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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글 제1장 고려인삼 뿌리 찾기 1. 대한민국 대표 경제작물: 고려인삼(高麗人蔘) 2. 인삼의 탄생과 진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제2장 인삼을 식용한 최초의 인류집단: 한(韓)민족 1. 인류 이동과 북방기마민족: 한(韓)민족의 기원 2. 고려인삼(高麗人蔘, Korean Ginseng) 어원 찾기 제3장 영약(靈藥)의 비밀: 식용에서 약용으로 1. 동아시아의 우주관과 문명사 2. 인삼과 고전의약서: 서지학적 고찰 제4장 조선이라는 나라와 인삼 1. 조선이라는 나라 제5장 위대한 발명: 인삼 인공재배법과 홍삼제조법 1. 인공재배법 발명 2. 홍삼제조법 발명 제6장 삼업과 무역 1. 조선 전기 삼업: 조선 왕조의 정부 관제와 상업 조직 2. 조선 후기 삼업: 아쉬웠던 마지막 기회 제7장 조선 삼업의 산업화 1. 산업화 여명기: 근대화 길목(1800~1863) 2. 조선 삼업의 근대화 학습: 고종 즉위~내장원 시기(1863~1904) 3. 근대적 기업형 삼업 출현: 불편한 진실(1905~1945) 4. 북미인삼과 일본산 고려인삼의 수출 실상: 19~20세기 중반 5. 거듭된 시련: 미군 군정 시절(1945.9.8.~1948.8.15) 6. 대한민국 전매청 출범: 정부 주도 인삼산업 7. 인삼과학(Ginseng Science)의 길을 열다: 일제 강점기 맺음말 |
張日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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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삼산업계에는 고려인삼 명칭 대신에 중국인삼(Chinese ginseng) 또는 아시아인삼(Asian ginseng) 이라는 용어가 널리 퍼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우리의 경쟁상대들이 의도적으로 폄하한다고 탓하기 전에 우리 인삼산업(人蔘産業, Ginseng Industry)의 역사를 가감 없이 살피고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이는 고려인삼의 뛰어난 가치가 바로 고려인삼의 정체성이고 선조 삼업인(蔘業人)의 땀과 눈물로 이룩한 인삼산업의 역사가 인삼 종주국(宗主國, Sovereign country)의 정당성을 담보로 하기 때문이다. 이제 필자는 선조 삼업인이 면면히 이어온 역사의 뒤안길을 따라서 ‘인삼지식여행’을 시작한다. --- p.2
장시간 글 읽기 여행에 참여한 독자들께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런던 중심가에 위치한 유서 깊은 카페 ‘게러웨이 커피하우스(Garraway’s Coffee House) ’를 소개하려 한다. 이 커피하우스는 1651년에 창업한 런던의 명소로 당시 런던의 상인, 왕립학회 회원 등 지식층과 예술인들이 휴식과 담론을 한 곳이다. [그림 1-37]의 커피하우스는 1666년에 인근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재건축 후 개업하였으며, 1657년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가 구입한 인삼으로 차를 만들어 판매한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메뉴판에 ‘China Drink’라고 쓰여 있었다. 동인도회사가 구입한 인삼은 조선의 고려인삼이었다. --- pp.56-57 고려인삼의 자생지는 대략 고조선-부여-고구려의 강토 내에 품질이 좋은 야생삼이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동북아 만주 지역 한민족 강토의 지리적, 생태적 여건은 고려인삼의 자생지의 ‘지역편중성’이 원천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한반도의 백제, 신라 그리고 고려 및 조선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 pp.82 『급취편』에 기록된 삼(參)은 동북아 만주 지역의 원주민이 인삼을 부르던 Gin-seng에서 seng (또는 shen) 발음이 우리 말의 삼 발음과 유사하다. 즉 이를 음차하여 삼으로 기록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 pp.117-118 조선 땅에는 천혜의 천연물자원(天然物資源, Natural Products Resources)인 고려인삼(Korean ginseng)이 전국적으로 자생하였다. 유독 조선 인삼이 최고의 품질과 효능을 발휘하였기에 중국, 일본 및 동남아 국가에서 칙사나 사신을 보내는 목적 중 하나가 조선 인삼을 구하려는 의도였다. 조선 왕실이 명·청에 열심히 보내는 조공사행의 제1물목 역시 인삼이었다. 조공사행에 필요한 인삼과 여행경비도 충분히 마련하지 못하는 상황이 도래하여 결국 삼상(蔘商)이 재정 지원을 하게 된다. 여기서 관료 집단과 상인이 결탁하는 정경유착이 일어나서 밀무역이 성행한다. 일본에 파견하는 통신사와 개국 초부터 설치한 삼포(三浦) 왜관무역에서도 예외 없이 밀무역이 성행하였으며 여기에도 인삼이 제1무역 품목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부 독점 사업은 권력층의 부정과 비리로 오염되기 쉽다. 