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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글 신학과 영성의 절묘한 조화_유해룡 장신대 교수
머리말 참된 신학은 변혁의 신학이다 1장 하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2장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3장 예수의 하나님 4장 하나님, 그리스도, 교회 5장 사막의 하나님 6장 구름과 어둠의 하나님 7장 불과 물의 하나님 8장 육신을 입은 하나님 9장 성찬의 하나님 10장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 11장 심연의 하나님 12장 어머니 하나님 13장 공의의 하나님 부록 새로운 영성 정립을 위한 선언 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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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심리학자들은 20세기에는 종교의 영향력이 점점 약화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종교인은 더욱 늘어나고 있으며, 종교적 열정도 점증되어 가는 추세다. 이런 사회적 현상을 보면 그 예측은 완전히 빗나간 것임이 분명하다. 오히려 20세기 후반 들어 사람들의 종교적 욕구는 더욱 왕성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통계적 근거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곳곳에서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임을 믿고 있기에 그의 영향력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 추천사 “신학과 영성의 절묘한 만남” 중에서
현대 서구인은 영적인 핍절과 빈곤에 처해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전통적인 서양 종교는 현대인의 영혼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 폐허로 변한 도심지를 보면 그 배후에 있는 황폐하고 절망스런 이야기가 연상되듯이, 폐허로 전락한 우리의 영혼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우리는 거짓된 영성의 부활을 목격했다. 1960년대 이래 ‘사적인 종교’의 전염병이 북아메리카와 유럽 여러 지역을 휩쓸었다. 사적인 종교들은 구원과 깨달음을 획득할 수 있는 기술과 방법론을 제공하는 종교들이다. 이런 종교들은 부유한 기업처럼 되어버렸다. 깨달음을 판매하는 일이 매우 수지맞는 사업이 된 셈이다. 미국의 사업가들은 명상 학교들이 직장에서 정신 집중, 효율성, 순응적 태도 등을 도모해 이익창출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이런 종교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예언자적 목소리가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기존의 경제적ㆍ정치적 질서를 건드리지 않고 자본주의 문화에 쉽게 순응한다. 그들이 제공하는 신은 사적인 신, 순전히 내면적인 신이다. 공적인 기업과 사적인 종교의 맥락에서 영성은 더 나은 체험, 어쩌면 더 스릴 있고 유별난 체험을 찾는 방향으로 전락할 소지가 크다. 그래서 오늘날 ‘내면의 신’을 찾는 운동은 하나님과 종교를 아주 편협하게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 1장 “하나님께 무슨 일이 있어났는가” 중에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것은 사막에서 방황하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여러 신들을 예배했을 가능성이 높다. 창세기에는 일련의 이름들이 보존되어 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엘 엘리온,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 이삭을 지켜주신 두려운 분 또는 친족, 야곱이 섬기는 전능하신 분 혹은 황소, 엘 샤다이 또는 전능하신 분 등. 그런데 족장들이 경험하고 좇았던 하나님은 특정한 장소의 신, 어느 영토의 신이 아니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분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 중인 한 민족과 관계를 맺는 존재였다. 아브라함이 유목민이었기에 생긴 중요한 부수효과는 하나님의 신상을 포기한 것이었다. 이는 아브라함이 신인동형론적 사상을 거부한 때문이 아니라 유목생활을 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신상은 신전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장막용으로는 사용이 어려웠다. --- 2장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중에서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한 것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경건한 자나 가까운 제자들에게만 국한시키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아버지가 되신다마 5:45; 21:28-32. 하지만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지키고 원수를 위해 기도할 때라야 비로소 합당한 아들이 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같이 완전하게 되는 것이 실로 아들 됨의 목표다. 한편 예수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를 제외하고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다. 언제나 “내 아버지와 너희 아버지”라고 말함으로써 후자의 관계가 전자에 기대고 있음을 밝혔다. 우리는 예수를 통해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며, 예수가 자기 생애와 사역을 이해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한 것은 아버지와의 관계였다. 