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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을 내며
서문 Ⅰ. 서 론 Ⅰ-1. 조사의 개요 1. 조사의 목적 2. 조사의 방법 3. 조사의 진행 4. 조사팀의 구성 Ⅰ-2. 조사지구의 개관 1. 가회동의 역사 2. 가회동의 발달 3. 한옥보존지구 4. 대상지구의 위치 5. 대상가옥의 연대추정 〈도면〉배치도 및 가로입면도 Ⅱ. 가옥별 분석 및 도면 - 개 요 - 가족구성 - 각 실의 이용행태 1. 가옥의 구성 2. 가옥의 변화 3. 가옥의 이용행태 4. 만족도 5. 조사느낌 Ⅲ. 설문양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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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보고팀 ‘무애연구소·OB 세미나’
1985년 서울대·홍익대 조사팀의 1년 간의 조사로 완성 조사팀은 ‘무애연구소·OB 세미나’ 회원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의 무애건축연구실, 홍익대학교 건축학과의 윤도근(尹道根) 교수 연구실의 대학원 석·박사과정 학생을 주축으로 구성됐다. 조사팀은(괄호안은 당시 직책) 이광노(李光魯) 서울대 명예교수(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윤도근 홍익대 건축학과 명예교수(홍익대 건축학과 교수)를 중심으로, 장성준(張聖埈) 명지대 건축학과 교수, 김광현(金光鉉)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서울시립대 건축학과 교수), 김광우(金光禹)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숭전대 건축학과 교수), 김상경(金相景) KSK건축 대표(경희대 건축학과 교수), 김형우(金炯宇)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홍익공전 건축학과 교수) 등이 참여했다. 아울러 이 조사에는 서울대와 홍익대 건축학과 대학원생과 학부 학생들도 참여했다. 이들의 면면을 보면 오늘날 우리나라 건축학계의 중진들이 총동원됐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서울대 건축학과를 살펴보면, 송인호 서울시립대 건축학과 교수(박사과정), 우창훈 수원대 건축공학과 교수(박사과정), 조용훈 한경대 건축학과 교수(박사과정), 이상구 경기대 건축대학원장(도시과 박사과정), 김승회 경영위치건축사무소 대표(석사과정 2), 정인하 한양대 건축학과 교수(석사과정 2), 정영균 희림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석사과정 2), 차정만 에코프렌드 대표(석사과정 2), 한필원 한남대 건축학과 교수(석사과정 2), 이형욱 도가 대표(석사과정 2), 전봉희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석사과정 2), 황두진 호아두진건축사사무소 대표(석사과정 1), 이동락 전 희림 이사(석사과정 1), 우동선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학부 3) 등이 참여했다. 홍익대 건축학과 멤버들도 화려하다. 김란기 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 대표(박사과정), 윤희상 신흥대 건축설계과 교수(석사과정), 김한준 중원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석사과정), 김능현 경주대 건축학과 교수(석사과정), 남호현 순천대 건축학과 교수(석사과정), 이일형 순천향대 건축학과 교수(석사과정) 등이 참여했다. 가회동 최초·최후의 실측조사 보고서·사라져간 우리 한옥의 ‘호적’을 만들다! 1935년 무렵 전통한옥이 개량한옥으로 진화하는 과정 조사 대한민국 건축계의 원로 이광노 서울대 명예교수가 1985년 무애건축연구실·홍익대 건축학과의 윤도근 교수 연구실과 함께 전국의 보존가치가 있는 한옥 마을들을 실측조사한 대한민국 유일의 한옥 실측조사 보고서다. 말하자면, 우리 한옥의 ‘호적’을 만든 셈이다. 이번 가회동 실측조사보고서는 도서출판 곰시가 『사라져간 우리 한옥 시리즈①-가회동편』의 첫번째 책으로 펴내면서 빛을 보게 됐다. 『사라져간 우리 한옥 시리즈①-가회동편』은 조사팀은 서울시 한옥보존지구 내 가회동 11번지 일대의 33가구를 대상가옥으로 선정해 조사했다. 