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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서문
서문 1장 칼을 갈다: 역사적 환경과 초창기 혁명적 테러리즘의 성장 제1차 세계대전과 국민회의 펀자브의 투쟁 전통 반란의 울림 잘리안왈라 대학살(암리차르 학살사건) 아칼리들와 바바르들 10월혁명과 그 영향 인도에서의 붉은 깃발 새로운 이상을 향하여 비협력운동, 국민회의, 타협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한계 2장 아나키즘과 아나키즘을 넘어서: 귀 먹은 이를 듣게 하라 인도공화주의자협회와 카코리 인도청년협회(NBS) 인도사회주의공화국협회(HSRA) 귀 먹은 이를 듣게 하려면 미루트 공모사건 뚜렷해진 혁명 사회주의공화국협회 선언과 ‘폭탄의 철학’ 아나키즘과 개인 테러 혁명적 무장투쟁과 폭력 3장 마르크스주의를 향하여: 단두대의 그림자 아래서 법정과 감옥에서의 동지들 보충자료 자틴 다스의 단식 이념적 투쟁 코뮤날리즘과 종교에 반대하다 보충자료 1 코뮤날리즘을 한솥밥으로 먹어 없애다 보충자료 2 시크교도의 바가트 싱 이용 카스트의 족쇄를 부수고 마지막 유서 혁명의 선봉 다른 저술들 순교를 향하여 학생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삶의 기쁨을 위하여 무한한 용기 동지애, 겸양 그리고 자기비판 동지들이 가졌던 인상 간디, 국민회의, 혁명가들 보충자료 1 사형 집행을 앞당길 것을 요구한 간디 보충자료 2 ‘진실’로 간디를 이긴 영국 총독 혁명 만세 4장 비판적 평가: 사상의 깊이와 실천의 한계 부르주아들의 잘못된 해석 비판적 찬양에 대한 위험 단점들 비역사적 과장 행동 지침 결론 보충자료 바가트 싱에 관한 상업영화 부록 붉은 팸플릿-귀 먹은 자를 듣게 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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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트 싱은 1907년 9월 27일 펀자브 리알푸르의 방가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원래 할아버지가 체나브 운하지역으로 이주하기 전 펀자브 잘란다르 구의 카트카르 칼란에 살고 있었다. 바로 영국의 농민정책이 끼친 악영향에 직접적으로 맞서 싸우는 집안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그의 삼촌인 아지트 싱은 랄라 라지파트 라이와 반케 다얄과 함께 식민지법에 반대하는 투쟁을 이끌었다. 바가트 싱의 아버지인 키센 싱 또한 이 투쟁에 참가했다. 이 때문에 아지트 싱과 랄라 라지파트 라이는 만달라이로 추방되었고 키센 싱은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운동은 성공적이어서 법안은 1907년에 폐기되었고, 아지트 싱과 랄라 라지파트 라이, 키센 싱은 곧 자유의 몸이 되었다. --- 「펀자브의 투쟁 전통」 중에서
인도 해방운동의 역사는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여 일어난 대중들의 투쟁을 국민회의가 영국과 타협하려는 관점에서 중단시킨 사례들로 가득 차 있다. 간디와 그의 사도들에 의해 제기된 비폭력운동의 정책은 이 과정에서 아주 긴요하게 쓰였다. 간디에게 비폭력주의란 그가 주장한 것처럼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관념이 아니었다. 이는 부르주아들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만 해방 투쟁을 유지시키는 유용한 계급적 무기였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간디 개인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민족주의 부르주아가 제국주의 부르주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했기 때문에 제국주의와 타협하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제국주의자들만큼이나 대중운동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한계」 바가트 싱은 경각심을 가지고 사회주의공화국협회가 이에 저항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의 발의에 의해 조직의 중앙위원회가 소집되었고, 바가트 싱과 두트가 저성능의 폭탄을 중앙의회에 던져 정부의 행동에 항의하는 것으로 최종적인 결정이 내려졌다. 또한 폭탄을 던진 후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잡혀가서 재판정을 조직의 관점에서 선동의 장으로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이 결정에 따라 바가트 싱과 두트는 중앙의회에서 쟁의조정법이 통과되자마자 폭탄을 던지고 입법에 반대하는 리플릿을 뿌렸다. 그리고 저항 없이 체포되었다. ---「귀 먹은 이를 듣게 하려면」 중에서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위에서 언급한 범위를 벗어난 개인 테러리즘은 언제나 비생산적인가?’