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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묻어버린 그 전쟁’을 다시 이야기한다
1. 평양 가는 길 2. 떠난 자와 남은 자 3. 길에서 만난 사람들 4. 버릴 수 없는 유산 5. 시간의 양식(糧食) 6. 나그네 7. 광야에서 8. 고향에 돌아와서 해설 미증유의 역사와 실존의 무게 _이재복 |
玄吉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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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례!”
그는 입속으로 아내의 이름을 불러본다. 그동안 수없이 불렀던 이름이다. 그 소녀티를 갓 벗은 아내의 나이를 헤아리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22에 47을 더하면, 예순아홉! 예순아홉? 70대 노파의 얼굴이 그 사진 위에 포개졌다. “훈식아!” 아들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이제는 50을 바라보는 장년이다. 아내는 이웃집 할머니요 아들은 친척 아저씨로 다가왔다. 승규는 평양을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20대의 청년으로 남아 있다. 고향을 떠나온 후부터 시간을 정지시켜놓고 살아온 것이다. 이제 그 나그네 생활을 청산하려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나 자신의 안전만을 위해 아내와 자식과 형제와 교회를 버리고 떠났던 그 부끄러움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 여행은 단지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버리고 떠나온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 비겁을 참회하기 위해서 평양으로 돌아간다. 한강을 건너지 않고 교회를 지키려 남았던 도경빈을 만나러 간다. --- p.20~21 흘러내리던 눈물이 갑자기 멈추더니 알 수 없는 분노가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정한 사람, 만삭이 된 아내를 남에게 맡겨두고 교회로 돌아간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었소? 그 물음은 곧 자신에게 돌아왔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재규와 재희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할까? 남편의 실체를 정부에서 알았으니 어쩌면 더 이상 내가 교직에 머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직장을 떠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25년 전에 떠난 남편 일이 오늘을 살고 있는 가족을 옥죄고 있다는 것이 화났다. --- p.217~218 승규는 그 사태를 당하고서 큰 혼란에 빠졌다. 몇 시간 전에 그가 기도하고 격려해준 그 사병들이 분노의 노예가 되어 무고한 마을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죽였다. 그가 병사들 막사를 찾아다니면서 내일의 작전을 위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격려하고 위로해주었는데, 그것이 결국 적에 대한 적개심을 갖게 만들었던가? 생각할수록 부끄러웠다. “주님, 제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들에게 주님의 뜻을 바르게 전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할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 저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승규는 연기에 휩싸여 있는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바위 위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기도했다. --- p.302 복도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방문이 열렸다. “현 목사?” 등이 굽은 노인이 들어섰다. 승규는 말문이 막혔다. 한참 동안 노인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를 데려왔던 안내자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갔다. 노인은 잠시 출입문 쪽을 향해 귀를 기울이더니 방 안을 두리두리 살폈다. “현 목사, 나 도경빈이오.” 목소리는 여전했다. 승규는 믿을 수 없었다. 노인의 눈은 움푹 들어갔고, 치아가 허물어졌는지 입도 쪼그라들었다. 두 사람은 마치 대결이라도 하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주 보기만 했다. 승규는 목이 메고 눈물이 흐르는데, 상대를 노려보는 듯한 노인의 눈에서는 이상한 광채가 튀었다. 한참 그렇게 바라보던 노인이 고개를 숙이더니 짐승의 비명처럼 헝클어진 음절이 쪼그라진 입에서 튀어나왔다. “김일성 장군님, 가암사합니다. 우우리를 이렇게 만나게 해주시니.” 경빈은 승규의 손목을 부여잡으면서 울부짖듯이 되풀이해서 말했다. 승규는 그를 껴안았다. 앙상한 뼈들이 그의 가슴을 눌렀다. --- p.448~449 이 전쟁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보다 비전투 상황에서 죽은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전쟁은 우리 속에 잠재해 있는 증오와 폭력과 이기와 비겁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너무 비극적이고 반인간적이다. 그런데도, 정치적인 목적으로 과거를 샅샅이 들춰내는 오늘의 상황에서, 이 전쟁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심하다는 것도 이 전쟁의 특징이다. 우리는 이 전쟁의 후유증을 앓고 있으면서, 그것을 모르고 또는 외면하고 살아간다. 