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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여기에 고요한 노을이… 에필로그 옮긴이의 말 지은이의 삶과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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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고 적막한 백야가 이어지고 있었다. 저녁노을에서 아침노을까지 긴긴밤의 어스름은 물기를 담뿍 머금은 풀잎에서 번질번질 흘러나오는 진한 침출액에 흠뻑 젖어 있는데, 소방장비 보관 창고에 기거하는 여군 고사기관포 사수들은 새벽녘 수탉이 두 번째로 푸드덕 홰를 치며 목청을 힘껏 뽑아 올릴 때까지 밤새도록 노래를 불렀다. 이제 리따의 은밀한 행적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있었다. 바스꼬프만 까맣게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이틀 밤이 지나 사흘째 되던 날, 리따는 저녁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종적을 감춘 뒤 다음날 아침 기상나팔 소리가 들리기 직전에야 병영 막사로 돌아왔다.
리따는 그렇게 돌아오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순찰대에 발각되기 쉬운 위험한 시간대는 이미 지나 이제는 마음을 놓고 걸을 수 있었다. 끈이 달린 군화 두 짝을 벗어 등 뒤로 둘러매고 터벅터벅 걸었다. 앞으로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물이 흥건하게 고인 질펀한 풀밭에서 절버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디찬 새벽이슬에 젖은 맨발이 칼로 도려내듯 시렸다. 리따는 그날 있었던 가족과의 만남에 대해, 친정어머니의 애처로운 하소연에 대해, 다음번에 부대를 빠져나올 방법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다음번 만남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거의 보지 않고 스스로 계획할 수 있었기에 리따는 행복했다.--- pp.42-43 멀리서 관목 덤불이 흔들거렸다. 그러자 덤불 언저리로 몸뚱이 둘이 미끄러지듯 살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몸놀림이 굉장히 조심스럽다. 몸에는 잿빛이 도는 파란색 얼룩무늬 망토를 걸치고 있다. 그러나 눈부신 아침 햇살이 그들의 얼굴 정면을 비추고 있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경비대장의 시야에 낱낱이 포착되었다. 집게손가락을 기관단총의 방아쇠에 댄 채 허리를 앞으로 조금 굽힌 독일군 공수부대원 둘이 호수 쪽을 향해 도둑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스꼬프는 그들을 주시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의 등 뒤 관목 덤불이 계속 흔들리고 있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기 때문이다. 거기서, 덤불 깊숙한 곳에서 잿빛이 도는 파란색 복장을 한 몸뚱이들이 여차하면 즉시 기관단총을 내갈길 수 있는 거총 자세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잇따라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셋… 다섯… 여덟… 열…” 구르비치가 중얼거리며 그들의 수효를 세었다. “열둘… 열넷, 열다섯, 열여섯… 열여섯이에요, 특무상사 동무, 열여섯…” 몸서리치듯 떨고 있던 관목 덤불 꼭대기가 움직임을 멈췄다. 아득한 지평선 위로 까치들이 날아가는 게 보였다. 까치들이 희미하게 깍깍 울어 대며 어디론가 멀리 떠나가고 있었다.--- pp.107-108 거대한 갈색 거품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리자 앞에 부풀어 올랐다. 너무 뜻밖에 일어난 일이라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옆으로 몸을 피했다. 겨우 한 발짝 비켜섰을 뿐인데 갑자기 몸을 떠받치던 바닥에 두 발이 닿지 않았다. 뭔가 굼실굼실 움직이는 차가운 빈 공간 어딘가에 몸이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이때 수렁에 빠져 든 양 허벅지가 탄력 있는 압착기에 가볍게 눌리듯 부드럽게 죄어들었다. 무서운 고통이 찾아올 것 같은 예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오랫동안 쌓인 공포심이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온몸을 겹겹이 휘감았다. 어떻게든 더는 깊이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바닥이 단단한 좁은 여울 쪽으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며 리자는 온몸의 무게를 막대기로 지탱하려고 했다. 우두둑, 마른 막대 부러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와 함께 리자의 얼굴이 얼음처럼 차가운 흙탕물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p.152 바로 이때 덤불 속에서 요란한 소음이 이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걀랴의 몸이 밖으로 튕겨 나왔다. 풀밭을 가로질러 독일군 공수부대원들 앞으로 날아간 처녀의 몸뚱이가 땅바닥에 나동그라져 물고기처럼 파드닥거렸다. 몸은 꿈틀거렸지만 허리가 꺾인 채 뼈가 부러진 양팔이 머리 뒤로 돌아가 있었다. 이미 처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갈랴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영문도 모른 채 가물가물 의식이 없어지고 있었다. “엄마-아-아!…” 드르륵, 기관단총 앞대가리가 짧게 불을 내뿜었다. 열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여기까지 숨 가쁘게 달려오느라 팽팽하게 긴장된 가냘픈 등에 독일군 공수부대원 하나가 기관단총을 내갈긴 것이다. 갈랴는 한번 몸을 내뻗쳐 보려고 용을 쓰다가 힘없이 얼굴을 땅바닥에 처박고 말았다. 아찔한 공포 속에서 부러진 두 팔은 뒤통수에서 요지부동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비명은 목구멍에서 글그렁글그렁 핏물에 거치적거리는 거친 숨소리에 묻혀 버려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두 다리는 아직도 달리고 있었다. 여전히 들들 떨고 있었다. 갈랴의 군화 코가 이끼를 쿡쿡 찔러 댔다.--- p.215 특무상사가 더블 백에서 셔츠와 속바지, 비상용 붕대 두 개를 꺼내 왔다. 리따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기를 쓰며 입술을 실룩거렸지만 바스꼬프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피에 흥건히 젖어 부풀어 오른 야전복, 스커트, 속내의에서 솔기를 찾아 칼로 실밥을 뜯었다 ― 그가 이를 악물었다. 수류탄 파편이 대각선으로 뚫고 지나가, 뱃속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고 위와 창자는 모두 결딴난 상태였다. 어둡고 짙게 보이는 물컹한 피범벅 틈새로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내장에서 푸들푸들 경련이 일고 있었다. 특무상사가 그 위에 셔츠를 대고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 p.2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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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5월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러시아 서북부의 농촌 마을. 제171대피역이 들어선 이곳에 고사기관포 두 문과 여군 고사기관포 사수 2 개 분대 병력이 배치되어 있다.
