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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서장 효문제의 ‘한화 정책’ 연구사 제1부 효문제의 ‘한화 정책’ 검토 제1장 호어 금지: 북위 후기 낙양 거주 호인의 호어 사용 1. 호어 금지 사료의 검토 | 2. 호어 사용자의 실례 | 보론. 호인의 문서 행정 능력 제2장 호복 착용 금지와 그 한계 1. 북위 후기 호복 금지의 문헌 검토 | 2. 북위 후기 낙양의 호복·한복 병존과 호한 융합의 복식 제3장 호성의 한성 개칭 검토 1. 「조비간묘문」의 호성 표기 | 2. 『위서』의 호성과 한성 표기 검토| 3. 묘지명과 기타 금석문의 호성 표기 | 4. 호성 개칭의 예외 집단 제4장 본적 개칭과 호인의 정체성 1. 호인의 본적 개칭 사례의 검토 | 2. 하남 본적 호인의 정체성 제5장 묘지명의 묘호 표기 검토 1. 효문제의 묘호 변경과 묘지명·『수경주』의 옛 묘호 표기 | 2. 묘호 변경과 표기에 반영된 역사관 제6장 매장 문화와 이장 1. 북위 후기 낙양의 매장 문화 | 2. 호인들의 이장 금지와 낙양 북망산 매장 제7장 중국 예악·제사 도입의 검토: 북위 후기 유가 의례 수용의 허실 1. 조정의 예제 도입의 지체 | 2. 유가 의례 공간의 미완성 | 3. 북위 황실의 ‘이례’와 ‘비례’ 소 결 ‘한화 정책’과 ‘호한 잡유’ 제2부 북위 후기 낙양의 호속 제8장 북위 후기 낙양 호인들의 생활 1. 낙양 거주 호인의 음식 문화 | 2. 사냥과 활쏘기 | 3. 호풍의 가무와 유희 | 4. 기타 호속 제9장 북위 황실과 호인의 이름 1. 북위 전기 호인들의 이름 | 2. 북위 황실 이름 중복 현상 | 3. 낙양 시대 호어 이름과 불교식 이름 제10장 북위 후기 낙양 호인들의 결혼과 성 풍속 1. 수계혼의 잔존 | 2. 문란한 성생활: 인척 상간, 다처, 간통 제11장 북위 후기 여성의 활동 1. 여성의 투기 현상 | 2. 여성의 정치·사회 활동 제12장 한인 여성의 호화: 호태후 1. 여성의 정치 간여: 황태후와 여주의 이중성 | 2. 호태후의 유가 의례와 예절 무시 | 3. 호태후의 음행: 수계혼과 과부의 ‘문란한’ 성생활 | 4. 외래 종교 불교의 숭상 제3부 호속 유지의 배경 제13장 호속 유지의 정치적 배경 1. 효문제의 잦은 순행·친정과 장기간의 도성 부재 | 2. 낙양 천도의 반발: 목태의 난과 황태자 원순의 평성 도망 미수 사건 | 3. ‘한화 정책’의 예외 조항 | 4. 선무제의 ‘태업’: ‘한화 정책’의 묵살 제14장 호속 유지의 경제적·환경적 배경 1. 유가 예제 건축 미비의 재정적 배경 | 2. 육식과 기사의 원천 하양 목장 | 3. 기후변동: 목축 경계선의 남이 제15장 북변 호인의 호속 1. 북변 호인들의 언어 | 2. 북변 호인들의 생활 풍속 | 3. 안신과 낙양 호속 16장 제3의 문화: 서역 문화 1. 북위 평성 시대의 서역인과 서역 문화 | 2. 낙양의 서역 상인과 교역 | 3. 낙양의 서역 음악과 무용, 서커스, 마술 | 4. 낙양의 서역 불교와 서역 불교예술 | 5. 국제도시 낙양 속의 서역인과 서역 문화 종장 북위 후기 낙양 사회: 문화의 샐러드 볼 역대 이민족 왕조와 북위의 동화론 신화와 호속 유지 | 『위서』의 편향성과 한화 위주의 서술 | 성족 분정과 통혼, 남은 과제 ?각 장의 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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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낙양 시대의 이름은 한자의 뜻을 살린 중국식 이름, 호어 이름을 약칭하거나 그대로 사용한 호어 이름,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인물과 개념 등 각종 인도어를 차용한 이름이 공존했다. 따라서 중국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자 이름만으로 ‘인명의 한화’를 주장하는 것은 당시 현실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주장이다. 게다가 ‘인명의 한화’ 주장은 효문제의 ‘한화 정책’ 가운데 한자를 사용해 중국식으로 이름을 지으라는 명령이나 조치가 없었음을 간과한 것이다. 도리어 이름 짓는 방식을 보면 호인들은 자신의 고유한 이름이나 인도라는 외래 문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인명의 한화’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인명에도 호속의 영향이 여전히 유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p.224, 제9장 북위 황실과 호인의 이름
