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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우리 이 애를 묻어버립시다: 어느 평범한 어미 아비의 자식 살인미수기
-[손순매아] [헨젤과 그레텔] [장화홍련전] 그들이 없애려던 건 쥐떼가 아니라 자식떼다 효심으로 은폐한 패륜 배 좌수는 왜 장화를 시집보내지 않았을까 귀신이 되어서도 입도 뻥끗하지 마라 2장 어린 누이는 사람 먹는 괴물이 되었다: 간도 쓸개도 다 내준 부모의 비극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여우 누이] 달빛이 집어삼킨 누이의 비밀 자식이 여우로 변하는 순간 부모는 자식을 빙자한다 3장 내 오늘 좋은 꿈을 꾸었단 말이다: 첩이라는 ‘계약직 여종’의 인생 -[홍길동전] [사씨남정기] [춘향전] 홍 판서는 길동의 어머니를 사랑했을까 호부호형에 숨겨진 욕망 사악하고 음탕한 첩들의 항변 춘향은 내일을 보장받고 싶었다 4장 과거를 묻지 마세요: 정절과 포르노그래피를 동시에 꿈꾸는 가부장의 이중생활 -[구운몽] [옥루몽] 기녀들아, 순결을 지켜라 추잡한 독점욕의 징표, 앵혈 탐욕스런 남자와 파렴치한 공모자 5장 저년을 잡아 내려라: 본처의 ‘투기’와 정체성 찾기의 몸부림 -[옥루몽] [홍계월전] 현숙한 본부인, 첩의 목을 베다 누가 그녀를 투기로 내몰았나 네 어떤 더러운 물건이기에 욕망의 대결에 가려진 슬픈 진실 6장 쓸모없는 지아비는 따르지 마라: 무능한 가장들의 비참한 타자화 -[흥부전] [심청전] [변강쇠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새끼 내지르는 일뿐 심 봉사의 무능함은 조작되었다? 가장은 무엇으로 사는가 7장 어찌 과부라고 해서 정욕이 없겠느냐: 과부 재혼 금지와 열녀 만들기 프로젝트 -[열녀함양박씨전] 닳아빠진 엽전에 얽힌 설움 그들의 인생은 날조되었다 어머니, 이제 그만 죽어주세요 8장 쥐뿔도 모르는 게!: 지아비의 빈자리에 스며드는 의심 -[쥐 변신 설화] [옹고집전] [배따라기] 배를 가르니 쥐새끼가 나왔다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지나 옹고집네 식구들이 웃음거리가 된 까닭은 쥐 잡던 날의 비극 9장 너 원한 적 없어: 균열과 전복, 그리고 가족의 재탄생 -[최고운전] 날개 달린 아기장수의 죽음 금돼지의 핏줄이 꿈꾸는 새로운 질서 지금 이후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자식은 부모를 배반한다 원하지 않아야 행복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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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은 이렇게 말했다.
“지극한 효자로고!” 물론 죽을 뻔한 어린애를 향한 말이 아니다. 자식을 생매장하려 했던 아버지를 향해 근엄한 목소리로 한 말이다. 이 모두《삼국유사》 「손순매아」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황당한 아버지의 이름이 바로 ‘손순’이다. 「손순매아」는 바로《삼국유사》의 「효선」 편에 들어 있다. 그러니까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은 이 엽기적인 이야기를 효로 생각했던 것이다. 손순의 매정하고 끔찍한 살인모의와 살인미수는 모두 그의 모친을 향한 효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옹호된다. 노모를 향한 뜨거운 효성이 지저분한 모든 진실을 덮은 것이다. ---「1장 우리 이 애를 묻어버립시다」 중에서 쥐를 가지고 교묘한 계략을 꾸민 것도 허씨고 장화를 연못에 빠뜨려 죽이자고 말한 것도 허씨다. 그리고 그것을 수행한 자는 허씨의 아들 장쇠다. 분명 계모 허씨는 악독한 짓을 모의했고 선동했고 저질렀다. 그 비난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배 좌수는 어떤가. 그 끔찍한 모 의를 추인하고 한밤중에 실행시킨 배 좌수는 어떤 자인가. 허씨는 장화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라 해도 배 좌수는 자신의 친딸이 아닌가. 그는 전처의 유언을 듣고 그대로 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도대체 배 좌수는 무슨 심정으로, 아니 어떤 연유로 자기 딸을 죽이라고 명령했단 말인가. 도대체 이 아버지는 어떻게 돼먹은 작자란 말인가. ---「1장 우리 이 애를 묻어버립시다」 중에서 왜 남자들은 여자의 과거까지 소유하려 할까? 대단치도 않은 그깟 첩 자리조차 왜 그리도 엄격하게 검열하고 확인하고 통제하려 들까? 