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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들어가는 말|세 명의 지식인과 프랑스의 역사 주 1부 레옹 블룸|환영받지 못한 예언자 기억에서 지워진 사람 왜 사회주의자가 되었는가 인민전선의 완벽한 실패 자신의 가책을 들춰내고 실수를 고백하다 지성과 도덕을 갖춘 정치인 유대인 레옹 블룸을 쏘아라 모든 인간을 위하여 주 2부 알베르 카뮈|불복하는 모럴리스트 참여 지식인, 사상가, 좌절한 예술가 모든 폭력에 반대한다 뿌리 없는 세계주의자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지식인 모럴리스트, 시대와 맞서다 암흑의 시대를 살았던 공허한 예언자 주 3부 레몽 아롱|이성으로 맞서 싸우다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 존중한 사람 좌파인가, 자유주의자인가 정의보다 효율이 핵심 엄격한 논리로 환영과 싸우다 프랑스 사상의 윤리적인 지지대 시대의 위대한 반대자 주 더 읽을거리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
Tony Ju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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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한 국란이 프랑스를 흔들 때마다 작가들·교사들·사상가들은 이쪽이든 저쪽이든 하나의 노선을 결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개입했다. 드레퓌스를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반대할 것인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국제사회주의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국가통합주의자가 될 것인가. 1930년대에 파시스트가 될 것인가 아니면 반파시스트가 될 것인가. 냉전시대에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가운데 어느 진영을 선택할 것인가. 탈식민화를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제국을 옹호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지식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했고, 이 결과 20세기 대부분의 시기 동안 프랑스에서 벌어진 유명한 논쟁이 규정되고 확증됐다.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고, 이러한 틀에서 벗어날 생각도 안 했으며, 그렇게 하지 않는 지식인이란 생각 자체가 완벽한 모순처럼 보였던 것이다. ---p.22
내가 주목하는 것은 블룸과 아롱과 카뮈가 시대와 유지했던 불편한 관계의 본성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세 사람이 흥미로운 한 가지 이유는 그들 모두 도덕적 (때로는 육체적)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용기를 드러냈던 경우는 (모든 사람이 너무나 자주 하는 일이지만) 정적이나 지적인 적수에게 반대할 때가 아니었다. ‘자기편’을 반대할 때 그들의 용기는 진가를 발휘했다. 그들은 대가를 치렀다. 고독했고, (적어도 생애 대부분 동안) 영향력이 줄었으며, 명성도 제한됐다. 그들이 해외에서 만난 친구와 후원자에게 받았던 명성과 견주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들이 살았던 시기의 프랑스는 정치적이고 지성적인 복종의 압력이 이례적으로 강력했던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인·대중·동료 좌파·지식인 동료 사이에서 평판이 떨어질 게 뻔했던 일을 기꺼이 감수하는 태도는 희귀하고 매력적인 특성이었고, 그 점만 해도 그들에 대한 글을 쓸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됐다. ---p.39 카뮈가 파리의 지식인을 정말로 혐오했던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은 무슨 일이든 말할 게 있으며, 어떤 일이라도 자기들이 말하고 싶은 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확신했던 점이었다. 카뮈가 지적한 점은 또 있었다. 체험으로 얻은 지식과 자신만만한 이론적 주장이 전형적으로 전도됐다는 것이다. 카뮈는 알제리를 잘 알고 추억했으며, 공평하게 정의를 적용하는 길을 찾았기 때문에, 진실로 양면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와 알제리] 두 집 모두를 저주했다면, 달리 할 말이 없던 것이 당연하다. 지식인의 책임은 입장을 정하는 게 아니라, 입장이 없으면 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상황이 그랬기 때문에 침묵이야말로 카뮈의 속내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것처럼 보였다. ---p.221쪽 애매했고, 한계도 억제도 심했던 카뮈였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길을 잃었던 곳에서 올바른 길을 찾았던 사람은 카뮈였다. 오래전에도 한나 아렌트가 옳았던 것 같다. 살아생전 외부인이었던 알베르 카뮈는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던 것이다.---p.248 아롱은 자신의 본분을 세상을 설명하거나 훈계하는 것만으로 국한한 지식인들을 규탄했다.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설명하는 것 외에는 정치에 대해서 할 말이 없다면, 아예 글도 쓰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이 아롱은 지식인의 의무를 남들과 다르게 이해했기 때문에, 동료 작가들과도 구별됐다. 