오늘날 예수를 ‘자유인’으로 강조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 자유를 하나님에 대한 의존관계로부터 분리시키기는 어렵다. --- 3장 “예수의 하나님” 중에서 신약성서는 하나님과의 합일을 사회적 실재로 본다. 하나님이 알려지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남자들과 여자들이 성화되는 것도 그 공동체를 통해서 가능하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이 “여러분을 택하여 주셨다”고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이 선택 행위는 그분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부르심과 관련 있다. 신약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말한다. 이 부르심은 구속 사역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내주신 것은 우리를 불법에서 건져내고 깨끗하게 하셔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업적도 철두철미하게 사회적인 행위로 간주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 시대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이 집합적 실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데, 사실 이 집합적 실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정의해 준다. --- 4장 “하나님, 그리스도, 교회” 중에서 수도사를 주변부의 삶으로 보는 사상은, 수도사 출신인 애드리언 헤스팅스가 강조한 것처럼 수도원주의를 일종의 저항으로 보는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확실히 초기의 사막 운동에는 강한 저항적 요소가 있었다. 그런데 기존 공동체들은 주변문화의 지배적인 가치관을 그냥 흡수하고 반영한 나머지, 근본적이거나 비판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일을 중단할 위험이 상존한다. 오늘날 수도원주의가 직면한 중요한 문제는 과연 이러한 항의의 정신, 저항의 정신, “창조적인 전복”의 정신을 유지하거가 회복할 수 있느냐다. 이런 정신이야말로 하나님의 실재를 증언하는 중요한 징표이기 때문이다. --- 5장 “사막의 하나님” 중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보고는 살아남지 못한다.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우리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오”라고 외친 이유다. 그런데 시내 산에서의 계시는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고 말씀하신 사건이다. 여기에 유대교 신학의 역설이 있다. 즉 하나님은 보이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분, 알려진 동시에 알려지지 않은 존재, 계시된 동시에 언제나 숨어있는 분인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존재와의 만남을 가리키는, 어둠에 싸인 지식이다. 만남 자체가 신비로 가려져 있는데다가, 그 신비도 신중한 인간의 언어로 보존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 그래서 유대의 영성은 신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꺼렸다. “하나님에 대한 토론은 성경이 거의 허락하지 않는 일이다.” 이 미지의 신神이라는 전통의 핵심 상징이 구름이다. 신의 영광을 보는 일은 어스레한 구름으로 가려진 상태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모세도 하나님을 일부분밖에 보지 못했다. --- 6장 “구름과 어둠의 하나님” 중에서 만일 영성 연구에서 신체적 체험을 환희의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 어색해 보인다면, 이는 우리가 성육신적 신앙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시사해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과 인간의 체험에서 육체와 감각이 차지하는 비중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영성은 우리의 전 존재에 대한 총체적 반응이 아니라 반쪽 인간에 대한 반쪽 반응에 그치고 만다. 우리는 창조 세계에 대한 몸의 총체적 반응, 실존적으로 체험하는 기쁨을 회복해야 한다. 성도가 된다는 것은 더욱 평범해지고 좀더 인간적이고 또 열정적인 사람이 되어, 사랑과 온유함이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 정도의 사랑은 인간적 애정과 사랑을 주고받는 일 없이는 도무지 이룰 수-아니, 받을 수-없는 법이다. --- 8장 “육신을 입은 하나님” 중에서 성찬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이 빵과 이 포도주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하고 물어야 마땅하다. 이 밀은 자유로이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심고 거둔 것인가? 이 밀가루를 만든 방앗간과 그것을 운반한 철도나 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사회정의의 혜택을 최대한 받고 있는가? 이 밀과 밀가루와 빵은 어떤 경로로 시장까지 운송되었는가? 어떻게 팔렸는가? 포도주는 어떤 조건 아래서 생산되었는가? 만일 성찬의 삶과 성찬의 원리들이 사회적ㆍ경제적 질서로 확장되지 않는다면, 만일 거룩한 성찬의 경험이 거룩한 공산주의자를 낳지 못한다면, 성사와 현실은 단절된 채로 남을 것이다. 성사의 세계는 따로 분리된 세계, 곧 우리가 가혹하고 불의한 삶에서 물러나는 하나의 성소가 되고 말 것이다. --- 9장 “성찬의 하나님” 중에서 죽어가는 영웅은 그리스와 로마 사회에 무척 낯익은 주제였다. 당시에는 사람이 죽음을 통해 신이 된다는 전설과 이야기가 흔했다. 