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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의홍상 - 009
가슴에 깃든 솟대 - 039 마지막인 것을 - 053 가을의 비늘 - 070 슬픈 고리 - 082 처음이기에 - 089 옥인동, 그 얕은 숨소리 - 098 그을린 가슴 - 137 애처로움 - 150 태워도, 태워도 - 163 삐걱대는 밤 - 177 소헌 아가 - 194 금실이 - 202 붉은 빗방울 - 222 어긋난 것들 - 236 하지(夏至)의 너울 - 253 닫힌 문 - 297 치미는 오열 - 310 몽환 - 331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 353 혼불문학상 심사평 - 367 작가의 말 - 375 허난설헌 가계도 - 3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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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양 끝에 매달린 풍경소리가 오늘따라 무겁다. 두 손을 깍지 낀 초희가 어긋나서 맞물린 열 손가락을 새삼 들여다본다. 열 손가락의 맞물림 같은 것이 결혼인가, 너무 조여잡은 손가락들이 어느새 저려든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반드시 행복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서로의 체온을 묻히고, 서로의 지문을 가슴에 감으면서 서로의 숨결 소리를 듣는 것, 그것이 결혼이라는 만남일까. 초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시댁 사람들과 어우러져 잘 해낼지, 그것에 대한 불안도 가슴 밑바닥에 안개처럼 고여온다. 바람이 일어 처마끝에 달린 붕어가 몸부림친다. 구름 저편에 산이, 산 너머 저편에 마을이, 그 마을을 지나 강이나 들…… 바람이 처마끝 풍경을 때리고 지나간다. _ 마지막인 것을 ---p.53
머물지 않고 흐르는 모든 것들은 아름다웠다. 고여 있지 않아 늘 새롭고 싱싱하다. 그미도 때때로 흐르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을 느꼈다. 청정한 상태로 머물다가 언젠가는 그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 공기 중에 떠도는 한 톨의 먼지가 되어 하늘로 스며든다는 것은 얼마나 신비하고 아름다운 현상인가. _ 옥인동, 그 얕은 숨소리 ---p.99 갑자기 낮은 돌담으로 둘러쳐진 두 칸짜리 이 별당이 감옥처럼 느껴진다. 앞뒤가 막막하다. 절벽이다. 시집온 지 네 해가 기울고 있는데도 신행 첫날에 느꼈던 그 밑도 끝도 없는 막막함은 때 없이 밀려온다. 그미는 좌불안석이다.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에 길들여지는 것이 시집살이의 지혜라 했던 배다른 언니의 말이 그미의 정강이를 일으켜 세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미가 나대는 건 시어머니의 심기를 더 거스를지도 모른다. 빗살무늬 구름이 바람살에 쓸려간다. _ 태워도, 태워도 ---p.168 그미는 꽁꽁 묶였던 오랏줄에서 풀려난 듯 큰 숨을 쉬었다. 생각은 늘 오랏줄이 되어 그미를 결박한다. 옥인동 시댁에서의 삶이 그러했다. 아무것도 바랄 것 없는 나날들이었다. 세상에 두려운 것, 가지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소망하는 것, 어느 한 가지도 그미의 마음을 정착시키지 못했다. 무채색의 세상은 덧없고 아프기만 했다. 예쁜 비단옷이나 보석도 그미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했다. 마음을 가득 채워주는 것이 어찌 광에 가득한 나락이며 괴 가득 담겨져 있는 은전이며 보옥이랴. 덧없고 부질없는 허욕은 그나마 죽으면 그만 아닌가. 어린 시절부터 그미에게 귀중하고 아까운 것은 사람의 곱고 따스한 마음이었다. 정성, 그 마음이 인정받지 못하고 상처받으면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_ 어긋난 것들 ---p.246 순간 그미도 떠나고 싶다는 간절함이 목젖까지 차오른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다는 간절한 갈망이 어찌 남정네들에게만 있는 특별한 감정이든가. 이 울울한 담 안에 갇혀 살아온 세월의 이끼가 온몸에 슬었다. _ 몽환 ---p.337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碧海浸瑤海)/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靑彎倚彩彎)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 (芙蓉三九楹)/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紅隋月霜寒) 최순치는 소스라쳐 몸을 일으킨다. 생시 같은 꿈이다. 연못 위에 나붓이 앉아 있는 난설헌 아씨를 보았다. 부용꽃 한아름을 가슴에 안은 채 누군가에게 한 송이 한 송이 가려내어 던지고 있었다. 가지 잘린 꽃망울들이 수록색 연못을 가득 덮었고, 손에 든 연꽃 잎새를 따내고 있는 섬섬옥수. 한 송이 두 송이, 어느새 스물일곱 송이…… 눈으로 그것들을 헤아리다가 벌떡 몸을 솟구쳤다. _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p.353 ‘아름다운 여인’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고 싶었다. 시대를 건너뛰면서 두리번거리다가 조선의시인 난설헌에게 머물렀다. 그것은 발견이었고, 계기였을 것이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외모와 빛의 알갱이처럼 영롱한 영혼의 소유자, 세속에 때 묻지 않은 순수, 원망이나 미움, 화를 자신의 내부로 끌어당겨, 시라는 문자를 통해 여과시켰던 난설헌이야말로 아름다움의 표상이었다. 난설헌의 짧은 생애를 불꽃처럼 태운 문학에의 열정, 종이와 붓이 있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명주실을 뽑아내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써내려갔던 그의 시는 영혼의 부르짖음이었다. ---작가의 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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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 짧은 생,
슬픔의 멍울을 시의 꽃망울로 터뜨렸던 여인…… 시리도록 아름다운 한 여인의 눈물이 지금 다시 흐른다 “나에게는 세 가지 한(恨)이 있다. 여자로 태어난 것,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남편의 아내가 된 것…….” 스물일곱, 짧고 불행했던 삶을 살다간 여인. 고통과 슬픔을 시로 달래며 섬세한 필치로 노래한 시인. 호는 난설헌(蘭雪軒). 자는 경번(景樊). 이름은 초희(楚姬). 『난설헌』은 16세기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의 삶을 따라가는 작품이다.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면서 “바윗돌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새기는 마음으로 글을 쓴 최명희의 작가정신을 그야말로 오롯이 담아낸 소설”로 평가받았다. 여성이 존중받을 수 없었던 시대, 창작을 통해 자신을 일으키고 인내했던 여인의 삶은, 올해 77세 여성 소설가인 최문희 작가의 삶 속으로도 깊이 투영됐다. 작품을 쓰는 내내 난설헌의 영혼으로 살았고, 난설헌의 마음으로 사물과 사람을 되새겼다. 그렇게 난설헌의 내면과 삶을 꼼꼼하게 바느질하듯이 이야기의 육체를 만들어냈다. 그 섬세한 바느질 끝에서 어린 초희의 총명함이, 한 사내를 향한 여인의 숨죽인 마음이, 현실과 불화하는 난설헌의 눈물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