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박성래의 다른 상품
|
역사란 끊임없이 다시 쓰여지기 마련이다. 장영실도 우리 역사에서 계속 수정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사실 광복 전까지도 그의 이름은 그리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세종실록》에도 장영실이란 이름이 나오고 18세기에 만들어진 전통사회의 백과사전인《문헌비고》에도 그의 이름이 잠깐 비치기는 하지만 그저 그런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일제시대에 우리 문화적 전통을 예찬하기 시작한 조선 학자들도 장영실에 대해 특별히 주목하지는 못한 채 시간이 지났다. 해방과 함께《조선상식문답》을 지은 최남선은 그 내용 속에 장영실이란 이름을 넣지도 않았고, 심지어 홍이섭은《조선과학사》를 쓰면서 자격루는 거론하지만 장영실의 이름은 기록도 하지 않았다. …… 그렇던 장영실의 위상이 갑자기 크게 부각된 것은 전상운의《한국과학기술사》(1966)부터라 할 수 있다. 전상운은 이 책에서 처음으로 관노였던 장영실이란 표현을 쓰면서 그의 생애를 극적인 것으로 보여주었고 모두 7쪽에 걸쳐 그의 이름을 거론했다. --- pp.46-47
굶어 죽었다는 조선 후기 주역 담당관, 김영 천재 수학자로서 정신분열증으로 고생했던 미국의 존 내쉬(John F. Nash. jr. 1928~)는 199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일생을 영화로 그린 작품이 바로 2001년 개봉한〈뷰티풀 마인드〉인데, 이 영화는 우리나라의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인 김영을 떠오르게 한다. 그는 산술에 미쳐 그야말로 정신병에 걸릴 정도였다고 옛 사람들은 전하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극도의 불운에 허덕이던 김영이 ‘굶어서 죽었다’는 기록이다. 명백히 그는 1803년 그가 죽을 때까지 대단한 천문학자로 많은 업적을 전한다. 이규경(1788~1856)은 김영이 “천재가 아주 뛰어나 …… 많은 책을 써서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했던 바를 발표했다”고 말하고, 그러나 그는 끝내 모화관의 허물어진 집에서 굶어 죽었고, 아들 하나를 남겼지만 그의 뒤를 계승할 수는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p.160 조선 최초로 서양 유학한 여의사, 김점동 어찌 보면 퀴리와 비슷하게 김점동 역시 헌신적이고 협조적인 남편을 만났다. 오히려 퀴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자기희생적인 훌륭한 남편이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김점동의 남편 박유산은 아내와 함께 미국에 갔지만, 당장 생계가 어려워 곧장 리버티의 농장에 취직하여 막노동을 하며 아내의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 공부를 뒷바라지했다. 그리고 1899년에서야 겨우 아내를 따라 볼티모어로 가서 함께 살면서 그곳 식당 일을 얻어 돈벌이를 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폐결핵으로 온전한 몸이 아니었다. 박유산은 아내의 대학 졸업을 반년 남긴 채 1899년 가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퀴리보다는 1세 어리고, 그 남편 피에르 보다는 9세 어렸던 박유산은 미국 생활 4년 반 남짓을 아내를 돌보는 데 바친 채 병으로 쓰러져 갔던 것이다. --- p.219 식민지 조선의 못다 핀 과학기술자, 나경석 이화여자대학교의 영문학자 나영균 교수의 회고록《일제시대, 우리 가족은》(2004)을 보면 그의 아버지가 기술자 나경석임을 알게 된다. 수원에서 대단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10년 스물의 나이에 일본에 건너갔다. 조선왕조가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선포된 그해의 일이다. 그는 세이소쿠영어학교를 거쳐 1911년 도쿄고등공업학교에 입학하여 기술자로 훈련을 받았다. 아직 국내에 대학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더구나 과학기술계 고등교육은 전혀 없었던 때에 일본의 대표적 고등공업학교에 입학한 사실만 보더라도 그는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 기술자로 성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할 만하다. 20세기 초 조선의 과학기술 수준이나 그 교육 사정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가 잘 되어 있지는 않지만 당시 이 땅의 과학기술 수준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 pp.326-327 ‘씨 없는 수박’ 발명한, 우장춘 우장춘만큼 극적인 일생을 살고 간 과학자도 드물다. 그는 일제시대에 당시 기준으로 치면 역적(?)의 아들로 태어났다. 