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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프로이트, 충동의 무의식
“무의식은 쾌락을 향한 욕망이다” 1. 무의식 2. 문명과 신경증 3. 무의식과 히스테리 4. 무의식과 꿈 5. 무의식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6. 무의식과 성적 구별 7. 무의식과 성충동 8. 무의식과 충동의 조직화 9. 무의식과 1차 정신구조의 모델 10. 무의식과 충동의 대리물 12. 무의식과 2차 정신구조의 모델 13. 무의식과 승화 14. 무의식과 죽음 15. 프로이트 분석 사례( 살인/ 자살 /정신분열증/자폐/우울증) 제 2부 라캉, 상징의 무의식 “무의식은 소외와 결여로 생명을 욕망한다” 1.무의식 2. 문명과 문자 3. 무의식과 지식 4. 무의식과 욕망 5. 무의식과 자아의 모순 6 . 무의식과 주체 7. 무의식과 상상계 8. 무의식과 상징계 9. 무의식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10. 무의식과 담론의 주체 11. 무의식과 욕망의 주체 12. 무의식과 실재계 13. 무의식의 저항 14. 무의식의 승화 15. 무의식과 죽음 16. 라캉 분석 사례(A.D.H.D / 불면증 /중독증 / 강박증 /나르시시즘 성격장애) 제 3부 윤정, 현상의 무의식 “무의식은 죽음을 향한 생명의 욕망이다” 1. 무의식 2. 무의식과 원자 3. 무의식과 분자 4. 무의식과 최초의 생명분자 5. 무의식과 원핵세포 6. 무의식과 광합성 7. 무의식과 진핵세포 8. 무의식과 세포의 생명질서(정보의 생명질서/ 대사의 생멸질서 / 유전자 영역의 역동성) 9. 무의식과 질병 10. 무의식과 감정 11. 무의식과 언어 12. 무의식과 미생물 13. 무의식과 상실의 주체 14. 무의식과 죽음 15. 무의식과 최면의학(Hypnosis Medical) 16 윤정 분석 사례( 염증/ 치매 / 자가면역질환 / 비만과 당뇨 / 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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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1부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장이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들고 나온 것은 이성 중심의 근대적 패러다임을 깨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문명 속에서 억압받아 발생하는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증상들의 원인을 무의식에서 찾아내면서 정신분석학의 새로운 임상치료 방법을 제시했다. 그 세계를 무의식의 관점에서 서술한다.
2부는 자끄 라깡의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장이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인 자끄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대타자의 담론(談論)이다. 라캉은 인간을 대타자인 언어의 의미를 가지고 표현하는 욕망의 주체로 보고 있으며, 언어로 상징화된 무의식의 반복적인 출현을 욕망으로 바라본다. 라깡의 욕망이라는 말은 어떤 대상에 대한 집착이나 탐욕이 아니라, 언어로 표현되는 존재의 결여에서 비롯되는 소외의 표현이다. 오늘 날, 현대인은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물질의 시대를 살면서 소비생활을 즐긴다. 아무리 명품으로 치장하고 희귀품을 소유해도 타자의 인정과 욕망의 대체물에 불과하기에 소외와 상실감을 채울 수 없다고 선언한다.. 라깡의 욕망은 사실적으로 상징화된 기호인 언어의 의미를 통해 본성을 드러낸다고 역설한다. 라캉의 무의식은 상징화된 언어의 의미 속에서 문명의 욕망을 모방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소외는 더욱 더 깊어지고 생명의 진실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삶을 비판한다. . 3부 윤정의 현상의 무의식에서는 단백질 세포의 생명질서 속에 머문 고통의 증상 속에서 무의식을 성찰한다는 점에서 라캉과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차별화된다. 윤정은 무의식의 실재를 몸으로 본다. 몸은 삶과 죽음의 생명이 머문 곳이며 동시에 거대한 쾌락의 감정이 머문 카오스다. 몸의 무의식에는 자아와 초자아의 대립적 관계를 안정된 최적의 수평적 삶으로 수용하면서 실재적 증상을 완화시키는 보이지 않는 생명의 질서에 머물러 있다. 그 질서는 새로운 생명을 욕망하는 창조적이고 순환적인 과정으로서 존재한다. 한마디로 현상의 무의식은 단백질 세포를 새로운 변이에 적응시키는 생명의 질서이자 욕망의 새로운 의미로 분석한다. 프로이트의 충동의 무의식과 라깡의 상징의 무의식 그리고 윤정의 현상의 무의식은 자아와 초자아를 배후에서 보이지 않는 역동적인 지배자이며, 생명의 질서를 창조하는 주체로 설정하고 있다. 그 동안 의식 중심 속에서 자아는 질서 있는 이성중심의 진리를 욕망하여 왔지만, 혼란스러운 인위적 자아의 문명 속에서 자아는 상실 당하며 살아왔다고 분석한다. 무의식의 현상은 새로운 생명 질서를 가지고 몸의 증상과 자아의 고통 속에서 새로운 자아를 지닌 생명의 주체를 성찰하길 원하고 있다. 이 책은 인간의 종이 진실한 자신의 삶을 펼칠 수 있는 내면세계를 향해 새로운 발걸음을 딛길 바라는 바램에서 저자가 25년 동안 연구해온 임상의 결과들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의미들은 저자의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사라지지 않고 있는 변함없는 생명 질서의 현상이다. 많은 부분은 학자들이 고민해온 삶의 고백들이다. 그것들을 가지고 새롭게 의미를 끌어낸 기표에 불과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무의식! 