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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이슬로 몸과 마음을 씻고
박진욱
알마 201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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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들어가는 말

노량 바다 건너기
처음 만들어진 충무공 사당, 충렬사
김구의 「화전별곡」
몸을 잘 숨긴 사람들
충렬사의 영검
별이 떨어진 자리, 이락사
한낮의 축제
탑동마을의 정지석탑
남해 유림이 재를 올리던 녹동정사
사람을 끌어당기는 관음포
슬픈 역사를 간직한 가칭이
비란산성 가는 길
청 장군이 하룻밤에 쌓은 대국산성
역사 속의 귀양처 남해섬
망운산의 산닥나무
장량사의 동정 마애비
정언신과 정철
봉천사 묘정비
정치9단 숙정
남해 향교
다정리 고인돌
백이정 난곡사
용문사 벽장 속에잠든 삼혈표
왜구 침탈의 역사를 말해주는 임진산성
백 정승의 묘
가천 암수바위
차 대신 배가 한 척 씩 있는 벽작개
'노자묵고 할배'의 섬, 노도
권문세가 김만중 집안
김만중과 윤선도
김만중의 목적소설「사씨남정기」
유배지에서 어머니를 위해 지은「구운몽」
벽작개의 바위그림
양아리 고대문자
단군성전과 조선태조기단
단군성전을 모신 금산
미륵이 돕는 마을, 미조항
최영 장군의 넋을 위로한 무민사
물건 어부방조림
산골 봉화
군자식 고기잡이, 죽방렴
500살 왕후박나무

저자 소개 1

경상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을 공부했다. 오랫동안 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일했다. 책을 낸 뒤, 학교와 도시를 떠나 시골로 들어갔다. 밀양에서 무농약, 저농약 농사를 짓다가 실농을 거듭했다. 지금은 중국 루둥대학교魯東大學校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중국을 여행 중이다. 곧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시골로 돌아갈 예정이다. 펴낸 책으로는 《기차타기가 수월찮아요, 암표를 이용하세요-중국배낭여행》 《역사 속의 유배지 답사기》 《평범한 글쓰기》(공저) 들이 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11월 16일
쪽수, 무게, 크기
423쪽 | 642g | 188*254*30mm
ISBN13
9788994963587

책 속으로

노량 바다 건너기
200여 년 전, 한 나그네가 노량나루에 서서 흘러가는 바닷물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나그네는 한양을 떠나, 남해섬으로 귀양 가는 류의양이었다. 노량나루에서 느꼈던 것을 《남해문견록》에 적었다.

신묘 영조 47년(1771) 2월 26일 오전에 노량 나룻가에 달하여 배 오기를 기다리다. 물 너비는 한강의 서너 배 되는 물이 그리 멀지 아니하고 바람이 없어 물결이 잔잔하여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 나루는 순진順津이라’ 한다. 또 내가 바닷배 건너기 처음이로되 구태여 무섭지는 아니하나 북으로 바라보니 운산이 첩첩하고 가국家國이천리 밖에 있는지라. 뭍의 길에 올 적보다 마음이 다르더라.

‘뭍의 길에 올 적보다 마음이 다르더라.’ 노량 바다를 보고 마음이 처량하였을 것이다. 노량을 건넘으로써 비로소 귀양살이가 시작될 것이고,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이 물을 건너오랴? 기약 없는 뱃길이었다.
다시 20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몇몇 사람이 노량나루에 서서 흘러가는 바닷물을 참담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흰 옷을 입은 이순신 장군과 그를 따르는 부하들이었다. 이때의 일을 《난중일기》에 적었다.

정유년 7월 21일(1597년 9월 2일)
맑다. 곤양군에 이르니 어떤 백성들은 이른 곡식을 수확하기도 하고, 어떤 백성들은 보리밭을 갈기도 하였다. 오후에 노량에 이르니 거제 현령 안위,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 여남 사람이 와서 통곡하고, 피난 나온 군사와 백성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순신 장군은 정유년 4월 1일 옥문을 나와 6월 8일 합천 초계의 권율 장군에게로 가서 백의종군했다. 7월 18일 원균이 거제도 칠천량해전에서 참패하고 왜적에게 잡혀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 권율 장군이 대책을 세우지 못하자 이에 ‘내가 직접 바닷가로 가서 보고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는 7월 21일 남해 노량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로부터 1년 뒤 이곳에서 노량해전이 벌어졌다. ---pp.16~17