그것은 강남홍과 벽성선은 첩이 되었지만 설중매와 빙빙은 되지 못한 이유에 잘 드러난다. 깨끗함. 남자의 자손을 낳아줄 청정한 몸. 남자들은 그것을 요구한 것이다. 아무리 기녀라 해도 자신의 자식을 낳아줄 여자는 자신에게만 처녀성을 바친 여인, 오직 자기 외에는 없었던 여인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깨끗한’자손을 낳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주 얄밉게 말하면 이렇게 된다.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를 통해 낳을 내 자식이 중요해. 알았니?” ---「4장 과거를 묻지 마세요」 중에서 ‘쥐뿔’, ‘개뿔’처럼 있지도 않은 ‘쥐의 뿔’과 ‘개의 뿔’을 운운하는 것이 좀 미심쩍고 궁금하긴 하다. 이 말을 둘러싼 정황이 뭔가 지목당한 사람만 당하고 속는 것 같아 찜찜하기도 하다. 쥐의 뿔처럼 있지도 않은 것을 모른다고 핀잔할 때 “없으니까 모르지”라고 맞받아치려고 하면 주위 사람들까지 동조해서 ‘정말 그것도 몰라?’하는 식의 눈길로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본다. 때론 손가락질하듯이 낄낄거리기까지 한다. 그럴수록 더욱 영문을 모르겠다.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있지도 않은‘쥐뿔’을 봤단 말인가? 당하는 나만 모르고 나만 쥐뿔을 못 본 것일까? 모두 다 알고 모두 다 보았다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뭔가 크게 당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도대체 쥐에게 무슨 뿔이 있단 말인가? 도대체 쥐뿔이 뭐기에 없는 쥐뿔 타령을 하면서 이리 난리란 말인가? 여기에는 말 못할 복잡한 사정이 있다. ---「8장 쥐뿔도 모르는 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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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배 좌수는 장화를 시집보내지 않았을까?
: 부모와 자식, 선택할 수 없는 자들의 비극 삼국유사에는 〈손순매아〉 이야기가 실려 있다. 우리 옛이야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인 ‘효자담’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가장인 손순이 노모를 더욱 극진히 모시기 위해 자신의 어린 자식을 땅에 묻으려고 산에 올라갔다가 땅에서 돌 종을 발견하게 되고,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임금이 손순을 ‘지극한 효자’로 칭송하여 상을 내렸다는 줄거리다. 정말 손순은 효도하기 위해 아이를 생매장하려던 것일까? 그리고, 효를 위해서라면 자식을 살해하려던 아비의 죄는 용서될 수 있는 것일까? 저자의 생각은 단호하다. 아무리 손자가 밥상의 음식을 날름날름 집어먹는다 해도 노모가 손자를 땅에 묻어버리길 원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손순은 가난한 살림에 하나라도 먹을 입을 덜기 위해 자식 살해를 모의했던 것이고, 그것을 ‘효’라는 명목으로 치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잔혹한 얘기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환상적인 과자 집이 등장하는〈헨젤과 그레텔〉 이야기도 끔찍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계모의 윽박을 못 이긴 무능한 아버지가 깊은 산속에 어린 남매만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흉년이 들어 살림이 궁핍해지자 입 하나라도 덜기 위해 남매를 유기한 것이다. 자식을 해치려는 일이 꼭 가난 때문만은 아니었다. 〈장화홍련전〉의 계모 허씨는 전처소생인 장화와 홍련을 시기하여 구박하고 결국 두 자매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계모만의 잘못일까? 계모가 그토록 딸들을 구박하고 음해하려는 것을 알면서도 배 좌수는 왜 장성한 딸들을 시집보내지 않고 옆에 끼고 있었던 것일까? 계모의 다른 음해에는 꿈쩍도 않던 배 좌수가 왜 아이를 사산했다는 모함에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친딸 장화를 죽이는 데 동조했던 것일까? 여기서 저자는 배 좌수와 두 딸 사이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 즉 성적 학대의 가능성을 읽어낸다. 