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모순적인 것은 바가트 싱이 개인 테러리즘을 정당화하는 행동으로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상징적인 존재로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다수 민중들은 바가트 싱의 순교를 사운더스에게 총격을 가하고, 중앙의회에 폭탄을 던진 행동의 결과로 회상하고 그를 흠모한다. 이런 행위들이 인도를 식민지배로부터 자유롭게 한 것은 아니지만 광범위한 대중, 특히 젊은이들을 해방 투쟁에 참가하도록 고무시켰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바가트 싱과 동지들의 특수성은 식민지 지배라는 가혹한 현실, 국민회의의 타협적인 전술에 대한 환멸, 그리고 해방 투쟁을 위해 영웅적이고 고무적인 색채로 민중들을 각성시킬 새로운 수단을 찾으려는 요구에 의해서 수행된 것이다. ---「혁명적 무장투쟁과 폭력」 중에서 그는 종교가 계급 착취를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폭로했다. “이 이론들은 특권층에 의한 발명품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이론의 도움을 받아 권력과 부, 우월성을 강탈하고 이를 정당화한다. 초기 혁명가들의 종교성은 ‘스스로의 정치 활동에 대한 과학적 이해’의 부족에 기인한다. 그들은 이를 유지하기 위해 ‘비합리적 믿음과 신비주의’를 차용했다. “진보적인 혁명 이념을 가진 이들에게는 더 이상 스스로를 고무시키는 영감이 필요치 않으며 …… 인공적인 영적 조작장치 없이도 압제와 투쟁할 수 있다. ---「코뮤날리즘과 종교에 반대하다」 중에서 위에서 언급한 것 이외에도 바가트 싱은 네 권의 팸플릿을 작성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마지막 복역기간 동안 적은 것으로 ‘사회주의 이념’, ‘자서전’, ‘인도 혁명운동의 역사’, ‘죽음 앞에서’이다. 이것이 에세이인지 책인지, 그리고 책이라면 어느 정도 분량인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이 저술들은 분명 감옥 밖으로 빠져나갔지만 결국 소실되었다. 이는 큰 비극이다. 이 저술들이 있었다면 의심할 바 없이 인도 혁명 문헌의 시금석이 되었을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젊은 혁명가가 간직했던 옥중 노트뿐이다. 이 노트는 앞서 언급했다시피 감옥에서 그가 읽은 방대한 분량의 독서에 관한 필기들이다. 이것을 유심히 살펴보면 소실된 원고에도 그가 얼마나 많은 주제들로 글을 썼을지 추측해볼 수 있다. ---「다른 저술들」 중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내게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숨기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것은 상황에 따른 것이다. 나는 죄수로서 또는 구속 아래서 살고 싶지는 않다. 혁명 정당의 이상과 희생은 내가 살아서 올라갈 수 없는 곳까지 나를 올려주었다. 내가 교수대를 피한다면…… 혁명의 상징도 바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웃으면서 용감하게 교수대 위에 올라간다면 인도의 어머니들을 고무시킬 것이고 당신의 아이들이 바가트 싱이 될 것을 열망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생을 조국의 자유를 위해 희생한다면…… 혁명의 흐름으로 제국주의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무한한 용기」 중에서 내 앞에 서 있는 그를 보았다. 더러운 샬와카미(통으로 된 무릎까지 내려오는 인도의 민족의상. 네루가 항상 입고 있었던 것으로 지금도 인도에서는 정장이다-옮긴이)를 입고 어깨에 담요를 두르고 있었는데, 키가 크고 흰 얼굴에 터번을 두른 시크 청년이었다. 통찰력 있어 보이는 작은 눈과 잘 생긴 얼굴에 성긴 수염이 있었다. …… 그는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나와 포옹하고 내 손을 잡고 그의 방인 것처럼 나를 내 방으로 데려 갔다. …… 그의 단순한 행동과 정직한 웃음은 첫 만남에서 완전히 나의 경계심을 풀게 했다. ---「동지들이 가졌던 인상」 중에서 부르주아 역사가들과 정치가들은 바가트 싱과 동지들의 역할을 마지못해 인정해 왔다. 그들이 경시하거나 완전히 감췄던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당파성과 바가트 싱이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것이다. 그 결과 혁명가들은 낭만적인 청년들이거나, 폭력에 사로잡혀 있거나, 순수하고 단순한 애국자로서 어머니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묘사되었다. 이것이 주류인 국민회의나 상업영화, 유행가, 만화, 달력 등에 의해 단순화된 바가트 싱의 초상화이다. ---「부르주아들의 잘못된 해석」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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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테러리스트에서 대중 활동가로
