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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_ 역사는 픽션인가
1. 이야기꾼 헤로도토스와 세계사 2. 동전의 양면, 투키디데스와 헤로도토스 3. 랑케, 그리고 역사와 문학의 결별 4. 과학적 역사는 가능한가 5. 잠든 역사를 깨운 크로체의 선언 6. 풍랑 위의 역사, 흔들리는 역사학 7. 언어의 그물에 걸린 역사 8. 페미니즘, 역사가에게 딴지를 걸다 9. 포스트모더니즘, 후기구조주의, 역사학의 삼각관계 10. 늪에 빠진 홀로코스트 논쟁 11. 역사전쟁 12. 역사, 환경사를 넘어 지구사로 진화하다 감사의 글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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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헤로도토스는 당시로서는 비교적 새로운 문학 형태였던 산문으로『역사』를 썼을까? 그는 왜 시가 아니라 산문을 선택했을까?『역사』도입부에는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와 라케다이몬의 왕비 헬레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알렉산드로스의 탈출 이야기가 나온다. 다시 말해『역사』는 시작부터 호메로스의 『일리아드』가 누려온 권위에 도전장을 내밀며 호메로스의 형식과 반대되는 역사서술과 회상의 형태를 확립하고 싶은 바람을 드러낸다. 시는 확고부동한 결정과 완결을 요구한다. 특히 서사사의 경우에는 최종적 처벌이 수반된다고 헤로도토스는 말한다.『일리아드』같은 서사시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이야기를 엄격하게 추구하는 데 비해, 산문을 훨씬 융통성이 있고, 세속적이다. 즉 산문은 모든 종류의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있고, 한 이야기를 다른 이야기와 충동시킬 수 있다. 이것이 헤로도토스가『역사』에서 사용한 서술방식의 특징이다. -38~39쪽
역사는 지금까지 과거를 판단하고, 후세를 위해 현재를 가르치는 역할을 해왔다. 그런 고귀한 일을 위해 역사는 추정하지 않는다. 역사는 오직 실제로 그것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려 할 뿐이다. -99쪽 보존과 숭배를 희구하는 고고학적 역사는 “옛날에 존재했던 것을 세심하게 돌보는” 삶에 가치를 부여한다. 설령 그것이 “사소하고, 접근이 어렵다고, 부패하고, 퇴화한” 것이라 할지라도 역사의 “고쳐 쓴 자국이 남아 있는 양피지(원래의 글 일부 또는 전체를 지우고 다시 쓴 고대 문서-옮긴이)”에 기록된 지식과 위엄을 보존한다. 과거에 대한 고고학적 숭배는, 잠시도 쉬지 않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더 새로운 것을 사냥하느라 여념이 없는 국가의 행동을 바로잡는 데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숭배의 단점은 “사람과 공동체, 민족 전체의 고고학적 감각이 언제나 극단적으로 제한된 가시 범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고고학적 역사는 존재하는 대부분의 것들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오직 몇 가지만을 아주 자세하게 들여다본다. 그런 까닭에 고고학적 역사에서 인지하는 것을 그 밖의 다른 것들과 관련짓는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130쪽 베커는 빈정거리듯 묻는다. 사건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역사적 연구처럼 19세기에 번성했던 “과학적 연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수백 년 동안의 과학적 연구가 (적어도 부유층에게는) 더 안락하고 편안한 삶의 조건을 가져다주었고, 질병의 예방과 치료, 고통의 완화를 위해 많은 기여를 한 것은 틀림없다. 베커도 이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과학적 연구는 삶은 물론 죽음을 위해서도 활용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은 과학적 연구였다. 역사연구는 전쟁을 막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이 ‘그 어느 전쟁보다도 잔인하고 무자비하며 대규모로“ 진행될 수 있었던 거슨 과학적 연구 때문이었다. 