게다가 그의 어머니는 일본인 사카이 나카였다. 그리고 그는 광복을 맞은 조국에 일부러 돌아와 외롭게 여생을 살며 많은 제자를 기르고 이 땅에서 죽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잘못에 대해 속죄하려는 마음으로 그렇게 살았던 걸까? ……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아버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 우범선(1857~1903)은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데 가담한 한국 측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 pp.400-401 수학 대중화에 힘쓴 대표적 수학 교육자, 최규동 최규동을 우리 역사상의 대표적 수학자라 부르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근대 수학의 도입기에 그는 그것을 먼저 배워 대중?게 교육한 대표적 수학 교육자로 꼽기에는 충분하다. 그는 젊은 시절 몇몇 학교를 동시에 가르치면서 매주 58시간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토요일만 8시간이고 다른 날에는 10시간씩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 대부분을 수학 교육에 바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서울 종로 거리에 나가서 까지 수학을 교육하려 했다고 전한다. --- p.488 우리나라에 알파벳 처음 소개한 개화철학의 선구자, 최한기 우리나라에 처음 영어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 거의 마지막 실학자로 꼽을 수 있는 최한기는 수많은 책을 썼는데 그 가운데 1857년에 쓴《지구전요》에 영어 알파벳이 처음 나온다. 최한기는 이 책 말고도 당시 중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여러 책 가운데 서양 과학을 국내에 소개한 것으로 기억될 만하다. 그가 쓴《지구전요》는 사실은 중국에 나온 서양 지리소개서를 다시 번안한 것으로 최한기는 세계 각국의 역사, 지리, 문화 등을 모두 소개하고 있지만 그 자신은 외국을 가본 적이 없다. 아마 중국도 가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영국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그는 중국책에서 영어 알파벳을 베껴 놓은 것이다. --- p.563 과학기술의 대중보급에 이바지한, 김용관 일제시대의 과학대중화운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한번 생각해보면 분명해진다. 일제시대에는 아직 한국에는 과학이란 것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과학기술의 미개지였다. 1910년 나라를 일본에 뺏긴 조선인들은 조금씩 과학기술의 중요성에 눈뜨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일본은 조선인에게 과학과 기술 교육을 막는 태도였다. 1926년 일제는 조선에 경성제국대학이란 첫 대학을 세우기는 했지만 법문학부와 의학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을 뿐이지 이공과는 설치하지 않았다. 과학자나 기술자로 교육받기 위해서는 일본 유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들어 조선인의 과학기술 수준을 아주 낮게 묶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 pp.578-579 |
|
원소 이름 한자로 개발한 중국의 서수
산소, 수소라는 말은 영어의 oxygen, hydrogen을 우리말로 옮겨 만든 것이다. 아니 엄격하게 말하자면 이런 단어는 ‘우리말’로 만들어졌다기보다 일본 사람들의 번역을 우리도 그대로 따르고 있을 뿐이다. ‘일제 잔재’란 말이 많이 사용되는데 엄격하게 말하라면 산소, 수소, 질소 등의 원소 이름도 모두 일제 잔재에 속한다. …… 그러나 같은 한자 문화권의 중국인들은 이 원소들을 이런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한때 중국인들도 일본에서 만든 용어들을 그대로 쓴 적이 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의 방황, 토론, 논의 끝에 중국 학자들은 원소 이름을 독자적으로 개발해 지금 우리와 전혀 다른 이름을 쓰고 있다. 예를 들면 산소, 수소가 중국에 가면 ‘양’, ‘경’으로 바뀌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108개의 원소 이름이 모두 한 글자로 표시되어 있는데, 아주 편리한 방식으로 분류되어 있다. 원소를 자연 상태에서 기체, 액체, 고체 등으로 나누고 그 각각의 원소 이름에 이를 나타내주는 것이다. --- pp.145-146 우리나라에 처음 상륙한 미국인 의사 호러스 알렌 이승만이 어렸을 때 천연두로 시력을 몇 달 동안 잃었던 것을 고쳐준 것도 알렌이었다. 장님이 된 어린 아들 때문에 절망에 빠진 아버지 이경선은 6대 독자인 아들의 실명을 고치려 온갖 노력 끝에 드디어 알렌에게 데리고 왔다. 