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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부 소월의 사인을 둘러싼 이설 미당과 『화사집』 오장환과 남만서점 박인환과 마리서사(상) 박인환와 마리서사(하) 2부 김수영의 여인들 김수영 가의 사람들 ①누이 김수명 ②미망인 김현경 오장환과 모스크바 볼킨병원 번역의 귀재 ‘부평삼변’ 3부 파블로 네루다를 만난 이태준 정지용과 길진섭의 「화문행각」 장맛비가 들려주는 님 웨일스와 김산과 이상 백석이 가만히 좋아했던 여인 경주에 대한 동리와 미당의 실감 루마니아를 방문한 말년의 이용악 전설이 된 윤동주와 정병욱의 우정 최석두 시인에 대한 피맺힌 증언 김우진의 죽음과 조명희의 망명 만주의 흙바람과 마주한 최서해와 김사량 4부 손창섭의 도일과 불귀 삼천 원이 없어 시인이 된 박재삼 고향에서 잠들지 못한 시인 이성부 마지막 카프 시인 이기형 소설가 천승세와 출생의 비밀 「분지」의 작가 남정현 르포문학의 기수 박태순 송기원의 가을 전혜린과 이덕희 아나톨리 김과 푸른 여치의 비유 |
鄭喆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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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이 김수영을 처음으로 만난 건 ‘마리서사’를 개업한 직후인 1945년 말이지만 두 사람을 연결해 준 것은 문학이 아니라 연극이었다. 도쿄의 ‘미즈시나하루키(水品春樹)연극연구소’에서 연극을 배운 김수영은 1943년 학도병 징집을 피해 귀국, 당시 신파극과 결별하고 국민연극운동을 벌이고 있던 미즈시나 출신의 연극인 안영일을 찾아가 연출 일을 맡고 있었다. 그러다 시국이 뒤숭숭해진 이듬해 봄, 먼저 만주로 건너간 가족과 합류하기 위해 길림성으로 떠나간다. 길림에서 조선 청년들로 구성된 ‘길림극예술연구회’에 가입한 그는 안영일, 오해석, 심영 등과 어울리며 독일 희곡의 번안 작품인 〈춘수(春水)와 같이〉에서 로만칼라를 한 신부 역을 맡는 등 연극인의 길을 걷다가 해방을 맞아 다시 경성으로 돌아온다. 당시 경성은 도쿄, 오사카, 베이징 등지에서 귀국한 문화인들로 차고 넘쳤다. 이들은 당시 문화의 중심지인 명동으로 몰려들었다. 김수영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안일영과 연극을 하면서 알게 된 박상진을 만나기 위해 명동 소재 극단 ‘청포도’ 사무실을 찾았을 때, 박상진은 먼저 와 있던 멋쟁이 신사를 소개해 주었다. 얼마 전 종로통에 ‘마리서사’를 개업한 박인환이었다. 인환을 처음 본 것이 박상진이가 하던 극단 ‘청포도’ 사무실의 2층에서였다. (중략) 해방과 함께 만주에서 연극운동을 하다 돌아온 나는 이미 연극에는 진절머리가 나던 때라 그의 말은 귀언저리로 밖에는 안 들렸고, 인환의 첫 인상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김수영, 「말리서사(茉莉書肆)」, 1966) 김수영은 이듬해인 1946년 3월 문학평론가 조연현을 주축으로 한 『예술부락』 제2집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며 등단한 직후 마리서사로 박인환을 찾아가 등단 잡지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아직 등단 전인 인환의 반응은 싸늘했다. 인환은 「묘정의 노래」를 습작 수준의 작품으로 취급한 것은 물론 『예술부락』을 한번 훑어보더니 마리서사의 구석에 처박아 버렸다. 김수영 자신도 등단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연극을 그만둔 뒤로 집에 들어앉아 쓴 시 가운데 20편을 조연현에게 보냈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가장 모던하지 않으며 저수준인 「묘정의 노래」가 뽑혔다고 불평했다. 어쨌든 김수영은 「묘정의 노래」 때문에 박인환을 비롯한 마리서사의 모더니스트 시인들로부터 혹독한 비판과 수모를 당했다. (최하림, 『김수영 평전』, 실천문학사, 2001) 박인환에 대한 김수영의 콤플렉스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박인환은 등단 자체에 연연하기보다 등단작의 수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김수영의 등단보다 9개월 늦은 1946년 12월 ‘마리서사’의 단골이던 송지영의 추천을 받아 〈국제신보〉에 「거리」를 발표하고 등단한 박인환은 겨우 스무 살의 나이에 장안의 문인들을 끌어안는 넉넉한 품을 열어 보이며 어엿한 모더니스트로 자리를 굳혀 가고 있었다. 실제로 박인환은 김경린 등과 함께 ‘신시론(新詩論)’ 동인을 만들 때 김수영을 참여시키며 그의 문단 활동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 p. 46~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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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다병, 뇌일혈, 아편 음독설, 복어알 음독설까지 - 소월의 사인은 무엇을 말하는가?
