 상태를 슥 잠재운다. 이 단순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차를 마시기 어려워한다. 차의 종류나 기원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 같고, 찻잔이나 다기를 제대로 마련해야 할 것 같고, 마시면서 다도를 갖춰야 할 것만 같은 부담감 때문이다. 하지만 차를 마시는 일이란 속이 시끄러워 불쑥 걸레를 빨고 바닥을 닦는 일과 다르지 않다. 다만 그것보다 좀 더 편하고 고요한 시간을 선물해주는 것이 다를 뿐이다. 『차의 기분』에서는 차를 마시는 일이 시를 읽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인생에 대한 하나의 정갈한 태도임을 보여준다. 차 한 잔으로 일상이 깊어질 수 있음을. 읽다 보면 나도 따라서 찻물을 올리고 싶어진다. 기도하듯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차를 마셔보자. 복잡해보였던 일상이 슬그머니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