그는 물약을 주면서 3시간 만에 한 번씩 눈에 떨어뜨리면 사흘 후에 좋은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사흘째 되던 날은 마침 이승만의 열 번째 맞는 생일이었는데, 어머니가 밥상을 가져와 수저를 손에 쥐어 주었다. 그때 갑자기 소년 이승만은 마루에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를 향해 기어가면서 눈이 보인다고 소리쳤다. 기쁨에 어쩔 줄 모르던 그는 계란 한줄을 선물로 들고 아이를 데리고 알렌에게 찾아갔다. 알렌은 선물을 사양하면서 당신 아들에게 계란이 더욱 필요하니 잘 먹이라고 했다는 일화이다. --- p.222 ‘과학’이라는 용어 최초로 사용한 일본의 니시 아마네 ‘과학(wj)’이란 말을 처음 만든 사람은 뭐로 보나 과학자는 아니었다. 서양 사람들이 사용하는 사이언스(science, 더 정확하게는 natural science)라는 말을 ‘과학’이라는 한자 용어로 처음 만든 사람은 바로 니시 아마네[1829~1897]로 일본 개화기의 대표적 사상가이며 철학자였다. 1874년 니시 아마네는《명륙잡지》에 연재하던 자신의〈지설〉이란 글에서 “이른바 과학……”이라면서 처음으로 이 말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것도 이 글에서는 단 한 번 사용한 단어였다. 그 뜻도 ‘전문화되는 각 분과의 학문’이란 정도의 뜻으로 만들어 썼던 단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한 ‘과학’이라는 단어는 그후 니시 아마네 자신도 계속 사용했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 --- pp.294-295 거중기 제작에 영향 미친 프랑스의 요하네스 테렌츠 우리 역사에 간접적으로 이바지한 스위스 출신 선교사 테렌츠는 우리식 이름이 등옥함이고 자를 함박이라 했다. 원래 이름은 장 테렌츠(Jean Terrenz)인데, 요하네스 테렌츠 또는 요하네스 테렌츠 슈렉(Joannes Terrenz Schreck)이라 하기도 한다. 테렌츠는 중국에 오기 전에 이미 독일에서 의학자, 철학자, 수학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동물, 식물, 광물, 기계 등에도 해박했다고 전한다. 특히 언어에도 재능이 있어서 독일어 이외에 프랑스어, 영어, 포르투갈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카르다어, 라틴어에도 능통했다고 하니 대단히 재능 있는 인물이었던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 그가 중국에 오게 된 동기는 당시 서양 지식층의 중국에 대한 환상이 어느 정도 역할을 했을 것으로도 보인다. 1600년쯤에는 먼저 중국에 와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중국 문명의 위대함이 과장 선전되어 유럽 젊은이들에게 중국 문명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예수회를 포함한 서양 선교단체가 중국 선교 운동에 열성이어서 많은 청년들이 중국행을 지원하고 있었다. --- pp.350-351 세계에 한국의 측우기 소개한 일본의 기상학자 와다 유지 1904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한국과 만주일대의 날씨에 대해 관심을 더 갖게 되었고, 그에 맞춰 제물포에 기상관측소를 세우게 된 것이다. 그전에 이미 임시 관측부대를 데리고 종군하고 있던 와다 유지는 1904년 7월 제물포관측소가 정식으로 시작되자 소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일제가 이 땅에 세운 최초의 기상관측소 소장이었던 셈이다. 바로 이때부터 그는 한국의 기상학사 연구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가장 중요한 공헌이 바로 우리나라의 측우기를 국제사회에 소개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와다 유지는 그 밖에도 첨성대를 외국에 소개하는 데에 상당히 공헌한 것으로 보인다. 1917년에 발표된 그의 논문〈경주 첨성대의 설〉에는 그가 1909년 4월 21일 처음으로 첨성대에 가게 된 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 pp.402-403 경성제대 마지막 총장 지낸 화공학자 일본의 야마가 신지 경성제국대학 설립은 1924년 4월로 거슬러 오른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들의 끓어오르는 교육 자치의 열망을 더 이상 억압하기 어렵게 되자 조선 최초의 근대식 고등교육기관으로 경성제국대학을 세웠다. 조선인들이 3·1운동 이후 자발적으로 세우려던 대학설립을 막는 대신 일제 스스로 이 정도의 양보를 한 셈이었다. 그전에 이미 전문학교들이 몇 개 있기는 했지만, 말하자면 ‘초급’ 대학만 있던 이 땅에 처음 대학교를 세운 격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처음 경성제국대학을 세운 일제는 여기에 법문학부와 의학부만을 만들고, 이공계 학과는 전혀 만들지 않았다. 법학과 의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서 법관과 공무원, 그리고 의사들을 조선인 사이에서 길러낼 필요성은 인정했지만, 과학자와 기술자를 조선인 가운데에서 적극 길러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인들에게 이공계에 대한 관심이 그리 높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가 1941년에서야 경성제국대학에 이공학부가 생겨났다. 그리고 바로 이 과정에서 주역을 맡았던 인물이 당시 일본 해군 중장으로 제대하여 도쿄제국대학 교수로 있던 야마가 신지였다. --- p.434 |
