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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쓰게 된 인연 005
제1장 부처[佛·부처님·Buddha] 진리란 무엇인가 017 불교라는 방편(方便) 017 불교(佛敎)라는 말의 의미 022 종교(宗敎)라는 말의 의미 027 붓다(Buddha)가 계시는 곳 034 불전(佛典)에 나타나 있는 고따마 붓다 034 고따마 붓다의 성불(成佛) 039 고따마 붓다의 관조(觀照) 수행[觀修行 vipa?yn?] 043 부처[佛·부처님·uddha] 047 부처[佛·부처님·uddha]를 찾는 선수행(禪修行) 047 법안(法眼) 선사의 ‘그대는 혜초니라’ 051 (1) 법안종을 창시한 법안 선사 051 (2) 법안 선사의 병정동자래구화(丙丁童子來求火) 054 (3) 본칙에 대한 설두 선사의 송(頌) 059 동산(洞山) 화상의 ‘삼 껍질 세 근[麻三斤]’ 064 (1) 운문 선사의 법제자 동산수초 화상 064 (2) 본칙에 관한 원오 선사의 비평과 해설[評唱] 065 (3) 본칙에 대한 설두 선사의 송(頌) 068 운문(雲門) 선사의 ‘똥 젖는 막대기[乾屎?]’ 074 (1) 운문종을 창시한 운문 선사 074 (2) 똥 젖는 막대기[乾屎?] 075 (3)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 079 (4) 본칙에 대한 무문(無門) 선사의 송(頌) 082 (5)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의 자정기의(自淨其意) 084 (6) 인간무죄(人間無罪)의 선언 090 마조(馬祖) 선사의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다[卽心卽佛]’ 092 (1) 조사선을 확립한 마조 선사 092 (2) 대매법상(大梅法常) 선사의 깨달음 096 (3) 『마조록』 「시중(示衆)」의 첫 법문[Ⅰ] 100 (4) 무문 선사의 평과 송 102 마조(馬祖) 선사의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 109 (1) 즉심즉불(卽心卽佛)과 비심비불(非心非佛) 109 (2) 『마조록』 「시중(示衆)」의 첫 법문[Ⅱ] 112 (3) 고따마 붓다의 중도 대 선언(中道大宣言) 114 (4) 공사상(空思想)과 중도 118 (5) 일념도 얻을 것이 없다[無所得] 122 (6)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126 (7)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일 뿐이다 129 제2장 마음[心]이란 무엇인가 지성(智性)의 세계와 본성(本性)의 세계 135 두 개의 마음 135 본성 세계의 실재성(實在性) 139 무분별·무차별의 본성세계에서 불교적 삶이 시작된다 145 본성을 깨달아서 얻은 세계 151 무념무상(無念無想)과 반야(般若)의 삶 154 불교의 근본 뜻은 대상계를 초월하는 것 162 평등과 차별 162 만법(萬法)과 짝하지 않는 것 165 무차별·무분별의 본성적 직각(直覺) 169 절대 그 자체가 홀연히 나타나다 173 불가사의(不可思議) 해탈 176 업보(業報)로부터의 해방 180 업사상(業思想)이란 무엇인가180 인간과 업은 하나의 물건이다 186 업에 묶임은 업을 초월하는 본성적 충동이다 188 기도는 업(業)을 여의는 노력이다 190 존재의 근원 그 자체는 묶여 있지 않다 193 본성 속에 있는 세 갈래 성질 197 불락인과(不落因果)와 불매인과(不昧因果) 197 본성의 세 갈래 성질은 합해져 있다 200 자각(自覺)은 인과법칙에 순응하는 것 203 일체의 사물이 존재하는 근본적인 의미 207 지성을 초월한다는 뜻 207 불매인과와 반야즉비의 논리 210 추위와 더위가 올 때는 어떻게 피해야 하나 213 인간은 우주보다 크다 215 제3장 진리의 실현[大悲] 지혜[智]와 자비[悲]가 한 개의 환(丸)으로 되어 있다 221 대지(大智)와 대비(大悲) 221 대지(大智)가 곧 대비(大悲)이다 223 본성적 직각은 동태적(動態的)이다 226 법계(法界)의 동력은 대비심 226 초월적·종교적 생활의 소식 229 인간은 도덕만으로 살 수 없다 231 대사일번(大死一番) 231 본성적 직각의 세계, 사람을 위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장소 234 아미타의 원력과 정토의 장엄(莊嚴) 237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당면의 문제 240 대비심이 적면(?面)에서 체득(體得)되지 않는 한 법계의 풍광은 없다 2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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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佛)이란 산스끄리뜨어 붓다(Buddha)를 줄여서 한자로 음역(音譯)한 말입니다. 현재의 순수한 우리말로는 ‘부처’ 혹은 ‘부처님’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산스끄리뜨어 Buddha를 순수한 우리말로 뜻으로 번역하면, 즉 의역(意譯)하면 무엇이 될까요? 불교 전래 초기부터 중국의 역경사들은 Buddha라는 단어를 깨달음[覺] 또는 깨닫는 것, 깨달은 사람[覺者]이라는 세 가지의 의미로 번역하였는데, 이 번역은 초기불교의 연구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오늘날까지 적합한 번역어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Buddha라는 말에는 깨달음·깨닫는 것·깨달은 사람이라는 세 가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 p.23 불교는 무분별의 분별을 생각으로 그것의 옳고 그름을 가려내어서 납득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일상의 경험에서 무분별이 분별 속에 스며들어 와 있는 것을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의식 속에서 가지가지로 분별을 합니다만, 이 분별은 실은 어느 것이건 절대 무분별 혹은 절대 무의식으로부터 나오고 있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본성을 보고 바로 깨닫는 것[直覺]입니다. 