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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영청 밝은 달이 비추는 바닷가 정자에서 이순신 장군과 두사충은 승리를 축하하는 조촐한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이 장군, 그대는 전략만이 아니라 시, 서에도 능하시더구려. 얼마 전 한산섬에서의 깊은 시름은 이제 좀 덜하신 게요?” “하하하 두 공, 장수의 시름에는 승리만한 보약이 없나보오. 또한 나를 알아주는 벗이 곁에 있으니 더더욱 기쁘오. 이 좋은 날 두 장군께 시 한수 지어 드리리다.” 북으로 가서 슬픔과 기쁨을 같이 하고 [北去同甘苦] 동으로 와서 죽고 사는 것을 함께 하네 [東來共死生] 성 남쪽 타향의 밝은 달 아래 [城南他夜月] 오늘 한 잔 술로 정을 나누세 [今日一盃情] --- 충무공 이순신 贈詩 [奉呈杜僕射] --- p.16 두사충은 한양으로 돌아와 임금(선조)을 알현하였습니다. “두 차례의 전쟁에 그대의 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오. 그대가 조선 땅에서 살고자하니 참으로 반갑구려. 그대에게 땅을 하사하고자 하니 어디가 좋으시겠소?” 두사충은 주저 없이 대답하였습니다. “신이 본 바로는, 경상도 대구 고을이 풍속이 아름답고 인심이 후하여, 머물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전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대구로 내려가 살고 싶사옵니다.” --- p.23 두사충의 눈이 스르르 감기더니, 눈가에 맺힌 눈물 한 방울이 툭하고 떨어졌습니다. 명나라와 조선, 두 나라를 사랑하며 살아온 두사충은 꿈을 꾸듯 평온하게 저 세상의 또 다른 명당을 찾아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 p.37 자식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햇볕이 잘 드는 지금의 ‘형제봉’ 기슭에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훗날, 두사충의 후손들은 그 근처에 두사충을 기리기 위한 집을 짓고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뜻을 담아 ‘모명재’라 이름 붙였습니다. 오늘날까지 모명재는 두사충의 일생과 조선과 명나라의 우정을 상징하는 대구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 p.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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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여 년 전,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 장군이 남긴 대구이야기
두사충의 호(號)는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의 ‘모명(慕明)’으로, 그의 뜻을 기려 세운 재실(齋室)이 바로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모명재(慕明齋)’입니다. 두사충은 중국 두릉 사람으로 임진왜란(1592년)과 정유재란(1597년), 두 차례에 걸쳐 명나라 군대의 지리참모로 조선에 왔습니다. 전쟁 이후,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두 아들과 함께 조선에 귀화를 하게 됩니다. 그 배경에는 오랜 시간 조선에 머물며, 아름다운 풍속과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더욱이 모명재의 주련(柱聯: 기둥에 장식으로 붙인 한시 구절)에 새겨진 이순신 장군이 두사충에게 보낸 한시를 통해 두 사람의 깊은 우정과 친분을 엿볼 수 있습니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이에게 마지막 선물을 하려했던 것일까요? 이순신 장군의 묏자리를 직접 보아주기도 한 두사충은 이후 전국 곳곳을 누비며, 조선 사람들에게 이로운 풍수를 알려주는 일을 보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림책 『모명재』는 두사충이라는 인물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가 우리 역사에 남긴 다양한 이야기들을 상상하기 쉬운 그림과 글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4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곳곳에 남아있는 그의 행적들은 우리 마을 내 고향의 역사를 아름답고 풍성하게 꾸며주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