|
한국과 세계의 과학자를 총망라한 명실상부한 ‘과학사 인물 열전’
지금까지 한국 과학사 전반을 주제로 한 책이 나온 것은 1960년대에 전상운의《한국과학사》, 박성래의《한국과학사》가 그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그 상세한 부분에 속한다 할 수 있는 과학사 및 기술사에서의 인물에 관한 연구와 저작은 풍성하지 못했다. 과학기술 인물사와 관련한 대표적인 책으로는 김호의《조선과학 인물열전》, 김근배의《한국과학기술 인물 12인》, 박성래의《명예의 전당에 오른 한국의 과학자들》 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존의 책들은 인물에 관한 내용이 빈약하고 다루고 있는 인물의 수 자체가 적다. 특히 기존의 과학 인물사와 관련된 책들은 대부분이 번역서였고 그러다보니 세계사 인물에 편중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또 고대로 올라갈수록 인물 수가 적고, 그 인물에 대해 상세한 소개가 없다. 이는 고대사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과학기술’의 내용이 빈약한데다가 혹시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유물이 있는 경우라도 그 주인공의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인물 과학사》는 이렇게 과학기술자들을 총망라한 개설서가 부족한 현실을 반영하여 기획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인물의 수부터 기존의 책들과 차별성을 이룬다. 한국 과학기술자를 다룬 1권의 경우 92명, 세계 과학기술자를 다룬 2권의 경우 63명의 인물을 다루고 있다. 또 기존의 책들은 대부분 백과사전식, 전기식 나열에 불과했다. 인물의 출생과 성장배경, 업적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백과사전식, 전기식의 나열로 위인전과 같은 전개를 이루는 것이 아닌 저자만의 독특한 인물관을 함께 엿볼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또 세계 과학기술자의 경우 우리나라에 언제, 어떻게 처음 소개되었는지를 소개하고 한국 과학사에 남긴 업적은 무엇인지 밝히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과학사학자 박성래의 과학기술자 인물 평론 그동안 대중적 주목을 받아 크게 인기를 모은 역사 속 인물 가운데에는 과학사에 속하는 인물인 경우가 많다. 의학자 허준, 천문기술자 장영실, 농학자 우장춘,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 등이 그 예이다. 당연히 이들의 일생은 드라마가 되어 책으로 방송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과학기술 인물사에 주력하는 과학사학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인물에 대한 많은 연구가 나왔고 또 인물 연구에 주력하는 역사가도 많이 있었지만 역사의 다양한 부분 가운데 과학기술 분야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는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그 가운데 특히 ‘과학기술 인물사’에 주력한 과학사학자는 더욱 드물었던 것이다. 이는 인물사 연구에 필요한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데다 현대에 들어서야 차츰 과학기술 기관이 생기면서 한국 과학기술 연구자들이 생겨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박성래는 다른 과학사 연구자들과 달리 과학사 인물에 대한 연구에 깊이 천착했다. 1979년부터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의 월간지《과학과 기술》에 ‘과학의 사회적 역할’, ‘과학기술의 맥’ 등 다양한 주제로 과학기술의 역사를 소개했으며 특히 ‘역사 속 과학 인물’이라는 주제로 1993년부터 2008년까지 약 200회에 걸쳐 한국 및 세계 과학자들을 소개해왔다. 이렇게 과학사와 관련한 그의 다양한 저술과 역사 속 과학기술자에 대한 그의 오랜 연구 결과가 이번에 두 권의 책으로 기획된 것이다. 저자는 “나에게는 사람을 너무 위대한 존재로 보지 않으려는 성벽(性癖)이 있다”고 말하며 때로는 인물의 어두운 사생활을 파헤치기도 하고, 잘못 알려진 사실에 대해 지적하며 자신의 독특한 인물관을 이 두 권의《인물 과학사》에 투영시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