조선 왕실이 인삼을 채삼(採蔘)부터 가공(加工) , 판매까지 독점 관리하였기에 여러 가지 비리와 폐단이 발생한다. 특히 조공사행에서 수많은 폐해가 발생하여 인삼을 공납하는 백성부터 조선 조정까지 고생 한다. 아쉬운 점은 조선 중후기에 인삼을 자유무역 대상으로 하였다면, 삼업(蔘業)이 활성화되어 오히려 국가 재정에 많은 도움을 주고 국부(國富)를 쌓을 기회가 있었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조선 왕조의 사대부가 갖고 있던 상업에 대한 경직되고 고착된 틀 속에서 기대난망(期待難望)이었다. --- p.135 청과의 군신관계 약속을 하고 나서 더욱 황당한 일이 벌어지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를 도와준다고 임경업과 약 1만의 군사를 은밀히 명나라에 보낸다. 이때는 이미 북경은 청나라가 장악하였고 명군은 중국 남쪽으로 패퇴해 가는 형편이었다. 중국 땅에서 싸움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오도가도 못하는 임경업은 청의 포로가 되었고 청에 잡혀간 그의 부인은 자결을 한다. 물론 조선의 수많은 군졸도 희생된다. 그리고 청은 임경업을 치죄하지 않고 조선에 보낸다.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 군사 파견에 대한 면피를 하기 위해 임경업에게 죄를 씌워서 곤장으로 때려 죽였다. 해괴한 짓일 수밖에 없는 명나라 파병은 임금인 인조, 화친파 최명길, 김자점 등이 지시 하였다고 한다. 숙종 시기에 임경업이 복권되어 충민공(忠愍公) 시호를 받기는 한다. 이후 청나라는 “조선의 조정은 국가 간의 약속도 안 지키며 거짓말을 잘한다”라고 더욱 모멸적 취급을 하게 된다. 즉 언행일치를 하지 않는 국가라는 뜻이다. 병자호란 이후 약 100년 동안 이러한 언행 불일치가 이어지면서 표면으로는 청에 복속하고 뒷전에서는 명나라 속국이었음을 자랑하는 행동을 보이는데 한 가지 예를 소개한다. --- p.231 조선에서 인삼산업(人蔘産業, Ginseng Industry)이 세계 최초로 등장할 수 있었던 계기는 첫째, 인공재배법 발명으로 인삼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둘째, 홍삼 제조기술의 발명으로 인삼을 장기간 저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 가지 발명이 완성되어 사용한 시기가 대략 17세기 중반~18세기 초로 이미 조선과 만주 지역의 야생 인삼은 멸종 위기를 맞은 시기이다. --- p.248 조선은 명나라 측에서 요구하는 물품의 종류와 수량이 증가하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금과 은, 인삼, 매(鷹)와 개를 보내거나 대구포, 새우젓, 조개젓이나 젊은 처녀와 청소년을 보내라는 것이다[이 부분은 뒷부분의 공녀(貢女), 화자(火者) 편에 자세히 기술]. 그리고 칙사가 오는 경우에도 엄청난 비용이 발생하였다. 왕과 고위 관료가 영접하였고, 잔치와 예물은 칙사가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준비해야 했다. 특히 칙사의 대부분이 조선 출신 환관이었기에 이들에게 조선 내 친인척에 관직을 주고 경제적 보상을 해야 했다. 이러한 비용 부담이 점점 증가하면서 재정 압박을 받게 된다. --- pp.323-324 그간의 정동의 처사를 보고 당연히 언론삼사인 대간, 사간 등이 벌떼처럼 비난 상소를 하는데 정동이 황제의 칙명을 빙자하여 제 스스로 꾸민 일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대해 성종도 정동의 속마음이 음험하고 간사하다는 언급을 여러 차례 거론했지만 삼사의 상소에 대한 답은 간단하였다. “과도한 예물 요구를 비롯한 그간의 정동이 행한 일들이 명 황실의 고명이 아니고 개인의 짓이라고 한다면 정말 그런지 아닌지 누가 명나라 황실에 가서 확인할 것인가?”라고 한다. 물론 어느 누구도 북경에 가서 확인하겠다는 삼사 관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임금 성종은 “세상에 정도(正道)도 있지만 또한 권도(權道)도 있다.”라고 마무리를 한다. 성종 생전 내내 조선과 명나라 관계에서 정동이 존재했던 이유는 서로 공생(共生) 관계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조선의 활 제작에 꼭 필요한 물소 뿔(弓角)을 명나라에서만 구할수 있는데 명 황실은 수출을 금하였다. 조공사행에 따라 붙은 상인이 궁각을 몰래 사서 가져오려다가 붙잡혀서 매우 어려운 상황도 벌어졌다. 이를 해결해 준 이가 바로 정동이다. 그리고 성종이 연산군 어머니인 윤씨를 폐비하였을 적에 윤씨가 독질(毒疾)에 걸려 불가피하게 폐비를 하였다고 둘러대어 무사히 넘어갔고 연산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도 일조하였다. --- p.352-353 삼업의 원료가 되는 인삼 중 야생삼은 이미 영조(1724~1776) 시기에 멸종하였다. 다행히도 조선 삼업인의 지혜로 인공적으로 인삼재배할 수 있는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여 원료 공급은 가능하였다. 그리고 생산된 원료 인삼, 즉 수삼(水蔘)을 2차 가공한 제품이 백삼(白蔘, 乾蔘)과 홍삼(紅蔘)인데 백삼은 이미 오래전부터 조선과 중국, 일본 등에서도 기술적으로 가공할 수 있었지만 홍삼 제조 기술은 조선 삼업인이 오랜 시간을 두고 기술 개발을 하여 홍삼 제품화에 성공한 결과(중종~선조~정조)로 소량이지만 조공사행에 제공한 시기가 정조(1776~1800) 때이다. 인삼 인공재배와 홍삼제조 기술력을 확보한 조선의 삼업인이 이를 산업화하기 위하여 원료 생산에 걸리는 최소 5~6년의 재배 기간에 투자할 충분한 자본과 이를 제품화하는 데 필요한 자본이 구비되어야 한다. 즉 기업화가 가능할 정도의 자본 확보가 선결되는 것이 필수 조건인데 이미 이러한 조건이 19세기 초반에 성숙된다. --- p.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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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삼(Chinese ginseng), 아시아인삼(Asian ginseng)이 아닌 고려인삼(Korean ginseng)
