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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건축과 기억의 적
역사의 한편에서는 언제나 건축물과 벌이는 또 다른 전쟁이 진행되었다. 즉 지배와 공포정치, 분열과 말살의 수단으로 적대 관계에 있는 민족이나 국가의 문화적 산물을 파괴하는 전쟁 말이다. 최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흔히 수행되는 이 전략의 목적은 상대편을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수단을 이용해 인종청소나 집단학살을 수행하고 정복을 강화하기 위해 승자의 입맛대로 역사를 고쳐 쓰는 데 있다. 여기서 건축물은 토템의 성격을 띤다. 예컨대 적의 모스크는 단순한 모스크가 아니라 말살하려는 집단의 현전現前을 상징한다. 도서관과 미술관은 역사적 기억의 저장고이자 특정 집단의 현전을 과거와 잇고 현재와 미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증거다. 이런 이유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구조물과 장소는 의도적으로 선택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자신들의 건축 유산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광경을 본 이들이 받는 상실감은 엄청난 복구 비용에 대한 걱정이나 그 구조물이 지닌 미학적 가치가 훼손되는 데서 느끼는 슬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해나 아렌트가 주장하듯 “인간 세계의 실재성과 확실성은 무엇보다 우리를 둘러싼 사물이 그 사물을 생산한 활동보다 더욱 영구적이라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친숙한 사물을 모두 잃는다는 것, 즉 한 개인을 둘러싼 환경이 남김없이 파괴된다는 것은 그 사물들이 불러일으키는 기억으로부터 추방당해 방향감각을 상실함을 의미한다. 개개인의 집단 정체성과 이 정체성들의 견고한 연속성이 상실될 위험에 맞닥뜨리는 것이다 1장 문화청소: 누가 아르메니아인을 기억하는가? 사라예보의 주요 모스크와 모스타르의 다리는 보스니아 내전으로 파괴되거나 심각한 피해를 입은 오스만제국 시대의 건축물 수천 개 가운데 두 곳에 불과했다. 최전선이 이동하고 평화조약들이 수정되는 와중에 수많은 주민들이 강제 추방되거나 목숨을 잃었고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전역의 가톨릭 성당과 정교회 성당이 마찬가지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사이에 끼어 가장 큰 화를 입은 대상은 오스만제국의 유산이었다. 이슬람의 화려한 건축 유산 중 조금의 상흔도 입지 않은 건물은 극소수였다.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건물의 피해가 가장 커서 도서관, 박물관, 이슬람 학교, 묘지, 분수 등이 주요 표적이 되었다. 아르메니아는 4세기 초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최초의 기독교 국가였다. 아르메니아인들은 2,500년 전부터 흑해와 카스피 해 사이의 고지대에 살았다. 문화적·언어적으로 다른 민족과 뚜렷이 구별되는 이들은 가끔 독립국가를 이뤘으며 오스만제국에 흡수된 뒤에도 수백 년 동안 대체로 온전하게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지켜왔다. … 하지만 19세기 제국의 몰락과 함께 제국 내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이 급증했고 구성원 사이에서도 민족주의적 감정이 팽배했다. 1894~1896년까지 술탄 아브뒬하미드 2세의 주도로 일어난 집단학살로 인해, 아르메니아 심장부인 터키 동부 전역에서 20만 명에 이르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살육되고 수천 명이 추방되거나 강제 개종 당했다. … 튀르크족은 여성과 남성을 따로 분리해 남성은 그 자리에서 죽이거나 라스 알 아인과 데이르 아즈 조르의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아르메니아 교회와 기념물, 거주 지구와 도시는 이 과정에서 파괴되었다. 예배를 보던 장소에서 산 채로 불태워진 아르메니아인들도 있었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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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어떻게 건축 유산을 파괴했는가
전장의 후방에서 벌어지는 건축물과의 또 다른 전쟁! 집단 기억의 말살을 위한 문화 파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455년 지어진 요크의 길드 집회소 ·유대인 문화의 상징 보우파 마을의 목조 시너고그 ·드레펑 사원과 간덴 사원 ·히츠콘크를 비롯한 아르메니아의 수도원 ·1500년의 역사를 가진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석불 ·모스타르의 역사적인 다리 스타리 모스트 ·세계문화유산 지정지인 두브로브니크의 항구 도시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 ·바르샤바에 있던 782곳의 역사 기념물 ·신고전주의 건물인 더블린 법원 건물 집단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한 야만적인 파괴의 참상을 고발하다 위에서 열거한 문화유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테러나 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거나 원형이 훼손된 역사적인 건물이라는 점이다. 국가나 민족 혹은 종교 간의 마찰로 인한 전쟁에서는 건물이 무너지거나 도시가 파괴되는 일이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파괴적인 무기가 개발될수록 그 정도는 더 심해진다. 그런데 이와는 성격이 다른 또 다른 전쟁이 전장의 후방에서 종종 벌어진다. 바로 건축물과의 전쟁이다. 