소월 김정식(1902-1934)의 죽음을 둘러싸고 이견이 분분하다. 소월의 오산학교 은사인 김억은 소월의 사인을 [조선중앙일보]를 통해 저다병과 뇌일혈이라고 밝혔고, 소월의 3남 정호 씨는 어머니 홍단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전하며 아편에 의한 중독이 아버지 소월의 죽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이설은 1995년 귀순한 북한 작가 장 모 씨의 증언이다. 그에 따르면 소월의 사촌형제로부터 들은 얘기로 복어알 안주를 먹고 자살했다고 전한다. 수많은 이설은 아직도 현재진행중이며 소월의 죽음은 타살이라는 가정 아래 만든 연극도 공연된 바 있다. 소월의 죽음이 병에 기인한 건지 자살인지 타살인지가 왜 그토록 중요한 걸까? 근대시의 형성 과정에서 한국적 서정시를 확립한 소월이 나약하고 순정한 사람만은 아니었다라고 평가하고 싶은 걸까. 어디까지나 이성이 감성보다 앞선 총명한 사람인데 왜 자살을 했겠냐고 말하고 싶은 걸까. 소월의 죽음을 일제의 암울한 식민통치에 대한 실존적 저항으로 규정하려 해도 그것이 비겁한 현실도피이지 어떻게 저항운동이 될 수 있느냐고 주장하고 싶은 걸까. 한국의 근대는 민족적 현실에 대한 비극적 인식이 가로놓여 있다. 소월의 죽음이 그 무엇이 됐든 이토록 이견이 분분한 것은 근대를 살아간 작가의 행보는 개인의 행보로만 한정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책에는 소월에서 시작해 31명의 작가의 삶과 문학의 뒷이야기가 실려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뒷이야기에서 우리는 작가의 섬세한 감정을 읽을 수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림이 그려지고 영상이 떠올라 독자는 어느새 그 영상 안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가 없었다면 나도 없다. -김수영과 박인환, 그리고 오장환 오장환이 운영한 남만서점은 이름도 괴상하지만, 서점 진열장에 놓인 흰 토끼털 위에 보들레르 시집 원서가 놓여 있고, 벽에는 에드거 앨런 포우의 사진과 이상의 자화상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서정주가 [화사집]으로 빛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어쩌면 오장환의 넉넉한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화사집] 출간 후 다시 현해탄을 건너간 오장환 덕분에 그 바통을 이어받는다는 의미에서 박인환이 마리서사라는 고서점을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시인으로서 마리서사의 경영인으로서 일찍이 두각을 나타낸 박인환은 연극연구회를 계기로 김수영과 만난다. 모더니즘을 주도한 박인환과는 대조적으로 김수영은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박인환에 대한 김수영의 콤플렉스가 발생하는 순간이다. 죽은 박인환에 대한 김수영의 가열한 공격은 거꾸로 그의 박인환 콤플렉스가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죽은 박인환에게까지 증오의 말을 쏟아낸 김수영이지만 김수영 문학은 박인환 없이는 불가능했다. 얽히고설킨 당대의 작가들을 하나하나 쫒아 실타래를 풀어내는 문학 탐사 저널리즘 저자의 탐사는 신문이나 문집, 편지 등 기록물에 한정되지 않는다. 기록물뿐만 아니라 생존해 있는 가족 김수명(김수영의 여동생). 김현경(김수영의 부인) 등을 직접 찾아가 김수영을 취재한다. 카자흐스탄으로 망명한 작곡가 정추를 취재하면서 그의 회고 중 파블로 네루다와 이태준이 만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북경에서 열린 ‘아시아작가좌담회’에서 북한 대표로 참석한 이태준과 네루다가 조우하는 순간이다. 