한국을 대표하는 특산물이자 경제작물인 ‘인삼’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지만 이에 관한 서적이나 언론 보도는 단편적이거나 야사적(野史的) 내용, 혹은 지극히 학술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반 독자가 한국인삼, 즉 고려인삼(Korean ginseng)에 대하여 너무 신비적이거나 과장된 내용에 자칫 오도(誤導)될 수 있고 너무 학술적인 내용은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 책은 일반 독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인삼 전문가들도 참고할 수 있는 내용으로, 세계사에서 고려인삼의 위상과 인삼산업의 발전 흐름을 이해하고 후속 연구에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이 책에는 조공물품으로 해마다 정해진 수량의 인삼을 바쳐야 했던 백성의 고달픈 삶, 그리고 조선 관리들이 인삼을 뇌물로 챙기는 역사적 사실들이 가감 없이 투영되어 있다. 그중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의 홍타이에게 항복한 후에도 조선 조정이 펼치는 이중적 외교정책은 한심한 행태 중 백미다. 인삼 등의 조공물품 외에 사람(공녀 및 화자) 조공도 마다하지 않았고, 대의명분으로 명과 청 양국에 조공해야 했던 조선 왕실은 피폐해진 국고는 아랑곳하지 않아 그 책임이 온전히 백성들에게 전가되었다. 명·청의 무리한 조공 요구에 국가의 대표적인 자원인 야생삼(산삼)은 멸종되어 갔다. 이러한 삶 속에서도 백성이 주도적으로 인삼재배법과 홍삼 제조기술을 발명하여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자원인 인삼을 산업화하였다. 이 발명은 일본과 미국으로 전파되었고 이는 조선의 산업기술 수출에 속한다. 인삼재배법은 묘삼을 활용한 이앙법을 적용하여 개발되었고 홍삼은 파삼, 판삼 단계를 거쳐 발전되어 정조(1776~1800) 시기에 청 황실 조공사행에 처음으로 제공되었다. 두 가지 핵심기술은 19세기 초반 형성된 자본 시장과 만나 인삼산업이 더욱 성숙된다. 개성 삼업인(인삼을 캐는 농민과 유통시키는 상인을 통틀어 일컬음)이 의주 만상과 동래 내상과 연계하여 삼업 및 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시기도 바로 이때다. 그 후 개성 삼업인은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를 통하여 인삼 경작과 제품 개발에 근대 과학기술을 도입하는데, 불편한 진실이지만 일본 기술자로부터 기술을 습득하여 기술발전을 도모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군정, 대한민국 건국 및 6.25 동란을 겪으면서도 개성 삼업인은 인삼 산업화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인삼에 얽힌 방대한 조선의 자료를 바탕으로 서술한 인삼산업사 이 책을 쓴 저자(장일무, 서울대 약학대학 명예교수)는 만주와 한반도에 주로 자생하며 우리 민족의 영약으로 칭송받아온 고려인삼이 조선시대 특권층에게만 향유되어 백성의 건강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마다 공물납부로 백성의 삶을 고단하게 한 장본인이었음을 폭로한다. 야생삼이 씨가 말라 정해진 수량을 바치지 못한 백성은 혹독한 처벌을 받았으며, 공납하지 못한 채 죽으면 그 이웃이 공납을 책임짐에 따라 도망친 백성들이 부지기수였고 이로 인해 마을이 텅 비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야생삼이 거의 멸종되어 좋은 삼을 구할 수 없자 그보다 작은 삼을 가공한 판삼을 만들어 바치는데, 의외로 명 황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는다. 하지만 정작 조선 조정에서는 판삼을 가짜 삼이라 하여 못마땅히 여기고 삼업인을 “교활한 모리배”, “인간말종”으로 취급한다. 저자는 이러한 사실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짚어내며 꼬집고 있다. 이런 대접 속에서도 주도적으로 인삼재배법과 홍삼 제조기술을 발명하여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자원인 인삼을 산업화한 주역인 삼업인을 임진왜란 중 백의종군하여 왜군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에 비견하는 것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