이 책은 우리 한옥의 구조를 도면으로 담아낸 것은 물론,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활상까지 설문 인터뷰를 통해 조사함으로써 민속학적인 가치까지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광노 교수는 본문에서 “지금까지 우리의 전통건축이나 근대건축에 대해 많은 조사연구가 진행돼 왔다”면서 “그것은 몇 천 년을 두고 지속돼 온 우리의 건축형식과 그것이 이 시대의 건축으로 전이(轉移)돼 가는 과정을 조사 연구함으로써, 과거에 대한 정확하고 과학적인 이해와 아울러 그것을 통해 현재에 대한 진단과 방향 설정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실측조사 대상으로 왜 가회동을 선택했는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는 “가회동 실측 조사는 전통주거 건축과의 연장선상에서 1935년을 전후로 한 시기, 즉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는 시기에 건축된 서울시 도시형 한옥 주거군(群)이기 때문”이라며 “그 시기는 전통 한옥이 이른바 개량 한옥으로 진화돼 가는 과정으로, 옛것과 새것이 서로 절충해 가는 첨예한 단계”라고 했다. 그는 “이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평면실측과 일반적인 설문조사, 그리고 한옥이 담고 있는 생활, 즉 그것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조사했다”면서 “지금까지 주거형식 위에 중첩돼 온 행위를 파악함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우리의 전통과 생활에 적합한 주거계획과 설계에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큰 것”이라고 했다. 조사팀은 이를 위해 서울시 한옥 보존지구 내 가회동 일대의 도시형 한옥의 원형 파악 ·그 원형이 시간을 두고 변화해 나간 과정의 파악 ·한옥에서의 주거방식, 행위 및 주거의식 파악 ·가회동의 도시적 맥락 속에서 대상지구의 구성 체계 파악 등에 주력했다. 이광노 교수는 개정판 서문에서 “최근 필자는 가회동 한옥촌므 조사해 만들어낸 조사보고서를 서재를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했다, 25년의 세월 동안 햇볕을 보지 못한 조사보고서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면서 “문득 ‘현대적 감각에 맞게 다시 빛을 보게 하는 것은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면서 이렇게 소감을 적었다. 〈겨울을 재촉하는 찬비가 흩날리던 12월 초하루, 25년만에 가회동 조사의 기점(起點)이 됐던 언덕 위 김활란(金活蘭) 박사의 별장 앞에서 가회동 한옥마을 전체를 조망해 본다. 가회동 기와집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이로 몇몇 현대식 건물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가회동 지역은 전통한옥 보존을 위해 1981년부터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됐으나, 주민들의 재산권 보호를 위해 1991년 해제됐다. 그나마 가회동 한옥마을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천행(天幸)이다! ·(중략)· 1985년 초여름으로 기억한다. 두 연구소 사람들은 호주머니를 털어 방학 기간을 이용해 자발적으로 조사연구에 착수했다. 통상 광범위한 지역의 한옥마을 조사·연구는 국가기관의 연구보조나 연구용역으로 이뤄지는 것이 상례다. 게다가 주민 여러분들의 협조가 없었더라면, 조사연구를 감히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사원들이 가옥을 실측(實測)할 때면, 바깥주인은 측량자(尺)를 잡아주거나 위험을 무릅쓰고 지붕 위까지 함께 올라가 주시곤 했다. 부인네들은 조사원들을 위해 식사와 차를 끓여내 대접하며 “수고한다”며 격려해 주셨다. 특히 그분들은 한옥의 생활상을 기록하기 위한 설문조사에도 기꺼이 협조해 주셨다. 그분들의 한옥공간 생활상은 하나 둘 채집돼 조사원들의 손을 거쳐 소중한 민속학(民俗學) 자료로 남게 됐다. 한 세대 전, 선배들이 흘린 땀의 기록이 헛되지 않도록, 이 조사보고서가 우리 한옥 연구의 기초자료로 잘 활용되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이광노 교수는 1986년 3월 조사보고서를 발간하면서 서문에서도 “오늘날 자발적인 공동연구를 한다는 것은 그 여건이 갖춰지기 매우 힘들고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되고 있다”면서 “그러나 이번 가회동 한옥보존지구에 대한 공동조사연구는 그 동기가 순수했고,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의 뜻있는 건축학과 대학원생들이 합심해서 이 일을 수행하였고 마무리 짓는 데 온갖 정성을 다했던 것”이라고 했다. 그는 “연구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 주거생활과 주택건축에 대한 뿌리를 찾아보자는 데 있다”면서 “도시의 전통주택 지역과 주거공간을 재조명함으로써 우리의 새로운 주택계획에 대한 체계를 구명(究明)함과 동시에 참된 전통창조를 위한 자료로 삼기 위함”이라고 적고 있다.