무분별의 경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체득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 p.159 업(業)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흔히 인간은 고(苦)라고 합니다만, 이것은 업에 매여져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아니 매여졌다고 하기보다도 실은 업 자체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업이라고 하면 나쁜 업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업은 본래 행위라는 뜻이기 때문에 선(善)·악(惡)·선도 악도 아닌 업[無記]이 다 같이 업입니다. 업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라고 하는 말이 타당합니다. 다른 유정(有情)·비정(非情)에게는 업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선악의 가치에 대한 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소위 자연의 법칙에서 본능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인간들이 말하는 윤리적 행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만이 자각을 가진 동물로서, 파스칼이 말한 ‘사유하는 갈대’입니다. 사유하는 것, 자각적으로 사유하는 것으로부터 사물을 보는 것, 적절히 조치를 취하는 것, 잇달아 생각해 나가는 것 등의 활동이 인간에게 발달해 왔습니다. 여기에서 인간이 자연법인 것에만 묶여지지 않고, 자기로부터 움직여서 나온다고 하는 것이 됩니다. 자기로부터 움직여서 나온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행위에 도덕적 평가를 가한다고 하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업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 바로 업 그 자체로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 p.180~181 불교에는 수많은 보살마하살이 계십니다. 그런데 예불문 속에는 ‘대지문수보살·대행보현보살·대비관세음보살·대원지장보살’이라고 네 분의 보살마하살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위에서 ‘부처님만이 지혜와 복덕을 완벽하게 갖추었다’라고 말했는데, 사실 부처님이 갖추신 덕성(德性)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합니다. 그래서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는 그 많은 덕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지혜와 큰행(行)과 대비(大悲)와 큰 원력(願力)이기 때문에 이 네 가지 덕성을 인격화(人格化)시켜서 네 분의 보살로 상징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학자들이 부처님의 네 가지 덕성 중에 어떤 것이 새의 양 날개와 같이,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인가를 연구해서 얻은 결론이 바로 지혜와 자비(慈悲)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라고 하는 큰 건축물에는 이것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큰 기둥이 있는데, 하나를 반야(般若) 또는 대지(大智)라고 말하고, 다른 하나를 대비(大悲)라고 말합니다. --- p.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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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오르는 길이 여럿이듯 진리로 향하는 길은 여럿일 수 있겠지만, ‘참된 이치, 우주의 근원적 원리’라고 풀이하고 있는 국어사전의 낱말 뜻을 생각하면 진리는 동일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종교, 철학, 사상, 심지어 과학조차도 제각각 진리에 대해 다른 견해를 내세우고 있다. 그 견해가 너무나도 다양해서 정작 진리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이가 드물다. 오늘날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물질적인 풍요와 반비례해서 정신적으로 더욱 피폐하고 각박해진 데는 진리에 대한 혼동과 그로 인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무상(無常)한 물질이나 명예, 권력 탐닉을 당연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은 진리에 대한 바른 가치관 정립이 절실한 상황에서 선어록과 대소승 경전을 통해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고, 삶의 참된 이치에서 나아가 바르게 살아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선의 관점에서 불교 진리를 밝히다! 