서역 문화는 호인(유목민)들이 한인과 한문화에 일방적으로 경도되는 것을 막는 완충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한인뿐만 아니라 북방의 유목민, 고구려 등 만주와 한반도의 사람들, 남조에서 귀화한 사람들, 중앙아시아와 인도, 페르시아 등 서역 사람들이 낙양에 거주했고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들에게 자신의 문화를 퍼뜨렸다. 따라서 북위의 호인 지배층이 일방적으로 한문화만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족의 문화를 섭취할 수 있는 공간이 낙양이었다. ---p.365, 제16장제3의 문화 호태후는 유가 문화의 세례를 받은 ‘정숙한 한인 여성’이 아니라 각종 호속을 따른 ‘호화된 한인’이었다. 호태후는 임조칭제를 하는 태후를 넘어 황제처럼 행동했고, 아들 효명제 대신 제사를 주관했으며 유가 의례와 예절을 무시했다. 또한 과부인 호태후는 남편 선무제의 동생 청하왕 원역, 정엄, 이신궤, 양화 등과 정을 통했다. 『위서』 「천상지」에서도 호태후의 음란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 호태후의 활동을 살펴보면 한인 여성으로 북위 황실을 ‘한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호화’되었다. 호태후는 북위 낙양 시대 호속을 수용한 한인의 전형적인 예로 주목된다. 또한 호태후의 호속 감염은 북위 황실이 여전히 호속을 유지했음을 반증한다. ---p.368, 종장 북위 후기 낙양 사회 효문제는 각종 ‘한화 정책’을 선포한 후 낙양에서 실행 여부를 살펴본 것이 아니라 잦은 순행과 남제 친정에 참가하면서 장기간 낙양에 거주하지 못했으므로 ‘한화 정책’의 감독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낙양에 체류한 호인들이 효문제의 눈치를 피해 호속을 유지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호인들의 반발을 우려해 호어 금지, 이장, 본적의 개칭, 낙양 천사(遷徙) 등 ‘한화 정책’의 중요한 정책과 명령에서 예외 규정을 두었다. 특히 호어 금지는 30세 이상에게는 해당하지 않았고, 조정 혹은 조정의 특정 장소로 해석할 수 있는 조당 안으로 한정함으로써 사실상 효과가 적었다. ---p.369, 종장 북위 후기 낙양 사회 물론 북위 후기 호인들은 자신의 고유한 풍습과 생활을 유지하면서도 중국의 한문화를 받아들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살펴본 증거만으로도 효문제의 ‘한화 정책’ 이후 낙양으로 이주한 호인들은 “완전히 한화되었다”는 ‘전반 한화(全般漢化)’론은 사실이 아니다. 또한 “한문화의 수용=한화”로 보는 기존의 시각도 수정할 필요가 있다. 호인 가운데 한문화에 심취해 자신의 고유문화를 포기한 사람들도 있는 반면, 자신의 문화와 습속만 묵수(墨守)했던 사람들도 있고, 양자를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문화 수용의 스펙트럼을 인정한다면 북위 후기 호인들의 한문화 수용에 대한 선입견을 벗어던질 수 있을 것이다. 즉, 북위 후기 낙양은 문화의 용광로(melting pot)가 아니라 샐러드 볼, 즉 호속과 한문화, 서역 문화의 공존 상황으로 보는 것이 당시 상황에 부합할 것이다. ---p.370, 종장 북위 후기 낙양 사회 현재 표준어[푸퉁화(普通話)]로 간주되는 베이징어는 본래 산둥 방언에서 나온 만주인[기인(旗人)]의 한어에서 유래한 북경 관화(北京官話)에 기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중국어는 한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민족인 청조(淸朝)의 기인이 창시했다고 볼 수 있다. ---p.373, 종장 북위 후기 낙양 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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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문제의 ‘한화’ 정책에 대한 새로운 시각
