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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미술의 정체
반양장
윤난지
한길사 2018.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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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책머리에 9

1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아우르는 글 13

‘현대성’으로부터
2 동양주의와 옥시덴탈리즘 사이│김환기의 전반기 그림 47
3 근원적인 세계를 향한 이상주의│권진규의 먼 시선 89
4 한국 앵포르멜 미술의 ‘또 다른’ 의미 135

‘한국적’ 현대미술을 향하여
5 단색화의 다색 맥락│젠더의 창으로 접근하기 203
6 단색화운동의 경쟁구도│박서보와 이우환 255
7 한국 극사실화의 ‘사실성’ 297

‘현대성’을 넘어서
8 김구림의 ‘해체’ 349
9 혼성공간으로서의 민중미술 399
10 한국 현대미술과 여성 457
11 윤석남의 ‘또 다른’ 미학 507
12 최정화의 플라스틱 기호학 561

참고문헌 609
찾아보기 627

저자 소개 1

尹蘭芝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2019년까지 같은 과 교수로 재직했다. 현대미술사학회, 서양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현대미술포럼 대표를 맡고 있다. 『현대미술의 풍경』(2000), 『추상미술과 유토피아』(2011),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2018) 등을 출간했으며, 『20세기의 미술』(1993), 『현대조각의 흐름』(1997) 등을 번역했다. 『모더니즘 이후 미술의 화두』(1999) 등 다수의 번역서와 편저를 기획했다. 석주미술상(2000), 석남미술이론상(2007), 한국미술저작출판상(2021)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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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08월 17일
판형
반양장 ?
쪽수, 무게, 크기
648쪽 | 1186g | 153*224*35mm
ISBN13
9788935670598

책 속으로

이 책의 목표는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를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규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 정체가 매우 다양하며 유동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체란 없는 것인가? 그것을 찾는 일은 부질없는 일인가? 당연히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정체란 어떤 특성으로가 아니라 열린 질문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을 찾는 일도 지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한국 현대미술의 출발점이자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로서 살기 위해 끊임없이 내가 누구인지를 물어야 하듯이, 이 전 지구화 시대에도 한국인인 우리에게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 찾기는 한국인으로서 살기 위한 길 중 하나다. --- p.10

한국 현대미술은 우리가 만들어온 미술일 뿐 아니라 우리로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야 하는’ 미술이다. --- p.43

김환기의 전반기 그림들에는 한국의 전통기물과 자연풍경이라는 정체성의 기호와 모던하고 인공적인 양식이라는 근대성의 기호가 공존한다. 그 양식 또한 구상적 이미지와 추상적 구성, 기하학적 구조와 비정형의 필치와 재질감 모두를 포괄한다. 그의 그림은 자국의 전통문화와 함께 선진제국의 미술사적 소산들에 동시에 노출된 제3세계 화가의 위치를 드러내는 시각적 지표인 것이다. --- p.84

권진규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자라다가 해방과 전쟁을 거쳐 분단시대를 헤쳐온 예술가들 중 그 “복판을 가로질러 나간” 흔하지 않은 예다. 정체성에 대한 인식과 근대화에 대한 요구, 근원적인 것을 향한 염원과 새로운 세계에 부응하고자 하는 열망이 교차하던 이 시기에, 그는 그러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하여 나름의 비전을 제시하였다. 문명의 시원과 고양된 정신의 경지를 표상하는 조각상들을 통하여 당대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이상세계를 현시한 것이다. --- p.133

나는 번역자의 능동적 계기가 두드러지는 경우 이러한 좋은 번역, 즉 의미 있는 오역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믿는다. 그리고 한국 앵포르멜에서도 그 가능성을 본다. 다른 언어 속에 갇혀 있는 앵포르멜의 순수한 의미를 ‘자신의 언어’를 통해 드러나게 한, 즉 번역자의 과제를 충실하게 수행한 예를 한국 앵포르멜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 p.198

단색화는 보이는 것처럼 그냥 단색이 아니다. 그것은 다색의 맥락에서 유래한, 또는 그것을 은폐하거나 통제하고자 한 주류 이데올로기의 회화적 버전이다. 단색화와 그 운동은 민족주의라는 ‘단색 이데올로기’가 미술을 통해 발현된 예다. 단색화는 당대 사회가 요구한 ‘한국적’ 현대미술의 시각기호로 만들어진 것이고, 그 운동 또한 그것을 바깥과 안에서 지켜온 과정이다. 즉 밖으로는 더 큰 주류에 합류하면서 안으로는 상호 간의 동질화를 통해 강력한 주류집단으로 결속되어온 문화적 부계혈통의 보존과 확장의 역사인 것이다. --- p.251

