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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페일리의 중독적인 ‘씹는 맛’ _무라카미 하루키
소망 빚 뭐가 달라질까 페이스의 오후 한나절 우울한 이야기 살아 있다 자, 어서, 그대 예술의 아들들이여 나무에서 쉬는 페이스 새뮤얼 무거운 짐을 떠안은 남자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 정치적 문제 북동쪽 놀이터 소녀 아버지와 나눈 대화 이민자 이야기 장거리 달리기 |
Grace Pa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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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서 우연히 전남편을 만났다. 나는 새로 지은 도서관 계단에 앉아 있었다.
잘 지냈어? 내 인생. 내가 말했다. 27년을 부부로 살았으니 그렇게 말해도 무방하다고 느꼈다. 그가 말했다. 뭐라고? 뭔 인생? 내 인생은 전혀 없었다고. --- p.15 어린 자식들까지 딸린 마리아는 힘든 시기를 최선의 방법으로 살아내려고 애썼다. 동네에 있는 가까운 친척집 몇 곳을 옮겨 다니면서 매번 열심히 일해 그 집 살림을 도왔다. 마리아는 일도 잘했지만 빵을 맛있게 굽는 것으로 유명했다. 마리아는 한동안 좋은 친구의 집에 들어가 살면서 아주 훌륭한 빵을 구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집 남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마리아가 구운 빵은 아주 근사해. 당신은 왜 저런 빵을 못 굽는 거지?” 그러고는 아마도 마리아의 다른 면에 대해서도 칭찬한 것 같다. --- p.23 “어째서 내 이름을 붙여준 애는 하나도 없는 거니, 마거릿?” 내가 마거릿의 면전에서 대놓고 물었습니다. “여자아이가 둘밖에 없어서요. 한 명은 우리 엄마 이름을 따서 테레사로, 다른 한 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언니 이름을 따서 캐서린으로 했어요. 다음에 낳는 아이에게는 어머니 이름을 붙일게요.” “뭐라고? 아이를 또 낳는다고! 내 아들을 죽일 셈이니?” --- p.44 애니타 프랭클린, 혼자서 잘해낼 수 있겠어? 페이스가 속으로 말했다. 뉴 위트레흐트 고등학교에서 가장 섹시했던 애니타 프랭클린, 요즘은 밤에 어떻게 자? 똑똑한 세파르디 유대인 학자이자 강사인 잘난 아서 마자노의 옆에 다시는 누울 일이 없는 요즘 어떤데? 이제 침대에 누우면 네 위로 시간이 덮쳐올 거야. 네 입술에 닿는 잘생긴 금발 아서의 입술도 아니고, 보이스카우트 같은 지적이고 뜨거운 손가락도 아니야. 주변에 어른거리며 맴돌던 리카르도의 그림자가 이 순간 커다란 문젯거리로 훅 솟아올라 그녀의 왼쪽 눈에 잽을 날렸고, 페이스가 놓인 바닥 수면이 얼마나 얕은지 온 세상에 드러냈다. 이 순간 그녀의 육체라는 논에 벼를 심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이 순간부터 시작되어 오후 내내 그녀가 어찌해볼 수 없을 만큼 물줄기가 밀려오는 가운데 아름답고 힘차게 새싹을 틔울 수 있었을 것이다. --- p.72 이야기를 나눈 뒤 내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나는 아이들을 집에 둔 채 살아 있는 생명체 속에 섞여 얼른 한잔하기 위해 길모퉁이로 달려갔다. 그러나 줄리네 가게를 비롯하여 모든 술집에는 얼른 핫위스키를 들이켠 뒤 자리를 옮겨 사랑을 나누려는 남녀들이 가득했다. 사람은 생명의 행위를 갖기 전 술기운을 빌릴 필요가 있다. --- p.88 “이를테면!” 필립이 말했다. 귓불에서부터 셔츠 안까지 벌겋게 물들어 얼굴 전체가 흥분으로 완전히 빨개졌다. 피가 그의 머리에서부터 아래로 쏠리는 걸 지켜보고 있자니 나는 그의 성기를 살며시 부여잡고 싶어졌다. 말하자면 모든 기운이 쿵쿵 용솟음치면서 쏠리는 그 부위, 바로 거기 있고 싶었다. --- p.146 아내와 아들은 오전 9시면 늘 슈퍼마켓에 간다. 마침내 아내와 아들이 카트와 쇼핑백과 차를 가지고 떠나자 남자는 일요일이면 허구한 날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또 나누었으니 이제 어떻게 여자와 성관계를 시작할지 다양한 방법을 강구해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 p.162 “제발, 네 이야기 속에는 결혼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니? 다들 침대 속으로 뛰어들기 전에 시청으로 달려갈 정도의 시간도 없는 거야?” “없어요.” 내가 말했다. “현실 생활에서는 그럴 시간이 있지만 내 이야기에서는 없어요.” --- p.229 나는 다시 남자 이야기로 돌아가서 말했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남자들이 우리에게 줄 거라고는 고작해야 섹스밖에 없는데도 무슨 귀한 선물이라도 주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어요. 섹스란 빵처럼 없으면 안 되지만 사실 흔해빠진 거거든요. 아, 섹스하지 않고도 살 수 있어요. 루디 부인이 말했다. 섹스하지 않고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 p.2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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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문학의 전설 그레이스 페일리가 펼쳐 보이는