바가트 싱은 23세의 짧은 생애 동안 인도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불꽃의 삶을 살다 간 혁명가이다. 독립운동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부터 독립 투쟁에 합류한 그는 초기에는 테러리스트로서 이후에는 대중 활동가로서 역사적인 족적을 남긴다. 싱과 그의 동료들은 민족적 보복 행위로 영국의 고위층에 대한 테러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민족 혁명가’나 ‘혁명적 테러리스트’에 머물지 않고 사상적으로 발전해 시각을 넓히고 사회주의와 계급 착취 없는 자유 인도 건설을 꿈꾸었다. 바가트 싱 역시 테러리즘의 한계를 깨닫고 대중 선동으로 노선을 전향한다. 1929년 4월 8일 그는 인도를 옥죄어 오는 영국의 잇따른 식민지 악법 제정에 항의하기 위해 의회에 가짜 폭탄을 터뜨리고 유인물 ‘귀먹은 자를 듣게 하라’를 뿌리면서 저항 없이 고의로 체포되었다. 1929년 6월 6일 그는 폭발사건 관련 법정을 대중 선동의 장으로 이용함으로써 인도 민중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그의 폭발적인 인기는 영국뿐 아니라 국민회의 지도자들까지 당황하게 만들었다.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그가 제국주의뿐 아니라 인도의 전통적인 계급과 착취에까지 항거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주의로 인한 기존 체제의 전복을 무엇보다 염려했는데, 여기서 간디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간디는 영국 총독에게 그의 사면을 요청하지 않았고 오히려 서둘러 처형할 것을 권고했다. 결국 그는 동료들과 함께 1931년 3월 23일 저녁 7시 33분 라호르 중앙감옥에서 처형되었다. 불멸의 아성 간디의 노선에 반기를 들다 1920년대와 1930년대는 간디의 국민회의 노선에 회의를 느낀 새로운 혁명 세대들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영국에 아첨하고 타협하기 급급한 국민회의 지도자들의 투쟁 방식은 갈수록 대중의 신망을 잃어갔다. 게다가 그들은 지주세력과 결탁해 진정한 의미의 해방, 즉 계급 없는 평등한 사회가 오는 것을 절대적으로 막고자 했다. 간디와 그의 사도들에 의해 제기된 비폭력운동은 인도 부르주아들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만 해방 투쟁을 유지시키는 데 아주 긴요하게 쓰였다. 그들은 제국주의자들만큼이나 대중운동에 대해 극심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바가트 싱과 동지들은 간디의 비폭력주의에서 벗어나 초기 해방 투쟁의 과정에서 무장투쟁을 신뢰했다. 무장투쟁은 독립을 위해 대중을 각성시키는 주요 무기로서 혁명 조류의 상징이었다. 바가트 싱은 그들 중 가장 돋보이는 존재였고, 그의 이름은 ‘인퀼랍 진다바드(혁명 만세)’라는 전투 구호와 동의어가 되었다. 또한 단순한 테러리스트였던 구세대 혁명가들과 달리 혁명 신세대인 그들은 민족해방 투쟁의 구체적인 내용과 독립된 인도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들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비타협적인 투사이면서도 여타의 억압에 질문을 던지고 투쟁과 성공 이후에 대한 구체적인 전망을 모색했다. 바가트 싱과 그 동지들이 목숨 바쳐 원했던 독립국가 인도는 종교 분쟁도 카스트도 계급도 없는 평등한 사회였다. 인도인들이 영원히 추억할 아름다운 이름, 바가트 싱 이 책(원서)의 초판은 2007년 바가트 싱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출간된 것이다. 아직까지도 인도인들이 그를 그리워하는 것은 인도 사회가 여전히 불평등하며 최근 극대화된 자본주의로 인해 빈부의 격차가 더욱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존의 불평등이 해소되지 못한 가운데 세계화·자유화·사유화를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시행으로 인도의 노동자들은 또 한 번 시련에 부딪히고 있다. “영국에게 협력하기 위해서 바가트 싱이 서둘러 처형되기를 원했던 간디는 역사적 심판을 받아야 한다!”라고 외치던 커다란 목소리들은 그때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이 책은 이 목소리들이 어디서부터 나왔는지 밝힘으로써 ‘간디와 IT산업’ 뒤에 가려져왔던 인도 절대다수의 빈곤과 불평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