베커는 역사연구와 과학적 연구를 통해 ”역사가 전진한다는 숭고한 이론“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신물나게 들었으니 그만하자며 냉소적 결론을 내린다. -167~168쪽 역사는 창녀이고, 첩자 냄새를 풍기는 앞잡이이며, 비영국인데다 유목인, 집시의 분위기가 섞인 늙고 타락한 자, (건방지게도 “반대신문”을 거부하는) 범죄자, 사육제의 야바위꾼, 서커스단의 마술사, 환상술사와 광대, 그리고 클리오다. -171쪽 “역사적 진실에 대한 자신이 정해놓은 기준”에 따라 어떻게 “선택하고 구성하고 비판하는지” 관심을 갖고 바라본다. 역사가가 적극적인 또 다른 이류는 언제나 상상력을 연구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콜링우드에 따르면 카리사르는 로마에 있었고, 훗날 갈리아에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자료에서 접할 때 우리는 “카이사르가 로마에서 갈리아로 여행하는 모습을 상상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 그런 상상은 너무나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흔해 빠진 탓에 “선험적 상상력”이 사용되었다고 표현해야 한다. 그러므로 상상력은 “구성적 역사”에서 “구조”의 역할을 맡고 있으며, 이는 자료 속에서 존재하지 않은 “지속성”을 제공한다. 상상력은 역사가 자신의 서사를 구축해나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178~179쪽 사실은 결코 생선장수의 좌판 위에 놓여 있는 생선이 아니다. 사실은 거대하고 때로는 다가갈 수 없는 대양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다. 역사가가 어떤 사실을 낚아챌 것인가는 부분적으로 운에 달려 있지만 대개는 그가 어떤 바다에서 물고기를 낚으려 하는지. 그리고 어떤 낚시대를 사용하기로 했는지에 달려 있다. 물론 이 두 가지 요건은 그가 잡고자 하는 물고기의 종류에 의해 결정된다. 대체로 역사가는 자기가 원하는 사실을 얻게 될 것이다. 역사는 해석을 의미한다. -219쪽 더욱 분명한 성적 관점에서 보면,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에 의해 시작된 두 가지 역사전통을 이해할 수 있다. 정치와 군사, 외교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여겨졌던 남성 중심적이고 투키디데스적인 전통은 1820년대에 랑케에 의해 계승되어 그 후 1세기 반 동안 대학의 역사학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반면 헤로도토스적인 사회사, 문화사, 여성사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다시 등장했다. 남성 지배적인 투키디데스적 역사가 호령하던 1세기 반 동안 헤로도토스적 전통은 주로 대학 울타리 바깥의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던 남녀 역사가들에 의해 유지되고 발전되었다. 우리는 뜨개바늘을 손에 쥐고 앉아 자신들의 역사를 한 땀 한 땀 꿰던 여성들이 마침내 대학에 입학허가를 받아 그곳에서 문서조사와 토론 같은 역사의 법칙들을 배워 나가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다. -294쪽 버크는 “역사가들이 가장 꺼리는” 몇 가지 특정 양식의 실험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버크가 보기에, 역사가들은 꾸며낸 연설과 “누군가의” 의식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을 기피했다. 그러나 버크의 우려가 무색하게 일부 역사가들은 역사적 인물들이 다양한 상황 속에서 했을 법한 이야기들을 추측해보는 일에 새롭게 의욕을 불태웠다. 그러한 이야기들은 누군가에겐 기쁨을 주고 또 다른 사람들에겐 경악을 선사했다. -338쪽 세계사에 대한 논쟁은 세계사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지구사를 입에 올린다. ‘지구사’와 ‘세계사’는 사실상 같은 뜻으로 쓰일 때가 많지만, 우리는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다. 지구사는 세계사의 주요관심사에서 비켜난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 바로 세계화의 역사다. -425쪽 우리가 살펴본 많은 역사가와 마찬가지로 로빈과 스테픈도 인류세를 위한 역사가 윤리적으로 반드시 필요하고, “지구의 이익을 위한 인류의 협동에 기여한다”고 평가한다. 두 사람의 주장에 따르면, 지구의 변화는 “국가가 아니라 지구를 위한 충성”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다!”는 게 그들의 결론이다. -434쪽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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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역사가 허구인가요?