그러나 이런 주제를 구약성경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살아있는 사람-에녹과 엘리야-이 하늘로 곧바로 올라가는 경우가 두 번 나오지만, 죽은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경우는 없다. 또 죽은 영웅을 숭배하는 모습도 없고, 오히려 여호와 신앙은 이를 금한다. “순교자를 영화롭게 하거나 초인적 존재로 기리는 것은 구약성경에는 전혀 생소한 행습이다. 한마디로,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마카베오 시대 이전에는 이스라엘을 위해 죽는 순교자가 출현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위해 죽는 자들은 찬미가 아닌 애도의 대상이었고, 하나님의 탓이었을 뿐이다. --- 10장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 중에서 모든 신비주의의 핵심에는 사람은 자신의 근원을 찾고 있는 ‘미완성 동물’이라는 사상이 ?여있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완성을 향한 갈구를 하나님을 향한 갈구로 보고, 그분 안에서만 우리의 잠재적 자아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 신비의 길은 현실에 눈을 뜨는 과정, 곧 자신의 참 본성을 깨닫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 깨달음의 과정에는 많은 걸림돌과 위험물이 도사리고 있는 만큼, 많은 저자들은 영적 인도자나 동반자 혹은 ‘영혼의 친구’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영적인 인도나 지도가 중요하긴 해도, 이는 어디까지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에크하르트는 본인의 내적 뿌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그분과 연합했음을 인정하는 것은 기쁜 일이라고 말한다. “갑자기 나는 하나님과 내가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다.” 아래로 자라는 과정, 곧 마음을 향해 떠나는 영적 순례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진리를 바탕으로 한다. 모든 영성의 목표는 이 형상을 회복하는 일, 곧 인간이 본연의 정체성을 되찾고 신적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의 전제는 사람 속의 신적 형상이 종교개혁 신학의 주장처럼 완전히 말살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 11장 “심연의 하나님” 중에서 하나님을 어머니로 일컫는 관행은 교부시대에도 엄연히 존재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이레나이우스, 요한 크리소스톰,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등이 모두 이런 이미지를 사용한다. 헬라 전통이 라틴 전통보다 모성적 상징을 더 편하게 여겼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3세기 초 저서인 베드로행전의 라틴어 번역자들이 그리스도를 ‘어머니’로 옮기기를 꺼려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우리의 주목을 끈다. 그는 남녀의 구별은 이 세상에만 속하는 것으로 본다.24 그는 하나님에 대해 엄마 새의 이미지를 사용할 뿐 아니라 유모라고도 부른다.25 하나님이 아버지인 동시에 어머니라고도 말한다. 하나님을 어머니로 상징하는 관행을 정통적 영성의 주변부에나 속하는 것으로, 혹은 영지주의 같은 이단의 글에만 나오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사실 “잘 알려져 있는 매우 정통적인 은유이며 해석학과 예표론, 설교와 전례에 스며들어 있다.” --- 12장 “어머니 하나님” 중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비록 그것을 이룩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불완전하고 서툴다 하더라도 지상의 사회들 속에서 표출되어야 마땅하다. 신적 정의를 인간 공동체 내의 정의를 위한 싸움과 떼어놓는 일은 성경의 기록을 우습게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뒤 평등을 이루는 일에 대단한 관심을 보였던 것이고, “이스라엘의 유적을 발굴한 결과 생활수준이 평등했다는 증거가 뚜렷이 드러났던” 것이다. 예언자 사무엘이 경고했던 것처럼, 군주제가 실시되면서 불평등이 증대되었고 예언서들에서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억압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예언서들을 읽으면서 그들의 생각 속에 영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하나로 묶여있었다는 점을 놓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예수는 율법과 예언을 완성하려고 온 만큼, 예수의 가르침에서 구약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으면 그분의 사역을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 흔히 얘기하듯이, 교회는 전통적으로 영혼의 내적인 상태에 관심을 가졌었는데 최근 들어 사회정의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는 소리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정통 기독교는 지금까지 그처럼 편협하고 순전히 내면적인 신앙관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우리가 요즘 인기를 누리는 잘못된 영성에 등을 돌리고 신적 공의의 중요성을 되찾아야 한다면, ‘성경적인 기독교로 돌아가야’ 한다. --- 13장 “공의의 하나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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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기 최고의 사회신학자 케네스 리치가 안내하는 기독교 영성신학