북위 후기 호인들의 한문화 수용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다양한 문화 수용의 스펙트럼을 인정하다 효문제의 ‘한화 정책’은 중국 문화와 제도를 수용한 것일 뿐, 일방적인 동화는 아니다._ 가와모토 요시아키(川本芳昭) 호인들이 한문화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 정화(精華)만을 취사선택했다._ 탕둬샨(湯奪先) 북위 후기에 이르러서도 선비인들의 제천의식이 유지되었고, 호인들이 좌임(左?)과 협령 소수(夾領小袖)의 호복을 여전히 착용했으며, 낙양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여전히 낙장(酪漿)과 육류를 즐기는 자신들의 식생활을 유지했음을 지적했다._ 루야오둥(?耀東) 북위 후기의 언어·복장·가족 관계·목축·부족 조직·토지 문제 등을 자세히 살펴보면 호인들은 여전히 자신의 문화를 유지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한화 정책’을 추진한 효문제 이후에도 효명제의 호어 사용으로 북위 후기 궁정에서 여전히 호어가 사용되었고, 효문제 말기의 부녀자가 여전히 호복을 착용하는 등 호속이 잔존했다._ 고가 아키미네(古賀昭岑) 중국 학계는 ‘미개한’ 이민족이 중국의 일부 혹은 전체를 지배하더라도 우수한 중국문화에 동화된다는 동화론을 주장한다. 특히 자기 종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했던 ‘금’이나 ‘청’과는 달리, 북위를 세운 이민족 지배층은 다른 이민족들과는 달리 ‘자발적인’ 동화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이른바 효문제의 ‘한화 정책’이다. 필자는 『위서(魏書)』와 묘지명(墓誌銘), 고고 발굴 자료를 분석하면서 기존의 통설처럼 효문제의 ‘한화 정책’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음을 실증적으로 검토했다. 그 결과 호어와 의식주를 포함한 생활과 문화 면에서 호인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했음을 밝혔다. 이 책은 그러한 작업의 결과물이다. 서장(序章)에서는 효문제의 ‘한화 정책’에 관한 연구사를 정리하고 선행 연구의 문제점을 살펴본다. 제1부에서는 효문제의 ‘한화 정책’의 여러 조치를 실증적으로 검증한다. 제1장부터 제7장까지 호어 금지, 호복 금지, 호성의 한성 개칭, 본적의 하남 낙양인 개칭, 묘호(廟號) 사용을 통해 본 정체성, 이장[천장(遷葬)] 금지와 낙양 매장, 중국 고유의 예악과 제사 도입으로 나누어 이른바 효문제의 ‘한화 정책’을 사서와 묘지명, 유물 자료를 바탕으로 검토한다. 소결(小結)에서는 제1장부터 제7장까지 살펴본 ‘한화 정책’의 여러 요소를 한화된 부분과 호속이 유지된 부분으로 나누어 비교한다. 제2부에서는 북위 후기의 수도 낙양에 존속했던 호속을 살펴보았다. 제1부에서 다루지 않은 음식 문화와 사냥, 활쏘기, 노래와 춤[歌舞], 유희, 호인의 이름, 낙양 거주 호인의 결혼과 성 풍속, 여성의 활동 등을 검토해 북위 낙양 시대의 낙양에 존재했던 호속의 존재 양태를 살펴본다. 제3부에서는 호속 유지의 배경을 분석했다. 북위 후기의 낙양에서 호속이 유지된 배경을 크게 정치, 경제, 환경, 북변(北邊)의 초원 문화, 서역 문화로 나눈다. 그리고 이를 다시 세부적으로 효문제의 순행과 친정(親征), 목태(穆泰)·육예(陸叡)의 난, 효문제의 황태자 원순(元恂)의 평성(平城) 도망 미수 사건, ‘한화 정책’의 예외 조항, 효문제의 후계자 선무제의 정책 계승 의지 부족, 재정 문제, 하양 목장(河陽牧場), 기후변동, 북변 호인들의 영향, 서역인과 서역 문화로 나누어 각각의 요인이 ‘한화 정책’의 어떤 부분에 영향을 주었는지 검토한다. 종장에서는 먼저 일방적으로 한화된 것도 아니고 호속과 서역 문화가 공존한 북위 후기 낙양 사회의 문화적 상태를 샐러드 볼(salad bowl)이라는 관점에서 정리한다. 그리고 요·금·원·청 등 역대 이민족 왕조의 한화와 호화 관련 연구사를 정리하면서 다른 이민족 왕조의 문화적 상황이 북위 후기(북위 낙양 시대)와 유사했음을 밝힌다. 이어서 효문제의 ‘한화 정책’이 그대로 실행되었다고 오인된 이유가 『위서』의 편향적인 서술 방식 때문이었음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다루려고 했으나 다루지 못한 성족 분정(정성족 혹은 성족 상정), 통혼(通婚) 정책, 문벌 정책 등을 간단히 언급한다. 이 책은 효문제의 ‘한화 정책’ 선언 자체를 맹목적으로 맹신하는 풍토를 지양하고 북위 낙양 시대에도 호속이 실존했으며, 북위 후기의 수도 낙양에 호인과 한인, 서역인 등의 다원적인 문화가 공존했음을 최초로 강조하고 밝혔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를 지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