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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연암, 그를 추억한다
풍찬노숙의 삶 궁핍한 시절 친구들 은둔 생활을 청산하다 그의 아들이 아비를 추억하다 연암, 술에 얽힌 일화 제2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 이서구가 쓴 글과 자신의 자화상 증백영숙입기린협서(贈白永叔入麒麟峽序) 백동수 세상을 완전히 등지다 불이당기(不移堂記) 선비는 궁한 뒤에야 제 모습이 드러난다 북학의서(北學議序) 오랑캐도 본받아야 답창애(答蒼厓) 글자는 같으나 문장은 독자적이다 종북소선 자서(鍾北小選 自序) 올바른 문장이란? 순패서(旬稗序) 도인을 스승으로 삼아라 만휴당기(晩休當記) 늘그막의 쉬는 즐거움 하야연기(夏夜?記) 한여름 밤의 풍류 초정집서(楚亭集序) 법고창신(法古倉新) 의청소통소(擬請疎通疏) 서자 차별을 금지하여야 합니다 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 분별하기 어려울 만큼 진짜에 가깝다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 검은 것은 능히 비출 수 있다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 글을 논리로 무장하라 홍범우익서(洪範羽翼序) 먼저 부유하게 한 뒤에 선을 행하게 하라 자소집서(自笑集序) 시골로 가서 예법을 찾아라! 여인(輿人) 벗에게 답이중존서(答李仲存書) 열하일기가 만들어진 경위 하김우상이소서(賀金右相履素書 동전의 유통 구조를 개혁하시오 필세설(筆洗說) 오래된 그릇에 관한 글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 누이를 추억하며 홍덕보묘지명(洪德保墓誌銘) 홍대용의 묘지문 답임정오륜원도서(答任亭五倫原道書) 진정한 깨달음이란?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글은 결국 자기 생각이다 원사(原士) 선비란 누구인가 제3부 하룻밤에 강을 9번 건너다 산장잡기(山莊雜記)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 야출고북구기후지(夜出古北口記後識) /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 만국진공기(萬國進貢記) / 만국진공기후지(萬國進貢記後識) / 상기(象記) / 승귀선인행우기(乘龜仙人行雨記) / 만년춘등기(萬年春燈記) / 매화포기(梅花砲記) 일신수필(日新隨筆) 중국의 큰 볼거리 / 수레제도 / 중국의 방앗간 / 베틀 짜기 상여 / 벽돌과 기와 / 가마제도 / 목축에 관해서 열하일기 심세편(熱河日記 審勢編) 제4부 풍자, 혹은 파라독스 마장전(馬?傳) 진정한 우정에 대하여 광문자전(廣文者傳) 염제기(念齋記) 연암의 자기 고백서 엄행수 선생전(嚴行首 先生傳) 똥 푸는 사람과의 우정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
朴趾源, 호 : 연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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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燕巖) 박지원은 18세기 조선 후기를 불꽃처럼 살다간 인물이다. 그는 영조 연간에는 철저하게 은둔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다 정조가 집권하고 규장각을 설치하면서 박지원의 친구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 자신도 세상과 벽을 허물고 소통하기 시작했다. 연암은 그 혈기 왕성하던 청년 시절, 그리고 중년의 세월을 모두 보낸 뒤에야 자신 속에 넘치는 화기를 잠재운, 나이 지긋한 시기에 사회와 소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미 청년 시절 《양반전》 등을 소설로 쓰면서 당시 시대를 풍자하고 비틀었다. 그의 짧은 소설은 재야의 학자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 것이다. 그런 그가 문득 정치적 이합집산이 심했던 당파적 갈등에서 살아남고자 연암골로 들어선 것이다.
스승 이양천이 죽은 1755년, 나이 19살부터 한때 과거공부를 하여 실력을 인정받지만 관직에 나서길 포기하고 재야에 묻혀 지내던 20여 년이 지난 후, 문득 청나라 방문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대륙의 땅을 밟은 것이다. 그는 이 놀라운 경험을 통해 북학파의 거두로 올라선다. 이미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선배인 홍대용은 서구 과학사상에 깊이 매료된 후였으며, 그의 후학들, 박제가·이덕무·유득공 등은 정조의 부름을 받아 규장각에서 고문을 해석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일 준비에 열중인 상태였다. 박지원은 나이 50살이 다 되어 선공감 감역이란 관직(종9품)을 임명받았다. 그것은 화려하지도 않은 허접스런 관직 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는 가난한 자신의 살림살이 때문에 고생하는 부인을 위해 관직을 받아들이지만 부인은 고생만 하다 그 다음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굶기를 밥 먹듯 했던 아내의 몰골이 너무 불쌍해 혼자 눈물짓던 휴머니스트 박지원은 부인의 묘지에서 그동안 가난함을 웃음으로 달래던 그 넉넉함을 잃고 만다. 가난이 얼마나 심했으면 연암은 일주일을 굶고 있다 찾아온 후배 이서구를 반갑게 맞이하여 밤새도록 자신의 생각을 그와 교유하였다. 배고픈 것은 둘째이며 지적 유희와 사회 개혁에 대한 열망이 더 조급했던 그였을 것이다. 연암은 안의현감을 맡아 4년 동안 훌륭한 정사를 펴고, 다시 면천군수로 발령 받았다. 그리고 다시 양양부사로 빠른 승진을 하지만 이미 일흔이 다가온 나이였다. 너무 늦은 출사이기도 하고, 이때는 이미 그의 가장 큰 지지자였던 임금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에게는 믿었던 하늘이 꺼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연암은 격변하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 종로 한복판에 자신의 생각과 뜻을 같이하는 북학파 교우들과 한 시대를 개혁하려고 온몸으로 맞서려 했던 지식인이었다. 세상을 등진 듯하지만 세상을 가르친 연암, 조선의 심장부 한양의 한복판에서 살아가면서 때로는 장자처럼, 때로는 걸인처럼, 때로는 시대의 스승처럼 한 시대를 풍미하면서 종로 바닥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에게 존경받으며, 또한 실학사상의 한 축이었던 북학파의 거두로 사회 개혁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자임한 인물이다. 그의 문장은 철저하게 솔직하고 사실적이다. 그는 삶의 고민했던 흔적들을 글로 담담하게 표현하여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빨려 들어가게 한다. 그의 글을 읽은 사람들은 그 솔직하고 넉넉한 글에 저절로 매료된다. 이 책에서는 그의 산문 가운데 백미(白眉)들을 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