이들은 공적인 지식인들이란 무책임하게 시선이나 끄는 행동을 일삼는 자들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p.2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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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은 정치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고,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가? “지식인: 남성 명사.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인간 집단. 드레퓌스 사건과 더불어 파리에 등장했지만, 20세기 말에 사라진 사람들.” _ 베라나르 앙리 레비 “진리와 정의를 지키는 것이 지식인의 소명이다.” _ 쥘리앵 방다 지식인, 글이 필요하면 펜을 잡았고, 탄환이 필요하면 총도 잡았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사람들이 부쩍 정치에 관심이 많아졌다. 물론 이명박 정부가 너무 무능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지식인들의 정치 참여도 늘어나고 있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논리로 정치를 발언하고 있다. 역대 어느 정부보다 많은 지식인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다보니 지식인의 정치 참여에 대해 논쟁이 오가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식인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그리고 지식인은 어떻게 정치에 참여해야 바람직한 것일까? 또 정치에 참여하면서 어떤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하는 것일까? 이런 물음들에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세 지식인의 삶을 예로 들며 답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지식인은 프랑스의 발명품이다. 드레퓌스 사건과 더불어 지식인이 탄생했고, 그 이후로 프랑스에서는 사회에 큰일이 터질 때마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그 사건에 개입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도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 당대의 지식인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며 사건에 발 벗고 뛰어들었고, 시대 역시 그들을 끊임없이 호출하며 해답을 찾았다. 지식인들은 글이 필요하면 펜을 잡았고, 탄환이 필요하면 총까지 잡았다. 사르트르가 그랬고, 푸코도 그랬으며, 부르디외도 참여 지식인으로 유명하다. 그러면서 수많은 논쟁이 오갔고, 그 논쟁들은 여러 이야기를 양산하며 세계 각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전작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포스트워」로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그는 현실에 안주하는 학자가 아니었다. 루게릭병으로 2008년에 사망할 때까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낳은 불평등과 빈부 격차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지식인이었다. 자신이 유대인이지만, 이스라엘을 ‘편협한 민족국가’로 규정하며 이스라엘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고, 미국이 일으킨 전쟁도 강한 어조로 비판한 바 있다. 자신이 한 명의 지식인이기도 했던 그가 바라보는 올바른 지식인상은 무엇이었을까? 지식인이란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또 그들이 책임져야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여겼을까? “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지식인을 주제로 연구를 했다. 첫째 지식인은 프랑스에서 중요한 존재였으며, 둘째 정치적 참여를 하게 되면 도덕적 책임이 따를 수밖에 없는데, 이때 가장 손쉽게 떠오르는 존재가 지식인이라는 것.” 삐딱하게 살았고, 시대와 불화한 세 명의 지식인 이 책의 주제는 세 명의 프랑스인이다. 정치인 레옹 블룸, 소설가 알베르 카뮈, 철학자 레몽 아롱. 좌파 정치인-이방인-우파 학자. 레옹 블룸이 2차 대전 이전에 정치계에서 활약을 했다면, 알베르 카뮈와 레몽 아롱은 ‘주로’ 2차 대전 이후에 담론계에서 활동을 했던 사람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저마다 무책임이 횡행했던 시대에 살았지만, 모두가 저항했던 사람들이라고 토니 주트는 말한다. 서로 매우 다른 사람이지만 그들은 무엇인가 독특한 것을 공유한다. 그들 모두 살아생전 프랑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당대의 사람들이 보기에 조금 삐딱하게 살았고, 시대와 불화했다. 그들은 무엇보다 ‘자기편’을 반대했다. 도덕적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동료들과 동시대 사람들의 혐오·의심·멸시·증오를 받았다. 고독했고, 영향력이 줄었으며, 명성도 제한됐다. 레옹 블룸과 레몽 아롱은 삶이 끝나갈 무렵에야 겨우 편안해졌으며, 모든 사람의 칭찬과 존경을 얻었고, 심지어 그들을 과찬하는 집단까지 생겼다. 알베르 카뮈는 35세에 일찌감치 칭찬과 존경과 과찬을 한 몸에 받았지만, 이후 악성 비방을 심하게 받다가 갑자기 사고로 죽고 말았다. 사후 30년이 지난 뒤에야 카뮈는 명성을 되찾았다. “레옹 블룸, 알베르 카뮈, 레몽 아롱이 오늘날 흥미로운 이유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들과 통례에서 벗어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한나 아렌트는 그들을 유럽의 과거에서 ‘뜨거운 감자’ 같은 인물이라고 적확하게 기술했다. 