살기 어렵고 무지했던 옛날의 일이라고, 꾸며낸 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우리의 마음을 편치 않다. 바로 오늘날, 현실에서도 똑같은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어린 자식의 손가락을 자르고 보험금을 타내려던 아버지, 키우기 힘들다며 어린 아이를 굶어죽게 방치한 젊은 엄마, 친딸을 성폭행하고 임신까지 시킨 인면수심의 아버지…….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에 실리는 끔찍한 기사들은 앞에서 언급한 옛이야기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잔혹하다. 이 책은 가족이라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 때로는 얼마나 억울하고 비극적인 일들을 만들어내는지를 옛이야기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일러준다. * 기녀들아, 앵혈을 지켜라. 본부인아, 투기하지 마라 : 폭력적이고 탐욕스런 가부장의 시선이 만들어낸 일그러진 여성상 가부장의 시선으로 쓰인 고소설들은 폭력적으로, 또 탐욕스러운 눈으로 여성의 모습을 그려낸다. 악독한 계모와 음탕한 첩들은 물론이고 지조 있는 기녀, 절개를 지키는 열녀, 현숙한 부인처럼 긍정적으로 묘사된 여인들 역시 한 꺼풀 벗겨보면 가부장의 욕망에 의해 일그러진 여성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고전소설을 보면 유독 사악한 첩들의 이야기를 자주 만나게 된다. 대부분 가문의 요구에 의해 맺어지는 본처와의 결혼과 달리 첩은 남자가 원하는 여자라면 언제든, 누구든 맞이할 수 있었다. 사랑 없는 본처보다 애정 관계로 맺어진 첩이 남편에게 더 사랑받고 살았을 텐데, 왜 그렇게 악독했을까? 양반 집안에는 처첩간의 위계가 분명했다. 아무리 총애를 받아도 첩은 첩일 뿐 절대로 처가 될 수 없다. 본처가 죽으면 다시 양반집 규수를 새로운 처로 맞지, 첩을 처로 ‘승격’시키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첩이 낳은 자식들도 모두 본처를 ‘어머니’로 부른다. 첩은 그저 가장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마음이 언제고 돌아서면 목숨조차 담보할 수 없는 것이 첩의 현실이었다. 첩이 언제든 사악해질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처라고 해서 삶이 평화로운 것도 아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고 나면 남편이 원하는 대로 아들을 낳고, 첩이 들어오는 것도 마다않고 받아야 한다. 여자니까 남편보다 뛰어나서도 안 되고, 남편이 사랑하여 데려온 첩을 투기해서도 안 된다. 〈옥루몽〉의 주인공인 양창곡은 2처 3첩을 거느리는데, 제2 부인인 황 부인이 첩 벽성선을 투기했다가 ‘더럽고 음란한 년’으로 몰려 지옥을 경험한 후 ‘남편 말 잘 듣는 현숙한’ 여인으로 새로 태어난다. 물론 가장의 입장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본 황 부인은 소심하고 얼빠진, 시키는 대로만 하는 인형이나 다름없다. 첩을 무조건 총애하고자 한 가장의 욕망에 반하는 행동(투기)을 한 대가다. 처든 첩이든 무조건 가장에게 복종하고 가장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다 바쳐야 한다는 점은 동일했다. 대부분 가장의 욕망은 성적인 것으로 드러나는데, 대표적인 것이 ‘앵혈’이다. 꾀꼬리의 피를 뜻하는 앵혈은 궁중에서 궁녀를 들일 때 소녀들의 처녀성을 감별하기 위해 고안한 것으로, 꾀꼬리의 피를 팔목에 묻혀서 묻으면 순결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앵혈이 남자와 동침을 하고 나면 사라진다고 믿었다. 〈옥루몽〉에서 양창곡의 3첩 중 강남홍과 벽성선은 원래 기녀였다. 기녀라는 직업상 무수한 남자들을 상대할 수밖에 없다. 남자들도 그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은 가당치도 않게 기녀에게 절개를 바란다. 이른바 ‘지조 높은 기녀’ 판타지다. 그리하여 양창곡은 강남홍과 벽성선의 팔뚝에 앵혈이 있음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첩으로 받아들였다. 양창곡의 아버지인 양기성 역시 기녀 설중매와 빙빙과 어울렸지만, 그들을 첩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에게서는 앵혈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오염된 몸’이라는 뜻이다. 기녀에게 순결을 요구했던 양창곡은 더 해괴한 짓까지 벌인다. 