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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바바라 매클린톡의 시대
2장.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 3장. 유전학계의 샛별로 떠오르다 4장. 여자로 산다는 것 5장. 고립과 불안의 시절 6장. 유전학의 역사 7장. 또 하나의 고향, 콜드 스프링 하버 8장. 자리바꿈 현상의 발견 9장. 그들과 그녀의 서로 다른 ‘언어’ 10장. 분자생물학의 빛과 그림자 11장. 유전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12장. 생명은 교감한다 |
Evelyn Fox Ke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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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계의 예언자, 혹은 영원한 이단자
그녀가 몸담았던 콜드 스프링 하버(Cold Spring Harbor) 연구소는 이제 그녀의 공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바바라 매클린톡 연구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나 이 연구소에서조차 매클린톡은 ‘다른 세상에 사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발견한 유전자의 ‘자리바꿈’ 현상은 이미 정설로 인정되었지만, 그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그녀와 다른 이들 사이의 괴리감은 아직도 넓고 깊기만 하다. 유전자의 자리바꿈 현상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물론 매클린톡이다. 그러나 이 현상은 그녀가 제외된 상태에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확인되고 재발견되었다. 이는 다시 말해 그녀의 작업 결과는 충분히 인정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업 방식이라든지 설명하는 방법과 논리 등은 여전히 학계에서 수용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노벨상 수상이 이슈가 되면서 그녀의 특별한 작업 방식이 세간에 회자되고, 이에 따라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전제 하에 그녀를 인정하는 과학자가 소수 생겨난 것은 사실이지만, 매클린톡은 지금도 논란의 중심에 선 과학계의 이단자로 남아 있는 상태다. 바바라 매클린톡의 일대기가 단순히 미운 오리 새끼나 신데렐라 같은 동화, 즉 세상의 몰지각한 편견 속에 천덕꾸러기로 묻혀 살다가 어느 날 진실이 빛을 발하며 지난 세월을 모두 보상받게 되는, 그런 가슴 벅찬 이야기의 틀을 따르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녀의 이야기는 한 여성의 삶을 단편적으로 조망하는 식으로는 결코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다단한 맥락 속에 얽혀 있다. 따라서 그녀가 걸어온 길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지 그녀의 개인적인 삶을 아는 것뿐 아니라 학문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나아가 개인과 집단의 관계에 대한 성찰도 이루어져야만 한다. --- p.12~13 늘 인간관계가 어려웠던 사람 언젠가 매클린톡이 말했던 것처럼, 그녀는 과학을 하는 것이 자기가 지닌 능력과 덕목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일이라 여겼기에 기꺼이 그것을 선택했다. 그때 이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일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길인 동시에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계약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러하기에 그녀는 나름대로 생존전략을 짜는 한편, 무엇보다 스스로 원칙을 정하고 그것을 지키면서 살아왔다. 그 과정에서 보람을 얻고 자긍심도 느낀 그녀는, 자신이 정한 원칙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남들의 시선과 상관없이 지켜야 하는 원칙, 품고 가야 할 가치가 그녀에게는 확고했고, 심지어 그것은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는 바로미터이자 삶을 지탱시키는 믿음이기도 했다. 이런 성향이 지나치게 강하면 타인과 화합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여기에 추가된 또 하나의 난제는, 그녀의 말투가 너무나도 직설적인 데다 상대방의 정곡을 찌른다는 점이다. 촌철살인이라 할 정도로 투명하고 날카로운 그녀의 말솜씨는 종종 주변 사람들을 당혹감에 빠지게 했고, 심한 경우 괜한 적개심을 일으켰다. 그녀는 일단 입을 떼면 한달음에 모든 걸 꿰뚫어서 설명했고, 상대가 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면 얼굴 가득 드러나는 짜증을 감추지 못했다. 이 때문에 매클린톡은 코넬에 있을 때부터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사람들은 그녀가 주변 사람들의 기분을 쉽게 상하게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곧 그녀에게 거리를 두며 멀어졌다. 10년의 세월이 흘러 미주리에 와서도 그녀의 어법은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더 유창하고 자신 있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곤 했다. 아닌 무엇이 밥 넘기려는 목에서 치밀어 올라오곤 해, 좀처럼 밥을 넘길 수가 없었다. --- p.179~180 보았다’, 그러나 ‘보여줄’ 수는 없었다 사실 매클린톡이 본 것을 똑같이 본다는 건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 응시와 더불어, 거기서 보이는 그림을 함께 읽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과학자의 눈은 곧 예술가의 눈이 되어야 한다. 