그녀가 보기에 그들은 ‘어두운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변방으로 밀린 사람들이 아니었다. 만약에 변방에 밀렸던 사람이라면, 그들은 영향력이 미약했을 것이며, 그에 따라 역사가들의 관심도 그다지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는 내내 꾸준히 오해를 받았다.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가끔 너무할 정도로 동시대 사람들보다 정확히 이해했던 만큼 오해를 샀다. 그들의 공동체의 평가와 자기이해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처럼 해질 무렵에 겨우 찾아왔다. 우리 역시 세 사람이 살았던 시대를 이해할 때 그들의 도움을 몇 가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걸출한 좌파 정치인 레옹 블룸 프랑스 사회당을 대표하는 정치인 레옹 블룸. 그는 26세 무렵에 세기말 프랑스의 문학 현장을 주름잡은 인물이자 상당히 걸출한 드레퓌스파 지식인이었고, 양차 대전 중간에 프랑스 사회당 당수를 계속 역임했고, 1936년과 1938년 두 시기에 인민전선 정부의 수상이었으며, 그를 투옥하고 기소하고 추방했던 비시정부의 가장 중요한 정적이었고, 전후에도 수상을 역임했고, 1950년 죽기 전까지 프랑스의 가장 존경받은 원로 정치가였다. 그러나 레옹 블룸은 사회주의운동의 목표를 종교적으로 동일시한 바람에 프랑스의 이해관계보다 정당의 이해관계가 중요하다고 고집스럽게 주장함으로써 양차 대전 중간에 조국의 정치를 분열시키고 불안정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사실 이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토니 주트는 말한다. 이런 점 때문에 블룸이 이룬 많은 성과들이 가려져 있다고 지적한다. 어쨌든 간에 블룸은 1930년대 후반 국제 현실에 직면해 평화주의, 집단 군축, 유화 정책을 폐기하자고 용기 있게 주장했다. 저명한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가운데 유일하게 이렇게 주장한 사람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비시정부의 페탱을 반대했던 소규모 프랑스 사회주의 집단에 속했으며, 이후 투옥되었을 때 오랫동안 견지했던 사회주의적 신념의 본질적인 부분을 70세의 나이에 다시 성찰하며 시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그는 성찰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신념의 근거였던 도덕적 전제와 사회적 비판을 폐기하지 않았다. 이런 측면에서 블룸은 독특하고 독특했다. 그가 헌법과 정부의 개혁에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였고 1945년 이후 프랑스 좌파를 부흥하고 근대적 합리적 원칙에 따라 재건하고자 노력했다. 블룸은 수많은 실수를 범했다. 하지만 그는 특별한 자질이 있었다. 실수를 실수로 생각하며 인정하고, 자신의 정치적 유산을 공개적으로 수정할 의사와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블룸은 때로는 엄청난 개인적 위험을 감수했으며, 언제나 자기가 누릴 수도 있었던 인기와 대중적 성공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렇게 했다. 그 같은 정치적 책임의식은 동시대를 살았던 정치인과 정치가에게 없던 것이며, 그 때문에 다수의 정치인들은 매우 극렬하게 그를 혐오했고 원망했다. 그의 정적은 그를 믿지 못했으며, 그가 성취한 모든 업적을 시기했다. 남달리 무책임한 정치인과 정치가 횡행했던 시대에서 레옹 블룸은 정치적 책임을 거의 혼자서 짊어졌던 셈이다. 카뮈는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카뮈는 알제리 출신이었기 때문에, 복잡한 측면에서 파리의 좌익 지성계의 외부인이 되었다. 고등사범학교를 다니지 않은 카뮈는 학벌이 부족했다. 그 때문에 프랑스의 최정예 지식인을 규정하고 식별하는 증표가 없었다. 이류 지방대학을 졸업했지만, 전쟁이 끝나자 파리에서는 거의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는 정치적 유명인사로 혜성같이 떠올랐다. 두 편의 소설(「이방인」, 「페스트」)과 한 편의 에세이(「시시포스의 신화」)와 일간지 「콩바」에 썼던 사설 덕분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카뮈가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의 동료이자 친구인 동시에 적수라고 생각했다. 그들보다 지적인 화력은 모자랐지만, 카뮈는 레지스탕스 활동에서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전력 덕분에 쌓은 카리스마와 도덕적 신뢰성을 통해서 충분히 벌충했다. 카뮈가 사르트르주의자들과 사이가 틀어졌으며, 공산주의와 알제리 문제 때문에 좌파 지성계 주류로부터 점차 고립됐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해외에서 카뮈의 입지는 계속 상승했고, 결국 195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2년 후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비교적 짧았던 카뮈의 인생은 우상처럼 숭배를 받게 되었다. 프랑스가 카뮈를 다시 발견할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오래전부터 다른 지역 사람들이 카뮈를 보배로 간주했던 것처럼 오늘날 프랑스인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카뮈는 알제리 독립의 지지를 거부한 탓에 끔찍한 고통을 겪었으며, 수많은 친구와 후원자를 잃었다(그는 동일한 정도로 프랑스의 식민주의 활동을 명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카뮈가 생뚱맞게 알제리 딜레마를 느꼈던 것은 아니었다. 