현대인이 잃어버린 영적 유산의 회복 신은 있다, 없다, 죽었다. 우리는 왜 이토록 신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가. 헤겔과 니체는 일찍이 하나님의 죽음을 언급하고 그 죽음을 공개적으로 축하했다. 이들뿐 아니다. 고대 그리스 유물철학자들로부터 도킨스와 같은 현대 과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신의 존재 유무는 많은 철학자들과 일반인들의 관심거리다. 20세기에는 종교의 영향력이 점차 약해질 거라는 사회심리학자들의 예측도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들어 사람들의 종교적 욕구가 더욱 왕성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통계적 근거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곳곳에서 나타났다. 이 책은 1960년대 히피들의 마약문화나 스탈린과 마오쩌둥 숭배마저도 잃어버린 신적 체험에 대한 갈구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며, 인간 실존의 차원에서 하나님 문제를 바라본다. 저자 케네스 리치는 《영혼의 친구》와 《사회적 하나님》으로 한국 독자에게 알려진 영국 성공회 사제이자 신학자로, 그의 대표작인 《하나님 체험》에서 성경과 역사, 신학과 영성을 넘나들며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심도 있게 전해준다. 어느 신이 죽었는가 리치는 ‘신의 죽음’이 있었다면 ‘어느 신이 죽었는가’라고 묻는다. 그는 이 신은 17세기의 산물로, 전통적인 서양 유신론의 신, 곧 여러 가지 존재 증명으로 입증된 탁월한 초월 객체라고 답한다. 과학적 객관성이나 철학적 정확성에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여겨져 19세기와 20세기에 믿지 않기로 작정한 특정한 시대의 문화적 산물. 그런데 토머스 쿤과 마이클 폴라니 같은 저자들은 과학을 합리성과 동일시하는 데 의문을 던졌다. 이제는 과학이 신비를 배제한다고 말할 수도 없게 되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이 죽었다기보다 하나님 언어가 우리에게 죽은 소리로 다가왔다고 해야 옳다고 저자는 말한다. 리치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빌어 하나님 언어가 더 이상 산 경험을 표현하지 않고 생명과 생기를 전달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지 않은 채 가짜 행복을 전파하고 신앙을 개인적인 내적 체험과 현실의 도피처로 삼은 미성숙한 신앙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런 공허한 분위기에서 사람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이나 믿어버렸고 그 결과가 SF나 오컬트 등의 발흥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참된 신앙을 찾는 일이다. 참된 신앙이란 무엇인가 케네스 리치는 정통 기독교와 여러 이단들의 본질적인 차이는 역설에 있다고 말한다. 이단들은 역설을 허용하지 않지만 참된 신앙은 회의를 그 기본 요소로 한다. 참된 신앙은 끊임없는 물음의 과정인 것이다.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인 하나님을 어떻게 하나의 하나님으로 경험할 수 있는가? 개인의 갈망에 응답하는 하나님과 사회정의나 공동체를 세워가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하나의 하나님으로 경험할 수 있는가? 아버지이시고 어머니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하나의 하나님으로 경험할 수 있는가? 엄연히 비물질적인 차원에서나 이해될 수 있는 영이신 하나님과 물질세계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계시면서, 구체적으로 이 세계에 참여하시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하나의 하나님으로 경험할 수 있는가? 우리의 영혼보다 더 가깝게 우리 존재의 근거를 이루고 있는 심연에 내재하시는 하나님과 동시에 삼위일체인 역사 내재적 하나님을 어떻게 하나의 하나님으로 경험할 수 있는가? 개인의 신비주의적인 경험적 자료와 성서가 전해주는 경험적 자료가 어떻게 일치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리치는 이런 창조적 회의가 없으면 종교는 불관용과 핍박을 낳으며 경직되고 잔인해진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여성성을 잃어버린 기독교가 저지른 여성 억압과 그로 인한 사회, 문화, 개인적 폐해는 한 가지 예일 뿐이다. 두고두고 음미하며 읽을 책 그동안 체험의 차원을 다루는 저술들은 매우 개인적이며 특정한 상황이나 전통을 전제하는 것들이어서 그러한 독특한 전통의 색조나 구조 혹은 영성학파들의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었다. 주로 신비가들이 쏟아내는 하나님 체험에 관한 책들이 그러했다. 이것은 경험주의에 입각한 신학적 저술들이 보여주는 한계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한계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방대한 경험적 자료와 각 전통의 가르침을 수집해 제시하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과 어떻게 일치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책은 처음부터 특정한 하나님 체험에 초점을 두려는 마음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특정한 체험들을 무시하거나 간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매우 개별적인 경험들이나 성경이 전해주는 이야기, 신학적 전통들의 가르침이 어떻게 서로를 보완하고 지지해 주는지를 보여줌으로써 하나님 체험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고 있다. 다양한 신학적 전통과 다양한 기독교 신비가들의 경험적 자료들, 설득력 있는 성경적 이해 등을 섭렵하고 있는 이 책은 독자들로부터 신뢰를 얻기에 충분하다. 신학자들이나 평신도 모두에게 이 책은 실로 두고두고 음미하며 참고해 볼 만한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