예술 세계에서 소통은, 어떤 세계를 함께 보고 그 안에서 통용되는 규칙뿐 아니라 가장 내밀한 지식과 감각까지 공유한 이들 사이에서만 일어난다. 다시 말해 공동의 지식에 의한 현실 판단뿐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주관적인 시각 또한 공유해야지만, 비로소 서로 간에 언어가 통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소통의 전제는 곧 어떤 눈으로 어떻게 보는가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돌프 아른하임(Rudolf Arnheim)은 『예술과 시각(Art and Visual Perception)』이라는 불후의 명저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한다. “인간의 감각이 바깥세상의 이미지를 받아들여 그 형상을 새기고 이를 해석하는 데는 언제나 의식의 차원과 무의식의 차원이 함께 작용한다. 무의식의 차원 역시, 의식의 차원에서 특정 대상으로 감지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감각 대상으로 받아들여질 수가 없다. 의식과 무의식은 결코 별개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사물을 ‘보는 일’에 모종의 주관적 요소가 내재함을 의미한다. 무언가를 ‘보는’ 능동적 행동에는 보는 자의 고유한 방식이 반드시 전제되기에, 누구도 그 자신의 관점을 완전히 벗어난 채 어떤 사물을 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에 따르면, 어떤 사물을 본 결과는 그런 결과를 산출해낸 시각의 내면적 요소로 규정되기에, 완전히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판단이란 사실상 있을 수 없게 된다. 보는 행위에 내재한 이와 같은 주관적 시점이 일상에서 문제가 되는 일은 거의 없다. 대개의 사람들은 일상적 차원에서 다른 이들과 대략이나마 소통할 수 있는 시각을 이미 충분히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과 예술의 영역으로 옮겨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 영역에서는 주관성과 객관성의 경계가 한결 모호하고 까다롭다. 더욱이 과학과 예술 모두 일상적 시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미묘한 현상들에 관심을 갖기에, 이런 현상을 감지할 수 있는 ‘내면적 응시’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내면적 응시’를 통해 어떤 원리를 깨친다는 말은 한낱 비유적 표현에 불과한 게 아니다. 이는 과학의 현장에서 실제로 요구되는 구체적인 능력으로, 특히 과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창조적 순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집중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과학적 상상력(The Scientific Imagination)』이라는 저작을 통해 이와 관련한 주제를 다룬 제랄드 홀튼(Gerald Holton)은, 그 구체적인 예로 노벨상을 받은 두 사람의 물리학자인 로버트 밀리컨(Robert Millikan)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을 꼽으며, 두 사람의 고유한 시각이 그들의 창조적인 작업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흥미롭게 묘사하였다. --- p.304~3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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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뛰어난 과학자들의 삶과 관련된 글을 읽으면 그들이 가진 천재성이 통찰에서 비롯되는 것을 확인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뉴턴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사실 이런 식의 설명에 대해 의문이 많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왜 하필 사과인가? 비도 어차피 하늘에서 떨어지고 낙엽도 떨어지고 가끔은 지붕 공사를 하던 사람도 떨어지는 데 왜 하필 사과였을까?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답이 떠올랐다. 천재들은 그와 관련된 생각들을 계속하다가 마주치는 순간이 있고 그 순간에 모든 것이 환하게 보이는 통찰의 순간이 생기는 것이라고. 그것은 전적으로 그 순간과 마주치기 전까지 그가 축적한 생각의 깊이와 마주한 현상이 극적으로 우연과 결합한 것이라고. 그러니 통찰의 순간은 항상 준비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뉴턴은 그 통찰의 순간을 정말 사과나무 아래서 맞이하였을 것이다. 과학은 아주 객관적인 학문이고 과학자는 언제나 냉철하고 객관적인 입장에 서야 한다고 흔히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 바바라 맥클린톡이라는 매우 뛰어난 여성과학자가 왜 그리 뛰어난 업적을 세울 수 있었는지에 대해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흔히 말하는 객관적이고 냉철하며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잘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천재성이 그냥 천재성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항상 그러한 천재성은 발현되어야 할 곳에서 발현된다는 것이다. 그 발현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다시 말해 통찰력 있는 결과는 항상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이전까지의 공부)와 대상을 충분히 이해하는 깊이 있는 지식이 늘 수반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대상을 보다 잘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은 대상에 대한 애정(그것을 이 글에서는 교감이라고 한다)이라는 것이다. 