날카롭고 깊고 뜨거운 순간들! “한번 빠져들면 이제 그것 없이는 못 견딜 것 같은 신비로운 중독성이 있다. 거칠면서도 유려하고, 무뚝뚝하면서도 친절하고, 전투적이면서도 인정이 넘치고, 즉물적이면서도 탐미적이고, 서민적이면서도 고답적이며, 영문을 모르겠으면서도 알 것 같고, 남자 따윈 알 바 아니라면서도 매우 밝히는, 그래서 어디를 들춰봐도 이율배반적이고 까다로운 그 문체가 오히려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 문체는 그녀의 명백한 특징이자 서명이며 흉내내려 해도 누구도 흉내낼 수 없다.”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에세이 「그레이스 페일리의 중독적인 ‘씹는 맛’」(『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수록)에서 그레이스 페일리 문학의 특징을 이렇게 소개했다. 실제로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레이스 페일리의 문학 세계에 깊이 매료되어 1999년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을 시작으로 페일리의 작품집 세 권을 모두 일본어로 옮겼다.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처음으로 번역한 여성 작가의 작품이기도 하다. 느닷없이 시작되어 ‘훅’을 날리듯 인물의 내면 깊이 들어왔다가 어느 순간 능청스럽게 줌아웃하는 17편의 소설은 소설의 형식, 특히 ‘기승전결’ 혹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에 익숙해져 있는 독자를 당황시킨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위기’ 혹은 ‘절정’에 가깝고 거꾸로 이야기가 ‘전개’되나 싶으면 “그래, 그랬었지” “그게 모든 일의 시작이었어” 하며 자연스럽게 끝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독자는 다시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구성하고 반추하며 무라카미 하루키가 언급한 ‘중독적인 씹는 맛’에 중독된다. 인물들은 주로 가족들 속에서, 간섭 많고 오지랖 넓은 친지들 속에서, 물색 모르는 남자들 앞에서 여성으로서 자신의 삶을 오롯이 들여다본다. 인생과 세상을 관조하는 시선과 뉴요커 특유의 쫄깃쫄깃한 유머가 빛난다. 또한 결혼하지 않은 여자, 이혼한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자, 대안가족을 꾸리는 여자 등 여성의 삶의 양상을 다양하게 보여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작가의 작품들이 주로 1960년대에 쓰였다는 걸 믿기 힘들 정도로 현대적으로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망 “길거리에서 우연히 전남편을 만났다.” 소설은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된다. ‘나’는 18년 전에 대출한 책을 드디어 반납하러 온 참이었다. 무려 32달러의 연체료를 내고 연체 기록을 삭제한 후 대출한 책은 반납한 바로 그 책이다. 나름 힘든 시기를 함께 이겨냈다고 믿었던 전남편은 넌 딱히 원하는 게 없었겠지만 자신은 늘 요트를 갖고 싶었다는 둥 상처 주는 말을 늘어놓다가 돌연 자리를 뜬다.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조금 전 빌려온 두 권의 책을 반납하기로 결심한다. 뭐가 달라질까 누구보다 뜨거운 청춘을 보냈다고 자부하는 ‘래프터리 부인’의 목소리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녀는 아들 ‘존’을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왔다. 동네 여자아이 ‘지니’를 아들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자해까지 감행한 사건은 그녀의 위업 중 하나다. 그러나 그날 이후 가족은 완전히 망가졌다. 늘 뜨겁게 그녀를 원하던 남편은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니다 일찍 죽었고 아들은 참한 아가씨와 결혼했지만 지니와 바람을 피운다. 래프터리 부인은 자문한다. 그토록 전전긍긍했던 모든 것들이 다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살아 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크리스마스 2주 전 엘런이 내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페이스, 나 죽으려나 봐.” 그 주에 나 역시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어찌어찌 살아났고 엘런은 정말로 죽었다. 나는 엘런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엘런을 추모하고 그녀의 아들을 위로하면서 충동적으로 그에게 “내가 널 키워줄까?” 하고 묻는다. 그러나 아이가 정말로 자신을 따라 나설까 봐 내심 걱정한다. 나무에서 쉬는 페이스 페이스가 다시 등장한다. 페이스는 공원 나무 위에서 동네 아이들과 여자들, 남자들을 내려다본다. 페이스의 아들은 단단히 토라졌으며 그녀에게 딴죽을 거는 사람도 있고, 수작을 거는 남자도 있다. 평범한 하루처럼 보이는 그날의 어떤 것이 페이스의 삶을 바꾸어놓았다. 페이스는 훗날 이렇게 생각한다. ‘바로 이때부터였다고 생각한다. 그날 있었던 일들을 계기로 나는 방향을 틀었고, 헤어 스타일을 바꿨고, 일자리를 시 외곽으로 옮겼고, 삶의 방식과 말투를 바꿨다.’ 