적들이 코앞에 들이닥친 군중에서 강남홍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한다. 무술을 배워 남장을 하고 양창곡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강남홍을 그저 자신의 성욕을 채우는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가부장의 손에 운명을 맡겨야 했던 여인들에게 ‘자기 정체성’이란 먼 나라 이야기였을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양창곡과 그의 아버지 양기성 모두 정의로운 인물로 그려진다는 사실이다. 간신과 목숨을 걸고 맞서는 기백, 당당하고 공명정대한 언술, 소신과 강단 있는 행동을 많은 이들이 칭송하였고, 그것이 그들의 비열하고 파렴치한 행동까지도 정당한 것으로 포장해버렸다. 저자는 오늘날에도 양창곡의 후손들이 주위에 널려 있는데도 그것을 이상하게 보지 못한 채 넘어가는 우리의 어두운 눈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 자식을 거부한 아버지, 부모를 배반한 자식 : 가족의 균열과 전복, 그리고 재탄생 아버지가 아들을 부정하고, 자식이 부모를 거부하는 이야기도 우리 고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시대 인물인 최치원의 삶을 형상화한 〈최고운전〉이 그것이다. 최충은 왕의 명으로 문창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하게 된다. 문창 고을은 부임하는 수령마다 그 부인이 사라지는 변괴가 일어나는 곳이었다. 아내의 손목에 붉은 실을 매어두고 업무를 보러 다녔지만, 어느 날 역시나 아내가 사라진다. 실을 따라가니 산꼭대기 바위틈으로 들어가 있었다. 바위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들어가 보니 으리으리한 집에 금돼지가 아내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최충은 금돼지를 죽이고 아내를 구해 돌아온다. 아내는 얼마 후 아들 최치원을 낳는다. 금돼지에게 잡혀가기 전에 임신한 상태였으나 최충은 금돼지의 자식이라 여겨 최치원을 내다버렸다. 그랬더니 선녀가 내려와 보살피는 등 신이한 일이 일어나 최충은 아들을 다시 거두려 한다. 그러자 최치원은 ‘잔인하고 정이 없다’며 아버지를 비난하고 홀로 글을 배운다.〈최고운전〉은 〈야래자설화〉와 〈지하국대적퇴치설화〉를 교묘히 결합하여 탄생시킨 놀라운 성취다. 〈야래자설화〉는 기존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구현할 영웅의 출생을 둘러싼 이야기이고, 〈지하국대적퇴치설화〉는 기존 질서를 어지럽히는 나쁜 존재를 퇴치하여 기존 질서를 재건하고 공고히 하는 영웅의 이야기다. 저자는 〈최고운전〉이 새로운 영웅(최치원)이 체제 수호 세력(최충)에게 발목 잡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끝내 좌절하는 이야기로, 최치원의 삶을 가장 효과적으로 형상화했다고 말한다. 이것을 가족의 이야기로, 부모와 자식의 이야기로 치환해 생각해보자. 부모는 항상 자식이 잘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것은 늘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 기득권을 장악하는 한에서 그렇다. 자식이 아무리 잘났어도 그것이 기존 질서에 도전하고 전복하려는 형태로 나타날 때 부모는 자식을 부정한다. 최충과 최치원이 그랬듯이 말이다. 최충에게 최치원의 행동은 ‘배반’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이 책 《가족 기담》이 결국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다. 자식은 언제나 부모를 배반하고 새로운 질서를 찾으려 한다는 것,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부모에게, 자식에게, 남편에게, 아내에게 무엇이라도 강요할 수 없다는 것, 가족이라고 해서 잘못이 덮어질 수는 없다는 것. 좋아서 같이 사는 거라면 그만큼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래야 비로소 행복한 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 더불어 익숙한 것을 익숙하게 바라보지 않을 수 있는 눈,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것에 ‘왜?’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힘을 갖게 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