단색화운동의 역사가 다시 쓰일 수 있다면, 이러한 남성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소외된 것들을 복원하는 일이 그 주요 방향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배제가 아닌 ‘포용(inclusion)’이라는 여성적 원리로 단색화운동을 다시 보아야 한다는 깨달음, 이것이 경쟁구도라는 남성적 논리로 이 운동을 조망한 이 글의 진정한 결론이다. --- p.295

우리 미술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서로 다른 문화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시대와 장소의 특수성이 미술을 통하여 나타난 결과다. 그것은 고정되어 전수되는 어떤 실체가 아니며 시간적, 공간적 문맥의 드러남이다. 우리 극사실화에도 정체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대 한국의 문화지정학적 특수 상황을 투영하는 점에 있으며, 그것이 또한 그 ‘사실성’이 될 것이다. --- p.345

“김구림처럼 이상한 것을 많이 한 작가도 드물다.” 어느 평자의 단순한 이 말은 다시 새겨보면 의미심장하다. 평생 ‘이상함’, 즉 ‘다름’을 추구해온 김구림의 작업은 제도권 미술사의 바깥에서 모든 종류의 틀을 깨는 것에 바쳐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술가 주체와 그의 작품 그리고 예술이라는 개념을 한정해온 틀과 그 절대적 권위를 문제 삼아온 그의 작업은 미술로 철학하기, 더 정확히는 미술로 ‘해체철학하기’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의 작업은 해체론에 대한 예술이 아닌 “해체론이라는 예술”의 예증이다. 그는 해체론을 예술에 적용한 것이 아니라 작업을 통해 해체를 실행해온 것이다. --- p.396

민중미술은 실패한 운동인가? 현실 속에서 성취되지 않는 순혈주의는 공허한 외침일 뿐인가? 나는 “민중미술은 성공보다 주로 실패를 통해 그 존재를 보여주었는지도 모른다”라는 최민의 진단에 동의한다. 민중미술은 실패를 통해서 성공한 운동이다. 나는 민중미술의 실패에서, 아니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그 숙명에서 민중미술의 ‘힘’을 발견한다. 불가능한 꿈에의 열정, 없는(ou)세계(topia)를 향한 유토피안적 열망, 거기에 민중미술의, 나아가 모든 예술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 --- p.454

정체성이 영원히 지연되는 타자들은 결코 일관된 주체로 통합될 수 없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또한 ‘일관성의 신화’라는 폭력을 비껴가고 나아가 그것을 제어할 수도 있다. 여성에게는 ‘아직 안 되는’ 것이 ‘스스로가 되는’ 것이다. 이런 모순에 여성의 한계와 또한 가능성이있다. --- p.506

윤석남의 작업은 이처럼 삶의 짜임에서 유래하고 그 삶에 대한 구체적인 효과를 통해 의미가 드러나는 리얼리즘이자 수행의 미술이다. 그녀의 작업은 여성주의 미술의 생래적 국면을 드러내는데, 따라서 그녀가 걸어온 길은 실천적 운동에서부터 예술작업과 이론에 이르기까지 여성주의의 다양한 차원들을 포괄하며 작업의 내용과 형식도 여성주의 미술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섭렵한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가능성으로 열린 진행형의 미술인 그녀의 작업은 ‘열린 과정’이라는 여성주의의 본성을 환기한다. 여성주의란 선험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여성 스스로 끊임없이 새롭게 규정하고 만들어야 하는 것이라는 어느 여성학자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 p.559

최정화의 기호들은 특정한 의미를 명시하지 않으면서 유동할 뿐 아니라 이런 과정을 통해 의미화(signification)의 경로 자체를 드러내는데, 그 경로가 바로 당대의 문화논리다. 다시 말해 그의 기호들은, ‘당대 한국’이라는 특정한 지정학적 맥락에서 만들어진 문화논리를 드러낸다. 그의 작업 전체가 특정한 시대와 사회를 말하는 하나의 기호인 셈이다. 그의 플라스틱 기호학이 또 하나의 기호가 되는 셈이다.