새뮤얼 전철에서 소년들이 시끄럽게 놀고 있다. 차량과 차량 사이에서 노는 모습은 꽤 위험해 보인다. 부인들은 걱정하고 남자들은 소년 시절을 추억하는 것 같다. 소음을 참다 못한 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 비상정차 쇠줄을 당긴다. 전철이 급정차하면서 아이들 중 한 명이 차량 사이에 빠져 브레이크에 몸이 끼어 죽는다. 소년의 이름은 새뮤얼이었다. 무거운 짐을 떠안은 남자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돈만 쓰는 것 같은 아내와 자식에게 지친 남자가 있다. 그는 사소한 일로 이웃집 부인과 말다툼을 벌이고 화해한 후 서로 말동무가 된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르고 남자는 이제 슬슬 그녀와 섹스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 중년에 가까워진 알렉산드라는 아버지를 문병하러 간다. 그런데 택시 기사가 알렉산드라에게 함께 침대로 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알렉산드라보다 한참 어리고 그녀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다. 그리고 얼마 후, 알렉산드라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임신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자존심이 강한 아버지는 딸이 자신의 삶을 수치스럽게 만들었다며 화를 낸다. 알렉산드라는 자신도 아버지도 행복해지려면 아버지가 죽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편 택시 기사는 함께 아이를 키우며 살자고 제안하지만 알렉산드라는 다른 길을 모색한다. 아버지와 나눈 대화 병상에 누워 있는 나의 아버지가 어느 날 나에게 이렇게 청했다. “네가 간단한 단편소설 한 편을 꼭 한 번 더 썼으면 좋겠다.” 나는 아버지를 위해 간단한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준다. ‘어느 여자가 살았다’로 시작되는, 꾸미지 않은 담백하고 불행한 이야기들. 하지만 아버지는 나의 이야기에 만족하지 못한다. 나의 이야기에는 결혼한 사람이 등장하지 않으며 의미도 없고 현실성도 없기 때문이다. 장거리 달리기 마흔두 살이 된 페이스는 갑자기 달리기를 시작한다. 더 나이들기 전에, 혹은 자신이 사는 도시의 모습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달라져버리기 전에 먼 곳까지 한번 달려보고 싶었다. 페이스는 열심히 달리기 연습을 한 후 아이들에게 잠시 집을 떠나겠다고 인사하고 자신이 살던 동네로 간다. 백인들이 살던 동네였는데 이제 흑인들의 마을로 바뀌었다. 뜻하지 않은 소동에 휘말린 페이스는 자신이 예전에 살던 집으로 도망치고, 그 집에서 얼마간 살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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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빠져들면 이제 그것 없이는 못 견딜 것 같은 신비로운 중독성이 있다. 거칠면서도 유려하고, 무뚝뚝하면서도 친절하고, 전투적이면서도 인정이 넘치고, 즉물적이면서도 탐미적이고, 서민적이면서도 고답적이며, 영문을 모르겠으면서도 알 것 같고, 남자 따윈 알 바 아니라면서도 매우 밝히는, 그래서 어디를 들춰봐도 이율배반적이고 까다로운 그 문체가 오히려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 문체는 그녀의 명백한 특징이자 서명이며 흉내내려 해도 누구도 흉내낼 수 없다. -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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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습고 슬프고 담백하고 겸손하며 유쾌하고 예리하다. 나를 울리고 웃기고 감탄하게 만든 책. - 수전 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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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작가이자 트러블메이커인 그레이스 페일리의 존재에 감사한다. - 도널드 버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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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인생, 사랑의 ‘가려운 곳’을 이토록 예리하게 포착해내는 작가가 그레이스 페일리 말고 또 있을까. -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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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페일리의 단편은 소설 형식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각각의 이야기는 더없이 풍성한 내면을 지녔고, 모든 문장은 놀랍도록 시적이며 압축적이다. - [런던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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