단서는 여러 곳에 있다. 1936년 8월 조선의 장맛비에도 저자의 상상력은 움직인다. 김산에게 조선의 태풍을 겪었다는 님 웨일스의 얘기 속에서 1936년 8월 큰 인명피해를 야기한 태풍 때 경성에 있던 님 웨일스와 김산이 아닌 이상이 어쩌면 종로 어느 뒷골목에서 옷깃을 스쳤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한다. 그저 상상일 것 같은 우연이지만 우연이 역사를 만드는 경우는 허다하다. 윤동주의 후배 정병욱의 어머니가 아들이 부탁한 짐을 일제의 공출로부터 지키지 못했다면 윤동주의 시집은 빛을 볼 수 없었다. 작곡가 정추가 아니었다면 최석두의 시는 우리에게 알려질 길이 없었다.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작가들은 무엇을 고민하고, 어디에서 희망을 찾았는가? 젊은 시절을 식민지와 전쟁과 분단의 역사 속에서 보낸 근대 작가와 더불어 분단 이후 4.19혁명, 군사독재와 광주항쟁을 겪은 당대 작가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학사의 굵직한 획을 그은 작가들의 미처 말하지 못한, 알려지지 않은 숨은 이야기를 찾아간다. 이 탐사는 1959년 광주에서 태어나 1997년 《창작과비평》에 「백야」를 발표하며 등단한 저자가 자신이 살아온 길 탐사이기도 하다. 시간은 흘러 근대를 지나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인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대에 들어선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비극의 한편을 지나가고 있고, 여전히 작가는 다음 세상의 꿈을 꾸며 희망을 쫓고 자유를 추구한다. 여운형의 6촌 여동생과 결혼한 마지막 카프 시인 이기형은 2005년 남북작가대회로 북한에 가 한국전쟁 때 북에 두고 온 딸을 만나 눈물을 흘린다. 적화에 대한 불안으로 도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손창섭,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남북작가회담을 추진하며 버스를 타고 판문점으로 향한 천승세, 미국을 폭력적인 지배자로 그렸다고 중앙정보부에 체포, 해방 이후 최고의 필화사건으로 기록되는 [분지]의 남정현, 광주가 고향임을 감당할 수 없던 이성부, 6월항쟁의 열기를 증거한 르포문학의 기수 박태순, 상처 안에 들어가 비로소 자유로워진 송기원, 현존 최고의 러시아 작가로 꼽히지만 한국인의 혼이 들어 있는 아나톨리 김에 이르기까지 직접 찾아가 작가를 통해 문학의 시대정신을 읽는다. 문학아, 너 밖에 나가서 다시 얼어 오렴아 정지용은 한겨울 귀가 얼어 붉은 앵두처럼 터질 듯한 모습으로 집안으로 들어온 화동 추월이의 귀가 방 안의 더위로 가시자 아쉬움에 이렇게 말한다. “추월아 너 밖에 나가서 다시 얼어 오렴아.” 저자는 툭 던진 이 한마디에 문학적 영토의 회복 가능성을 발견한다. 귓불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영하 30도의 북방으로 우리 문학이 회귀해야 한다는 일종의 각성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점점 잔망해지는 우리 문학의 영토적 협소를 타개할 전망은 요원하다. 문학의 규모와 깊이는 확실히 영토적 문제이다. 문학사 백년 풍경이라고 해봤자 대부분 남방문학 백년으로 귀착될 뿐, 북방이 그립다. 북방은 회복되어야할 우리의, 우리 문학의 영토이다. 문학사 백년 풍경의 완성을 위해, 나아가 새로운 백년의 초석을 놓기 위해 압록 건너 두만 건너 북방대륙을 바람처럼 떠돌 날이 하루빨리 오길 기대해본다. 현실은 모래처럼 부서져 내리지만 과거는 더 이상의 진행을 멈춘 하나의 완전체이다. 그 완전체를 이리저리 궁굴리며 만져보는 과분한 호사는 이제 독자의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