--- p.606

출판사 리뷰

한국 현대미술의 중심과 주변을 아우르다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지난 20여 년간 한국 현대미술을 연구하며 깨달은 ‘단순한 사실’을 밝힌다. “미술은 미술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언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현대미술 또한 한국 현대미술이 무엇인지 그 정체(identity)를 말하는 언어”다.
정체란 끊임없이 변화하며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다. 한국 현대미술이라는 경계 안에 다양한 양식이 교차하고 충돌하며 그 경계 자체를 허무는 과정 자체가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는 그 정체를 정의하지 않는다. 정체는 매우 다양하고 유동적이라는 사실만을 드러낼 뿐이고 그렇기에 끊임없이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종의 ‘열린 질문’이고, 저자가 데리다의 ‘차연’(defferance) 개념을 인용한 이유다.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 찾기 ① : 한국의 현대사
이러한 정체 찾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한국의 현대사 자체다. 현대미술의 다양한 양식 외에도 사회적 요소가 한국 현대미술에 영향을 미쳤다. 가령 저자는 한국 현대미술의 중심을 차지한 단색화가 유신체제의 대응물이라고 설명한다.
“소위 ‘한국적 모더니즘’으로 창안된 단색화는 ‘한국적 민주주의’를 지향한 유신체제의 예술적 대응물이다. 전통미술과 그 예술관이 현대미술 및 그 이론과 만나는 단색화는 ‘한국적’이면서도 ‘모던한’ 미술이 될 수 있었으며, 따라서 당대가 요구한 [근대성을 담보한] 민족주의의 적절한 기호가 될 수 있었다.” _ 212쪽

이처럼 한국 내부의 정치적 사정은 물론이고 좀더 본질적인 차원에서도 한국 현대미술은 현대사의 산물이다. 일제강점기와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늘 ‘하위’의 자리에 머문 한국의 현대사는 “아버지 타자, 즉 본받아야 할, 적어도 무시할 수 없는 권위의 타자”를 좇은 기록이다. 이러한 양상은 한국 현대미술에도 반영되는데 흥미롭게도 모방이 아닌 창조의 성격을 띤다.

“타자를 전용과 개발의 대상으로 삼았던 서구 모더니즘과도 다르고, 서구를 올려다보는 동시에 아시아 국가들은 내려다보면서 자국의 정체를 저울질하던 일본의 현대미술과도 다른 현대미술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다름’이 곧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일 것이다.” _ 15쪽

대표적인 것이 앵포르멜(Informel)이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신·구체제의 격돌장이 된 한국 사회의 각 부문에서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반(反)체제 의식이 표면화된다. 미술계도 예외가 아니어서 일종의 관전(官展)이었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國展]에 대한 저항의지가 분출한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한국판 앵포르멜이다.
단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앵포르멜은 프랑스가 원산지다. 해방 후 일본을 거치지 않고 직접 수용한 모더니즘으로 지금까지 ‘외래경향의 맹목적 추종’으로 비판받았으나 저자는 여기서 “문화수용의 능동성”을 새롭게 찾아낸다.

“이러한 문화수용은 당대 한국의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에서 기인한 특수한 요구에 의해 촉발되었으며, 따라서 매우 선별적이고 자의적인 측면이 발견된다.
수용의 시기와 대상에 따라 외래경향을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선별적인 태도는 수용 주체의 능동성을 드러내는 국면인데, 각 경향에 대한 반응에서도 매우 자의적인 해석이 작용했다. ……다다(Dada)를 계승한 그리고 앵포르멜의 대안으로 등장한 신사실주의가 우리 앵포르멜 속에서는 무리 없이 혼용된 것도 이런 맥락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_ 192~193쪽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 찾기 ② : 주변부 미술
둘째는 한국 현대미술의 경계를 뒤흔드는 주변부다. 한국 현대미술의 중심은 이우환, 박서보 등으로 대표되는 단색화와 그 근간을 이루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차지해왔다. 하지만 역동적이고 혼성적인 한국 현대사만큼이나 한국 현대미술 내에도 다양한 양식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한 주변부는 한국 현대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영역을 확장시킨다.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가 주변부를 강조하는 이유다.
저자는 특히 여성 미술에 주목한다. 여성 작가들은 당대 사회에 순응하거나 저항하면서 나름의 시각기호를 만들어왔다. 중심 특유의 ‘일관성’의 미학에서 자유로운 그들은 “아직 안 된 것으로서의 여성”(woman as the not-yet)의 존재방식을 취한다. 저자는 이 부분에 주목한다. ‘아직 안 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또한 스스로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근현대를 통틀어 여성 미술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특성이 있다면 주류를 따르는 ‘일관성’의 미학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점, 즉 주류와 주변을 오가는 시각기호들이 교차한다는 점일 것이다. 모든 작가가 주류양식을 따랐던 모더니즘 시기에도 여성들의 작품에서는 장식적 패턴이나 공예기법 같은 주변적 요소가 공존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 이후에는 그런 요소들이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날 뿐 아니라 페미니즘 전략으로까지 이용되어왔다.” _ 505쪽

현대미술의 중심과는 다른 길을 걸어온 여성 미술의 최전선에 있는 작가가 바로 윤석남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활동을 “여성으로서 겪는 콤플렉스를 예술을 통해 승화시키는 일종의 굿”으로 표현한다. 단순히 여성성을 증명하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 여성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보여줌으로써 승화시키는 것이다.