◎ 가회동의 역사 가회동(嘉會洞)은 조선조 건국 초기부터 있었던 북부 10방(坊) 중의 하나인 가회방(嘉會坊)의 이름을 그대로 동명(洞名)으로 한 것이다. 영조 27년(1751) 9월 선포한 ‘도성삼문분계총목록(都城三門分界總目錄)’을 보면, ‘훈후(訓後)’에 속한 계동(契洞) 중 북부 가회방에는 ‘가회방계(契)’ 하나만이 보일 뿐이지만, 고종 31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당시의 기록에는 북서(北署) 가회방 관내에 ‘재동계(齋洞契)’가 있고 그 아래에 재동(齋洞)·홍현(紅峴)·맹현(孟峴)·동곡(東谷) 등의 동 이름이 보인다. 따라서 이때 ‘가회’는 단순히 방명(坊名)으로만 쓰이고, 계명(契名)이나 동명으로는 쓰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 말부터 갑오개혁 때까지 서울 행정구역으로는 구(區) 대신 부(部)가 있었고, 그 아래에 방(坊)과 계(契)·동(洞)을 두었다. 갑오개혁 당시 서울에는 5서(署) 47방 288계 775동이 있었다. 1910년 일한강제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그때까지 ‘한양’ 또는 ‘한성’으로 불렀던 왕도를 ‘경성부’로 이름을 바꾸고 경기도의 일개 지방도시로 그 격을 낮췄다. 그와 더불어 도(都)·계·방으로 나눴던 지명을 폐지하고 끝에 동(洞)과 정(町)이 붙은 지명을 사용했다. 1914년 4월 1일 경성부 고시 제 7호에 따라 경성부제(京城府制)가 실시되면서 가회방은 맹현과 재동, 동곡, 홍현의 일부를 가회동으로 새로이 부르게 됐다.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한양 천도 이후, 서울의 도시 형태와 구체적인 내부구조는 도성과 궁궐, 사직단(社稷壇), 종묘(宗廟), 조정(朝廷) 청사 외에 시전(市廛)과 양민의 주택지, 기본 가로망이 완성되면서 그 윤곽이 뚜렷해졌다. 조선 초기에는 토지 사유화가 인정되지 않고, 신분에 따라 땅을 나눠 주었기 때문에 어느 주거지역에 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분이 구분됐다. 도시의 중요한 부분인 주민의 지역분포는 대체로 종로(鐘路)를 경계로 해 나타났다. 그때의 신분사회는 양반, 중인, 상인, 천민의 네 계급으로 이뤄졌다. 왕족을 중심으로 한 양반과 관료는 서울의 명당자리인 경복궁과 창덕궁을 연결하는 지금의 율곡로(栗谷路) 일대에 모여 ‘북촌’을 이뤘다. 반면, 하급관리나 양반의 자손이기는 쿇지만 벼슬이 없는 집단은 남산 기슭에 모여 ‘남촌’을 형성했다. 이와 같이 북촌과 남촌의 분화현상은 대체로 조선왕조 후기에 들어와서 뚜렷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한옥지구로 지정된 가회동 일대는 조선조 이래 주로 양반(兩班)과 왕족(王族)의 거주지로 형성됐던 곳으로 현재까지 그 맥이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서울의 외곽지역이 개발됨에 따라 예전의 화려함이 다소 퇴색한 느낌을 준다. 한옥 보존지구 지정 1977년 가회동 둘레에 이른바 ‘한옥보존지구’가 생겨났고, 1977년부터는 일반 조선집(한옥집)도 그것이 본래의 모습을 지닌 집이기만 하면 문화재로 지정돼 보호를 받게 됐다. 이것은 문화재의 개념이 궁궐이나 상류주택에 한정되었던 것에서 벗어나 일반 서민의 집까지로 확산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회동 한옥보존지구 내에는 2,000여 호의 전통 가옥이 있다. 당시 실측대상으로 정한 곳은 가회동 11번지 일대로, 보존지구 중심부에서 약간 북동쪽으로 치우친 지역이다. 조사대상 가옥은 33가구로, 대·중·소 규모의 가옥이 비교적 고르게 분포돼 있다. 대상지역의 지형은 남북방향의 고저(高低) 차는 거의 없으나, 동서 방향으로는 약 30도 이상의 급경사이기 때문에 동쪽에 있는 주택의 축대가 서쪽에 인접한 주택의 담 역할을 하고 있다. 1929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지적도를 보면, 이 부근은 아직 획지 분할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로서 주거지가 아닌 농경지나 과수원 등의 용도로 사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사실은 조사대상 가옥의 건립연도가 최고 1930년경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좀 더 자세한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근거는 몇몇 조사가옥에 나타나 있는 ‘을해년(乙亥年)…칠량(匕梁)’ 이라는 문구에서 조사대상 가옥의 건립연대를 1935년 부근으로 추정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