우리는 역사서를 읽으며 자주 질문하곤 한다. "이 역사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그러나 우리는 이 질문을 더 정확하게 정정해야 한다. ‘이 역사서를 쓴 역사가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같은 질문을 던진 역사가가 있었다. 1961년에 초판이 발행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저자인 E. 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질문을 좇으며 역사적 진실과 해석의 문제를 탐구했다. 오늘날 앤 커소이스와 존 도커의 『역사, 진실에 대한 이야기의 이야기(원제 Is History Fiction?)』는 ‘역사는 허구(fiction)인가?’라는 보다 협소한 질문을 던진다. 이들은 역사에 대한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해석 사이에서 역사가가 취하는 태도에 대해 물음표를 붙이고 역사가들의 역사서술에 대한 거대 조류를 따라간다는 점에서 카와 입장을 같이한다. 그러나 카와 달리 역사서술의 문학적 측면에 더 많은 초점을 맞춘다. 이들은 역사서술의 문학적 측면과 사실적 측면 사이를 줄타기한다. 그러면서 일종의 ‘역사에 대한 역사’를 철학, 문학, 사회학 등 인문학의 영역에서 과학의 영역까지 다양한 학문과 접목시켜 전방위적으로 추적해 나간다. 이 책의 원제인 ‘역사는 허구인가?’라는 질문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역사는 당연히 허구(fiction)가 아닌가요?”라고 생각하는 부류였고, 두 번째는 “무슨 소리! 역사는 역사이고, 허구는 허구입니다!”라고 단언하는 부류였다. 그렇다면 세 번째 부류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 “에……, 글쎄요. 역사가 허구인가요?”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에게 묻는다, 역사는 객관적 사실인가, 상상의 산물인가?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의무는 내가 들은 모든 것을 전하는 것이지만, 들은 그대로 전해야 할 의무는 내게 없다. 이 말은 이 책 전체에 적용할 수 있다.” 역사서란 항상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진실하게 기록한 책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우리는 이러한 헤로도토스의 말에 뒤통수를 맞은 듯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도저한 과거의 시간을 지나 현재 역사연구의 출발점이 되는 사료가 과연 얼마나 많이 역사가 앞에 남아 있겠는가? 아무리 많은 역사자료가 남아 있을지라도, 연속적으로 흘러간 과거의 시간을 파편적으로 고증해주는 것만으로 과거를 복원해낼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많은 역사가들이 명징한 자료로서 남아 있는 사실과 사실 사이의 여백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연결하고 메우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이 유혹은 과연 유혹일까? 아니면 지향해야 할 역사서술의 방법론일까? 하지만 과연 헤로도토스의 말, 즉 그의 역사서술 태도를 옳다고 할 수 있는가? 역사가들 가운데에도 헤로도토스적 역사서술 방법에 반발하는 역사가들이 있었다. 역사를 연구하고 역사서를 집필하는 역사가들은 역사서술에 있어 역사가 개인의 주관과 해석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생각하는 무리였다. 그 선두에 역사가란 과거를 “실제 있었던 그대로(wie es eigentlich gewesen)”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선언한 레오폴드 폰 랑케가 있었고, 그 뿌리는 헤로도토스와 동시대의 역사가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였다. 어떻게 역사를 써야 하는지, 자신이 쓰고 있는 역사서가 얼마나 진실한지에 대해 역사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일치된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두 저자는 그 의견들의 차이를 밝히기 위해 서구 역사서술의 창시자로 불리는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를 따라간다. 그들의 위대한 저작,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투키디데스의『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연구에 있어 끊임없이 논쟁거리를 제공해왔다. 역사연구의 초점은 투키디데스처럼 국가의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영역에 맞추어야 하는가? 아니면 헤로도토스처럼 특별한 사건을 넘어 보편적 시간 속에 있는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성적, 그리고 일상적인 영역에 맞추어야 하는가? 저자가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따라가 보자. 우리는 ‘역사에 대한 역사’라는 흥미진진한 모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헤로도토스의『역사』에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문명의 붕괴』까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을 가로지르는 전방위적 역사 이야기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역사’라는 분야에 흥미를 갖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역사가 거의 모든 인문학과 연결되어 있으며, 역사가 지닌 이야기의 힘이 인간을 끌어당기기 때문일 것이다. 두 저자는 페미니즘 속의 역사와 역사 속의 페미니즘을, 남성과 서구와 유럽인 중심의 역사에서 여성과 제3세계와 원주민의 역사로 확장되고 뻗어가게 된 배경을, 포스트모더니즘 및 후기구조주의와의 관계를, 역사가 어떻게 폭력이 되며 반대로 어떻게 폭력을 막아내게 되는지를, 역사가 허구라는 주장이 어떻게 홀로코스트와 결부되고 반박되는지를, 과학, 특히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문명의 붕괴』를 통해 진화와 인류학, 세계사를 어떻게 통합했는지를 밝히는 과정을 통해 역사와 허구, 진실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에 탄탄한 논리적 바탕을 제시한다. 