자아의 상실 앞에 생명의 질서로 응답하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언급한다.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2천 5백년동안 계속 해서 자신을 향해 질문하면서 지혜를 찾으려고 했지만 아직까지도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그 답은 의식이 아닌 무의식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현대 철학자 하이데거는 현대인은 과학 문명과 실증주의 구조 속의 자본주의가 만든 욕망 속에 빠져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지식이나 진리의 개념적 도식에 머문 상상의 존재자가 아니라, 순간순간 수많은 생명의 존재들과 살아가는 현상 속의 현존재로 자신을 성찰하라고 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종은 우연히 시간과 공간 속에 ‘내던져진 존재(자아)’이면서 타자하고의 관계 속에서 살아야하는 ‘더불어 존재(자아)’라고 했다. 더불어 존재는 문명 속에서 ‘그들의 존재(자아)’라는 제 3자의 세계를 만들어 왔다. ‘그들의 존재’는 구조주의 속에서 만들어진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통계를 가지고 이윤을 추구하는 삶을 추종한다. 그리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 도덕, 숭고한 이데올로기는 실재적 존재를 억압하고 구속한다. 결국 ‘그들의 존재’가 만들어 놓은 인위적 존재가 생명의 질서를 지닌 자아에게 상처와 상실감을 주고 있다고 개탄했다. 현대인은 ‘그들의 존재’ 가치를 욕망하면서 점점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며 산다. 인간관계의 근본인 가족관계가 파괴되고, 불신이 팽배하여 범죄가 늘어가고, 현대인의 50% 이상은 정신질환이나 크고 작은 스트레스와 만성질환으로 고통 받고 있다. 불신감과 상실감 등의 부정적 정서는 자학적 충동성을 인식할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에 누적되어 왔다.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중반의 유럽 기술, 산업사회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대규모 세계 전쟁과 경제 공황을 겪으면서 어느 때보다도 혼란스러웠다. 절대적인 상징인 신의 존재를 회의하게 되었고, 지배적인 가치들과 의미들을 의심하게 되면서 미래가 불투명하여 허무주의, 히피주의, 염세주의가 성행하게 되었다. 그즈음에 민족국가들이 탄생하고 상호 경쟁체제로 들어서면서 인적 자원 양성이 시급해졌다. 이에 교육이 확장되면서 200년 동안 대학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많은 전공분야가 파생되면서 지식인들의 수도 그에 비례해 늘어났다. 학문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보다는 효용성과 실용성에 치중되어 전인적인 생명의 교육보다는 전문가를 양성하는데 우선하였다. 사회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이성중심의 학문이 자아를 소외시키고, 억압된 것들이 무의식에 누적되면서 오히려 혼란과 정신질환을 야기했다는 반성이 일면서 이성과 의식에 대한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성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새롭게 사유하는 철학자들은 이에 대한 대안을 고민하면서 의식보다 무의식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쓰여 진 이 책에서는 무의식을 새로운 생명의 지배자로 보고 있다. 문명사회 속에서 자아가 주체를 갖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의식의 현상과 잘 소통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세 명의 정신분석학자들의 무의식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은 존재의 의미를 고민하면서 자신을 아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프로이트의 충동의 무의식과 라캉의 상징의 무의식 그리고 윤정의 현상의 무의식은 모두 무의식을 자아와 초자아를 배후에서 조정 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역동적인 지배자이며, 생명의 질서를 창조하는 주체로 설정하고 있다. 그 동안 의식 중심 속에서 자아는 질서 있는 이성중심의 진리를 욕망하여 왔지만, 혼란스러운 인위적 자아의 문명 속에서 자아는 상실 당하며 살아왔다. 무의식의 현상은 새로운 생명 질서를 가지고 몸의 증상과 자아의 고통 속에서 새로운 자아를 지닌 생명의 주체를 성찰하길 원한다. 이 책은 인간의 종이 진실한 자신의 삶을 펼칠 수 있는 내면세계를 향해 새로운 발걸음을 딛길 바라는 바램에서 저자가 25년 동안 연구해온 임상의 결과들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의미들은 저자의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사라지지 않고 있는 변함없는 생명 질서의 현상이다. 많은 부분은 학자들이 고민해온 삶의 고백들이다. 그것들을 가지고 새롭게 의미를 끌어낸 기표에 불과하다. 이제는 무의식의 생명 질서를 향해 주체를 고민하는 숭고한 생명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됐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새롭게 희망하며 꽃처럼 피어나는 삶이되길 무르익은 봄날 간절히 원해본다 무의식의 현상은 죽은 자도 산 자도 없는 영원한 생명의 떨림이다. 