무엇을 보든 허투루 보지 않는 태도를 가진(어쩌면 우리는 이것을 천재성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그 대상의 본질에 속하는 숨은 비밀을 꿰뚫어 보기도 한다는 것이다. 맥클린톡은 바로 그런 과학자다. 어렸을 때부터 자율적인 성격이 강했던 소녀였다. 물론 이러한 성격은 그녀의 자율적 성격을 믿고 지지해주는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 학교로부터 이해받지 못할 때 과감히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해 주었던 부모님의 영향은 셋째 딸에 대한 강한 믿음과 강력한 지지를 보여준다. 그것이 20세기 초반의 미국 사회에 퍼져 있던 여성에 대한 경시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가고 연구의 길로 갈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코넬 대학에 입학하고 대학원에서 꾸준히 연구해 온 그녀에게는 좋은 동료들이 많았다. 롤린스 에머슨 교수 아래에서 에드워드 로우즈, 조지 비들 같은 훌륭한 연구자들과 함께 하며 해리엇 클레이턴 같은 후배 여성학자와 함께 많은 유전학의 연구 성과를 이루어낸다. 분자 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의 가장 탁월한 연구자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도 이 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녀 자신의 능력에 비해 턱없는 대우를 받는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납득하기 어렵지만 당대의 사회에서는 이런 경향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의식이 강했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동그라미 염색체를 발견하는 과정에 대한 이 책의 설명에서 그녀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그녀는 돌연변이 옥수수의 줄무늬가 생기는 원인이 염색체의 끝이 서로 붙어버리는 동그라미 염색체에 있음을 밝혀내는데 이 과정에서 그녀는 염색체 일부가 끊어져 누락된 다음 막대기처럼 생긴 염색체 조각의 양쪽 끝이 맞닿아 서로 연결되면 결과적으로 동그란 모양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모양의 염색체는 더 이상 정상적으로 복제될 수 없다. 즉 동그라미 꼴을 짓고 있는 염색체의 활동은 누락된 채 나머지 염색체들만 계속 복제에 참여한다는 설명이다. 이에 대한 캘리포니아 연구소의 답이 재미있다. “ … 참으로 황당한 억측이지만, 그래도 여태까지 들어본 해석들 중에는 가장 그럴 듯했습니다.” 그런데 이 억측이라고 생각했던 동그라미 염색체 이론이 정확한 설명임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 발견은 옥수수 유전학의 복잡한 비밀을 푸는 대단히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그런데 절친한 유전학자 마르쿠스 로우즈가 다 똑같이 현미경을 들여다보는데 어떻게 남들이 못 보는 걸 죄다 찾아내느냐는 질문에 그녀가 한 이 답이 그녀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준다. “난 세포를 관찰할 때면 현미경을 타고 내려가서 세포 속을 들어가거든. 그 안에서 ‘비잉~’ 돌며 구석구석 둘러보는 거지.” 어쩌면 맥클린톡의 연구는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의 개념을 이용하면 잘 설명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유기체와의 교감을 통해 그 대상에 몰입하는 그 순간 그녀는 남들이 못하는 유기체와의 교감을 이루고 이를 통해 유기체의 비밀스러운 현상들을 그려내고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녀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 자리바꿈 현상에 대한 설명 역시 이런 과정을 통해 얻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평전을 읽는다는 것은 그 인물의 좋은 면만 부각하는 것이 아닌 한 인물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 의미를 둘 수 있다. 이 책은 맥클린톡이라는 인물의 좋은 면만 드러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시종 자신이 여성이라서 차별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이 평전의 작가는 좀 다른 시각을 보인다. 미주리 대학에서 자리잡지 못하고 거의 쫓겨나다시피 떠나게 될 때 평전의 작가는 단순히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맥클린톡의 성격적 결함을 말한다. 물론 단순히 그녀의 성격적 결함 이전에 당시 미주리 대학 사람들의 몰이해가 우선하지만 말이다. 평전의 저자는 맥클린톡의 주변에는 그녀의 연구 업적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그녀를 도와주려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는 점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왜 그런 연구 결과를 낼 수 있었는지를 냉정하고 합리적인 관점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평전의 작가 이블린 폭스 켈러는 더 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작가이다. 어려운 분자 생물학의 개념들을 쉽게 설명해 이해하기 쉽게 해 주고 있고, 그래서 맥클린톡이라는 인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더불어 좋은 번역은 어려운 개념으로 가득한 이 책이 우리에게 보다 쉽게 읽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좋은 번역가의 유려한 문장 속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한 여성 과학자의 삶과 그 의미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읽는 동안 시종 분자 생물학의 바다가 아니라 자기 일에 몰입하는 훌륭한 과학자, 아니 한 인간의 삶에 오롯이 빠져 들 수 있게 하는 훌륭한 책이라는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