이는 역사와 자신에 대한 물음을 포기하는 것이기에 이 작품이 그것들을 엿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p.5 소설의 외피는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묻어버린 그 전쟁』은 종교소설이 아니다. 소설의 외피를 들추고 들여다보면 이 소설은 6·25전쟁으로 야기된 인간 본성과 양심의 왜곡과 파괴, 우정과 사랑 같은 인간관계 및 가족 공동체는 물론 종교와 사상의 자유에 대한 억압과 통제, 그리고 이념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과 객관적인 이해의 불가능성 등을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대에서 해결되지 않은 이 다양한 문제들이 자신의 아들·딸은 물론 손자·손녀 대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작가의 관점과 문제의식은 그것이 묻히거나 묻어버릴 수 없는 하나의 존재 증명으로서의 현존하는 역사임을 강하게 웅변하고 있다. --- p.4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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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자와 남은 자, 그들이 짊어진 운명
해방 직후 평양에서 공산주의 세력에 저항하던 기독교인들은 현승규, 도경빈 목사와 평양중학 교사 원철규의 주도 아래 대규모 구국기도회와 시가행진을 벌이기로 계획한다. 하지만 거사 전날 탄로가 나는 바람에 가담자들의 신변이 위태로워지고 만다. 원철규는 평양에 남지만, 현승규 목사는 단신으로, 원래 이남이 고향인 도경빈은 아내와 함께 월남하여 서울에 정착한다. 승규는 이북에서 월남한 교인들을 주축으로 서울제2교회를 개척하고, 경빈은 한성교회 담임목사로 목회를 하던 중 6·25 남침 전쟁이 일어난다. 피난길에 오른 경빈 가족과 승규는 한강을 건너기 위해 나룻배에 오른다. 그러나 평양에서 교회를 버리고 혼자만 빠져나왔다는 것을 자책하던 경빈은 교인들을 두고 떠날 수 없다며 배에서 다시 내리면서, 승규에게 아내와 아들을 부탁한다. 경빈의 수원 처갓집에 그의 가족을 데려다준 승규는 국군 부대와 함께 다니며 군목(軍牧)으로 활동하다 휴전 후에 서울로 돌아와 목회를 계속한다. 한편 서울에 남은 경빈은 서울시당 문화선전부장이 되어 내려온 원철규의 회유를 받는다. 끝내는 우익 교인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산 세력에 협조하기에 이른 그는 북한군이 퇴각할 때에 함께 북으로 떠나게 되는데……. 이데올로기와 국가 권력에 휘둘리는 인간의 사랑과 신앙 평양에서 저항운동에 실패한 현승규와 도경빈이 교회와 교인과 가족을 뒤로하고 피신해 온 뒤, 이 사건은 이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남긴다. 그리고 이런 부채감은 두 목사의 이후 행적을 좌우하는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한다. 남침한 인민군을 피해 서울을 떠나려 하던 경빈은 이번에는 차마 교회를 버릴 수 없다며 홀로 남고, 교인들을 보호하려고 공산당에 협력하다가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월북하는 운명에 처하고 만다. 더욱이 전쟁과 이념 갈등이라는 굴레에 갇혀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일로 끝나지 않는다. 훗날 경빈은 북한의 고위직에까지 오르지만, 남한에 남은 아내와 아이들은 이런 그의 존재 때문에 여권 발급이 거부되고 공직 임용에서 탈락하는 등 부당한 불이익을 겪어야만 한다. 승규가 개척한 서울제2교회는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하고, 승규 역시 개신교계의 지도적 위치에 오른다. 이념보다는 민족과 가족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승규는 유신시대에도 집권 세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목회에만 전념하지만, 정부에서는 그의 인격과 교계 내 위치를 의식하며 경계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승규가 반정부 운동에 나서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정교분리 원칙을 철저히 고수하면서 어떤 정치 세력에 밀착되는 것도 거부한다. 심지어 정부의 집요한 공작 때문에 고통을 겪으면서도, 한국의 비민주적 상황을 비난하며 투사를 자처하기보다는 밝은 미래를 예견하고 희망을 전파한다. 휴전선 저편에 사는 가족의 삶이 순탄치 않은 사정은 북쪽에서도 매한가지다. 두고 온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러 반세기 만에 평양을 방문한 승규는 6·25전쟁 당시 북한군 장교로 큰 공을 세우고 이제는 장군이 된 동생 승철에게서 가족들이 그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듣는다. “형님이 북조선을 탈출해서 남조선으로 갔기 때문에, 조카들이 더 열성적으로 공화국에 충성했지요. 그러지 않고는 김일성 장군님의 신임을 받기 어려웠을 터이니까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형님이 월남 반동이었기에 그 값으로 남들보다 더 열심히 충성했습니다.” 6·25전쟁의 폭력과 그 그림자로 인해 좌절을 겪으면서도 인간의 원초적 가치인 사랑과 믿음을 잃지 않으려는 두 주인공의 최후 선택은 과연 무엇일까?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전쟁과 분단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개인이 국가의 이데올로기와 권력이라는 거대한 체제에 어떤 충격을 가하고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 문학평론가 이재복은 이런 충격이 “견고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깨는 하나의 구멍(틈)”이 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런 틈을 함께 모색하려는 것이 바로 작가가 ‘묻어버린 그 전쟁’을 다시 끄집어내는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