삶의 모든 현상은 모르는 것에 대한 부분적인 고백에 불과하다. 안다고 하는 순간 모르는 모든 것을 모르게 된다. 없다고 하는 순간 있는 모든 것을 모르게 된다. 간다고 하면 오는 모든 것을 모르게 된다. 온다고 하면 가는 모든 것을 모르게 된다. 우리는 기껏 80평생 살아온 정보만 안다. 우리가 삶 속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정해진 공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연의 연속에서 선택한 것들이 만든 현상의 모습이다. 불확실하고, 비결정적이고, 비연속적인 모든 경우수의 확률적인 통계만 가지고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존재는 ‘대상관계’가 아닌 ‘관계’에서 존재한다. 우리는 대상에 대한 이미지의 존재가 아니라 순간의 존재이다. 마치 컴퓨터의 메모리에 담긴 정보가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정보들은 관계들의 연결망에 따라 순간적으로 의미를 드러냈다가 다시 의미가 없는 곳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대상관계에 의한 자의적이고, 관습적이고, 편의적인 것이다. 우리의 존재는 상황의 관계 속에서 정보를 조직화하는 방식에 불과하다. 인간은 매 순간 달라지는 것을 몸으로 귀속시키며 한결같은 자신을 유지시키다가 죽음으로써 한순간에 자신을 내려놓는다. 하지만 모든 생명의 질서는 끊이지 않고 흐른다. 마치 아름다운 장미가 피었다 지고,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을 되풀이 하는 것과 같다. 장미꽃의 시작과 끝은 어디고, 바다의 시작과 끝이 어디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장미꽃과 바다가 실재하는 것처럼 우리도 실재한다. 모든 존재는 흐른다. 그러는 가운데 잠깐 동안이라도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이기심은 인간의 생명을 탄생일로부터 죽는 순간까지로 제한시켜놓았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원대한 생명의 흐름 속에서 순환하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잃어버렸다고 두려워한다. 모든 존재는 서로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얽혀 있는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다. 그러한 가운데 생존에 가장 효과적인 속성들이 나타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살아 있는 체계가 지향성과 목적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생존에 필요한 효과적인 흐름을 선택한 것들의 결과물로 DNA가 만들어졌고, 기록된 정보를 적절하게 관리하고, 수집하고, 저장하고, 전달하고, 처리하는 것이 생명의 질서이다. 기록된 정보를 갖게 되면서 인간의 자아 영역이 크게 확장되어나갔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해석은 신체의 물리적 구조가 아니라, 그가 속한 가족, 사회, 세계의 연결망에 의해 변해갔다. 결국 인간은 상호적 정보의 풍부한 연결망 속에 복합적인 단백질 매듭으로 이어진 구조물인 것이다. 현상의 무의식은 생명 질서에 대한 결정적인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신뢰할 만한 답을 끊임없이 욕망할 뿐이다.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서 무지가 가득한 삶을 받아들이며 존재한다. “내가 곧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라는 자기위안의 해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 속에 생명의 주체가 없다고 한다. 현상의 무의식은 모르는 것을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더 진실하고 아름다운 삶이라고 고백한다. 그 고백의 삶은 가장 정직한 자신만의 길이라고 선언한다. 현상의 무의식은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시간과 공간의 거품을 묶고서, 서로의 상관관계를 엮어내는 상호적인 관계로부터 생명의 질서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과 '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과 마주하며 살아간다. 그러한 삶 속에서 수많은 이해의 한계를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 존재는 확실한 대답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인간의 세포는 대략 80년 동안 대략 400번 바뀐다. 세포는 죽음으로써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 생명 질서를 유지시킨다. 죽음이 없다면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없다. 상실의 주체는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자신을 죽이고 버려지는 상황 속에서 더 진실하게 자신을 바라본다. 그럼으로써 죽음 후의 생명의 도약을 약속한다. 그 질서 속에는 죽은 자도 산 자도 없는 영원한 생명의 떨림만 있을 뿐이다. 그것의 이름이 현상의 무의식이며, 볼 수 없는 영원한 실재이다. 현상의 무의식은 과거, 미래, 현재의 시각을 거부한다. 다만 하나의 현재가 다른 현재를 뒤따르는 집합에 불과하다고 한다. 사라지지 않는 존재는 영원히 알 수 없어서 영원히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지 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