김구의〈화전별곡〉
〈화전별곡〉이 남해의 찬가라고 《남해향토사》에 적혀 있다. 이는 제1장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망운산이 있고 호걸준걸 모인 섬이라고 했으니, 그렇게 말할 만도 하다.
제2장에서 제5장까지는 선비들이 먹고 노는 모습을 그렸다. ‘박교수 술에 취해 이리저리 손 휘젓는 버릇(2장)’ ‘몸맵시 잘 빠진 학비, 못생긴 옥지(3장)’ ‘소반도 두드리며 간혹 잔대도 치고(4장)’ ‘녹파주, 소국주, 황금빛 닭고기, 흰문어(5장)’ 〈춘향뎐〉의 변학도 생일잔치 빰치는 놀이판이다. 이 사람이 정말 도학정치를 논하던 기묘 명현이 맞으며, 귀양 온 사람이 맞는가? 이를 두고 남해의 찬가라고 하면 이는 남해 사람들을 욕보이는 일이 아니겠는가.
제6장에 이르면 탄식으로 흘러간다.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단 말인가. 내 나이 갓 서른, 서울을 잊기에는 아직도 젊다. 아직도 기회는 사라지지 않았다. 임금은 나를 잊지 않았을 것이다. 임금겨옵셔 들어주던 옥당의 글 읽는 소리, 임금겨옵셔 내리신 향기로운 술과 따뜻한 담비털의 성총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눈에 어른거리는 당상관의 붉은 대문 집, 그러나 머리를 흔들어버린다.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서울은 멀고 몸은 외로운 섬 남해에 웅크리고 있다. 찬란했던 시절은 사라지고 초라한 귀양살이만 남은 것이다. ---p.45

사람을 끌어당기는 관음포
오실에서 왼쪽으로 가면 포상이다. 포상의 옛 이름은 ‘개뫼’다. 개펄 위에 있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개뫼라는 말뜻대로 보면 포상 아래에 있는 지금의 논은 모두 개펄이어야 한다. 곧 옛날에는 바다였다는 말이 된다. 연필로 오실, 관당, 포상 그리고 정지석탑이 있는 탑동을 이으니, 길쭉한 타원형의 들판이 된다. 들판을 바다로 바꾸면 길고도 깊숙한 관음포가 된다. 비로소 나는 옛날 관음포의 지도를 완성시켰다.
이 바다에서 두 차례 대해전이 벌어졌다. 모두 우리 수군이 대승을 거둔 해전이고, 왜구가 결딴이 난 전투다. 우리 수군이 대승을 거둔 데에는 이 바다가 한몫을 했다. 관음포가 한몫을 할 수 있는 데는 다른 바다가 가질 수 없는 모양과 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멀리 하동이 보이고 육지 사이로 쩍 갈라진 곳이 하동 포구다. 저기서 섬진강 물이 흘러나와 밀물을 타면 관음포로 밀려든다. 대장경판의 목재가 그렇게 섬진강물을 따라 관음포로 들어왔을 것이고, 왜적들이 그렇게 흘러들어 왔을 것이다.