이 책 집필의 원동력은 광덕 스님의 말씀 “인간 삶의 의미를 찾는 종교가 불교이고, 불교가 발견한 삶의 의미를 체득하기 위해서 부처를 찾는 행위를 선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소납도 한 30여 년 전에 해오의 상사각을 진정한 깨달음으로 착각하여 기고만장하던 때가 있었습니다만… 말할 수 없는 도리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입을 다물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허물인 줄 알면서도 사족을 붙여보게 된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 이 책의 저자인 혜담 스님은 광덕 스님(불광사 불광법회 법주)의 제자로서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하여 오래도록 ‘공사상(空思想)’ ‘반야사상’을 연구해 왔다. 귀국 후에는 수십 년 동안 선수행을 하는 한편 도심포교 도량으로 유명한 불광사에서 대중들에게 법을 설하고 지도해 온 이사(理事)를 겸비한 분이다. 혜담 스님은 이 책 진리란 무엇인가를 집필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이 광덕 스님임을 토로한다. “부처님은 법신(法身)이다. 번뇌가 다한, 번뇌가 끊어진 것이 아니라 번뇌가 본래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즉 실제로 부처님께서 깨달은 법문은 상(常)·락(樂)·아(我)·정(淨)이다. 사람의 본성이 법신이고 부처님의 진리로서 자기 생명을 갖춘 자리고 불성이고 법성이다. 그런 몸인 까닭에 이 진리의 세계에서 보면 진리는 무상한 것도 아니요, 고통스러운 것도 아니요, 아(我)가 없는 것도 아니요, 더러운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이다. 사람의 본성은 떳떳한 것이며 변치 않는 것이다. 나의 진실생명의 세계는 떳떳한 것이며 변치 않는 것이고 즐거운 것이지 고통이 아니다. 나는 무아(無我)가 아니라 진실한 불성으로서의 자신이 있는 것으로 그것은 지극히 청정한 것이다.”라고 하신 광덕 스님의 말씀이 반야바라밀과 조사스님들이 남긴 화두를 혜담 스님 나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었고, 그 덕분에 이 책을 집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광덕 스님의 영향을 받고 반야공사상과 선수행에 천착한 혜담 스님은 모든 사람이 뿌리로 들어가면 진리 본성뿐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신 분이 바로 부처님이라고 역설한다. ‘붓다와 마음, 진리의 실현’이라는 부제에서 엿볼 수 있듯 불교 교리로 진리를 설명하지 않고 선의 관점에서 불교 진리를 설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1장과 2장에서는 진리 자체인 붓다와 마음에 대해 선적인 관점에서 참된 불교의 진리를 보여주고, 3장에서는 진리의 세계인 법계(法界)의 동력(動力)이 지혜에서 나온 대자비임을 강조하면서 진리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뇌의 궁극적인 목표는 지혜 자비의 실천에 있음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불교 교리적인 해설 없이 오직 붓다와 마음, 진리의 실현에 대해 당송 시대 조사, 선지식들과 선승들이 남긴 선어록과 화두, 공안을 불교의 진리와 일치시켜서 설명, 독자들로 하여금 선수행의 세계로 이끌어 주고 있다. 진리 자체인 ‘부처’를 찾는 선수행 이 책의 1장은 붓다의 장이다. 첫머리에 ‘불교라는 방편’이라는 소제목이 눈길을 끈다. 이웃종교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불교는 진리를 뗏목에 비유하면서 진리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불교라는 방편’이라는 말이 불자들에게는 낯설지는 않다. 그래도 불교 교리, 신앙형태, 수행방법이 너무나 다양하여 불교의 참다운 가르침, 불교의 진리가 무엇인지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방편이라는 말도 가지각색으로 받아들인다. 혜담 스님이 방편에 대해 먼저 설명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방편이란 반야바라밀을 구족해서 제법이 공(空)인 것을 알고 대비심(大悲心)에 연유해서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이 법공(法空)과 중생애(衆生愛) 두 가지 법에 있어서 방편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염착을 내지 않는다. (하략)” - 본문 20쪽 혜담 스님은 『대지도론』에 의거해서 방편을 대지방편(모든 법이 공한 것을 아는 지혜 방편)과 대비방편(대비심으로 중생을 사랑하고 버리지 않는 방편)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면서도 대지(大智)에 의해 모든 중생이 같은 생명임이 체득되었을 때 대비심은 자연히 일어나게 된다면서 두 가지가 나뉠 수 없는 것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한편 대지방편의 입장에서 부처와 불교의 개념을 정리함으로써 진리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운문 선사가 부처라고 대답한 ‘똥 젓는 막대기[간시궐]’에는 인간은 본래 죄가 없다는 인간 무죄의 선언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참 성품밖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본문 92쪽 부처를 찾는 행위인 선수행의 이론과 실천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 벽암록, 무문관 등 여러 선어록에서 법안종을 창시한 법안 선사, 조동종을 창시한 동산 화상, 운문종을 창시한 운문 선사, 조사선을 확립한 마조 선사 등의 일화를 가려 뽑고 그 안에 깃든 불교의 진리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혜담 스님이 이 책에서 초지일관 강조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뿌리로 들어가면 진리본성뿐이라는 것이다. 