국가나 민족을 상징하는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이 전쟁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1938년 크리스탈나흐트에 나치스가 독일 안에 있는 시너고그(유대교에서 집회와 예배의 장소로 쓰는 회당)를 파괴한 사건이나, 몇 년 전 탈레반이 1500년의 역사를 가진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석불을 폭파한 사건, 오스만 군대가 아르메이나인을 학살하면서 아르메니아 교회와 기념물, 거주 지구와 도시를 모두 파괴한 사건, 이스라엘군이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가옥과 건물들을 불도저로 밀어버린 사건 등 한 집단의 현전現前을 상징하는 장소나 건축물에 대한 파괴 행위는 역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 역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민족문화 말살이라는 정책 아래 경복궁, 경희궁, 경운궁을 비롯해 전국 곳곳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조직적으로 파괴되거나 해체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정복자들에 의한 이러한 파괴는 왜 일어나는 걸까? 그것은 문화유산이 토템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민족과 그 집단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물질을 말살하는 행위는 민족 자체를 말살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이런 이유로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며 발생한 민족 및 국가 간의 분쟁에서 각각의 집단을 상징하는 수많은 장소와 건축물들이 정복자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었다. 다시 말해 전쟁으로 인한 부수적 피해가 아니라 적극적이면서도 조직적인 파괴 행위가 벌어진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파괴 행위로 정복당한 민족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기억을 말살하려 했고, 자신들의 입맛대로 역사를 고쳐 씀으로써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다. 이 책 《집단 기억의 파괴》는 이처럼 건물을 표적으로 한 테러 활동과 정복 활동, 사람들을 분산시키거나 결집시키기 위해 구조물을 세우거나 철거하는 행위, 과거의 잔해 위에 유토피아를 세우려는 혁명적인 새 질서로 인해 파괴되는 건물들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건축물 재건과 문화재 복원을 둘러싼 논쟁을 밝히다 저자는 파괴에 대한 참상을 고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러한 행위가 재발되지 않도록 범죄를 저지른 이들에게 중형을 선고해 억지 효과를 갖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파괴 행위로 사라진 건축물의 복원과 관련한 문제에서도 망각이 강요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전쟁 전 모습으로 충실하게 복원한 폴란드 바르샤바를 예로 들면서 재건의 주체가 가해자든 희생자든 역사의 증거인 균열과 빈 공간, 잔해를 제거함으로써 과거를 은폐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건축물을 파괴 이전의 모습 그대로 복원함으로써 아픈 기억을 역사에서 지워버리려고 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옛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문제에서부터 서울시청 철거를 앞두고 등록문화재 지정 문제, 경복궁 및 서울성곽 복원 문제 등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파괴되었던 건축유산에 대한 복원 및 철거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명확한 철학 없이, 정치적인 논리에 따라 복원이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문화재 복원에 관한 후진국임을 자처하는 행위다. 철저한 고증과 복원도 중요하겠지만 문화유산에 일어났던 역사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짚고 넘어가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저자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도 과거의 건축적 유물에 파묻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한 과거의 흔적들 틈에서 사회 안의 이질성을 긍정적으로 반영할 수 있도록 다양한 흔적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충고한다. 아울러 저자는 이데올로기와 인종과 민족주의의 싸움으로 수많은 건축물들이 지금도 파괴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20세기 이전의 역사가 21세기에 되풀이되지 않도록 국제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촉구한다. 건축물에 대한 탄압을 다룬 유일한 책! 이 책 《집단 기억의 파괴》는 지금까지 한 번도 다뤄지지 않았던 건축에 가해진 탄압, 다시 말해 ‘문화청소cultural cleansing’를 깊이 있게 연구한 책이다. 소수민족의 문화, 즉 그들의 언어와 문학과 예술과 관습을 의도적으로 탄압한 사례를 다룬 책은 많지만 건축에 가해진 탄압을 다룬 책은 지금까지 없었다. 이에 저자는 인도에서 보스니아까지, 요르단 강 서안에서 아일랜드까지 무수한 파괴의 현장을 직접 둘러보며 정복자들이 어떤 이유에서, 어떤 방식으로 한 집단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 그들의 건축물을 파괴해왔으며 지금도 파괴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전 세계 저널리스트들의 기사와 전공 분야의 학자, 역사가, 운동 단체, 인권 단체의 저작을 참고해 이 같은 행위를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