책 속에서 이것들은 단순한 논거를 넘어선다. 예를 들어 랑케의 제자인 액턴 경은 역사가가 최대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 즉 독자가 역사책을 읽으면서 역사 스스로 말한다고 평가할 때 역사의 가치가 있다고 한 반면, 허버트 버터필드는 역사가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향해 역사란 “건조한 문장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이야기이며, 역사의 의미는 기하학 개념에 의해 전달될 수 없다”고 반격한다. 6장에서 다루고 있는 마르크스주의는 노선은 다르지만 이후 등장한 푸코의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역사가들에게 전체사(whole history)라는 역사서술의 신천지를 제공했으나 마르크스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에 경도된 역사가들은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게 될까 봐” 안절부절못하기도 했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히로시마 원폭투하와 난징대학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학살 같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 역사 왜곡과 역사관의 관계를 진단한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 자행된 일본의 난징대학살 은폐 시도를 용기 있게 고발한 역사가 아이리스 장이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자 난징에서는 “택시기사부터 구멍가게 주인까지 도시 전체가 그 ‘젊은 역사가’를 그토록 가슴 아픈 결말로 내몬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는 대목도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역사가는 역사 속의 시간이라는 문제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정원사의 삽에 흙이 달라붙어 있듯이 역사가의 사고에는 시간이 꼭 달라붙어 있다.”고 말했다.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탐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의 전망을 제시해야 하는 역사가들에게 상상력은 어쩌면 가장 필요한 무기이자 가장 무서운 함정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책을 읽어 나가면서 다양한 주의( [u)와 관점, 이론의 급류를 타며 지적 여행의 쾌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 역사는 허구일까? 아니면 진실일까? 책을 펼치는 순간 우리는 저자가 던지는 질문을 넘어서는 지적 매력에 빠지게 될 것이다. 역사가를 비롯한 많은 학자와 연구가들의 구체적인 사례들이 마치 논쟁의 현장 속에 있는 듯한 생생한 간접체험을 제공할 것이다. 역사, 인류사와 환경사를 넘어 지구사(global history)로 진화하다 우리가 역사를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에게는 과거의 기록이 매우 중요했다. 어느 왕조에서나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과 편찬하는 사람이 있었다. 역사 과목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가 없었고, 역사를 배우지 않고 졸업할 수 있는 학생 역시 없었다. 우리가 역사를 읽는 이유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과거를 통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역사가가 투키디데스보다 헤로도토스에게 역사서술 방법을 배워야 하는 까닭이 분명해진다. 과거를 통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즉 과거 속에서 미래를 읽기 위해서는 역사가가 단순히 있었던 사실 그대로를 편집해 옮기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역사가는 다양한 각도와 관점에서 과거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역사의 행간을 채워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바로 헤로도토스처럼 말이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1인극이라면,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다성의 역사이다. 헤로도토스는 한 가지 사건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와 설명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독자는 능동적으로 이야기 속에 들어갈 수 있으며, 다양한 이야기와 해석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헤로도토스의 방법론은 인류를 위한 역사를 가능하게 한다. 중심과 변방, 내국인과 이방인, 남성과 여성, 지배층과 피지배층, 더 나아가 인류 이외의 생물과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배제와 소외, 폭력이 없는 역사서술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인류사, 환경사, 세계사(world history)를 넘어서, 빅뱅 및 우주와 지구의 탄생, 인류의 출현에서 진화와 문명 발달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역사학뿐만 아니라 생물학, 천문학, 지리학 및 고고학, 환경학, 인구학 등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을 가로지르며 통합적 지구사(global history)를 태어나게 했다. 이는 인류의 역사와 자연사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세계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것이야 말로 인류의 미래를 내다보는 수정구슬이 아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