신을 믿는 종교와 불교의 가장 다른 점은 인간관, 진리관인데 불교에서는 부처님과 인간이 똑같은 불성, 참 성품을 가진 존재임을 역설한다. “모든 것은 인연이 화합해서 생기는 까닭에 사물에는 제 성품[自性]이 없는 것이다. 만약 제 성품이 없다면 이것을 법이 없음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까닭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일체 모든 것은 본성이 없다고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것은 본성이 공한 때문이니……” -『대품반야경』 「도수품」 한편 위와 같은 경전 내용을 언급, 일체 존재와 현상이 공하다는 것을 책상의 예를 통해 “책상은 많은 부분이 모여서 된 복합적인 것으로 결코 실체가 있는 단일한 것이라 말할 수 없다.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이다.”라고 설명하면서 이러한 깨달음은 공의 체득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깨달음과 반야바라밀 그리고 공(空)사상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간화선 수행은 반야바라밀을 증득하는 과정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불교는 마음의 종교라고 한다. 화엄경에서는 일체유심조, 모든 것을 마음이 만들었다고 하고, 심즉시불(心卽是佛),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한다. 혜담 스님은 이 책의 2장에서 붓다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반야를 마음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하면서 이 모든 것이 선불교의 입각처라는 것을 천명하고 있다. 조사스님들이 남긴 선어록의 화두를 스님 나름의 안목으로 읽어내고, 선수행을 하면서 일체유심조의 마음이 불성(佛性)이고, 반야바라밀이 바로 공(空)인 사실을 확인했다는 혜담 스님은 “일체유심조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수행하다보면 어느 날에 분명히 그대 앞에 이 말이 거짓이 아님이 나타날 것입니다. 바로 그때 그대에게 고통의 바다인 이 세상[苦海]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불자로서의 안목이 생기게 됩니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진리의 실현이야말로 불교 수행의 궁극적 목적 “대비(大悲)는 대지(大智)로부터 나오고 대지는 대비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원래 하나의 물건입니다만, 분별지의 입장에서 말할 때 두 개의 물건으로 있는 것처럼 나누는 것입니다.” -본문 224쪽 불교를 떠받치는 큰 기둥은 반야와 대비이다. 특히 혜담 스님은 진리의 세계인 법계(法界)는 대비(大悲)를 동력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강조한다. 스님은 진리의 실현, 즉 대자대비를 실천할 때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지금 이 자리가 극락정토라는 것을 거듭 밝히고 있다. “어떤 종교에서는 창조주인 신(神)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말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불교의 입장도 그런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자연스런 대비심이 왜 일어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부모가 자식이 자신과 같은 몸[同一生命]임을 본성적으로 체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223쪽 한편 스님은 기독교의 사랑과 불교의 자비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종교나 저 종교나 다 같다고 하는 이들이 많아서인지 이 책에서 이웃종교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위와 같이 비교해서 설명하는 대목이 간혹 보인다. 우리가 스스로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을 가진 존재임을 깨닫기 위해서, 더 나아가 대자대비를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행을 해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알고 우리와 똑같은 또 다른 부처들을 위해 대자대비행을 실천하는 삶이 진리의 실현임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진리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은 이들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는 한편 진리, 삶,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이 지혜 자비의 실천에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불교 인구가 300만이 감소되었다고 한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답은 진리의 실현, 지혜 자비의 실천, 우리 모두 부처임을 자각하고 부처의 마음으로, 부처의 행동을 실천하는 데에 있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