대피역 경비대장 바스꼬프 특무상사는 초등학교 4년 중퇴의 학력을 가진 32세의 농촌 출신 이혼남이다.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핀란드와의 겨울전쟁(1939-1940)에서 어깨에 포탄 파편을 맞은 대가로 대피역 경비대장 보직을 받았다. 경비대 제1분대는 독일군의 침공 이튿날 백병전을 벌이다 전사한 국경수비대 중위의 젊은 미망인 리따가 지휘하고 있다. 리따는 어린 아들 알베르뜨를 친정어머니에게 맡긴 뒤 고사기관포 교육대에 들어가 훈련을 받은 여군 하사다. 대피역은 리따의 친정어머니와 아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밤이 되면 리따는 몰래 빼돌린 군용식품을 들고 감쪽같이 부대를 빠져나가 가족에게 달려가곤 한다. 아침노을이 질 무렵 부대로 돌아오고 있던 리따가 숲속에서 독일군 공수부대원 두 명을 발견하고 마을의 셋집에 묵고 있는 바스꼬프 특무상사에게 달려가 적의 출현을 보고한다. 특무상사는 리따, 제냐, 리자, 소냐, 갈랴 등 여군 병사 5명으로 추격대를 편성해 독일군 소탕 작전에 나선다. 바스꼬프는 독일군이 보삐 호수 언저리를 통과할 것으로 예상하고 그들을 앞질러가기 위해 늪지의 좁은 여울을 따라 이동한다. 호숫가에 도착한 추격대는 시뉴히나 구릉지에 몸을 숨긴 채 적병을 기다린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덤불숲에서 모습을 드러낸 독일군 공수부대원은 두 명이 아니라 열여섯 명으로 확인된다. 마음이 다급해진 바스꼬프는 지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리자를 대피역으로 되돌려 보내지만 리자는 늪 한가운데의 여울을 따라가다 깊은 수렁에 빠져 죽는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추격대는 지원군이 도착하기만 손꼽아 기다리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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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중 가냘픈 러시아 여군 병사들과 건장한 독일군 공수부대원들 간에 벌어진 전투를 그린 다소 색다른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여군 병사들은 드라마틱한 상황에 처하게 되지만 그래도 미래를 낙관하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병사들은 어제까지 학생이었다가 오늘 전쟁에 참가한 꽃다운 나이의 처녀들이다. 바실리예프는 아가씨들의 인내력을 시험하기라도 하듯이 그들을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 삶과 죽음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저자는 그런 경우에만 등장인물 개개인의 성격이 뚜렷하게 부각된다고 보는 것이다. 여군 병사 다섯은 각자 타고난 운명에 따라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듯이 죽음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맞게 된다.
보리스 바실리예프는 자신이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살해되는 광경이 아니라, 몸에 따뜻한 피가 흐르고 창조적 사고 능력을 가진 인간, 성과 이름이 있고 사랑과 기쁨을 느낄 줄 아는 구체적인 인간이 죽는 모습이었다. 저자는 전장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것들에 대한 모든 감정과 생각을 고스란히 작품에 담아냄으로써 독자들이 전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 전쟁 중에 무수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의 관점은 그들의 죽음뿐만 아니라 그들의 못다 한 사랑, 못다 이룬 꿈, 못다 부른 노래, 태어나지 못한 아이들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전쟁 자체나 전투가 아니라 전쟁에서 나타나는 인간 영혼의 삶과 죽음에 대한 것이다. 거기에는 등장인물이 많지 않고 사건의 전개 기간이 짧게 설정되어 있으며 그 속에서 주인공의 성격, 행동 및 그 행동의 모티브에 대한 심오한 탐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