알제리 문제가 발생하기 이전에도 카뮈는 전후 보복, 사형, ‘혁명’ 사상, 공산주의 실천에 대해서 지식인의 주류 의견과 공공연히 충돌을 거듭했다. 평판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카뮈가 알제리 사태에 침묵했던 이유는 예전에 저항 활동을 한 이유와 동일했다. 본능적인 도덕적 의무감에 따른 결과였던 것이다(여기에 할 말이 없을 때는 침묵해야 한다는 의무도 포함됐다). 결과적으로 불운했으며 오해를 쉽게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로서는 할 수 있는 게 딱히 없었다. 할 게 없을 때 하지 않는 게 카뮈가 생각한 책임이었다. “반대편의 불관용, 정치적 실수, 프랑스와 아랍 두 곳이 저지른 범죄는 카뮈를 이성에서 감정으로, 감정에서 침묵으로 몰아갔다. 도덕적 개입과 정서적 애착 사이에서 가슴이 찢어졌던 카뮈는 할 말도 없었고, 그래서 아무 말도 안 했다. 이런 이유로 카뮈는 당시의 거대한 도덕적 쟁점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고, 그 때문에 당시에도 이후에도 카뮈를 많은 사람이 안 좋게 보았다.” 이성으로 시대와 맞선 우파 철학자 레몽 아롱 레몽 아롱은 사르트르를 포함해 여타의 고등사범학교 동창들보다 뛰어났으며, 전쟁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기 전까지 동세대 가운데 가장 많은 기대를 받은 젊은 프랑스 철학자였다. 전시에는 자유프랑스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학문 활동을 재개했다. 절정은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취임했던 일이었다. 이 와중에 그는 수십 편의 책과 에세이를 펴냈고, 일간지 「르 피가로」와 주간지 「렉스프레스」에 수천 편의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1983년 아롱이 지적인 회고록을 출판한 직후 향년 78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그는 아마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이자 사회학자, 정치평론가, 사회이론가였을 것이다. 아롱은 학계의 거물이었고 권력자, 유력 언론인과 막역한 사이를 유지하기도 했지만, 지식인이었다. 아롱이 학자로서 야심이 있다거나 재능이 있었다고 해서, 당연히 지식인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프랑스의 수많은 동료 학자들 가운데 비교적 소수의 사람만이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레몽 아롱은 지식인이 틀림없었다. 사는 내내 아롱은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니더라도 공적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아롱은 공적인 논쟁에 개입했던 대부분의 동료 지식인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자 애써 노력했다. 그뿐만 아니라, 아롱은 진지하게 지식인의 책임을 다하며 중요한 공적인 논쟁에 개입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롱은 여러 유명한 프랑스의 활동파 지식인들과 똑같은 출발점에서 공적인 지식인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바로 철학자의 역할이었다. 아롱은 지나칠 정도로 동료 지식인들을 공격했다. 문제는 사르트르를 위시한 대부분의 프랑스 좌파들이었다. 정작 그들은 기이할 정도로 무지했다고 아롱은 말한다. 요컨대 그들은 진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롱이 비통할 정도로 가장 잘못됐다고 생각한 양상은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진지하지 않은 태도로 공적인 토론에 임한 점이었다.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자기가 읽지도 않은 책에 대해서 논의했고, 자기가 이해하지 못한 이념을 지지했고, 스스로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은 채 통치자의 정책을 비판했다.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학자들과 작가들이 일단 써놓고 생각하는 딜레탕트적 성향이 자기네 지식인 공동체에 국한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랬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지식인들의 독자는 친구와 지지자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들의 공동체를 넘어서 확대됐던 것이다. 아롱은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제멋대로 행동했을 뿐만 아니라 지적으로도 무책임한 행태를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아롱이 살았던 시대는 이상적인 해결책을 찾을 때 필요한 깊은 사유를 용인하지 않았다. 아롱은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학자적 관심을 갈고닦았던 덕분에, 궁극의 해결책을 사유할 때 따르는 철학적 토대와 역설을 사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힘을 쏟은 일은 정치적 경제적 현실의 불편한 세부사항을 이해하고 비판하는 것이었고, 동료들의 지겨울뿐더러 무책임한 현실 도피를 솜씨 좋게 폭로하는 것이었다. “아롱은 자신의 본분을 세상을 설명하거나 훈계하는 것만으로 국한한 지식인들을 규탄했다.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설명하는 것 외에는 정치에 대해서 할 말이 없다면, 아예 글도 쓰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이 아롱은 지식인의 의무를 남들과 다르게 이해했기 때문에, 동료 작가들과도 구별됐다. 이들은 공적인 지식인들이란 무책임하게 시선이나 끄는 행동을 일삼는 자들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