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마애암 골짜기
세상 속으로 밤의 넋 사막의 달 총 가대기의 노래 조수潮水 순교시대 해설 / 마애암 골짜기에서 솟아오른 놀라운 세계 작가의 말 |
신종국의 다른 상품
|
아득한 시야 속에 갑자기 수십 마리의 작은 새들이 버려지듯 경사면 잡목 숲에서 저수지 제방 뒤로 한꺼번에 떨어졌다. 결국 명수는 저수지의 검은 수면을 보고 말았다. 먹구름이 천지간 가득한지 밤하늘 한쪽이 아주 가는 틈바구니를 이루면서 그쪽으로만 별들이 빼곡했다. 갇힌 저수지의 검은 물들은 제방 쪽 가장자리를 치면서 스윽 입을 벌려 명수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 「마애암 골짜기」 중에서 나는 순간 그 얼굴이 영순이가 아닐까 했다. 아니면 사촌누이거나….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시신의 머리 부분을 당겨 얼굴을 확인하려 했다. 남자였다. 아까 승강구에서 그림자처럼 서 있던 그 어린 입대병과 비슷하게 보였으나 아니었다. 승무원 하나가 나를 밀쳤다. 나는 강변 호텔에서 내게 사랑을 호소했던 그 초로의 남자 얼굴을 겹쳐 본 듯한 충격을 받았다. --- 「세상 속으로」 중에서 낡은 형광등은 삭을 대로 삭아서 빛을 내기보다 주위의 빛을 천천히 빨아먹고 있는 듯이 보였다. 몹시 두께가 두터운 아날로그형 텔레비전이 컬라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푸르스름한 빛 일변도로 화상을 비추고 있었다. 독도 지킴이 활동이 뉴스에 나오는 중이었다.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으로 독도 문제까지 연일 시끄러웠다. 얼마간 말없이 망연자실 앉아있던 어머니가 부리나케 일어나 남해댁이 덮고 있던 이불을 홱 걷어내었다. 그러자 그녀의 벗은 아랫도리가 기다린 듯이 나타났다. 하반신이, 말라 비틀어진 두 다리가 엉성하게 연결된 채 드러났다. --- 「밤의 넋」 중에서 나는 그 어둠의 윤곽이 조성해내는 움직이는 그림들을 만난다. 그 잔상은 언제나 같은 구도와 내용을 반복한다. 안개가 깔려있고 그 안개를 밟고 전진하는 탄탄한 군화의 대열이 나타난다. 그 집단의 상체는 안개가 가려 보이지 않는다. 실한 하복부, 굶은 나무 둥치 같은 허벅지, 쇠막대 뭉치처럼 땡땡한 종아리가 똑같은 색조의 유니폼에 감긴 채 어두운 내 망막의 그물에 나타난다. --- 「사막의 달」 중에서 아직 어두운 박명의 막이 드리워져 있는 중첩된 먼 산을 향해,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을 향해, 누워 잠든 푸르게 싱싱한 새벽 강을 조준하여 쏘았고, 마지막은 붉은 깃털 꼴로 찬연히 번져 나오는 새벽하늘의 언저리를 정조준해 쏘았다. 들판 가득히 놀란 세떼들이 힘찬 날갯짓으로 일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 「총」 중에서 동생이 잰 걸음으로 띠라왔다. 나란히 서게 되자 나는 왠지 동생과 간격을 두어야겠다는 조바심으로 발이 헛놀기까지 했다. 왜 그런지 참 알 수가 없다. 동생은 오늘따라 무척 피곤하게 보였다. 입술은 작고 야무지게 닫혀 있었고 두 눈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고요했다. 그런 동생의 코밑으로 아직은 솜털에 지나지 않은, 그러나 사내임을 드러내는 잔잔한 수염이 자라 있었다. 일터로 나가기 시작한 며칠 동안 동생은 한밤 중 이불 속에서 가만가만 울곤 했었다. 그 울음은 그런데 도저히 아이의 울음이 아니었다. 평생을 두고 육신의 뼈마디에까지 감정을 새겨 넣을 어른의 울음이었다. --- 「가대기의 노래」 중에서 저녁 안개 속에서 노을은 여린 황금빛 흐름으로 하늘을 나는 학의 깃처럼 따스하였고 그런 아름답고도 고요한 풍랑 속에, 와상에 나와 앉으신 할머니는 그대로 하나의 소슬한 구름이었고 또 바람이었다. 할머니는 이 황홀한 자연에 조응하시는 얼굴로 먼 하늘 끝 부분을 바라보셨다. 문득 그러한 할머니에게서 나는 이 세상의 모든 몸부림이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허약하게 무너져 버리고 마는 듯한 무력감을 느끼는 동시에 보다 큰 힘의 현장으로서, 하늘을 향해 단정히 앉으신 할머니의 연륜으로부터 발산되는 어떤 기막히도록 억센 생명의 불꽃을 투시하게 되었다. 나는 사뭇 감격하여 이 순간만은 나의 청춘이고 사랑이며 심지어 자유까지 아무렇게 되어도 상관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이 아름답도록 끈질긴 생명의 불꽃과 함께라면, 이 어찌할 수 없도록 모든 것이 가득한 가을 황혼을 맑은 마음으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무엇인 문제가 되겠는가 하는 느낌이었다. --- 「조수潮水」 중에서 |
|
이 소설은 신종국 작가의 첫 작품집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세계를 진정성 있게 불러내고 있다. 위안부, 사생아, 5·18 희생자, 게이, 아버지의 총, 월남전, 날품팔이 피난민, 이념과 징용의 희생자 등의 다양한 이야기가 크고 작은 숲을 이룬다. 사회적 약자나, 밑바닥 삶을 이야기로 끌어들이는데 탁월한 신종국 작가는 일방적인 경험의 세계에 함몰되지 않은 자세로 우리 삶에 은폐되어 있는 진실을 감각적으로 직관하고 있다.