---pp.100~102

출판사 리뷰

조선의 귀양터 남해 유배지를 찾아서
유배의 흔적 그리고 유배에 담긴 미학


유배는 죄인을 먼 곳으로 귀양 보내는 것을 말하며, 대체로 정치범들이 이 형벌을 받았다. 교통과 통신이 수월찮았던 시절, 주류에서 밀려나 언제 다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먼 곳으로 귀양 가는 것은 권력을 탐하던 벼슬아치들에게는 무서운 형벌이었을 것이다. 귀양 가는 이들은 대개 당쟁에서 밀린, 다시 말해 중상과 모략에 놀아난 이들이었다. 당파싸움은 선조 때 동인과 서인으로 파가 나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는데, 이러한 갈등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심해졌을 뿐만 아니라 고착화되었다. 이처럼 당파싸움이 치열해질수록 유배객들의 수도 덩달아 늘어났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남해로 귀양 간 류의양 역시 그중 한 명이다. 류의양은 여느 유배객들처럼 유배지 남해에서 보고 겪은 일을 《남해문견록》에 남겼다. 이 책 《바람과 이슬로 몸과 마음을 씻고》는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우연히 《남해문견록》을 손에 쥔 지은이 박진욱은 이 책에 기록된 유배의 흔적을 찾아 13일 동안 남해를 답사했다.
남해는 한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예부터 유배지로 ‘각광’ 받았다. 남해로 귀양 온 수많은 유배객들 중 누군가는 임금의 부름을 받아 주류 사회로 복귀했고, 누군가는 서포 김만중처럼 유배지 남해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이 유배객들은 남해 곳곳에 그들의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그 흔적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물러남의 아름다움’과 ‘돌아감의 지혜’ 그리고 ‘멈춤의 여유’가 만들어낸 유배문학
유배는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던 사람들에게 물러남과 돌아감, 멈춤의 미학이 무엇인지 가르쳤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또 다른 에너지를 만들어냈는데, 바로 문학이다.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500여 권의 책을 쓴 다산 정약용을 비롯해 정철, 송시열, 김춘택, 이진유 등이 이른바 유배지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가사나 시 혹은 연구논문의 형태로 남겼다.
남해 역시 유배문학이 꽃피었던 곳이다. 앞서 이야기한 류의양은 절해고도인 남해 곳곳을 답사하며 느낀 것들을 《남해문견록》이라는 책에 기록했다. 남해에서 13년간 유배생활을 한 자암 김구는 수십 수의 한시를 남겼는데, 그중 남해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경기체가인 「화전별곡」은 잘 알려져 있다. 3년을 남해 노도에서 귀양을 산 서포 김만중 역시 「사씨남정기」 「구운몽」 「서포만필」 등을 지으며 유배생활의 외로움을 달랬다. 《바람과 이슬로 몸과 마음을 씻고》에서 박진욱은 그들이 살았던 집과 잠시 머물렀던 공간들을 돌아보며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비사와 그 배경을 소개한다.
또한 박진욱은 김만중이 귀양살이할 때 《주자어류》 전질을 빌려다 읽었다는 남해향교, 고려 말의 성리학자인 이재彛齋 백이정白?正을 추모하는 사당인 난곡사, 서포 김만중이 귀양살이를 한 노도,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벽작개의 암각화, ‘서불과차徐市過此’ ‘서불과지徐市過之’라 해석되는 양아리 고대문자 암각화, 조선시대 남해에서 가장 큰 해군기지였던 미륵이 돕는다는 뜻의 미조항, 최영 장군의 넋을 위로한 무민사와 같은 유배와 관련되거나 남해만의 이야기가 담긴 장소를 찾아 옛 기록들 속에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임진왜란 그리고 이순신의 자취가 남아 있는 남해
동쪽으로 거제가 보이고, 북쪽으로 삼천포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전라좌수영(여수)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남해는 뒤에는 높은 산이 버티고, 앞은 야산이 둥글게 막고 있어 풍랑을 피할 수 있는 천연 항구다. 게다가 미조항은 조선 최대의 해군기지이자 왜구가 지나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던 만큼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조선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원균이 이끄는 조선해군이 칠천량해전에서 참패하고 권율 장군이 대책을 세우지 못하자 이순신은 착잡한 심정으로 ‘내가 직접 바닷가로 가서 보고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1597년 7월 21일 노량나루에 선다. 그리고 이때의 일을 《난중일기》에 적었다.

정유년 7월 21일(1597년 9월 2일)
맑다. 곤양군에 이르니 어떤 백성들은 이른 곡식을 수확하기도 하고, 어떤 백성들은 보리밭을 갈기도 하였다. 오후에 노량에 이르니 거제 현령 안위,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 여남 사람이 와서 통곡하고, 피난 나온 군사와 백성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로부터 1년 뒤 이순신은 노량해전에 임하는데, 박진욱은 당시 이순신의 자취를 따라간다. 이순신이 전사했던 장소라 알려진 관음포를 찾아 옛 문헌 속에 적힌 이순신의 행적을 좇고,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처음으로 세워진 충무공 사당 충렬사를 찾아 그의 공적을 기린다. 또한 임진왜란이 끝나는 해에 명나라 유격대장 장량상이 조선에 출병한 명나라의 공적을 새겨 넣은 동정 마애비 앞에 서기도 한다.
박진욱은 남해 곳곳을 답사하며 ‘유배’의 의미를 돌아본다. 그리고 ‘빠름’과 ‘경쟁’이라는 혹독한 현대의 두통을 유배라는 처방을 통해 치유하고자 한다. 그것이 선인들의 지혜이며 그 지혜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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