“주류와는 ‘또 다른 미학’을 제안하고 실천해온 과정이 예술가 윤석남이 걸어온 길인데, 이는 무엇보다도 여성으로 살아온 삶의 경험에서 온 것이며 그 경험의 줄기는 모성이다. 자신의 삶 속에 살아 있는 어머니, 즉 제도로서의 모성이 아닌 이른바 ‘체험으로서의 모성’에서 윤석남은 치유의 힘을 발견한다. ……윤석남에게 모성은 타자를 아우르는 주체 혹은 내 안의 타자를 발견하는 주체, 나아가 스스로의 타자됨을 자청하는 주체 개념을 회복하게 하는 출발점이다. 그것은 생물학적 성을 넘어서서 모든 인간에게 그 존재의 윤리적 차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요청되는 가장 큰 덕목일 것이다.” _ 558쪽

정체 찾기의 윤리적 차원

역동적인 상호관계로 한국 현대미술을 구성해온 중심과 주변을 탐색한 후 저자는 가장 최신의 ‘증후’를 소개하며 책을 마친다. 저자는 1990년대 이후 본격화된 후기자본주의의 문화적 특징으로 ‘가소성’(plasticity)을 꼽는다. “의미가 기표와 기의의 일대일 대응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기의에서 분리된 채 떠도는 기표들 사이에서 형성된다”는 뜻의 가소성은 한국 현대미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는 대표적인 작가로 최정화를 소개한다. 최정화는 ‘플라스틱 예술가’다. 우선 플라스틱을 이용해 작품을 만든다. 왜 하필 플라스틱인가. 플라스틱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영원히 존재할 수 있으며 무한한 자기복제가 가능하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후기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상품’이기도 하다. 인공이 자연을 대체한 자본주의 스펙터클에 이보다 적합한 재료는 없다. 결국 플라스틱은 ‘물질적 실체’의 한계를 뛰어넘은 “무한한 변형이라는 개념 그 자체”다.
그렇다면 최정화는 이런 플라스틱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그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소재를 이용해 ‘실체의 부재’라는 자본주의의 역설을 표면화한다. 동시에 이를 한국이라는 특수 상황에 적용한다. 대표적인 게 플라스틱 소쿠리를 이용한 설치미술이다.

“예전에는 수공으로 만들어졌던 소쿠리가 기계로 대량생산되어 유통되는 현실을 환기하는 이 작품들은 토착문화가 버무려진 소위 한국식 자본주의, 특히 그 혼성성이 두드러지는 한국식 후기자본주의의 시각적 표상인 셈이다.” _ 577쪽

무엇보다 최정화는 본인 스스로를 플라스틱한 것으로 표상한다. 자기 몸에 플라스틱을 붙이는 따위의 1차원적 수준에서가 아니라 예술가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플라스틱한 것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여행자’라고 부르는데, 이 역시 플라스틱한 ‘최정화 스타일’을 암시한다.

“최정화에게 여행은 예술가로서의 자신에게 또 다른 의미가 부기되는 열린 과정이다. 다시 말해 예술가 주체의 끊임없는 탈중심화 과정이다. ……따라서 최정화는 한국인이면서 동시에 코스모폴리탄이다. 그리고 그의 한국성은 하나가 아닌 한국성, 유동적이고 혼종적인 한국성, 즉 플라스틱 한국성이다.” _ 603쪽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는 현대미술의 외부 요소와 내부 요소를 모두 아우르며 그 정체를 탐색한다. 그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경계’다. 외부와 내부의 경계, 내부와 내부의 경계. 이 ‘제3의 공간’에서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이상화해 형상화한 우리 모습이 아닌 우리도 알지 못하는 또는 우리가 밀쳐낸 타자의 모습이다. 이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이야말로 “주체중심주의 또는 그 연장선상에 있는 국가중심주의가 내포한 폭력의 가능성을 넘어서서 남과 더불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 일이며, 남의 존재를 두려워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 여유와 배려”다. 저자가 시종일관 강조하는 정체 찾기가 윤리적 차원을 내포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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