표제작인 중편 「마애암 골짜기」는 문체 미학과 구성 미학의 안정된 호흡을 바탕으로 시종일관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 작품 전체를 감도는 격조 높은 자연묘사의 색채감은 진경이다. 오래전에 죽어 부패된 마애암 노스님의 손에 들린 사진에서 자신의 어린 얼굴을 보는 순간 명수는 그 여느 때와는 다른 맹렬한 아픔을 느끼며 고꾸라진다. 이것이 어쩌면 가장 명징하고 진실한 아픔의 감각일 수도 있다. 소설은 그 아픔의 감각을 인식의 통증을 넘어서는 체험으로 공유한다. 「세상 속으로」는 군 입대를 앞둔 청년의 삶이 진지한 성찰의 문장과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분위기로 독특하게 읽힌다. 사촌누나, 영순, 중년의 천주교 신사, 어린 입대병, 매형, 철로에 뛰어든 사내 등의 인물들이 점묘처럼 흩어져 있으면서도 모두가 세상의 구성원이다. 입대를 앞둔 청년이 겪는 순간순간을 통해 독자들에게 이런 때가 어쩌면 자기 인생의 한 모서리가 부서지는 순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도 모른 채 인생의 한 모서리가 부서지는 청년의 시간에, 함께 머무는 동안 격심한 마음의 진동이 느껴진다. 「밤의 넋」은 남해댁과 갑선이, 두 위안부 여인과 어머니의 이야기가 다층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보는 곳이 아니라 못 보는 곳의 실재를 다루는 이 소설에서는 이국에서 고통의 삶을 겪은 남해댁의 마음이 발견되고, 그 마음이 위안부로 동생을 빼앗긴 어머니의 마음으로 동화되는 지점의 아픔을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사막의 달」은 30대의 중학교 여선생의 인물 형상이 독특하다. 어떤 기억으로 인해 삶을 불신하기 때문에 늘 불행에 대한 예상을 하고 그 긴장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겉으로는 독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여선생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삶에서 불행이 무엇인지 알기에 그냥 불행을 살아버리는 여선생의 형상이 애잔한 슬픔으로 가슴에 남는다. 「총」은 아버지가 가진 총과 동거 하면서 살아온 아들의 이야기를, 중첩되는 총의 이미지와 함께 그리고 있다. 총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구조가 성곽처럼 탄탄하고 그 현장을 읽어내는 묘사와 심리의 직조가 여간 조밀하지 않다. 그러면서 ‘이미 그 무언가를 용서하고 있음인가?’ 하는 질문이 우리의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친다. 하지만 이 질문을 소설의 진의로 파악하는 것은 작품의 진면목을 몰라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아버지의 슬프디슬픈 자기 보호술인 총이, 때로는 누가 가지느냐에 따라서 가장 강력한 폭력성을 가진 무기로 둔갑할 수 있다는 증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대기의 노래」는 ‘겨우 천 조각으로 치부를 가렸을 뿐인 벌거숭이였고, 어허여 디야 노래를 부르며 짐을 나르는, 너무나 낯설고 어마어마하게 크며 들짐승들 같은 피부색을 지닌 막노동 사내’였던 아버지 이야기이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아버지는 착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조소와 증오의 대상이고 기껏 연민의 대상이다. 추레하고 비루해 언제나 아들에게 부끄러움만 불러일으키는 존재이지만 그것은 아버지의 탓만은 아니다. 그것은 그런 불행을 초래하게 만든 그 시대의 모든 아버지들의 책임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마른 삭정이처럼 부서질 듯한 얼굴로 여윈 목줄기의 핏줄을 돋우면서 가대기 노동요를 부르던 그 날품팔이 인생’ 아버지들 모두에게 보내는 애가이자 헌사이다. 「조수」는 고목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뿌리를 거두지 않고 있는 외할머니를 통해 아픈 시대를 증언한다. 조수처럼 밀려왔다가 빠져나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 인생이기에 내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고 느끼는 공범자의 의미가 각별하다. 그래서 ‘할아비로부터 그 자식들이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삶의 넓이를 깨닫듯이, 나 역시 내가 딛고 일어서야 하는 이 험난한 삶의 바닥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이미 어떤 현장의 예외가 아니었다. 어쩌면 가장 억울한 공범자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성찰의 무게가 값지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순교시대」는 가난한 집안을 위해 몸을 팔아 순교한 여동생을 화장하는 것을 보면서도 ‘땅에 꿋꿋이 버티어 서서 그 무언가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 볼’ 뿐인 화자의 아픔이 화장막 굴뚝의 푸르스름한 연기처럼 자욱한 작품이다. 독자들은 신종국 작가가 안내하는 마애암 골짜기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석양과 별을 보고 바람의 숨결, 숲의 냄새를 느끼고 북소리, 총소리, 새벽 조수 밀리는 소리, 가대기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안내한 골짜기는 사회적인 약자여서 모욕당한 인생들의 성지聖地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 소설가 소리를 들은 지 30여 년이나 지나 소설집을 내니 만감이 교차 된다. 스스로 한심하면서도 신기한데, 부디 이 소설집이 ‘새 출발을 위한 좋은 작별’이 되어, 내 남은 생 동안 진정 좋은 글을 남겼으면 한다. |